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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며 질주할 것 같은 슈퍼 카 한 대가 이 넓은 주차장을 두고 굳이 제 차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이니까 얼마든지 옆에 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사랑이 운전석으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바짝 붙여 놨다는 사실이었다.
차를 세운 곳은 한 대가 들어가긴 많이 넓고 두 대가 들어가긴 좁은 코너의 칸이었다. 조수석을 벽 쪽 가까이 세워 놓긴 했지만, 옆에는 차가 주차하기 애매한 크기라 A동 주차장의 로열석이라고 불리는 자리였다. 크리스마스가 밝아 오던 새벽 퇴근길, 누군가 한밤중에 휴가라도 떠났는지 떡하니 비어 있는 자리에 웬 떡이냐 주차를 해 놓았는데 이런 사단이 날 줄이야.
“어떤 또라이 자식이야?”
조수석은 벽에 막혀 있고 운전석은 이 차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찌나 환상적인 주차 실력인지, 몸 하나 통과하기 어려운 간격이었다.
여러 외제 차들이 득시글거리는 주차장에서도 유독 튀는 차종을 보아하니 돈이 정도껏 많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자신의 학번을 보고 놀라는 후배들을 놀려 주는 것 정도는 이자에 비하면 간지러운 애교 수준이었다.
“아, 수고하십니다. 저 2102호인데요. 제 차 옆에 너무 바짝 대 놓은 차 때문에 나가기가 어렵네요. ……네. 아 번호가…… 6789요. 그럼, 연락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네. 수고하세요.”
입주할 때 등록한 차량 번호로 주차장도 관리되기 때문에, 차량에서는 동·호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하나마나 휴대폰 번호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 주민 대부분은 자신의 번호가 곧 신분증이고 돈인 사람들이었으니까. 가끔 휴대폰 번호가 노출되어도 별 관계없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바로 그녀 자신처럼─ 그건 극소수였다.
주차 예의를 보아하니 휴대폰 번호를 올려놓는 예절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혹여 두었어도 짙은 선팅 상태를 자랑하는 유리창 때문에 안 보일 것이었다.
하아. 어떤 자식인지.
그녀는 이런 저질스런 악취미를 가진 차주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
‘우리 아들, 잘 있을 수 있지?’
볼이 푹 팰 정도로 핼쑥한 얼굴과 새까만 눈 밑. 그 모든 걸 덮고 있는 붉은 기운은 가슴께까지 이어져 있었다. 동네에서도 유명한 주정뱅이였던 그의 눈은 그날따라 술기운 없이 깨끗했다. 매일 들고 있던 초록색 술병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가, 아빠. 나 두고 가지 마.’
길을 나서려는 남자의 추리닝 바지 자락을 어린 남자아이가 붙잡고 늘어졌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자식의 얼굴에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자는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아이의 땟국 묻은 얼굴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들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이는 남자의 주름진 얼굴이 서글펐다.
‘아빠가 금방 엄마 데리고 올게. 알았지?’
돌아서는 남자의 등을 보며 아이는 집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아이는 자신을 붙잡는 다른 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저 등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가 악을 썼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데도 남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오히려 멀어지기만 하다, 결국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제자리만을 뛰고 있었다. 아이는 손을 뻗어 그의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빠!’
“아, 안 돼……. 가지 마…….”
식은땀으로 얼룩진 남자의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남자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으며, 잘 정리된 눈썹이 서로 만날 만큼 찌푸린 미간은 펴지질 않았다.
까만 암흑을 향해 걸어가는 남자에게 절박하게 내민 아이의 손이 점점 커지며 성인 남자의 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팔도 키도 훌쩍 자라며, 꼬마의 외치는 소리가 한 남자의 절규로 변했지만,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새까만 어둠이 아이의 아버지를 삼켜 버렸다.
“안 돼!”
찡그렸던 눈가에 작은 방울이 맺혔을 때, 고통스럽게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비로소 열렸다. 꿈속의 남자와 그를 집어삼키던 어둠 대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그를 맞이했다. 다급하게 눈앞을 확인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그는 꿈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느꼈다. 20년째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허상에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진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이내 몸을 일으킨 남자가 침대를 벗어나, 어두운 암막 커튼을 걷어 냈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그의 눈을 아프게 비추며 방 안으로 쏟아졌다. 그는 새로 이사 온 아파트의 전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눈 덮인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복잡했다. 어린 날의 그 예감처럼 돌아오지 못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생각의 나락으로 빠지려던 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거실에서 들려오는 벨 소리였다. 처음 듣는 소리에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매니저를 불렀다.
“김 군아, 전화 온다.”
그러고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매니저 김 군은 그의 스케줄에 맞춰 아침부터 대기했을 테지만, 주요 영화 시상식이 끝난 연말은 그에게 황금 같은 휴식기였다. 그 말은 매니저 역시 휴가라는 얘기였다. 인테리어며 짐 정리도 모두 소속사에서 진행했을 만큼, 한창 바쁜 나날들을 보낸 수현을 위해 회사에서도 당분간은 광고 외에 스케줄을 잡지 않겠다며 배려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 새 집에 혼자 있었고, 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제 휴대폰의 벨 소리는 아니었다.
“아, 여보세요?”
한참 만에 거실 벽에 달린 인터폰에서 나는 소리였다는 걸 깨달은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관리실입니다. 6789 차량 소유주 맞으시죠?
“네.”
― 민원이 들어와서요. 주차장에 한번 내려가 보셔야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주차장에서 민원이 들어올 이유는 많지 않았다. 그의 팬들이거나 혹은 그의 팬들이거나 아니면 그의 팬들이거나. 얼굴이 보고 싶어 허위 신고를 했다는 둥, 일부러 차를 가로막아 주차를 했다는 둥 이러저러한 핑계들은 많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소수의 팬들이 이런 장난을 치는 데에는 제 얼굴을 보고 사인을 받아 가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외부인 출입이 철저한 아파트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벌써 자신이 이곳에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어제 호텔에서 돌아올 때부터 따라붙었는지도 모르지.
“전 제 차 옆에 주차를 했고 주차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허위 신고인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그는 호텔에서 돌아와 매니저가 세워 두었다는 자신의 세컨 카 옆에 주차를 해 놓았다. 운전석과 너무 가까웠지만, 요즘은 세컨 카를 모는 일이 많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근데 김 군 이 자식, 넓은 데다 주차할 것이지.
그는 좁은 칸 안에 자신의 애마를 주차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하지만 두 차를 각각 멀리 두고 싶지도 않았고 주차 위치도 엘리베이터 바로 옆이라 그 정도 수고는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제 차 앞에 누군가 일자로 주차를 해서 자신이 연락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주차로 문제될 일은 없었다.
“빤한 수작이지.”
그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예닐곱 번은 울려 대는 인터폰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가운데 끼어서 난감해하는 젊은 직원의 목소리가 애처로워, 수현은 겉옷을 챙겨 입었다.
몇 주 전 사인회가 끝나고 걸쳤던 옷인지, 주머니 속에서 두툼한 크기를 자랑하는 매직이 손에 잡혔다. 대충 사인해 주고 얼른 돌려보낼 참이었다. 돌아와서 당장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아파트에 주의를 넣으라고 할 생각이었고.
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는 자신의 세컨 카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등판에 대학 이름이 박힌 야구 잠바를 입은 여대생이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자신의 세컨 카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폼이 한두 번 해 본 위인은 아닐 것이다.
열의에 박수를 쳐 줘야 할지. 한창 바쁘게 보내야 할 나이에 여기 와서 이러고 있다고 혼을 내서 돌려보내야 하는 건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매직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거침없이 그녀의 등에 펜을 휘갈겼다.
“야, 인마.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집까지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게 관리실에 연락을 해 대면 어떻게 하냐. 곤란하게. 그래도 이 정도 끈기면 어디 가서든 성공할 것 같긴 하네.”
얼마 전 사인회에서도 야구 잠바에 사인해 달라고 가져오는 대학생들이 많더니. 요즘엔 이게 대세인가 싶었다. 야구 잠바 등판 전체에 걸쳐 거대한 사인을 남긴 그가 ‘됐다.’ 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다음은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팬 서비스 제대로 해 준다. 어디 가서 나 여기 산다고 말하진 말고.”
거들먹거리듯 장난을 치는 그의 말에도 사인을 받은 여대생은 움직임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땐 소리를 지르며 기쁨을 드러내거나 부끄러워 말도 못하는 타입으로 나눠지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았다. 조용한 그녀 대신 보닛 위를 데구르르 구르며 펜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열이면 열, 그에게 줄 팬레터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열성적으로 전화해서 주차 문제가 있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자신을 마주하자 돌변한 제 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조소를 지었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여자가 차에서 몸을 떼더니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기 전, 수현은 표정을 감추고 싱긋 웃어 보였다. 몸을 펴니 여자의 키가 꽤 컸다. 이 정도라면 170cm는 족히 넘을 것이었다.
“인증샷 찍을 차례인가?”
아니, 실제론 ‘오빠, 사랑해요!’ 하고 품에 안길 차례였다. 하지만 살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여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상상 밖이었다.
“6789 차주분?”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여자의 미소가 기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사인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씌이셨나.’ 하는 말이 들린 것 같았는데, 그건 착각인지도 몰랐다.
“하하, 실례도 용서해 드릴 테니, 차만 좀 빼 주시겠어요?”
여자의 말이 꼭 자신이 큰 아량을 베푸는 것마냥 관대하게 들렸다.
‘하, 요즘 애들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지.’
여자의 수법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입술 사이로 욕지기가 삐져나올 것만 같았다. 차 핑계를 대기에 적당히 대해 주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귀찮은 게 걸렸다. 막 이사 온 집까지 찾아와 부리는 행패도 정도껏 해야 봐주지…….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며 입술을 열었다.
“차 핑계는 그만 부리고. 말하라니까?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이런 걸로는 만족이 안 되나?”
조소가 짙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주차장을 갈랐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표정 위로 한층 더 두껍게 얼음이 깔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여자의 입술은 그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6789 차주분. 제가 지금 안 가면 지각이라……. 차 좀 빼 주시죠?”
끝까지 팬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태도가 그의 한계를 자극했다. 그는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몰상식한 팬심에 결국 가면을 벗어던졌다.
“무슨 차를 빼라는 거야. 이 차 빼면, 네가 뭐 내 차 운전이라도 할래? 핑계 그만 부리라고 했지.”
높아진 그의 언성에 그녀는 이를 내보이며 더 억지스럽게 웃었다. 후드를 젖히자, 생각보다 훨씬 앳되고 순한 그녀의 얼굴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연이어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은 전혀 순하고 앳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볼썽사납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이런 바밤바 씨 발라먹을……. 야, 내가 차 빼라고 했지, 초면에 말 놓으라고 했니?”
하하, 하고 영혼 없이 웃는 그녀의 눈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입을 타고 나온 건 아이스크림 이름뿐이었는데. 단어상으로는 욕이 아니었음에도, 시골장의 할머니로부터 구수한 욕을 얻어먹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 잘못한 게 누군데, 누구한테 욕지거리를!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언성을 높였지만, 실제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마주한 순한 얼굴에서 나오는 매서운 말들이 계속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네 차 때문에, 내 차가 지금 나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잖아요. 6789 차주님.”
그러고는 그녀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차 키였다. 차를 열어서, 뭐 자기 차라는 걸 증명이라도 할 모양인데.
‘가지가지 한다. 저걸 누른다고 내 차가 자기 차가 되나.’
수현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돌연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동차의 스마트키를 누르는 그녀의 길쭉한 엄지손가락을 타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철컥.
자신의 세컨 카가, 아니 세컨 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차량이 그녀가 들고 있는 차 키에 반응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 소리가 자신의 배우 생활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리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 인마.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집까지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게 관리실에 연락을 해 대면 어떻게 하냐. 곤란하게. 그래도 이 정도 끈기면 어디 가서든 성공할 것 같긴 하네.’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다음은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팬 서비스 제대로 해 준다. 어디 가서 나 여기 산다고 말하진 말고.’
이렇게도 말했던 것 같고.
‘차 핑계는 그만 부리고. 말하라니까?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이런 걸로는 만족이 안 되나?’
그의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여자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인생의 마지막에 지나간다던 ‘주마등’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이제 차 좀 빼지?”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내리꽂힌다. 황망한 수현의 시선 끝에 검은 SUV가 닿았다. 자신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이 여자의 자동차가 전조등을 번쩍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차 헷갈리면, 인생 피곤해지는 거야.
그가 차를 빼자마자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석 문고리를 잡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대충 차를 세워 두고 내려서 여자를 붙잡았다. 일단 저 등짝에 큼지막하게 남아 있는 제 사인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쪽팔리고 자시고를 떠나서 일단 자신의 실수가 맞으니까.
“이봐.”
그의 부름에 운전석 도어를 열던 여자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사과라도 해야 하는데, 이쪽을 돌아보는 여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서슬이 퍼레서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변상해 줄게.”
“사과는커녕, 끝까지 반말이시네.”
한숨을 내쉬는 여자의 얼굴이 싸늘했다. 이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내려놓고 천장을 한 번 바라보던 여자가 발걸음을 옮겨 남자에게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며 질주할 것 같은 슈퍼 카 한 대가 이 넓은 주차장을 두고 굳이 제 차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이니까 얼마든지 옆에 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사랑이 운전석으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바짝 붙여 놨다는 사실이었다.
차를 세운 곳은 한 대가 들어가긴 많이 넓고 두 대가 들어가긴 좁은 코너의 칸이었다. 조수석을 벽 쪽 가까이 세워 놓긴 했지만, 옆에는 차가 주차하기 애매한 크기라 A동 주차장의 로열석이라고 불리는 자리였다. 크리스마스가 밝아 오던 새벽 퇴근길, 누군가 한밤중에 휴가라도 떠났는지 떡하니 비어 있는 자리에 웬 떡이냐 주차를 해 놓았는데 이런 사단이 날 줄이야.
“어떤 또라이 자식이야?”
조수석은 벽에 막혀 있고 운전석은 이 차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찌나 환상적인 주차 실력인지, 몸 하나 통과하기 어려운 간격이었다.
여러 외제 차들이 득시글거리는 주차장에서도 유독 튀는 차종을 보아하니 돈이 정도껏 많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자신의 학번을 보고 놀라는 후배들을 놀려 주는 것 정도는 이자에 비하면 간지러운 애교 수준이었다.
“아, 수고하십니다. 저 2102호인데요. 제 차 옆에 너무 바짝 대 놓은 차 때문에 나가기가 어렵네요. ……네. 아 번호가…… 6789요. 그럼, 연락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네. 수고하세요.”
입주할 때 등록한 차량 번호로 주차장도 관리되기 때문에, 차량에서는 동·호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하나마나 휴대폰 번호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 주민 대부분은 자신의 번호가 곧 신분증이고 돈인 사람들이었으니까. 가끔 휴대폰 번호가 노출되어도 별 관계없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바로 그녀 자신처럼─ 그건 극소수였다.
주차 예의를 보아하니 휴대폰 번호를 올려놓는 예절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혹여 두었어도 짙은 선팅 상태를 자랑하는 유리창 때문에 안 보일 것이었다.
하아. 어떤 자식인지.
그녀는 이런 저질스런 악취미를 가진 차주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
‘우리 아들, 잘 있을 수 있지?’
볼이 푹 팰 정도로 핼쑥한 얼굴과 새까만 눈 밑. 그 모든 걸 덮고 있는 붉은 기운은 가슴께까지 이어져 있었다. 동네에서도 유명한 주정뱅이였던 그의 눈은 그날따라 술기운 없이 깨끗했다. 매일 들고 있던 초록색 술병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가, 아빠. 나 두고 가지 마.’
길을 나서려는 남자의 추리닝 바지 자락을 어린 남자아이가 붙잡고 늘어졌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자식의 얼굴에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자는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아이의 땟국 묻은 얼굴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들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이는 남자의 주름진 얼굴이 서글펐다.
‘아빠가 금방 엄마 데리고 올게. 알았지?’
돌아서는 남자의 등을 보며 아이는 집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아이는 자신을 붙잡는 다른 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저 등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가 악을 썼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데도 남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오히려 멀어지기만 하다, 결국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제자리만을 뛰고 있었다. 아이는 손을 뻗어 그의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빠!’
“아, 안 돼……. 가지 마…….”
식은땀으로 얼룩진 남자의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남자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으며, 잘 정리된 눈썹이 서로 만날 만큼 찌푸린 미간은 펴지질 않았다.
까만 암흑을 향해 걸어가는 남자에게 절박하게 내민 아이의 손이 점점 커지며 성인 남자의 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팔도 키도 훌쩍 자라며, 꼬마의 외치는 소리가 한 남자의 절규로 변했지만,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새까만 어둠이 아이의 아버지를 삼켜 버렸다.
“안 돼!”
찡그렸던 눈가에 작은 방울이 맺혔을 때, 고통스럽게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비로소 열렸다. 꿈속의 남자와 그를 집어삼키던 어둠 대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그를 맞이했다. 다급하게 눈앞을 확인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그는 꿈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느꼈다. 20년째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허상에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진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이내 몸을 일으킨 남자가 침대를 벗어나, 어두운 암막 커튼을 걷어 냈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그의 눈을 아프게 비추며 방 안으로 쏟아졌다. 그는 새로 이사 온 아파트의 전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눈 덮인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복잡했다. 어린 날의 그 예감처럼 돌아오지 못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생각의 나락으로 빠지려던 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거실에서 들려오는 벨 소리였다. 처음 듣는 소리에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매니저를 불렀다.
“김 군아, 전화 온다.”
그러고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매니저 김 군은 그의 스케줄에 맞춰 아침부터 대기했을 테지만, 주요 영화 시상식이 끝난 연말은 그에게 황금 같은 휴식기였다. 그 말은 매니저 역시 휴가라는 얘기였다. 인테리어며 짐 정리도 모두 소속사에서 진행했을 만큼, 한창 바쁜 나날들을 보낸 수현을 위해 회사에서도 당분간은 광고 외에 스케줄을 잡지 않겠다며 배려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 새 집에 혼자 있었고, 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제 휴대폰의 벨 소리는 아니었다.
“아, 여보세요?”
한참 만에 거실 벽에 달린 인터폰에서 나는 소리였다는 걸 깨달은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관리실입니다. 6789 차량 소유주 맞으시죠?
“네.”
― 민원이 들어와서요. 주차장에 한번 내려가 보셔야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주차장에서 민원이 들어올 이유는 많지 않았다. 그의 팬들이거나 혹은 그의 팬들이거나 아니면 그의 팬들이거나. 얼굴이 보고 싶어 허위 신고를 했다는 둥, 일부러 차를 가로막아 주차를 했다는 둥 이러저러한 핑계들은 많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소수의 팬들이 이런 장난을 치는 데에는 제 얼굴을 보고 사인을 받아 가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외부인 출입이 철저한 아파트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벌써 자신이 이곳에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어제 호텔에서 돌아올 때부터 따라붙었는지도 모르지.
“전 제 차 옆에 주차를 했고 주차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허위 신고인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그는 호텔에서 돌아와 매니저가 세워 두었다는 자신의 세컨 카 옆에 주차를 해 놓았다. 운전석과 너무 가까웠지만, 요즘은 세컨 카를 모는 일이 많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근데 김 군 이 자식, 넓은 데다 주차할 것이지.
그는 좁은 칸 안에 자신의 애마를 주차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하지만 두 차를 각각 멀리 두고 싶지도 않았고 주차 위치도 엘리베이터 바로 옆이라 그 정도 수고는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제 차 앞에 누군가 일자로 주차를 해서 자신이 연락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주차로 문제될 일은 없었다.
“빤한 수작이지.”
그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예닐곱 번은 울려 대는 인터폰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가운데 끼어서 난감해하는 젊은 직원의 목소리가 애처로워, 수현은 겉옷을 챙겨 입었다.
몇 주 전 사인회가 끝나고 걸쳤던 옷인지, 주머니 속에서 두툼한 크기를 자랑하는 매직이 손에 잡혔다. 대충 사인해 주고 얼른 돌려보낼 참이었다. 돌아와서 당장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아파트에 주의를 넣으라고 할 생각이었고.
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는 자신의 세컨 카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등판에 대학 이름이 박힌 야구 잠바를 입은 여대생이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자신의 세컨 카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폼이 한두 번 해 본 위인은 아닐 것이다.
열의에 박수를 쳐 줘야 할지. 한창 바쁘게 보내야 할 나이에 여기 와서 이러고 있다고 혼을 내서 돌려보내야 하는 건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매직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거침없이 그녀의 등에 펜을 휘갈겼다.
“야, 인마.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집까지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게 관리실에 연락을 해 대면 어떻게 하냐. 곤란하게. 그래도 이 정도 끈기면 어디 가서든 성공할 것 같긴 하네.”
얼마 전 사인회에서도 야구 잠바에 사인해 달라고 가져오는 대학생들이 많더니. 요즘엔 이게 대세인가 싶었다. 야구 잠바 등판 전체에 걸쳐 거대한 사인을 남긴 그가 ‘됐다.’ 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다음은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팬 서비스 제대로 해 준다. 어디 가서 나 여기 산다고 말하진 말고.”
거들먹거리듯 장난을 치는 그의 말에도 사인을 받은 여대생은 움직임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땐 소리를 지르며 기쁨을 드러내거나 부끄러워 말도 못하는 타입으로 나눠지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았다. 조용한 그녀 대신 보닛 위를 데구르르 구르며 펜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열이면 열, 그에게 줄 팬레터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열성적으로 전화해서 주차 문제가 있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자신을 마주하자 돌변한 제 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조소를 지었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여자가 차에서 몸을 떼더니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기 전, 수현은 표정을 감추고 싱긋 웃어 보였다. 몸을 펴니 여자의 키가 꽤 컸다. 이 정도라면 170cm는 족히 넘을 것이었다.
“인증샷 찍을 차례인가?”
아니, 실제론 ‘오빠, 사랑해요!’ 하고 품에 안길 차례였다. 하지만 살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여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상상 밖이었다.
“6789 차주분?”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여자의 미소가 기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사인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씌이셨나.’ 하는 말이 들린 것 같았는데, 그건 착각인지도 몰랐다.
“하하, 실례도 용서해 드릴 테니, 차만 좀 빼 주시겠어요?”
여자의 말이 꼭 자신이 큰 아량을 베푸는 것마냥 관대하게 들렸다.
‘하, 요즘 애들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지.’
여자의 수법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입술 사이로 욕지기가 삐져나올 것만 같았다. 차 핑계를 대기에 적당히 대해 주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귀찮은 게 걸렸다. 막 이사 온 집까지 찾아와 부리는 행패도 정도껏 해야 봐주지…….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며 입술을 열었다.
“차 핑계는 그만 부리고. 말하라니까?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이런 걸로는 만족이 안 되나?”
조소가 짙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주차장을 갈랐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표정 위로 한층 더 두껍게 얼음이 깔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여자의 입술은 그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6789 차주분. 제가 지금 안 가면 지각이라……. 차 좀 빼 주시죠?”
끝까지 팬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태도가 그의 한계를 자극했다. 그는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몰상식한 팬심에 결국 가면을 벗어던졌다.
“무슨 차를 빼라는 거야. 이 차 빼면, 네가 뭐 내 차 운전이라도 할래? 핑계 그만 부리라고 했지.”
높아진 그의 언성에 그녀는 이를 내보이며 더 억지스럽게 웃었다. 후드를 젖히자, 생각보다 훨씬 앳되고 순한 그녀의 얼굴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연이어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은 전혀 순하고 앳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볼썽사납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이런 바밤바 씨 발라먹을……. 야, 내가 차 빼라고 했지, 초면에 말 놓으라고 했니?”
하하, 하고 영혼 없이 웃는 그녀의 눈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입을 타고 나온 건 아이스크림 이름뿐이었는데. 단어상으로는 욕이 아니었음에도, 시골장의 할머니로부터 구수한 욕을 얻어먹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 잘못한 게 누군데, 누구한테 욕지거리를!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언성을 높였지만, 실제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마주한 순한 얼굴에서 나오는 매서운 말들이 계속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네 차 때문에, 내 차가 지금 나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잖아요. 6789 차주님.”
그러고는 그녀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차 키였다. 차를 열어서, 뭐 자기 차라는 걸 증명이라도 할 모양인데.
‘가지가지 한다. 저걸 누른다고 내 차가 자기 차가 되나.’
수현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돌연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동차의 스마트키를 누르는 그녀의 길쭉한 엄지손가락을 타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철컥.
자신의 세컨 카가, 아니 세컨 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차량이 그녀가 들고 있는 차 키에 반응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 소리가 자신의 배우 생활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리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 인마.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집까지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게 관리실에 연락을 해 대면 어떻게 하냐. 곤란하게. 그래도 이 정도 끈기면 어디 가서든 성공할 것 같긴 하네.’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다음은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팬 서비스 제대로 해 준다. 어디 가서 나 여기 산다고 말하진 말고.’
이렇게도 말했던 것 같고.
‘차 핑계는 그만 부리고. 말하라니까? 뭐 해 줄까. 인증샷, 포옹 이런 걸로는 만족이 안 되나?’
그의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여자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인생의 마지막에 지나간다던 ‘주마등’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이제 차 좀 빼지?”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내리꽂힌다. 황망한 수현의 시선 끝에 검은 SUV가 닿았다. 자신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이 여자의 자동차가 전조등을 번쩍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차 헷갈리면, 인생 피곤해지는 거야.
그가 차를 빼자마자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석 문고리를 잡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대충 차를 세워 두고 내려서 여자를 붙잡았다. 일단 저 등짝에 큼지막하게 남아 있는 제 사인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쪽팔리고 자시고를 떠나서 일단 자신의 실수가 맞으니까.
“이봐.”
그의 부름에 운전석 도어를 열던 여자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사과라도 해야 하는데, 이쪽을 돌아보는 여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서슬이 퍼레서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변상해 줄게.”
“사과는커녕, 끝까지 반말이시네.”
한숨을 내쉬는 여자의 얼굴이 싸늘했다. 이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내려놓고 천장을 한 번 바라보던 여자가 발걸음을 옮겨 남자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