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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여러분께선 지금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계신가요?」
그는 양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넓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한 손에는 헤어지자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이, 한 손에는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매끈한 몸을 감싸고 있던 슈트는 여기저기 구겨졌고 단추도 두세 개쯤 풀려 있었다. 그는 구두도 채 벗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개 같은 크리스마스였지. 그는 건조하게 웃었다.
배우 생활 15년째. 그는 20대 중반부터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남우주연상, 차수현.
빛나는 금색 트로피엔 유명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의 이름이 번쩍거렸지만, 그는 그런 것에 감흥이 없어 보였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와 함께 보내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또 누군가는 혼자서. 그리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일 수도 있죠.」
라디오를 틀어 놓은 그의 표정은 어딘지 음울했다.
― 시상식 뒤풀이 끝나면 온다며! 야, 이 개자식아! 내 말 듣고 있기는 해?
그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안 여자가 욕을 있는 대로 날리고 전화를 뚝 끊자, DJ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몇 번 만났던 여자와 만나기로 한 것도 잊고 있었다. 집이 이사 중이라 호텔에 가 있으라는 매니저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제 집 이사라니. 아무튼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이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머리맡에 던져 놓고 침대 옆 콘솔로 손을 뻗었다. 술이 이쯤에 있는데. 아, 그래, 여기. 그는 손에 잡히는 술병을 입 앞으로 가져왔다. 누운 채로 술병을 기울이는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쏟아지면 어떠하리.’
그러나 나오는 게 없었다. 병을 반대로 뒤집어 탈탈 털어 보자 한 방울이 그의 입 안으로 톡 떨어진다. 한숨을 내쉬며 슬쩍 던진 술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카펫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확실한 건 오늘은 참, 사랑하기 좋은 날이라는 겁니다.」
사랑?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사랑 좋아하네. 그렇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모래알처럼 버석거렸다. 외로워. 외로워서, 젠장. 그는 송곳 뭉치가 제 온몸을 긁고 내려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한두 해도 아닌데, 그는 술이 아니면 이 하루를 넘기는 게 죽도록 힘들었다. 진탕 취해서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아니 그다음 날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근데 항상 취하질 않는다. 유독 이상하게 이날만큼은 술을 들이부어도, 취하질 않아.
「그런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 보셨으면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이죠. 크리스마스에 유독 기적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그 네 글자가 1년 중 가장 많이 울리기 때문 아닐까요?」
그 역시도 기적이란 걸 믿었던 때가 있었다. 내일이면, 아니 그다음 날이면. 고사리 같은 손을 마주 잡고 매일 기도하며 기적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기적을 간절히 바랐던 만큼, 환상은 더 비참하게 깨졌다. 기적. 그딴 게 어디 있어.
그는 ‘염병, 듣기 싫어.’ 하고 읊조렸다. 그러나 라디오 리모컨을 바로 손 근처에 두었으면서도,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지금 시각 새벽 1시 48분. 크리스마스 특집, 생방송으로 진행된 〈편사랑의 편애하는 라디오〉. 어느덧 마칠 시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문득 라디오 속의 저 여자는 방송이 끝나면 무얼 할까 궁금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밤 습관처럼 듣게 된 그녀의 라디오. 자신에겐 괴롭기만 한 이 크리스마스가 저 여자한텐 어떤 하루일까.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매일 밤 라디오를 진행하는 저 여자는 이 방송이 끝나면 어딜 갈까? 애인을 만나러 가거나, 파티를 가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여자도 그냥 혼자 보냈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애 같은 생각인가. 그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저 여자도 그냥 혼자였으면 좋겠다고.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나도 이 세상에 혼자서만 외로운 건 아닐 테니까. 어쩌면 이 사실이 제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 문자 들어왔네요. ‘편 작가님은 오늘 방송 끝나면 어떻게 보내실 건가요?’」
라디오를 진행하는 여자는 작가라고 했었다. 소설 작가라고 했던가, 여행 작가라고 했던가. 그래서 가끔 방송을 듣다 보면 청취자들이 여자를 ‘작가’라고 칭하는 걸 심심치 않게 듣기도 했다. 아니, 거의 그랬던가. 여하튼 누가 보낸 문자인진 몰라도 기특하네. 궁금하던 차였다.
그리고 저 여자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흠, 글쎄요. 제주도에 있는 가족들이 언제 오냐고 연락하는 통에 핸드폰에 불이 나고 있긴 합니다만. 비행기 표도 없고. 그렇다고 거길 차로 운전해서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집에 가려고요.」
DJ의 대답에, 팔을 들어 눈을 가리는 그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밖에서 피디님이며 작가님들이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시네요. 마치 ‘넌 그 나이에 애인도 없구나.’ 하시는 것 같아요. 하하, 저런. 그래요, 저에게 크리스마스란 사랑 넘치는 25일일 뿐. 제 이름이 괜히 편사랑이겠습니까. 외사랑, 짝사랑, 치우쳐진 사랑, 쏠린 사랑, 적은 사랑, 곧 편사랑. 하하. 우리 부모님은 참 센스도 넘치시지. 이름 한번 잘 지으셨다니까. 이러니 딸이 연애도 못 하지.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마스에 저 혼자 외로워서 그런가 말이 많아지네요.」
여자의 말에 그는 마음 한구석에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외로운 동지를 얻어서인가. 흡족한 마음 위에 조소가 뒤덮인다.
라디오의 매력인지, 저 여자의 진행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저에게 말을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 여자가 내 생각을 읽고 있나? 나를 위한 방송을 하고 있는 건가? 우습지만 영화 〈트루먼 쇼〉처럼. 근데 이름이 이상하긴 하네. 우리나라에 편씨도 있었나.
「끝 곡으로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보내드립니다. 오늘 굿나잇 인사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눠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전 어디에선가 저와 함께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계신 분께 전하고 싶네요.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그는 음악으로 넘어간 라디오를 껐다. 방 안이 숨 막히는 정적으로 휩싸였다. 자신을 짓누르는 적막에 몸이 압사할 것 같았지만, 그는 다시 라디오를 켜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계속 자신의 귓가를 맴도는 마지막 인사를 작게 읊조려 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 한 마디가 양주를 머금은 것처럼 입 안을 쓰게 했다.
너무 써서, 그는 어느새 송곳이 찌르는 듯했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 *

“아, 졸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가족들에게 전화로 시달리느라 더 피곤한 것 같았다.
그녀가 진행하는 〈편사랑의 편애하는 라디오〉는 작가인 그녀가 책을 소개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는 형식이었다. ‘책 읽어 주는 여자’의 라디오 판이랄까. 매일 밤 12시부터 2시까지 진행하는 그녀의 라디오는 마니아들을 꽤 많이 형성했다. 청취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낮에 녹음을 해 놓고 방송을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에 생방송을……. 2년째 함께하고 있는 라디오 식구들 역시 울상을 지었던 게 눈에 선했다.
‘꼬모 안 와?’
눈에 넣으면 조금 아플 것 같은 조카들의 애교를 떠올리자 구석에 기대 서 있던 사랑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졌다.
‘고모도 가고 싶어.’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비행기 표가 없는 걸 어떻게 하냐고요. 제주도까지 날아갈 수도 없고.
그녀는 건조한 손으로 피곤한 눈을 비볐다. 가족들이며, 출판사에서 온 문자들이 한가득이었지만 일단 잠을 좀 자고 일어나서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녀로선 일단 휴대폰 전원을 껐다. 거의 다 올라온 것 같은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 2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눈앞의 광경에 사랑이 멈칫했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깔끔하던 복도에 이삿짐이 한가득이었다.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했지만 어김없이 21층이었다.
옆집에 이사 왔나? 활짝 열린 옆집 문 앞에서 분주한 소리들이 들린다. 짐이 어찌나 한가득인지, 박스들과 스티로폼, 비닐 잔해들이 발에 차였다. 한밤중에 이사하는 집은 또 처음이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어록을 열었다. 다행히 집 안에 들어가자 별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었다. 현관 바구니에 차 키를 내려놓은 사랑이 허물 벗듯 옷을 하나씩 벗어 갔다. 현관부터 이어진 옷가지들이 눈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그녀의 동선을 기록했다.
나른하게 욕실 문을 닫은 그녀의 눈에 졸음이 한가득이었다. 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한 경계가 뚜렷한 편인 그녀에게는 옆집에 누가 이사 올지 그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눈을 감았다.
만약 그때 누가 이사 오는지 알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이런 귀찮은 인연 따위 만들지 않았을 텐데. 그날로부터 한참 후, 계절이 익어 갈 무렵.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과거의 무관심을 후회했다.



1. 바밤바와 학교 잠바


성공한 삶은 무엇인가. 사랑은 아침부터 그런 회의감에 빠졌다. 적어도 나이 서른을 먹고도 아직 졸업 못 한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건,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던 수능이 끝나도 그다음 날은 찾아왔고 그녀는 대학에 입학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소만큼 봤고 딱 그 만큼에 알맞은 대학에 들어갔다.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간 건 정치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점수에 맞춘 결과였다. 많은 수험생들이 그렇듯 오로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한 결과였다.
아……. 가기 싫다.
학교에 가기 싫은 건 만국 학생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특히나 방학 기간에 가야 하는 계절 학기 수업은 더 싫었다. 그게 성탄절 연휴가 끝나고 바로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녀는 쓸 수 있는 휴학 기간을 전부 쓴 상태였고 결국 제때 학교에 가지 않으면 제적당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커리어에 충실하다 보니 작가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학교에선 학부에 입학하고 10년째 졸업도 못 한 문제적 학생이라는 오명을 썼다. 작가의 직업 특성상 취업계를 내고 졸업할 수도 없는 게 한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사정 얘기를 하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상, 아직 학사 경고를 한 번밖에 받지 않았다는 게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학점을 따져 보니, 겨울 계절 학기를 수강하고 봄 학기를 잘 마치면 코스모스 졸업이 가능했다. 돈을 벌어 놨어도 대학 졸업장 하나는 있어야지 않겠냐는 게 부모님 고집이었다. 공부도 하고 어린 학생들이랑 어울리는 게 집필에 도움이 될 거라나……. 실제로 도움이 되는 면도 있긴 있었다. 묘하게 설득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그놈의 대학 졸업장 때문에 잔소리를 듣기 싫었다.
현관을 나서며 야구 잠바에 팔을 껴 넣는 사랑의 등판에 그녀가 재학 중인 학교 이름이 영문으로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소위 야잠(야구 잠바), 학잠(학교 잠바), 과잠(학과 잠바) 등으로 불리는 그녀의 겉옷은 한쪽 팔엔 학교 마크가 다른 한쪽 팔엔 학번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때때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앳된 그녀의 얼굴과 상반된 학번을 확인하고 경악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 목격하곤 했다. 마치 공룡이나 암모나이트 화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런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랑이었지만 가끔씩 무심한 얼굴로 윙크를 날리며 응수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매번 당당하고 짓궂은 그녀의 행동에 반대로 그들이 당황스러워했는데, 그녀는 그 얼굴이 재밌어 가끔 이런 악취미를 즐기곤 했다.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으며 현관을 나선 사랑의 입술에서 휘익 휘파람 소리가 튀어나왔다. 며칠 전 새벽에 보았던 이삿짐이며 박스들이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었다. 금요일이었던 크리스마스와 이어진 주말을 종일 집에서 보내느라, 오늘이 꼭 사흘만의 외출이었다. 아예 집 밖으로 안 나왔다지만, 문밖에서 별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싹 말끔해진 복도를 보는 그녀의 눈이 슬며시 커졌다.
“조용해서 좋긴 하네.”
사랑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흘긋 옆집 문을 돌아보았다. 전에 살던 사람들은 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사 갈 때도 어찌나 요란한지, 한 일주일은 우당탕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잘됐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물기 가득한 단발머리와 기초 화장품만 간단히 바르고 나온 얼굴 위엔 흔한 선크림조차 바른 흔적이 없었다. 대학교 야구 잠바에 후드 티, 청바지, 운동화. 그녀의 학번을 나타내 주는 숫자만 아니라면, 20대 초중반의 여대생으로 보였다. 물론 피부 톤이 좀 칙칙하긴 했지만…….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슬쩍 엘리베이터에 놓인 거울을 보던 사랑이 조용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아무리 그녀라도 떡국을 서른 그릇 정도 먹으니, 화장 안 한 제 얼굴이 민폐인 것 정도는 알았다.
“뭐야, 저거.”
검은색 바디에 흰색 루프. 번호판도 1230…….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제 차가 확실한데.
주차장에 내려온 사랑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져 갔다. 큼지막한 자신의 SUV 옆에 바짝 붙여 세운 차 한 대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