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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는 마지막 남은 그의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모두 날아갔음을 깨달았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한쪽 입꼬리만 픽 올라가는 여자의 얼굴에 그가 마지막 객기를 부렸다.
“얼마면 되는데?”
미친놈의 자존심 같으니. 그는 스스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펜을 휘갈김과 동시에 아름답게 남아 버린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되돌리기 위해서는 정중하게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삼류 대사라니. 제가 저 여자라면 이미 주먹을 한 대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변상이 그렇게 하고 싶어?”
여자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겉옷을 벗었다. 자신의 사인이 새겨진 야구 잠바가 그의 품 안에 던져졌다.
“잉크 빼서 A동 2102호 앞에 갖다 놔.”
변상을 운운하던, 그의 입을 단숨에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의 팬들한테 팔면 꽤나 값이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마치 이까짓 사인에는 관심 없다는 듯 차갑고 예의 없는 태도에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엔진 소리와 타이어 소리가 주차장을 요란하게 울려 대며 사라졌다.
15년 차 배우 차수현은 그동안 10편의 영화를 찍었고 9편의 드라마를 찍었다. 그중 데뷔 시절의 한두 작품을 빼면, 모두 그가 주연이었다. 그는 성공이 빠른 편이었고 어느새 ‘톱스타’라는 수식어를 얻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가운데 그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준 횟수는 얼마나 될까. 공항에서, 시상식 레드 카펫에서, 혹은 사인회에서. ‘차수현 친필 사인’ 이벤트라도 있는 날에는 손에 쥐가 나도록 사인을 해야 했으니.
생전 처음으로 팬으로부터 길에서 사인을 해 달라고 요청받았을 때, 처음 사인회를 갖게 되었을 때. 밤새 연습했던 사인을 써먹게 되었음에 감사했던 데뷔 초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 주었다는 게 신기해서 하루 종일 붕 뜬 기분으로 헤실헤실 웃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다.
못해도 만 번 이상은 했을 그 휘갈김이 그는 여전히 즐거웠다. 광고판 옆에 새겨진 공식 모델로서의 인증 사인부터, 하다못해 카드 결제 후 서명란에 휘갈기는 것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인이 자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손에 든 이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사인은 당장에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맙소사.
“하……. 쪽팔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던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여자는 이미 한참 전에 가고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문짝만 하게 들어오는 자신의 사인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며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제 입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사과 한마디 그게 뭐 어렵다고. 일을 이렇게 만들었나.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알려지면 평소 쌓아 왔던 젠틀하고 친근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라,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해 보던 그의 발걸음이 돌연 멈칫거렸다.
사실 젠틀하고 친근한 건 아니었지. 까먹을 뻔했는데 여성 편력, 개차반이란 수식어도 가지고 있었다. 실은, 이런 해프닝 따위 이미 망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미지 걱정하며 살았다고.
그런 생각으로 집으로 올라가는데, 문득 문제의 내 차는 어디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그가 주머니를 뒤져 매니저 김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
“야! 엘리베이터 옆에 대 놓은 거 내 차 아니었어?”
수현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도 전에, 할 말을 쏟아 냈다. 잠이 가득 묻어 있던 목소리는 난데없이 쏟아지는 호통에 영문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 형? 무슨 일이에요?
“이번에 이사한 집 말이야. 내 차 어디에 뒀어?”
주차장에 있을 게 뻔한 차를 묻는 자신의 배우 때문에, 매니저 김 군은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잠이 달아났다.
주절주절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수현의 목소리에 김 군의 입술에서 찔끔찔끔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곤 수현이 자신이 들었다는 바밤바 어쩌고 하는 찰진 문장들을 그대로 읊어 주자 김 군은 박장대소를 금치 못했다.
― 네……. 크하, 흡. 바밤바 씨 발라, 푸하. 대박이네, 그 여자. 푸흡. 이따 블랙박스 영상 안 터지게 가서 싹싹 빌어야겠는데요.
“뭐? 블랙박스?”
― 네. 요즘 차마다 블랙박스 다 있잖아요. 차 앞에서 그러셨으면 다 찍히셨겠네. 와, 우리 형님 이제 CF 어떡하냐.
이 자식은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건지. 웃는 말본새가 거슬렸다.
“하여튼 내 차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그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 아유, 형님 차 번호만큼 외우기 쉬운 게 어디 있다고요. 차 번호판을 보셨어야지.
수현은 그제야 한 번도 자신이 두 자동차의 번호조차 외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아서 대 주고 알아서 가져와 주니, 굳이 외울 필요가 없었기도 했고. 하여간, 밑에 어딘가 있다는 거면 되었다.
“대 놨으면 됐어. 이따 이 옷 세탁소 좀 맡겨 주러 와. 오면서 점심도 좀 사 오고.”
툭 잘라먹는 말투에 매니저 김 군이 속닥거렸다.
― 이런, 4885.
“뭐라 그랬냐?”
― 아뇨, 형님 차 번호가 4885라고요.
수현이 알아채기 전에, 금세 상냥하게 태도를 바꾼 김 군이 아무렇지 않게 점심 메뉴를 물었다.
― 그럼 점심은 뭘로 사 갈까요?
어차피 그의 식사는 거의 매번 정해져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는 먹을 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원하지 않았다.
“샌드위치.”
― 예썰.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경례라도 하는 듯 우렁찬 목소리가 전화 속으로 사라지고, 적막한 공간에 수현 홀로 남았다.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잠바에 또다시 시선이 꽂히고 만다.
팔 부분의 가죽은 낡아 있었고 모직으로 된 등판도 보풀을 여러 번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새로 하나 사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잠바의 양어깨 부분을 잡고 눈앞에 들어 올렸다. 영어로 새겨진 학교 이름 아래로, 굵직한 매직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니. 느낌만 사네, 뭘.”
이미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잠바가 사인 덕분에 새로 태어난 듯 빛이 난다고, 수현은 그렇게 자존감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실은 그렇게 합리화하지 않으면 쪽팔려 죽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21층에 도착하자, 그는 들고 있던 잠바를 둘둘 말아 팔 안쪽에 쑤셔 넣었다.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재빠른 태도였다.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 어쩐지 옆집 현관문이 눈에 들어온다. 떡이라도 돌리고 인사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오갔다. 김 군이 오면 상의해 봐야겠노라 생각하며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2. 이웃으로 얽혀 들다


싸구려 재즈 음악이 팝송으로 바뀌고, 분주한 커피 머신 소리와 손님을 부르는 점원들의 외침, 사람들의 시시껄렁한 일상 이야기가 소란스럽게 얽혀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여자는 그 속에서 어떤 고요함을 찾았다.
글을 쓸 때면 늘 함께하는 금테 안경과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카페모카는 으레 이 시간이면 있어야 할 필수품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곳에서 어떻게 글을 쓰는 건지. 하지만, 그녀는 이와 같은 소란함이 더 집중하게 만든다며 한사코 카페며 공원에 나와 글을 썼다. 그리고 집중할 때면 근처에 누가 앉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그걸 바라보던 남자의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노트북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남자는 눈에 담았다. 그녀는 지금 어느 곳을 여행하고 있을까. 작가인 여자는 자신이 여행했던 곳을 배경으로 글을 풀어냈다. 지난번에 향했던 곳이 남미였던가…….
어느새 바닥을 보여 가는 두 번째 커피 잔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예상처럼 그녀가 노트북에서 눈을 뗐다. 앞에 앉은 자신을 보고도 여자의 얼굴엔 별 놀라는 기색이 없다.
“많이 기다렸어?”
여자는 휘핑크림이 녹은 미지근한 커피를 아쉽게 바라보며 물었다. 마치 그가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예상했다는 말투다. 그래서 남자는 입술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별로. 한 삼십 분?”
단조로운 그의 말투에 이번엔 여자가 웃었다.
“한 두어 시간 기다렸나 보네.”
여자는 눈짓으로 남자의 앞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언젠가 서점이나 내서 원 없이 책 읽고 살라는 여자의 말을 대변하듯 남자는 책을 좋아했다. 언제나 단숨에 책 한 권을 읽어 버리는 남자는 자리에서 읽던 책을 다시 꺼내 드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 놓인 책 한 권은 두어 시간 정도를 뜻했고, 그것은 여자가 글을 쓸 때 남자가 말없이 기다려 준 것과 같은 서로의 암묵적 동의이며 당연한 약속과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당부하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그 변함없는 사실에 희열과도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남자의 말에 여자가 싱긋 웃었다.
“좋아. 최 피디 기둥을 뽑아 버려야지.”
큰 포부를 밝히며 일어나는 사랑의 말에 남자가 입매를 늘렸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밖에 추워. 옷 입고 나가.”
의자에 걸려 있던 겉옷을 건네는 남자의 손은 깔끔한 외모만큼이나 곱상하다. 글을 쓰다 일어나서일까, 사랑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에 시선을 주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저 손가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이 들어맞는 기분을 참 좋아했다. 깍지 낀 손가락 하나만으로 온갖 기분을 선사하지 않았던가. 안정감, 설렘, 행복, 오르가즘, 외로움, 절망, 편안함.
사랑은 하나의 세뇌가 아닐까. 그의 손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플들은, 특히 그중 여자들은, 영화의 내용이나 음악의 가사 등을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대입하곤 한다. 그러곤 생각하지. 우리 사랑은 특별해. 아무리 볼품없이 혹은 지질하게 끝나 버린 인연일지라도. 꼭 되새겨 본다. 저 영화 속에 나오는 정도의 이야기라면, 우리도 참 특별했노라고.
그리고 다시 감정의 색깔을 입힌다. 그들이 뜨거웠던 그때로 다시 되돌려 버린다. 그렇게 세뇌는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은 너무나 쉽고도 애처로워서. 우리를, 특히 헤어진 연인들을 망각의 동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서로 멀어져 있던 기간이 짧다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내가 좀 더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우리였던 그들은 안타까워하고 되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다 또다시 헤어진 이유에 대해 너그럽게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각나지도 않는 이유라면 얼마나 사소한 이유였단 말인가.’ 하며 사소함을 넘기지 못한 자신을 통탄한다.
그러나 ‘망각’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최이영과 그녀 역시도 망각의 동물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을 헤어지고, 세 번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비극이라는 단어에 걸맞게도 그들은 또다시 헤어졌다.
“고마워.”
사랑은 이영이 건네는 자신의 옷을 받아 입었다. 그리고 그가 읽던 책과 함께 제 머그잔과 노트북까지 챙기는 이영을 붙잡았다.
“내가 가져갈게.”
사랑은 자신의 물건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이렇게 선을 그었다. 호의를 거부했다. 멈칫하는 이영이 느껴졌지만,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물건을 챙겼다.
시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무뎌지게 만든다. ‘우리’란 두 글자 안에 최이영과 자신이 들어가 있어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이렇게 서로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고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어쩌면 무뎌진 척하게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 해?”
이영이 사랑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 왔다.
“어떡하면 최 피디의 기둥을 잘 뽑았다고 소문날지 하는 생각?”
확실한 건, 사랑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깔깔대며 자리를 나섰다. 그들은 그 세 번째 이별을 끝으로 완벽하게 헤어졌다.

“근데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
식사를 끝낸 이영이 얇은 코트 위로 턱짓을 했다. 학교에 다니는 기간일 때면 매번 옷을 골라 입기가 싫다며 학교 잠바만 입고 다니는 사랑이었기에, 그의 눈동자가 궁금함으로 물들었다.
“급한 대로 차에 있는 게 저 옷밖에 없더라고.”
사랑이 디저트 스푼을 물며 대충 대답했다.
“그 낡아 빠진 야잠은 어디에 두고.”
웬일이래,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영에게 사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그 옷이 탐났나 봐. 큼직하게 자기 거라고 영역 표시 하기에 줘 버렸어.”
“영역 표시?”
사랑은 영역 표시란 말에 미간을 좁히며 킥킥거렸다. 누가 들으면 강아지한테 오줌 세례라도 받았다고 생각할 만한 노골적인 단어였다.
“옷보다 옷 주인이 탐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영은 턱을 괴며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 낡아 빠진 야잠보다 내가 더 낡아 빠졌나 보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비하적인 발언을 했지만, 이영은 그냥 두었다. 세상 무심하고 시니컬하게 말해도 그녀의 자존감에는 아무런 변화나 문제가 없었으니까. 이래 봬도 유쾌하기로 소문난, 제주도의 유명 펜션 〈편便〉의 주인장들이 바로 그녀의 부모님이시다. 사랑 듬뿍 받고 자란 그녀의 속이 얼마나 단단하고 따뜻한지, 그녀를 지켜보아 온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최이영은 그중에서도 ‘잘’ 아는 축에 속했다.
“그래도 누군지 고맙네. 버리래도 안 버리던 옷을 가져가 줬으니.”
“그렇게 화목한 분위기에서 이뤄진 건 아니었어.”
“화목하기까지 했으면 질투 났을 거야.”
“좀, 격정적이긴 했지.”
물끄러미 사랑을 쳐다보는 이영의 눈빛에 흥미가 일었다.
‘격정적이었다라…….’
그녀는 달콤한 디저트는 저리 밀어 놓고 보기만 해도 시큼한 레몬 셔벗을 어느새 두 그릇째 해치우고 있었다. 표정도 없이. 상상만 해도 신 침이 고이는 이영의 눈가가 잠시 찌푸려졌다.
제 사람이란 생각이 들기 전까진 타인에게 크게 관여하지도, 폐를 끼치지도 않는 그녀의 성격과 생활 속에 ‘격정’이라는 단어는 딱히 일상적인 단어는 아니었다. 누굴까, 그는 그 상대가 꽤나 궁금해졌다.
세상 맛있는 표정으로 디저트에 집중하는 사랑의 모습에 이영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는 도박을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떠보는.
“그럼, 옷 하나 사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