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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달이 하늘 위에 동실 떠오른 늦은 시간이 되었다. 보육원은 조용했다. 6세, 7세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니, 모두들 하원하고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소를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가던 로미는 누군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교실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있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루 아버님?”
“……로미 씨인가?”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시간인데 보육원에 있는 사람이 둘씩이나. 그것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퇴근 시간은 지났을 텐데? 뭐 하는 거지?”
“……아버님이야말로 그 손에 들고 계신 아루의 작품부터 내려놓으시죠.”
그녀의 단호한 말에, 안테는 움찔하며 오늘 낮에 아루가 만들었던 우유병 사람을 내려놓았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가위도 내려놓으시고요.”
안테는 풀이 죽어 가위도 내려놓았다. 그는 자그마한 어린이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듯 기대어 아루의 작품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로미는 이제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야밤에 찾아와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만에 그는 입을 열었다.
“아루가 슬퍼했다.”
열심히 만들었지만, 친구들처럼 멋지게 만들 수 없었다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모를 붙잡고 울며불며 서러워했다. 보육원에서는 창피한 마음에 울 수가 없었던 탓에 꾹꾹 눌러두었던 슬픔이 한 번에 폭발한 모양이었다.
아루는 황국의 귀한 공녀님이었고, 그 이전에 안테에게는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의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겨 준 단 하나의 선물이었고, 유일한 삶의 기쁨이며, 열심히 일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고, 살아가게 하는 심장이었다.
“그렇다고 아버님께서 아루의 작품에 손을 대면 더욱 슬퍼할 거예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따라 로미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루의 작품에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비로소 로미에게로 닿았다.
로미 보. 그가 뽑아서 보육원으로 데려온 황궁의 시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시녀라고 들어 옳다구나 하며 당장 고용을 결정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훌륭하게 적응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거의 그녀의 손에 의해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최근 들어 그의 딸이 가장 따르는 타인이었다. 아무리 타인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 안테라고 하더라도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로미는 안테 앞에 놓여 있는 색종이 조각과 가위를 집어 제자리에 정리해 두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의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딸의 작품을 조금 손봐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딸의 웃는 얼굴을 찾아 주고 싶었겠지. 그는 제 딸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사람이니까.
로미는 안테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내 나란히 앉았다. 형편없이 작은 어린이 의자가 몸집이 작은 로미에게는 아직 앉을 만한 의자가 되었다.
“이런 방식은…… 아버님도 아루의 작품을 형편없다 생각했다고 아루에게 전하는 것이 돼요.”
로미는 아루의 작품을 책상의 가운데에 끌어다 놓았다.
“아루가 만든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칭찬해 주세요.”
안테는 팔짱을 끼고, 딸이 만든 작품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몸통 역할을 하는 우유병에는 붉은색 물감을 이용한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양쪽으로는 길게 뻗은 팔이, 위로는 얼굴이 동그랗게 붙어 있었다. 손가락이 없는 팔은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굴! 표정이 음울해 보였다.
종합하면, 하트 그림 티셔츠를 입은 손가락이 없고, 다리가 없으며, 표정은 음울한 우유병 인간.
“하트를 잘 그렸다.”
안테는 수 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딸의 미술 작품에서 진정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었다. 로미는 그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다시 묻지만, 로미 씨는 이 시간까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약속이 있어서 퇴근했다가, 청소하기 위해 다시 들른 것뿐이에요.”
“약속?”
“네, 저녁 식사 약속이…….”
어느 정신 빠진 놈이 보육원의 시녀에게 식사 요청을 하는 거지? 그녀가 마주치는 남성 대부분은 이 보육원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 잘난 교육학자 할아버지들이나 아침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행정부의 유부남들뿐이다. 적당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와?”
그 얼빠진 놈이 누군지 알아야겠다. 유부남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모리젠 선생님이요.”
그 얼빠진 놈이 내 동생이라니! 안테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이마를 짚었다. 모리젠은 황실 소속의 의료팀이었다.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 보육 시설에 지원을……, 아니 강제 차출을 당했다.
모리젠은 유부남이 아니다. 약혼녀도 없으니,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한다고 하여 그 어떤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지 않았다. 뭐가 좋지 않은지는 그도 알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일을 팽개치고 놀러 다니면 쓰나.”
그저, 뭔가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적당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아침에는 항상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아침의 이야기고.”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논리로 무장해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의 주 업무 중 하나인데 이런 간단한 사리 판별 하나 못 할까.
“지금은 밤이지.”
그의 눈동자에 달빛이 깃들었다. 묘한 분위기는 억지스러운 그의 말에도 조금 더 깊은 뜻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안테는 아침보다 밤에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로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 밑에서는 어딘가 바래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이지만, 달빛을 받으면 은빛을 내며 은은하게 빛난다. 아침에 입고 있던 구김 가득한 옷도 다시 빳빳하게 손질된 정장으로 갈아입었고, 피곤함과 졸음이 가득했던 눈은 날카로운 이성으로 빛이 났다.
“모리젠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게 좋겠어.”
무의식중에 그는 담배를 찾았다. 문득 주변을 인식하고 금방 그만두게 되었지만.
로미는 그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별다른 의중을 마음에 둘 리가 없다. 그저 말하는 것이 곧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건……. 보육원 사업 담당자의 의견인가요? 그게 아니면 모리젠 선생님 형님의 의견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안테는 잠깐 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눈동자를 굴려 고민하다 가볍게 툭 내뱉어 대답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냥 아루 아버지의 의견이야.”
그리고 그리 말하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깨달았다. 그 대답은 확실하게 틀렸다는 것을.
“아니, 그냥 나의 의견.”
안테 디안의 사적인 의견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출처는 정확해야지.
다음 날 아침.
“안녕, 아루.”
“안녕하시어요. 로미 씨.”
“이런 보육 시설의 시녀 따위 그만둬.”
보육원의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은 언제나 같은 말로 서로에게 인사를 전했다. 로미는 무릎을 굽혀 아루와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다. ‘중요한 말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전달한다.’ 그녀의 신념 때문이었다.
“아루, 어제는 아버님께서 아루와 친구들의 작품에 이름표를 만들어 달아 주셨어.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야. 알았지?”
아루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파란색 눈동자에 환희가 더해지니 귀한 보석이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루는 몸을 돌려 안테를 꼭 끌어안았다. 안테도 몸을 낮추어 그의 작은 공주를 소중하게 안고 토닥여 주었다.
“하트를 잘 그렸다.”
미리 예습한 말을 딸에게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은 아루의 얼굴이 곧 기쁨으로 빛났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 안테의 뺨에 귀여운 입술로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해 주었다.
안테는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가 딸을 진정 기쁘게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제의 슬픔 따위는 전부 잊은 아루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딸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들어 로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야말로 그녀에게 꼭 전해야 하는 경고의 말이 있었다. 부디 그녀가 똑똑히 새겨 두길 바라며, 그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런 보육 시설 따위 내가 문 닫게 해 주지.”
로미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말에 웃는 것은 로미뿐이 아니었다.
그가 늦은 밤까지 열심히 가위질하고, 성심성의껏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간 이름표들이 보육원 복도에서 그를 바라보며 함께 웃고 있었다.
* * *
보육원의 수업 내용은 매일 변경되지만, 그 전체적인 일정은 비슷했다. 처음에는 일정한 일과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심 식사 후 이어지는 낮잠 시간은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른들에게 낮잠 시간을 준다면 만세를 부르며 즐거워하겠지만, 아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오전 시간의 놀이로 아직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동그란 눈이 깜빡깜빡 이불을 꼭 붙든 손 위에서 빛났고, 문득 다른 친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키득키득 웃느라 겨우 찾아온 약간의 잠마저 쏙 달아나 버리곤 했다.
교수들은 아이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막아 두었다. 어둠이 아이들의 들뜬 마음을 잡아먹었고, 순한 아이들은 스스로 잠이 들었다. 로미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잠들기 어려워하는 아이를 토닥여 주기도 하고, 잠버릇이 나쁜 아이의 담요를 다시 예쁘게 덮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루의 반을 슬쩍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새액새액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깊이 잠이 든 걸까? 로미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로미 씨…….”
그녀를 찾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다. 아루였다.
항상 가장 먼저 잠들던 아루가 오늘은 가장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로미는 걱정을 마음속에 그대로 감추어 둔 채 상냥한 얼굴 그대로 아루에게 다가갔다. 아루는 로미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이불 속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하얗고 말랑거리는 아루의 손.
“잡아 주시어요…….”
소곤소곤 전하는 귀엽고 솔직한 한마디.
아루에게 손을 내밀던 로미는 순간 멈칫했다. 제 손이 너무 차가웠다. 아이에게 조금 남아 있는 잠기운마저 달아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작은 손이 먼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차가웠던 손가락 마디마디로 따듯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의 푸우― 푸우― 하는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갔다. 부스럭거리는 담요 소리도 함께였다. 깨어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이라는 실감이 조금 더 깊이 와 닿았다. 두꺼운 커튼을 겨우 뚫고 다가와 준 아스라한 빛에 의지해, 로미와 아루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루의 눈동자에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어 로미는 안도했다.
“어서 자야지…….”
로미는 다른 손으로 아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저기……. 로미 씨 혹시…… 그 자장가를 알고 계시어요?”
“어떤 자장가?”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시녀로 발탁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몇 개의 자장가를 외워 두었다. 아루의 질문에 로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몇 개의 자장가가 떠올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어느 것일까?
“어머니 나라의 자장가…….”
아루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던 로미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어린 소녀는 지금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을 용기 내어 말해 준 것이었다.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떼를 쓰고 훌쩍훌쩍 울어도 좋을 나이. 그러나 이 아이는 그리하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를 배려한 것이리라.
꾹꾹 눌러둔 그리움이 작지 않을 것이거늘, 아이가 바라는 것은 겨우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노래였다. 로미는 아이의 소망이 너무나도 소소하여 가슴 아팠다.
그 노래는 로미가 외워 두었던 여러 자장가의 목록에는 없었다. 그 나라는 이미 사라졌고, 그 문자와 언어마저도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으니. 그러나 로미는 분명하게 알고 있는 노래였다. 로미에게도 자장가가 되었던 노래였으므로.
아루의 어머니는 지금은 사라진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다. 약소국이었던 그 나라는 평화를 위해서 아름다운 공주를 이 나라 황제에게 보냈으나, 황제는 그녀를 공작인 아루의 아버지에게 보내 버렸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공주를 굳이 황족이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루의 어머니를 동정했다. 아루를 낳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본국의 부족한 힘이 지켜 내지 못한 아름다운 비운의 공주. 그것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그리고 그 약소국은 로미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제가 아플 때는 매일같이 울기만 해서,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드시지도 못하면서도 저를 재우실 때마다 그 노래를 불러 주셨다 들었사와요…….”
세상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아루는 항상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자신을 키우는 일에 될 수 있으면 유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해내셨다 들었다. 수천, 수만 번의 애정 어린 키스가 이마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잡히지 않는 그리움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가끔 그리워지는 음률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렴풋한 기억. 알듯 모를 듯한 그 노래. 지금은 사라져 버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나라의 말로 이루어진 노래.
작은 아이의 커다란 그리움을 어떤 사람이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로미의 입가가 같은 슬픔으로 파르르 떨려 왔다. 마음과 추억이 노래하는 음을 따라서 간신히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언젠가 자신도 어머니한테서 들었던 노래다.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입술이 그 가사를 알고 있었다. 로미의 이마에도 남아 있는 어머니의 키스가 그 음을 알려 주었다.
푸우푸우, 같은 박자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숨소리, 로미의 기억 속 노래, 아루의 추억 속 어머니. 그 노래를 길잡이 삼아 잠의 요정도 비로소 아루에게 무사히 찾아왔다.
아루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미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놓고 이불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노래는 로미의 마음에 깊이 숨겨 놓았던 그리움을 깨워 주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허공으로 산산이 깨어지는 것 같아서, 로미는 잠시 아루의 곁에서 자신의 심장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녀는 애써 중얼거렸다. 이 노래에 걸린 수많은 이의 그리움이 언제나 함께였다. 그녀와 아루 둘뿐이 아닐 것이다.
그날 저녁, 안테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온 아루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여운 위안 인형 ‘아리아’의 옷을 갈아입혔다.
“티 파티가 있으니까, 예쁘게 입는 것이어요. 아리아.”
아루는 인형이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곧 핑크빛 장난감 티 세트를 챙겨 온 아루는 인형 앞에 차 한 잔을 대접했다. 텅 비어 있는 장난감 찻잔이지만, 이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차가 담긴 예쁜 찻잔이 되었다.
그리고 아루는 또 다른 찻잔을 꺼내어 대접했다. 인형의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티 파티의 손님, 안테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찻잔이었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 잔을 받았다.
“홍차에 설탕이 필요하시어요?”
“물론이다.”
앙증맞은 슈거볼과 티스푼이 그의 앞에 놓였다. 안테는 찻잔에 설탕을 넣는 시늉까지 충실하게 이행했다. 두어 번 휘저어 설탕을 녹여 낸 후에는 그 작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아루의 눈동자가 즐겁게 휘어지는 것이 보여 그도 살짝 웃었다.
“차 맛이 훌륭하구나.”
“부끄러운 것이어요.”
아루는 제 앞에도 잔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오늘,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이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털어놓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테는 딸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낮잠 시간에…….”
어머니 나라의 자장가를 들은 것이어요.
아루는 얼른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저 들뜬 마음에, 행복한 충족감에 잠시 잊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같은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루가 당황하는 얼굴로 멈칫거리자 안테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낮잠 시간에?”
“아,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요.”
“흠?”
그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와의 간격을 세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캐묻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인지는 알았으나, 이렇게 기뻐하는 일은 함께 나누고 싶었다. 욕심일까.
“무엇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 주겠다.”
“무엇……이든?”
“그래.”
달이 하늘 위에 동실 떠오른 늦은 시간이 되었다. 보육원은 조용했다. 6세, 7세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니, 모두들 하원하고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소를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가던 로미는 누군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교실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있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루 아버님?”
“……로미 씨인가?”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시간인데 보육원에 있는 사람이 둘씩이나. 그것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퇴근 시간은 지났을 텐데? 뭐 하는 거지?”
“……아버님이야말로 그 손에 들고 계신 아루의 작품부터 내려놓으시죠.”
그녀의 단호한 말에, 안테는 움찔하며 오늘 낮에 아루가 만들었던 우유병 사람을 내려놓았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가위도 내려놓으시고요.”
안테는 풀이 죽어 가위도 내려놓았다. 그는 자그마한 어린이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듯 기대어 아루의 작품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로미는 이제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야밤에 찾아와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만에 그는 입을 열었다.
“아루가 슬퍼했다.”
열심히 만들었지만, 친구들처럼 멋지게 만들 수 없었다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모를 붙잡고 울며불며 서러워했다. 보육원에서는 창피한 마음에 울 수가 없었던 탓에 꾹꾹 눌러두었던 슬픔이 한 번에 폭발한 모양이었다.
아루는 황국의 귀한 공녀님이었고, 그 이전에 안테에게는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의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겨 준 단 하나의 선물이었고, 유일한 삶의 기쁨이며, 열심히 일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고, 살아가게 하는 심장이었다.
“그렇다고 아버님께서 아루의 작품에 손을 대면 더욱 슬퍼할 거예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따라 로미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루의 작품에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비로소 로미에게로 닿았다.
로미 보. 그가 뽑아서 보육원으로 데려온 황궁의 시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시녀라고 들어 옳다구나 하며 당장 고용을 결정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훌륭하게 적응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거의 그녀의 손에 의해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최근 들어 그의 딸이 가장 따르는 타인이었다. 아무리 타인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 안테라고 하더라도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로미는 안테 앞에 놓여 있는 색종이 조각과 가위를 집어 제자리에 정리해 두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의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딸의 작품을 조금 손봐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딸의 웃는 얼굴을 찾아 주고 싶었겠지. 그는 제 딸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사람이니까.
로미는 안테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내 나란히 앉았다. 형편없이 작은 어린이 의자가 몸집이 작은 로미에게는 아직 앉을 만한 의자가 되었다.
“이런 방식은…… 아버님도 아루의 작품을 형편없다 생각했다고 아루에게 전하는 것이 돼요.”
로미는 아루의 작품을 책상의 가운데에 끌어다 놓았다.
“아루가 만든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칭찬해 주세요.”
안테는 팔짱을 끼고, 딸이 만든 작품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몸통 역할을 하는 우유병에는 붉은색 물감을 이용한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양쪽으로는 길게 뻗은 팔이, 위로는 얼굴이 동그랗게 붙어 있었다. 손가락이 없는 팔은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굴! 표정이 음울해 보였다.
종합하면, 하트 그림 티셔츠를 입은 손가락이 없고, 다리가 없으며, 표정은 음울한 우유병 인간.
“하트를 잘 그렸다.”
안테는 수 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딸의 미술 작품에서 진정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었다. 로미는 그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다시 묻지만, 로미 씨는 이 시간까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약속이 있어서 퇴근했다가, 청소하기 위해 다시 들른 것뿐이에요.”
“약속?”
“네, 저녁 식사 약속이…….”
어느 정신 빠진 놈이 보육원의 시녀에게 식사 요청을 하는 거지? 그녀가 마주치는 남성 대부분은 이 보육원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 잘난 교육학자 할아버지들이나 아침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행정부의 유부남들뿐이다. 적당한 후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와?”
그 얼빠진 놈이 누군지 알아야겠다. 유부남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모리젠 선생님이요.”
그 얼빠진 놈이 내 동생이라니! 안테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이마를 짚었다. 모리젠은 황실 소속의 의료팀이었다.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 보육 시설에 지원을……, 아니 강제 차출을 당했다.
모리젠은 유부남이 아니다. 약혼녀도 없으니,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한다고 하여 그 어떤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지 않았다. 뭐가 좋지 않은지는 그도 알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일을 팽개치고 놀러 다니면 쓰나.”
그저, 뭔가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적당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아침에는 항상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아침의 이야기고.”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논리로 무장해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의 주 업무 중 하나인데 이런 간단한 사리 판별 하나 못 할까.
“지금은 밤이지.”
그의 눈동자에 달빛이 깃들었다. 묘한 분위기는 억지스러운 그의 말에도 조금 더 깊은 뜻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안테는 아침보다 밤에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로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 밑에서는 어딘가 바래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이지만, 달빛을 받으면 은빛을 내며 은은하게 빛난다. 아침에 입고 있던 구김 가득한 옷도 다시 빳빳하게 손질된 정장으로 갈아입었고, 피곤함과 졸음이 가득했던 눈은 날카로운 이성으로 빛이 났다.
“모리젠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게 좋겠어.”
무의식중에 그는 담배를 찾았다. 문득 주변을 인식하고 금방 그만두게 되었지만.
로미는 그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별다른 의중을 마음에 둘 리가 없다. 그저 말하는 것이 곧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건……. 보육원 사업 담당자의 의견인가요? 그게 아니면 모리젠 선생님 형님의 의견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안테는 잠깐 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눈동자를 굴려 고민하다 가볍게 툭 내뱉어 대답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냥 아루 아버지의 의견이야.”
그리고 그리 말하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깨달았다. 그 대답은 확실하게 틀렸다는 것을.
“아니, 그냥 나의 의견.”
안테 디안의 사적인 의견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출처는 정확해야지.
다음 날 아침.
“안녕, 아루.”
“안녕하시어요. 로미 씨.”
“이런 보육 시설의 시녀 따위 그만둬.”
보육원의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은 언제나 같은 말로 서로에게 인사를 전했다. 로미는 무릎을 굽혀 아루와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다. ‘중요한 말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전달한다.’ 그녀의 신념 때문이었다.
“아루, 어제는 아버님께서 아루와 친구들의 작품에 이름표를 만들어 달아 주셨어.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야. 알았지?”
아루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파란색 눈동자에 환희가 더해지니 귀한 보석이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루는 몸을 돌려 안테를 꼭 끌어안았다. 안테도 몸을 낮추어 그의 작은 공주를 소중하게 안고 토닥여 주었다.
“하트를 잘 그렸다.”
미리 예습한 말을 딸에게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은 아루의 얼굴이 곧 기쁨으로 빛났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 안테의 뺨에 귀여운 입술로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해 주었다.
안테는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가 딸을 진정 기쁘게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제의 슬픔 따위는 전부 잊은 아루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딸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들어 로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야말로 그녀에게 꼭 전해야 하는 경고의 말이 있었다. 부디 그녀가 똑똑히 새겨 두길 바라며, 그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런 보육 시설 따위 내가 문 닫게 해 주지.”
로미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말에 웃는 것은 로미뿐이 아니었다.
그가 늦은 밤까지 열심히 가위질하고, 성심성의껏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간 이름표들이 보육원 복도에서 그를 바라보며 함께 웃고 있었다.
* * *
보육원의 수업 내용은 매일 변경되지만, 그 전체적인 일정은 비슷했다. 처음에는 일정한 일과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심 식사 후 이어지는 낮잠 시간은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른들에게 낮잠 시간을 준다면 만세를 부르며 즐거워하겠지만, 아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오전 시간의 놀이로 아직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동그란 눈이 깜빡깜빡 이불을 꼭 붙든 손 위에서 빛났고, 문득 다른 친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키득키득 웃느라 겨우 찾아온 약간의 잠마저 쏙 달아나 버리곤 했다.
교수들은 아이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막아 두었다. 어둠이 아이들의 들뜬 마음을 잡아먹었고, 순한 아이들은 스스로 잠이 들었다. 로미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잠들기 어려워하는 아이를 토닥여 주기도 하고, 잠버릇이 나쁜 아이의 담요를 다시 예쁘게 덮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루의 반을 슬쩍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새액새액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깊이 잠이 든 걸까? 로미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로미 씨…….”
그녀를 찾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다. 아루였다.
항상 가장 먼저 잠들던 아루가 오늘은 가장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로미는 걱정을 마음속에 그대로 감추어 둔 채 상냥한 얼굴 그대로 아루에게 다가갔다. 아루는 로미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이불 속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하얗고 말랑거리는 아루의 손.
“잡아 주시어요…….”
소곤소곤 전하는 귀엽고 솔직한 한마디.
아루에게 손을 내밀던 로미는 순간 멈칫했다. 제 손이 너무 차가웠다. 아이에게 조금 남아 있는 잠기운마저 달아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작은 손이 먼저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차가웠던 손가락 마디마디로 따듯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의 푸우― 푸우― 하는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갔다. 부스럭거리는 담요 소리도 함께였다. 깨어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이라는 실감이 조금 더 깊이 와 닿았다. 두꺼운 커튼을 겨우 뚫고 다가와 준 아스라한 빛에 의지해, 로미와 아루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루의 눈동자에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어 로미는 안도했다.
“어서 자야지…….”
로미는 다른 손으로 아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저기……. 로미 씨 혹시…… 그 자장가를 알고 계시어요?”
“어떤 자장가?”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시녀로 발탁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몇 개의 자장가를 외워 두었다. 아루의 질문에 로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몇 개의 자장가가 떠올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어느 것일까?
“어머니 나라의 자장가…….”
아루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던 로미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어린 소녀는 지금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을 용기 내어 말해 준 것이었다.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떼를 쓰고 훌쩍훌쩍 울어도 좋을 나이. 그러나 이 아이는 그리하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를 배려한 것이리라.
꾹꾹 눌러둔 그리움이 작지 않을 것이거늘, 아이가 바라는 것은 겨우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노래였다. 로미는 아이의 소망이 너무나도 소소하여 가슴 아팠다.
그 노래는 로미가 외워 두었던 여러 자장가의 목록에는 없었다. 그 나라는 이미 사라졌고, 그 문자와 언어마저도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으니. 그러나 로미는 분명하게 알고 있는 노래였다. 로미에게도 자장가가 되었던 노래였으므로.
아루의 어머니는 지금은 사라진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다. 약소국이었던 그 나라는 평화를 위해서 아름다운 공주를 이 나라 황제에게 보냈으나, 황제는 그녀를 공작인 아루의 아버지에게 보내 버렸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공주를 굳이 황족이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루의 어머니를 동정했다. 아루를 낳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본국의 부족한 힘이 지켜 내지 못한 아름다운 비운의 공주. 그것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그리고 그 약소국은 로미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제가 아플 때는 매일같이 울기만 해서,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드시지도 못하면서도 저를 재우실 때마다 그 노래를 불러 주셨다 들었사와요…….”
세상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아루는 항상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자신을 키우는 일에 될 수 있으면 유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해내셨다 들었다. 수천, 수만 번의 애정 어린 키스가 이마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잡히지 않는 그리움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가끔 그리워지는 음률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렴풋한 기억. 알듯 모를 듯한 그 노래. 지금은 사라져 버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나라의 말로 이루어진 노래.
작은 아이의 커다란 그리움을 어떤 사람이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로미의 입가가 같은 슬픔으로 파르르 떨려 왔다. 마음과 추억이 노래하는 음을 따라서 간신히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언젠가 자신도 어머니한테서 들었던 노래다.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입술이 그 가사를 알고 있었다. 로미의 이마에도 남아 있는 어머니의 키스가 그 음을 알려 주었다.
푸우푸우, 같은 박자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숨소리, 로미의 기억 속 노래, 아루의 추억 속 어머니. 그 노래를 길잡이 삼아 잠의 요정도 비로소 아루에게 무사히 찾아왔다.
아루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미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놓고 이불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노래는 로미의 마음에 깊이 숨겨 놓았던 그리움을 깨워 주었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허공으로 산산이 깨어지는 것 같아서, 로미는 잠시 아루의 곁에서 자신의 심장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녀는 애써 중얼거렸다. 이 노래에 걸린 수많은 이의 그리움이 언제나 함께였다. 그녀와 아루 둘뿐이 아닐 것이다.
그날 저녁, 안테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온 아루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여운 위안 인형 ‘아리아’의 옷을 갈아입혔다.
“티 파티가 있으니까, 예쁘게 입는 것이어요. 아리아.”
아루는 인형이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곧 핑크빛 장난감 티 세트를 챙겨 온 아루는 인형 앞에 차 한 잔을 대접했다. 텅 비어 있는 장난감 찻잔이지만, 이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차가 담긴 예쁜 찻잔이 되었다.
그리고 아루는 또 다른 찻잔을 꺼내어 대접했다. 인형의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티 파티의 손님, 안테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찻잔이었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 잔을 받았다.
“홍차에 설탕이 필요하시어요?”
“물론이다.”
앙증맞은 슈거볼과 티스푼이 그의 앞에 놓였다. 안테는 찻잔에 설탕을 넣는 시늉까지 충실하게 이행했다. 두어 번 휘저어 설탕을 녹여 낸 후에는 그 작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아루의 눈동자가 즐겁게 휘어지는 것이 보여 그도 살짝 웃었다.
“차 맛이 훌륭하구나.”
“부끄러운 것이어요.”
아루는 제 앞에도 잔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오늘, 즐거운 일이 있었던 것이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털어놓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테는 딸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낮잠 시간에…….”
어머니 나라의 자장가를 들은 것이어요.
아루는 얼른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저 들뜬 마음에, 행복한 충족감에 잠시 잊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같은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루가 당황하는 얼굴로 멈칫거리자 안테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낮잠 시간에?”
“아,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요.”
“흠?”
그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와의 간격을 세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캐묻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인지는 알았으나, 이렇게 기뻐하는 일은 함께 나누고 싶었다. 욕심일까.
“무엇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 주겠다.”
“무엇……이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