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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루는 머뭇거렸다. 즐거운 일을 말하고 싶어 간질간질하는 입이 참지 못하고 미소를 띠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저어.”
아루가 겨우 힘들게 첫마디를 뗀 순간, 안테의 팔이 인형 아리아를 툭 치는 바람에 인형이 한쪽으로 힘없이 스르륵 쓰러졌다. 그는 아루의 이야기가 끊길까 걱정이 되어 얼른 인형의 손을 잡아 바로 세워 두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인형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다시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별수 없이 말랑말랑한 인형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아루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로미 씨께서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려주신 것이어요.”
“……카르나의?”
“그러셨사와요.”
안테는 그녀의 서류에 기입되어 있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로미의 어머니가 그 나라 출신인 것으로 적혀 있었다.
“행복했사와요.”
아루는 두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았다. 그리하면 아직도 노래의 음률이 심장과 같은 박자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정말로 그랬사와요.”
두 볼이 살짝 붉어진 아이의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제 어머니를 닮아 가는 아이가 즐겁게 웃고 있는 모습은 그의 그리움을 묻을 만큼이나 기쁜 것이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아루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네가 행복하다고 하여, 나도 좋다.”
“……그래도 죄송한 것이어요.”
생각해 보면 아루는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너무나도 어릴 적에 떠난 사람이라 그립지 않은 것일까 생각했으나 틀린 모양이었다. 아이는 안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칫 건드릴까 싶어, 그 작은 심장에 큰 그리움을 누르며 참고 참아 왔던 것이었다.
“아루.”
“예.”
“네가 가진 마음 중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안테는 잡고 있던 인형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네 심장에 움직이고, 변하고, 새로 태어나는 그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싫은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네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흥분한 걸까, 어느새 안테는 아루의 인형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민망하여 얼른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아루가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깔깔거리며 웃기에, 그는 기꺼이 한 번 더 인형을 안아 주었다.

* * *

저녁이 되면 보육원의 아이들 대부분은 퇴근 후 데리러 온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로미는 현관에서 아이들을 배웅하고, 교수들이 부탁한 특별한 전달 사항이 있을 시에는 부모에게 안내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제 물건을 한 번에 전부 챙기는 법이 없었다. 신발을 신다가도 무언가를 잊었다며, 우당탕 다시 들어 왔다가 나가기 일쑤였다. 아예 더 놀다 가겠다며 버티는 아이들도 있어서, 저녁 시간은 언제나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차례로 아이들을 배웅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마지막에 남게 되는 아이가 있다. 오늘은 아루였다. 아루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늦게까지 남는 일이 잦았다. 안테는 항상 바빴고, 달리 데리러 와 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탓이었다. 숙부인 모리젠은 이곳 일이 끝나면 바로 황실 병원으로 돌아가서 일해야 했다.
“아루, 책이라도 같이 읽을까?”
지난번 낮잠 시간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로미는 혼자 남은 아루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아루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사와요. 로미 씨의 일을 하시어요.”
평소보다 안테가 조금 더 늦어졌다. 교수들도 모두 퇴근했고, 남아 있는 사람은 로미와 아루 단둘뿐이었다. 아루는 조금 두꺼운 동화책을 꺼내 들었다. 아루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로미는 각 교실을 전부 청소했다. 바닥을 쓸고 닦는 것만이 아니었다. 섞여 버린 색연필을 색상별로 예쁘게 놓아 주거나, 위험하게 입을 쫘악 벌리고 있는 가위를 다시 안전한 모습으로 돌려 두었다. 다른 종류와 섞인 장난감이 있으면, 그 사이에서 꺼내어 제자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딸랑.
현관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안테가 집무실에서부터 달려왔는지, 현관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교실까지 들려왔다. 아루는 책을 든 채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아버님!”
아루는 달려온 안테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루가 조금 조숙할지라도, 아이는 그저 아이였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안테는 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도록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어서 돌아가자.”
“아니어요. 조금 더 책을 읽다 가고 싶사와요.”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루는 보육원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 했다. 아루는 아예 안테의 팔을 끌어 로미가 청소 중인 다른 교실로 그를 밀어 넣었다.
“책에 집중하고 싶으니 여기서 기다려 주시어요.”
그러곤 총총 걸어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 쿵 하고 문을 닫아 두었다.
안테와 로미만 남아 버린 교실. 갑작스러움에 놀라 문가에 그대로 서 있는 그와 달리 로미는 무척 바빴다. 그저 작게 고개를 숙이며 눈짓에 가까운 인사만을 하고는, 늘어놓은 장난감 사이사이에 낀 먼지들을 닦아 내었다.
슥삭슥삭. 청소 도구가 마찰하는 규칙적인 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는지 안테는 제 쪽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는 마땅한 공무가 있었다. 공무? 그래. 뭔가 공적인 것을 물어볼까.
“그러고 보니.”
물어볼 만한 공적인 일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언제나 서류화 되어서 그에게 매일같이 보고되고 있었다. 안테는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긴, 그녀와 특별히 대화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결심에도, 그의 입은 멋대로 움직이며 그녀와의 대화를 재촉했다. 안테는 입이 멋대로 이야기를 끌어가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제……. 아루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더군.”
거침없이 바닥을 닦아 나가던 로미의 손이 멈추었다. 아루에게 노래를 들려준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노래가…….
“죄송합니다. 아루 아버님.”
이미 사라진 나라에서 구전되었던 자장가. 이 나라의 돈으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들려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나라와 관련이 깊은 아루에게는 더욱 그러할지도 몰랐다.
로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안테는 당황했다. 그녀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감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오해하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도 곧 다물었다.
결국, 안테는 로미의 손에 들려 있던 청소 도구를 빼앗아 잠시 바닥에 내려 두었다.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하느라 거칠거칠한 시녀의 손끝을 잡아끌어 교실 구석에 있는 건반 악기 앞에 앉혔다.
“내게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로미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머뭇거렸다.
“나도 딸에게 불러 주고 싶을 뿐이야.”
그는 회색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부끄러울 때 나오고 마는 오랜 습관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미는 안심하고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핑크빛 작은 입술이 사라진 나라의 노래를 추억했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조용한 음색이 그 가사에 담겨 있는 애정을 느껴지게 했다.
언젠가 그도 분명히 들어 본 노래였다. 아기였던 아루를 안고 그의 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들려주던 노래. 그녀를 잃고 아루가 자라면서 완전히 잊었던 그 노래였다.
짧은 노래는 야속할 정도로 빨리 끝난다. 한 번 더 듣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한 번 들어서는 잘 모르겠군.”
거짓말이었다. 자신도 몰래 자연스럽게 나온 거짓말에 잠시 놀랐다. 여전히 그의 입은 멋대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고민하다 결국 그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그러고는 셔츠 위에 토끼가 그려진 귀여운 초록색 앞치마를 둘러 입었다.
“조금 더 듣겠다.”
로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정장에 토끼 앞치마라니. 우스웠다. 게다가 그의 큰 키 덕분에 앞치마는 겨우 허리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더욱 어색해 보였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양새에도 그는 당당했다. 팔을 조금 걷어 올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닥을 깔끔하게 닦아 내었다. 익숙한 솜씨였다. 로미는 그가 행정부의 소속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곳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신입 시절 누구나 평등하게 잡부의 일을 맡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그의 솜씨를 보니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끝이 어설픈 하녀보다도 훨씬 꼼꼼했다.
“풉…….”
“뭐가 그리 웃기나?”
안테는 한 손에 걸레를 든 채, 더없이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음에 로미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들려주어라.”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비로소 로미는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의 청소 솜씨가 능숙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로미는 안심하고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려 연주했다. 이따금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에 왠지 묘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안테는 먼지를 닦고, 장난감들의 흐트러진 배열을 모두 바로 맞춰 주었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학용품도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거듭 확인했다.
그리고 종종 고개를 돌려 노래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나, 작은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건반을 따라가는 모습이 그의 명석한 두뇌에 확실하게 새겨졌다.
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양쪽으로 길게 땋아 내린 밧줄 같은 로미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작은 어깨에 빛이 내렸다.
이 노을 때문에 공기도 바뀌었음이 틀림없었다. 노랫소리가 마음으로 바로 들어와 심장을 움직이게 했다. 이게 다 노을이 공기의 색을 바꾸고, 노래를 깊은 곳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몹쓸 노을.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이런 보육 시설의 시녀 따위 그만…….”
이제는 보육원의 문을 열면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을 내뱉던 안테는 잠시 멈칫했다. 로미는 다른 부모와 대화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그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버님, 가방을 주시어요.”
오늘도 무릎을 굽혀 아루에게 가방을 메어 주었다. 한 줄로 길게 늘어뜨려 한쪽 어깨에 메는 작은 크로스백이다. 가벼운 가방이고, 아루는 현관에서 교실까지 아주 잠깐 메는 가방이지만, 그는 혹여 작은 어깨에 무리라도 갈까 항상 걱정이었다. 그래서 가방을 메어 줄 때는, 하루는 오른쪽 어깨에 하루는 왼쪽 어깨에 반드시 번갈아 가면서 메어 주었다. 물론 줄이 꼬여 있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다.
“가정 보육 서류라니 그런 걸 어떻게 다 하나하나 작성해? 그냥 애들 딱 보면 모르겠어? 별일 없잖아? 별 귀찮은 걸 다……. 나 참…….”
로미가 있는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니 안테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의 부하 중 한 명인 베이 남작이었다. 부인의 뜻에 따라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고 있으나, 보육원 정식 설립을 반대하는 안테의 편에 선 자였다. 그는 보육원에서 요청하는 모든 일을 배척하는 강경한 자세로 자기 뜻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가정과 보육원의 상세한 정보 공유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귀찮으셔도 반드시 작성을 부탁드립니다.”
로미는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그에게 이런 설명이 먹혀들 리 없었다.
“……아버님.”
아루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목소리로 안테를 불렀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깔끔하게 정리된 가정 보육 서류를 보란 듯이 로미 앞에 내밀었다. 서류에서 차악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상관인 공작이 나서서 서류를 제출하니 일개 남작은 할 말이 없었다.
“남작은 아이들을 딱 보면 전부 알게 되나? 난 전혀 모르겠던데. 아주 타고나셨군.”
안테의 입이 또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는 자진해서 서류를 내는 모습만 보여 주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남작의 행패는 멈추게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어쩐지 불쾌한 목소리에 찌푸려진 인상까지 보태게 되었다. 조금 지나친가? 안테는 제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 그러니까 이, 이건! 저놈이 시건방진 얼굴을 하고 내가 고용한 시녀를 노려보고 있던 탓이다. 그러니까 그것뿐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나 그의 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도 좋으련만, 마지막까지 베이 남작을 향해 날카로운 말을 쏟아 내는 것이다.
“내 부하 중에서 당일에 처리해야 하는 서류 작업을 이렇게 당당히 미루는 녀석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아무래도 어제부터 입에 다른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본래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일에 신이 나서 끼어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전 중에 꼼꼼히 작성해서 로미 씨에게 제출하도록.”
“예…….”
남작이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보육원 문을 빠져나갔다. 긴장감이 돌았던 보육원의 현관에 비로소 평화가 돌아왔다.
“아루 아버님…….”
안테는 자신을 돌아보는 로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감사의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뭐 그렇게 해야 하나? 아니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나에게 보고해라.’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에게는 공이 있었다. 뿌듯한 마음에 어쩐지 양쪽 가슴이 앞으로 쭉 펴지고 저절로 턱이 들렸다.
“아버님.”
마침내 그 작은 핑크빛 입술이 움직였다. 안테는 살짝 침을 삼켰다.
“저기, 보육원 안에서는 남작님과 같은 신분이 아니라 서로 ‘베이 군 아버님’ 혹은 ‘베이 군 어머님’ 이런 식으로 불러 주셔야 해요.”
“규칙이니까요.”라고 덧붙이며 로미는 웃었다.
반면, 그녀가 건넬 감사의 말에 대한 대답을 멋들어지게 준비하고 있던 안테는 양쪽 어깨가 한 번에 바닥으로 추락할 듯 꺼져 버렸다.
“……이런 보육 시설의 시녀 따위 그만둬. 이곳은 일 년 안에 문을 닫을 테니까.”
신분이 통하지 않는 이딴 시설 따위 반대할 테다. 행정부에 일을 늘리려는 그 모든 것을 없애 버리겠다.
“그리고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미는 아주 잠시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침내 들어 올린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은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녀는 곧 아이들의 손을 잡아 교실로 이끌었다. 안테는 두 눈을 끔뻑이며, 로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해 주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의 왕자님한테나 쓰이는 동사가 아닌가. 아무래도 외국인 어머니를 둔 탓에 동사의 쓰임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저 여자에게 이 나라에서 쓰이는 ‘구해 주다.’라는 말의 뉘앙스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도와주다.’라는 말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공작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늘 아침 그는 로미를 ‘구했다.’

* * *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한 로미는 현관에서 머리가 빙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목이 따끔따끔했고, 오늘은 머릿속에서 누가 시끄러운 악기를 데엥 울리는 것처럼 멍했다.
“로미 씨?”
그녀 다음으로 출근한 모리젠이 그저 멍하게 서 있던 그녀의 정신을 불러 깨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로미의 얼굴이 붉었다.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모리젠은 격렬한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심장의 근처를 손으로 쓸어 진정시켰다.
“아, 모리젠 선생님.”
항상 빠릿빠릿한 그녀가 이렇게 느릿한 반응을 보이니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로미 씨. 실례할게요.”
그녀의 이마 위로 그의 손이 올라왔고, 곧 그의 얼굴은 작게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이 무척 얇았다. 3월이라고는 해도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싸늘한데, 어째서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걸까.
“의료실로 가죠.”
로미도 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걸까,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젠은 다소 서두르며 현관문을 열고, 곧장 의료실로 향했다.
아침 공기가 맺힌 의료실은 싸늘했다. 모리젠은 가까이에 있는 아이용 침대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다행이다. 포근한 이불이 여린 온기를 지켜 준 모양이다.
“로미 씨. 잠깐 누워 계세요.”
“저는 약만 먹어도 괜찮은데…….”
“어허. 얼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