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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주인 2화
1. 재회 (2)
문득 이사 가기 전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박민재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사 가는 집 주소를 물었다. 도현은 당연히 그런 것 따위 알 리 없었고, 부모님한테 물어본 적도 없었다. 도현이 모른다고 말하자 박민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도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우리 집 주소야. 가자마자 편지 보내라.’
손바닥에 놓인 쪽지 한 장.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도현은 그런 그를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야, 박민재! 잠깐 기다려.’
그리고 도현이 급하게 마당에서 끌고 나온 건 자전거였다. 그가 빠진 체인을 걸어 줬던 그 자전거.
‘나 이제 자전거 안 타도 돼. 이사 가는 집 바로 앞에 중학교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거, 너 가져라. 탈 줄은 알지?’
대문 밖으로 끌고 나온 자전거를 그 녀석 앞에 세웠다. 정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순간 부모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탈 줄 모르냐?’
‘아니.’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는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핸들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살짝 손이 맞닿았다. 그러나 도현이 얼른 손을 놔 버렸기 때문에 그 접촉은 순간뿐이었다.
‘잘 지내라.’
그게 도현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인사에 박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안장에 올라서 약간 비틀거리다가 제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이 골목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인마, 내가 언제 편지한다고 약속했냐? 사실 나 그 쪽지 잃어버렸어.”
마지막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잘 챙겨 둔다고 도현이 애지중지 모아 둔 잡동사니 상자에 넣어 놨는데 어머니가 이삿짐을 싸다가 홀딱 버리고 만 거다. 이사 후 며칠이 지난 뒤 그걸 알게 된 도현이 난리를 친 것은 당연했다.
“짐 싸다가 잃어버려서. 아무튼 기다렸다면 미안하다. 뭐, 이제라도 연락 돼서 만났으니 다행 아니냐.”
사실은 그동안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동창들과 연락할 수 있었다. 도현이 대학에 입학할 때쯤 한참 유행했던 어떤 사이트에서도 동창 찾는 서비스가 인기였었다. 그런데도 이제야 SNS에 가입해서 초등학교 동창을, 아니, 정확히는 이 녀석을 만날 생각을 한 건 무슨 변덕이었을까.
“그래. 지금이라도 만났으니까.”
박민재는 조금 허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뭔가 뒤에 생략한 말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도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꽤 친하게 지냈다. 그러니 이사 가서도 연락하고 지낼 거라 생각한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녀석에게서, 그 학교에서 벗어나는 게 그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의사 선생님 되니까 어떠냐? 할 만하냐?”
“글쎄. 1년 차 지나니까 조금 낫긴 한데 여전히 좆같다.”
병원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던 도현은 대꾸 없이 피식 웃었다. 본래 하얀 피부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묘하게 창백한 게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박민재는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다. 가끔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는 게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딱 보니 바쁜 생활에 찌든 모습이었다.
“넌 어떤데?”
“아, 나도 좆같지. 그래도 올해 대리 달고 나니까 조금 낫다. 밑에 신입도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쓸 만해져서. 근데 일 시키는 입장도 마냥 편한 건 아니더라. 속 터지는 일도 많고.”
박민재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이나 김창식과는 전혀 다른 대화 주제라서 도현은 이제야 좀 말할 상대를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래도 윗사람 잘 만나서 우리 팀장이나 과장이 일을 잘 시키는 건지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밑에 사람 부려 보니까 알겠더라고. 내가 일을 병신같이 시키면 밑에 애도 병신 되는 거구나.”
도현은 대리 6개월 차에 겨우 막내를 벗어났다. 계속 신입들이 달아난 탓이었다. 뽑아서 1, 2개월 지나면 딴 데 됐다고 튀고, 안 맞는 거 같다고 그만두고. 지금 신입은 입사한 지 간신히 6개월이 됐다. 그리고 그사이에 도현도 겨우 사람 부리는 요령을 터득한 터였다. 몇 번은 지시를 잘못해서 신입을 울리기도 했다.
세금 계산서를 정리해 두라고 했더니 단순히 모아 두기만 한 거였다. 워낙 바빠서 그런 걸 챙길 시간도 없었던 도현은 결국 제 잘못임을 인정해야 했다. 크기에 맞게 자른 후 사업자 번호 순서대로, 그 전에 간이, 영세율, 일반을 분류해서 정리하라고, 같은 사업자는 날짜 순서대로 해야 한다고 세세하게 지시를 해야 했는데 자신이 생각이 없던 거였다. 모르면 물어보지 그랬냐고 다그치려다가 모르는 사람이 뭘 물어볼 수 있겠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인턴이나 1년 차는 그냥 병신이야. 윗사람과는 상관없이. 군대에서 이병이랑 같은 거지. 뭐, 어쨌든 네 말이 맞긴 해. 나도 2년 차 되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한다는 표현만으로 무언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랬다. 도현도 박민재도 사사건건 설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몇 마디 말만 나눠도 무슨 생각인지, 어떤 감정인지 감이 왔다. 그래서 참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취미나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 면도 많았다.
“바쁘다는 게 얼마나 바쁜 거냐? 화장실도 못 가냐?”
“응. 화장실 가겠다는 생각도 자주 잊어버리지.”
도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도현도 돌 정도로 바쁠 때는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는 생각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것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쉬는 타이밍은 웬만하면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몸 축나면 너만 손해다. 의사인 녀석이 더 잘 알겠지만.”
“그러게. 의사들이 제일 몸에 해로운 짓만 하고 다니는 거 알려나 모르겠다.”
잠 못 자고, 밥 굶는 건 예사고, 그나마 시간도 충분치 않으니 샌드위치에 삼각 김밥 따위라고. 그렇게 조곤조곤 대답하는 박민재는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외과 쪽은 워낙 체력이 필요해서…….”
“아까는 둘 다 입에 자물쇠를 걸었나 했더니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냐.”
서원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었다. 순간 담배 냄새가 코로 훅 끼쳐 들어왔다. 도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코 썩겠다, 새끼야. 몇 대나 피운 거야.”
“담배도 안 피우고, 이도현 너는 무슨 낙으로 사냐? 연애는 하냐?”
김창식의 질문이었다. 순간 서원과 박민재까지 도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연애는 무슨.”
대충 얼버무리려던 의도는 통하지 않았다. 서원이 놀리듯 연이어 물었다.
“너도 김창식과 아니냐? 모태솔로?”
“내가 어딜 봐서 모태솔로로 보여? 나름 인기 많았다고.”
도현은 사실 모태솔로긴 했지만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누구와도 사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건 옆에 앉아 있는 동창 덕분에 자각했고, 중학교 때는 한 학년 선배한테 고백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후배한테, 대학교 때는 클럽이나 바에서 대시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사귈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나는 왜 걸고넘어져. 나도 썸은 좀 타 봤다고.”
김창식의 투덜거림은 아랑곳 않고 서원은 연이어 물었다.
“그래서 최근에 연애는 언제 했는데?”
도현은 뭐라 대답할까 하다 문득 박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도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이제 슬슬 만나 봐야지. 지금까진 일이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결혼 생각하고 만나야 하니까 아무나 만날 수도 없고.”
친척들이나 친구들한테 하던 레퍼토리를 또 늘어놓았다. 오래 만난 친구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겠지만 역시 오늘 본 동창들이라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도현은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박민재 너는? 너도 솔로냐?”
“응. 어쩌다 보니.”
의대 졸업, 국가 고시,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것이다. 도현은 그렇게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얼굴에 누구 하나 만나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솔로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뭐, 이 녀석은 솔로라고 해도 자발적인 솔로겠지.”
서원의 대꾸에 도현과 김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떠들다 보니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서원이 먼저 슬슬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도현은 더 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주중의 피로가 쌓여서 꽤 피곤한 상태긴 했다. 김창식은 이제 출근해야 할 시간이라 했고, 박민재는 네 시간 후면 오프가 끝난다고 했다. 새벽 5시까지는 출근해야 한다고. 어쩐지 그 말만 들어도 그의 생활 패턴을 알 것 같았다.
서원은 신림동, 김창식은 홍대에 살아서 두 사람은 먼저 지하철 쪽으로 사라졌다. 큰길로 나와 버스를 탈까 고민하던 도현은 옆에 서 있는 박민재한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냐?”
“A동. 너는?”
“어? 나는 J동. 근처 아니냐?”
별일이었다. 이 넓은 서울에서 바로 옆 동에 살다니.
도현은 대학교 시절부터 지냈던 원룸에서 옮기지 않고 쭉 살고 있었다. 이사도 귀찮았지만 출퇴근 거리도 멀지 않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회사 근처에 자리를 잡기엔 월세가 너무 비쌌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볼 수 있기 때문에 학교 근처가 여러모로 편했던 것이다.
어쨌든 레지던트 하면서 그 동네에 산다는 건 도현과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너 설마……?”
“방향도 같은데 택시 타자.”
도현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박민재는 마침 다가오던 택시를 잡았다. 도현이 먼저, 그가 뒤이어 타면서 목적지를 말했다.
“아저씨, A동 오거리요.”
차가 출발하고 나서 조금 후 도현은 조금 전보다 구체적으로 물었다.
“너 K대 병원 다니냐? K대 나왔어?”
“응.”
“진짜냐? 어떻게 몰랐지? 네가 의대라 몰랐나?”
“네가 경영대라 볼 일이 없었겠지.”
도현의 모교 의대는 인문계와 캠퍼스가 달랐다. 학교 캠퍼스가 A동과 J동의 경계에 걸쳐 있는 탓이다. 그리고 도현의 학과 건물은 인문계 쪽에서도 제일 가장자리 쪽에 있었다.
“나 경영대 다닌 건 어떻게 아냐?”
“SNS에 뜨던데…….”
“아…….”
택시는 한산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의 익숙한 거리에 시선을 주는데 박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잔 더 하고 갈래?”
“너 자야 되는 거 아니냐? 새벽에 출근한다며.”
“그렇긴 한데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피곤해?”
“어. 좀.”
“나 새벽에 나갈 거니까 자고 가도 되고.”
도대체 의중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던 도현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출근도 안 하겠다, 그의 집에 들어가서 잔다고 해도 어차피 자신의 원룸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안 걸렸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천천히 나가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색하고 거절하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 한 잔만 더 하지, 뭐.”
도현의 대답에 박민재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순간 도현은 조금 전의 무표정이 긴장 탓이란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가슴이 묵직하게 울려서 당황했다.
두 사람이 내린 곳은 학교 앞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 두 캔과 과자 몇 봉지를 샀다.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드는 때라 늦은 밤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무언가 어색했다. 도현은 슬슬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아무리 이 녀석 제안이었다고 해도.
문득 도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15년 만에 만난 동창이 근처에 산다니까 한 잔 더 하자고 제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데, 몇 시간 후면 출근해야 하는데 이게 정상적인 제안인가? 자신처럼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 늘어지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도현은 엘리베이터 도착음 때문에 생각을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오른쪽 끝에 있는 출입구에 카드키를 찍은 박민재가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이제라도 피곤하니까 쉬라고,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문 앞까지 와서 그러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 게 분명했다. 도현은 거실에 들어서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박민재의 시선에 할 수 없이 그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낯선 이의 집에 왔다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6학년이었던 그때 박민재의 책상 서랍을 바라볼 때처럼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느끼는 그런 감정이 생겨났다.
“왜 그래?”
신발을 벗고도 현관 앞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민재가 물었다.
“들어오기 싫어? 가려고?”
박민재는 마치 도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물어 왔다. 아니, 그렇게 도현의 얼굴에 쓰여 있는 걸 읽은 것뿐인지도 몰랐다.
박민재가 거실 한가운데 놓은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며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도현을 바라봤다. 복층 구조라 그런지 천장이 유달리 높았다.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도현을 바라보던 박민재가 테이블에 올려 둔 봉지에서 맥주와 과자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침묵을 갈랐다.
“너는 맨날 그런 식이었지.”
“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박민재에게 도현이 물었다. 이 역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도망치는 거. 너 잘하잖아.”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자신을 얼마나 잘 안다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화가 났다. 그러나 박민재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현은 대학 내내 역시 문과대를 갔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과를 잘못 골랐던 것이다. 회계학과 경영수학을 들을 때는 자괴감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잘하는 애들이 많은데 보통 이하인 자신은 왜 이걸 공부하고 있을까.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런데도 문과대로 전과하지 못한 건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자기 위안이었다.
어차피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글로 먹고사는 건 힘드니까. 하고 싶은 일 하며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냥 취미로 하자. 진짜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공부에서는 도망치면서 정말 도망치고 싶은 전공에서,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도현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오기가 밀어 냈다. 여기서 가겠다고 하면 그 말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별 뜻 없는 말처럼 받아넘겨야 했다.
“너 피곤한데 괜히 민폐 같아서 고민한 거지. 도망은 무슨. 내가 너한테 죄졌냐?”
이번에는 박민재가 대답이 없었다. 다만 또다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도현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어 또다시 뒷걸음질 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도현은 신발을 벗고,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슥 주변을 둘러봤다. 거실 한쪽 벽에 난 계단 위층은 침실인 것 같았다. 입구 왼쪽에 주방이 보였고, 방문이 하나 있었다. 오른쪽은 욕실처럼 보였다. 혼자 살기엔 꽤나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었지만 모델 하우스처럼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삭막했다.
“혼자 사냐?”
“응.”
자주 들어오지도 못하지만. 박민재가 덧붙이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집 안을 훑어봤다. 자주 못 오는 것치곤 깔끔한 편이었다. 아니, 어지를 시간도 없는 걸까.
도현은 박민재가 내민 맥주캔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에 그거 무슨 뜻이야.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맥주와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도현이 박민재에게서 도망쳤던 일은 ‘전학’ 그 자체였다. 그러나 표면상 전학은 집안 사정이었고 박민재조차 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건 다른 일일 터였다. 도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 저 말의 근거는 어떤 일일까.
‘도망’이라고 하니 문득 떠오른 일이 있었다.
자전거 사건 직후에도 도현은 박민재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도현은 수업이 끝나고 친한 애들과 말뚝박기나 축구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학원 갈 시간에 교문을 나서곤 했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 나오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민재와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날은 우연히도 박민재와 그의 친구들이 도현이 어울리는 무리들과 함께 축구를 했었다. 그리고 도현과 몇몇 애들이 학원 시간 때문에 교문을 나서자 남은 애들도 집에 가야겠다고 따라 나왔다. 도현은 그날 쉬는 아버지가 학교까지 데려다주어서 마침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이 있는 읍내로 통하는 지름길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그 지름길로 가려면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작은 시냇물을 지나야 했다.
예닐곱 명의 남자애들이 차례대로 징검다리를 건넜다. 얕은 시내라 빠진다고 해 봤자 정강이나 찰 정도의 깊이였다. 그런데 어떤 녀석이 장난친다고 잠깐 멈춘 사이에 아무 생각 없이 뒤따르던 도현이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부딪혀 발이 미끄러졌던 것이다. 도현은 어찌할 새도 없이 넘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다지 춥지 않은 가을 초입이었다. 순식간에 뒤집힌 시야에 짙푸른 하늘이 담겼다. 그제야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이 한꺼번에 뇌를 파고들었다. 도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순간 당황한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애가 없었다. 그때였다.
첨벙.
‘이도현, 괜찮아?’
징검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자빠진 상태라 도현을 일으키려면 함께 시냇물에 발을 담가야 했다. 그때 도현에게 다가온 건 이 녀석이었다. 박민재.
도현이 그에게서 받은 두 번째 도움이었다. 도현은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에 푹 젖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기 직전 망설임이 도현의 손을 붙들었다. 그때 박민재의 하얀 손이 도현을 한 번에 일으켰다.
‘감기 걸리겠다. 그냥 집에 가.’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도현은 순간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씨발! 쪽팔려!’
정말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생쥐처럼 물에 푹 젖은 꼴이 얼마나 볼썽사나웠을까. 일어선 그대로 상체를 내려다보니 잔뜩 젖은 검은색 반팔티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팬티까지 푹 젖은 상태였다.
순간 도현은 저도 모르게 박민재를 밀쳐 내고 휘적휘적 냇가 반대편으로 걸어가 시냇물에서 벗어났다. 그 길로 미친 듯이 달렸다. 정말 말 그대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기 위해서.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정신을 차려 보니 도현은 어머니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닿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얼어 있었는지 알았다. 그러고 그날 밤은 꼬박 열이 올라 새벽까지 앓았다. 역시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였다.
1. 재회 (2)
문득 이사 가기 전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박민재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사 가는 집 주소를 물었다. 도현은 당연히 그런 것 따위 알 리 없었고, 부모님한테 물어본 적도 없었다. 도현이 모른다고 말하자 박민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도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우리 집 주소야. 가자마자 편지 보내라.’
손바닥에 놓인 쪽지 한 장.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도현은 그런 그를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야, 박민재! 잠깐 기다려.’
그리고 도현이 급하게 마당에서 끌고 나온 건 자전거였다. 그가 빠진 체인을 걸어 줬던 그 자전거.
‘나 이제 자전거 안 타도 돼. 이사 가는 집 바로 앞에 중학교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거, 너 가져라. 탈 줄은 알지?’
대문 밖으로 끌고 나온 자전거를 그 녀석 앞에 세웠다. 정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순간 부모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탈 줄 모르냐?’
‘아니.’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는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핸들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살짝 손이 맞닿았다. 그러나 도현이 얼른 손을 놔 버렸기 때문에 그 접촉은 순간뿐이었다.
‘잘 지내라.’
그게 도현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인사에 박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안장에 올라서 약간 비틀거리다가 제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이 골목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인마, 내가 언제 편지한다고 약속했냐? 사실 나 그 쪽지 잃어버렸어.”
마지막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잘 챙겨 둔다고 도현이 애지중지 모아 둔 잡동사니 상자에 넣어 놨는데 어머니가 이삿짐을 싸다가 홀딱 버리고 만 거다. 이사 후 며칠이 지난 뒤 그걸 알게 된 도현이 난리를 친 것은 당연했다.
“짐 싸다가 잃어버려서. 아무튼 기다렸다면 미안하다. 뭐, 이제라도 연락 돼서 만났으니 다행 아니냐.”
사실은 그동안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동창들과 연락할 수 있었다. 도현이 대학에 입학할 때쯤 한참 유행했던 어떤 사이트에서도 동창 찾는 서비스가 인기였었다. 그런데도 이제야 SNS에 가입해서 초등학교 동창을, 아니, 정확히는 이 녀석을 만날 생각을 한 건 무슨 변덕이었을까.
“그래. 지금이라도 만났으니까.”
박민재는 조금 허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뭔가 뒤에 생략한 말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도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꽤 친하게 지냈다. 그러니 이사 가서도 연락하고 지낼 거라 생각한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녀석에게서, 그 학교에서 벗어나는 게 그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의사 선생님 되니까 어떠냐? 할 만하냐?”
“글쎄. 1년 차 지나니까 조금 낫긴 한데 여전히 좆같다.”
병원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던 도현은 대꾸 없이 피식 웃었다. 본래 하얀 피부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묘하게 창백한 게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박민재는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다. 가끔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는 게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딱 보니 바쁜 생활에 찌든 모습이었다.
“넌 어떤데?”
“아, 나도 좆같지. 그래도 올해 대리 달고 나니까 조금 낫다. 밑에 신입도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쓸 만해져서. 근데 일 시키는 입장도 마냥 편한 건 아니더라. 속 터지는 일도 많고.”
박민재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이나 김창식과는 전혀 다른 대화 주제라서 도현은 이제야 좀 말할 상대를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래도 윗사람 잘 만나서 우리 팀장이나 과장이 일을 잘 시키는 건지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밑에 사람 부려 보니까 알겠더라고. 내가 일을 병신같이 시키면 밑에 애도 병신 되는 거구나.”
도현은 대리 6개월 차에 겨우 막내를 벗어났다. 계속 신입들이 달아난 탓이었다. 뽑아서 1, 2개월 지나면 딴 데 됐다고 튀고, 안 맞는 거 같다고 그만두고. 지금 신입은 입사한 지 간신히 6개월이 됐다. 그리고 그사이에 도현도 겨우 사람 부리는 요령을 터득한 터였다. 몇 번은 지시를 잘못해서 신입을 울리기도 했다.
세금 계산서를 정리해 두라고 했더니 단순히 모아 두기만 한 거였다. 워낙 바빠서 그런 걸 챙길 시간도 없었던 도현은 결국 제 잘못임을 인정해야 했다. 크기에 맞게 자른 후 사업자 번호 순서대로, 그 전에 간이, 영세율, 일반을 분류해서 정리하라고, 같은 사업자는 날짜 순서대로 해야 한다고 세세하게 지시를 해야 했는데 자신이 생각이 없던 거였다. 모르면 물어보지 그랬냐고 다그치려다가 모르는 사람이 뭘 물어볼 수 있겠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인턴이나 1년 차는 그냥 병신이야. 윗사람과는 상관없이. 군대에서 이병이랑 같은 거지. 뭐, 어쨌든 네 말이 맞긴 해. 나도 2년 차 되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한다는 표현만으로 무언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랬다. 도현도 박민재도 사사건건 설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몇 마디 말만 나눠도 무슨 생각인지, 어떤 감정인지 감이 왔다. 그래서 참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취미나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 면도 많았다.
“바쁘다는 게 얼마나 바쁜 거냐? 화장실도 못 가냐?”
“응. 화장실 가겠다는 생각도 자주 잊어버리지.”
도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도현도 돌 정도로 바쁠 때는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는 생각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것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쉬는 타이밍은 웬만하면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몸 축나면 너만 손해다. 의사인 녀석이 더 잘 알겠지만.”
“그러게. 의사들이 제일 몸에 해로운 짓만 하고 다니는 거 알려나 모르겠다.”
잠 못 자고, 밥 굶는 건 예사고, 그나마 시간도 충분치 않으니 샌드위치에 삼각 김밥 따위라고. 그렇게 조곤조곤 대답하는 박민재는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외과 쪽은 워낙 체력이 필요해서…….”
“아까는 둘 다 입에 자물쇠를 걸었나 했더니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냐.”
서원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었다. 순간 담배 냄새가 코로 훅 끼쳐 들어왔다. 도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코 썩겠다, 새끼야. 몇 대나 피운 거야.”
“담배도 안 피우고, 이도현 너는 무슨 낙으로 사냐? 연애는 하냐?”
김창식의 질문이었다. 순간 서원과 박민재까지 도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연애는 무슨.”
대충 얼버무리려던 의도는 통하지 않았다. 서원이 놀리듯 연이어 물었다.
“너도 김창식과 아니냐? 모태솔로?”
“내가 어딜 봐서 모태솔로로 보여? 나름 인기 많았다고.”
도현은 사실 모태솔로긴 했지만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누구와도 사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건 옆에 앉아 있는 동창 덕분에 자각했고, 중학교 때는 한 학년 선배한테 고백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후배한테, 대학교 때는 클럽이나 바에서 대시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사귈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나는 왜 걸고넘어져. 나도 썸은 좀 타 봤다고.”
김창식의 투덜거림은 아랑곳 않고 서원은 연이어 물었다.
“그래서 최근에 연애는 언제 했는데?”
도현은 뭐라 대답할까 하다 문득 박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도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이제 슬슬 만나 봐야지. 지금까진 일이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결혼 생각하고 만나야 하니까 아무나 만날 수도 없고.”
친척들이나 친구들한테 하던 레퍼토리를 또 늘어놓았다. 오래 만난 친구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겠지만 역시 오늘 본 동창들이라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도현은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박민재 너는? 너도 솔로냐?”
“응. 어쩌다 보니.”
의대 졸업, 국가 고시,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것이다. 도현은 그렇게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얼굴에 누구 하나 만나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솔로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뭐, 이 녀석은 솔로라고 해도 자발적인 솔로겠지.”
서원의 대꾸에 도현과 김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떠들다 보니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서원이 먼저 슬슬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도현은 더 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주중의 피로가 쌓여서 꽤 피곤한 상태긴 했다. 김창식은 이제 출근해야 할 시간이라 했고, 박민재는 네 시간 후면 오프가 끝난다고 했다. 새벽 5시까지는 출근해야 한다고. 어쩐지 그 말만 들어도 그의 생활 패턴을 알 것 같았다.
서원은 신림동, 김창식은 홍대에 살아서 두 사람은 먼저 지하철 쪽으로 사라졌다. 큰길로 나와 버스를 탈까 고민하던 도현은 옆에 서 있는 박민재한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냐?”
“A동. 너는?”
“어? 나는 J동. 근처 아니냐?”
별일이었다. 이 넓은 서울에서 바로 옆 동에 살다니.
도현은 대학교 시절부터 지냈던 원룸에서 옮기지 않고 쭉 살고 있었다. 이사도 귀찮았지만 출퇴근 거리도 멀지 않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회사 근처에 자리를 잡기엔 월세가 너무 비쌌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볼 수 있기 때문에 학교 근처가 여러모로 편했던 것이다.
어쨌든 레지던트 하면서 그 동네에 산다는 건 도현과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너 설마……?”
“방향도 같은데 택시 타자.”
도현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박민재는 마침 다가오던 택시를 잡았다. 도현이 먼저, 그가 뒤이어 타면서 목적지를 말했다.
“아저씨, A동 오거리요.”
차가 출발하고 나서 조금 후 도현은 조금 전보다 구체적으로 물었다.
“너 K대 병원 다니냐? K대 나왔어?”
“응.”
“진짜냐? 어떻게 몰랐지? 네가 의대라 몰랐나?”
“네가 경영대라 볼 일이 없었겠지.”
도현의 모교 의대는 인문계와 캠퍼스가 달랐다. 학교 캠퍼스가 A동과 J동의 경계에 걸쳐 있는 탓이다. 그리고 도현의 학과 건물은 인문계 쪽에서도 제일 가장자리 쪽에 있었다.
“나 경영대 다닌 건 어떻게 아냐?”
“SNS에 뜨던데…….”
“아…….”
택시는 한산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의 익숙한 거리에 시선을 주는데 박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잔 더 하고 갈래?”
“너 자야 되는 거 아니냐? 새벽에 출근한다며.”
“그렇긴 한데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피곤해?”
“어. 좀.”
“나 새벽에 나갈 거니까 자고 가도 되고.”
도대체 의중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던 도현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출근도 안 하겠다, 그의 집에 들어가서 잔다고 해도 어차피 자신의 원룸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안 걸렸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천천히 나가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색하고 거절하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 한 잔만 더 하지, 뭐.”
도현의 대답에 박민재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순간 도현은 조금 전의 무표정이 긴장 탓이란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가슴이 묵직하게 울려서 당황했다.
두 사람이 내린 곳은 학교 앞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 두 캔과 과자 몇 봉지를 샀다.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드는 때라 늦은 밤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무언가 어색했다. 도현은 슬슬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아무리 이 녀석 제안이었다고 해도.
문득 도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15년 만에 만난 동창이 근처에 산다니까 한 잔 더 하자고 제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데, 몇 시간 후면 출근해야 하는데 이게 정상적인 제안인가? 자신처럼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 늘어지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도현은 엘리베이터 도착음 때문에 생각을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오른쪽 끝에 있는 출입구에 카드키를 찍은 박민재가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이제라도 피곤하니까 쉬라고,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문 앞까지 와서 그러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 게 분명했다. 도현은 거실에 들어서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박민재의 시선에 할 수 없이 그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낯선 이의 집에 왔다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6학년이었던 그때 박민재의 책상 서랍을 바라볼 때처럼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느끼는 그런 감정이 생겨났다.
“왜 그래?”
신발을 벗고도 현관 앞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민재가 물었다.
“들어오기 싫어? 가려고?”
박민재는 마치 도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물어 왔다. 아니, 그렇게 도현의 얼굴에 쓰여 있는 걸 읽은 것뿐인지도 몰랐다.
박민재가 거실 한가운데 놓은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며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도현을 바라봤다. 복층 구조라 그런지 천장이 유달리 높았다.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도현을 바라보던 박민재가 테이블에 올려 둔 봉지에서 맥주와 과자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침묵을 갈랐다.
“너는 맨날 그런 식이었지.”
“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박민재에게 도현이 물었다. 이 역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도망치는 거. 너 잘하잖아.”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자신을 얼마나 잘 안다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화가 났다. 그러나 박민재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현은 대학 내내 역시 문과대를 갔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과를 잘못 골랐던 것이다. 회계학과 경영수학을 들을 때는 자괴감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잘하는 애들이 많은데 보통 이하인 자신은 왜 이걸 공부하고 있을까.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런데도 문과대로 전과하지 못한 건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자기 위안이었다.
어차피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글로 먹고사는 건 힘드니까. 하고 싶은 일 하며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냥 취미로 하자. 진짜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공부에서는 도망치면서 정말 도망치고 싶은 전공에서,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도현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오기가 밀어 냈다. 여기서 가겠다고 하면 그 말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별 뜻 없는 말처럼 받아넘겨야 했다.
“너 피곤한데 괜히 민폐 같아서 고민한 거지. 도망은 무슨. 내가 너한테 죄졌냐?”
이번에는 박민재가 대답이 없었다. 다만 또다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도현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어 또다시 뒷걸음질 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도현은 신발을 벗고,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슥 주변을 둘러봤다. 거실 한쪽 벽에 난 계단 위층은 침실인 것 같았다. 입구 왼쪽에 주방이 보였고, 방문이 하나 있었다. 오른쪽은 욕실처럼 보였다. 혼자 살기엔 꽤나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었지만 모델 하우스처럼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삭막했다.
“혼자 사냐?”
“응.”
자주 들어오지도 못하지만. 박민재가 덧붙이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집 안을 훑어봤다. 자주 못 오는 것치곤 깔끔한 편이었다. 아니, 어지를 시간도 없는 걸까.
도현은 박민재가 내민 맥주캔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에 그거 무슨 뜻이야.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맥주와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도현이 박민재에게서 도망쳤던 일은 ‘전학’ 그 자체였다. 그러나 표면상 전학은 집안 사정이었고 박민재조차 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건 다른 일일 터였다. 도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 저 말의 근거는 어떤 일일까.
‘도망’이라고 하니 문득 떠오른 일이 있었다.
자전거 사건 직후에도 도현은 박민재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도현은 수업이 끝나고 친한 애들과 말뚝박기나 축구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학원 갈 시간에 교문을 나서곤 했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 나오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민재와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날은 우연히도 박민재와 그의 친구들이 도현이 어울리는 무리들과 함께 축구를 했었다. 그리고 도현과 몇몇 애들이 학원 시간 때문에 교문을 나서자 남은 애들도 집에 가야겠다고 따라 나왔다. 도현은 그날 쉬는 아버지가 학교까지 데려다주어서 마침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이 있는 읍내로 통하는 지름길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그 지름길로 가려면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작은 시냇물을 지나야 했다.
예닐곱 명의 남자애들이 차례대로 징검다리를 건넜다. 얕은 시내라 빠진다고 해 봤자 정강이나 찰 정도의 깊이였다. 그런데 어떤 녀석이 장난친다고 잠깐 멈춘 사이에 아무 생각 없이 뒤따르던 도현이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부딪혀 발이 미끄러졌던 것이다. 도현은 어찌할 새도 없이 넘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다지 춥지 않은 가을 초입이었다. 순식간에 뒤집힌 시야에 짙푸른 하늘이 담겼다. 그제야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이 한꺼번에 뇌를 파고들었다. 도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순간 당황한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애가 없었다. 그때였다.
첨벙.
‘이도현, 괜찮아?’
징검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자빠진 상태라 도현을 일으키려면 함께 시냇물에 발을 담가야 했다. 그때 도현에게 다가온 건 이 녀석이었다. 박민재.
도현이 그에게서 받은 두 번째 도움이었다. 도현은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에 푹 젖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기 직전 망설임이 도현의 손을 붙들었다. 그때 박민재의 하얀 손이 도현을 한 번에 일으켰다.
‘감기 걸리겠다. 그냥 집에 가.’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도현은 순간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씨발! 쪽팔려!’
정말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생쥐처럼 물에 푹 젖은 꼴이 얼마나 볼썽사나웠을까. 일어선 그대로 상체를 내려다보니 잔뜩 젖은 검은색 반팔티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팬티까지 푹 젖은 상태였다.
순간 도현은 저도 모르게 박민재를 밀쳐 내고 휘적휘적 냇가 반대편으로 걸어가 시냇물에서 벗어났다. 그 길로 미친 듯이 달렸다. 정말 말 그대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기 위해서.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정신을 차려 보니 도현은 어머니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닿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얼어 있었는지 알았다. 그러고 그날 밤은 꼬박 열이 올라 새벽까지 앓았다. 역시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