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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be banished from my world



일주일 전에 찾은 서재는 아주 커다란 보물창고 같았다. 오가는 이 없이 버려진 곳이지만 그곳을 가득 채운 책들은 아주 색다르고 신비했다.
지난밤 읽다 말고 숨겨 두었던 책을 찾아 들고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로 향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폴폴 피어오르는 먼지가 코를 자극했다. 깐깐한 유모가 보면 더러운 물건을 만졌다고 아주 혼을 낼 법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것을 고려하기엔 오늘 이곳에서 할 실험이 더 중요했다.
“여기 있다!”
숨을 참고 한참 책장을 넘긴 끝에 원하는 페이지를 찾았다.

「만구초: 여성의 미용을 위한 약초. 찻잎에 소량을 섞어 복용. 식욕을 떨어뜨려 자연스럽게 체중을 조절할 수 있게 해 준다.」

여기 쓰인 그대로 효과가 있다면 나는 아주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이 된다. 어쩌면 이걸로 역사책이나 위인전 같은 곳에 실려 가문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될지도 모른다.
한껏 솟아오른 흥분을 가라앉히고 책에 코를 박았다. 해진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또 흐려진 글자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고 실험을 위해 준비한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소량이면 어느 정도일까? 한 잎? 두 잎?”
바구니 한구석에는 책 속의 그림과 똑같이 생긴 풀이 들어 있었다. 어제 저택 뒤쪽의 숲을 뒤져 찾아낸 만구초였다.
“그림을 보지 못했으면 찾지 못했을 거야. 누가 이런 잡초를 만구초 같은 특별한 약초로 생각하겠어?”
바짝 긴장했던 것과 달리 만구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별다른 특징도 없는 그저 그런 흔한 풀이었다.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어 허탈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쉽게 찾을 수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새하얀 면포에 쌓인 만구초는 꽤 빽빽하게 무수히 많은 이파리를 달고 있었다. 그중 중간에 달려 유난히 싱싱해 보이는 이파리를 하나 떼어 냈다.
“좋아. 그럼 딱 이파리 하나만 넣어 보자.”
미리 준비한 홍차에 만구초 이파리를 넣고 기다렸다. 충분히 우러났을 텐데 찻잔의 내용물은 색도 변하지 않고 향도 바뀌지 않았다.
“된 건가?”
의심스럽지만 일단 마셔 보기로 했다. 홍차에 들어간 이파리는 매우 작았기에 해로운 성분이 있어도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홀짝.
한 모금 머금어 봐도 딱히 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효과가 있단 말이야? 잘 모르겠는데.”
바짝 긴장한 것이 무색할 만큼 허탈했다.
“에잇.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지.”
낙심한 손으로 찻잔을 정리했다. 그러다 유모가 싸 준 스콘을 발견했다. 꼼꼼한 유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잼과 크림치즈도 함께 넣어 주었다. 오늘 만든 신선한 사과잼의 달콤한 향을 맡자 식욕이 돌았다.
“흠흠. 유모의 정성을 무시할 순 없지. 바구니에 스콘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게다가 이 스콘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단 말이야.”
실망으로 시린 마음을 달랠 생각에 잼과 치즈를 듬뿍 발랐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바삭바삭한 그런 익숙한 맛을 기대하고 한입 베어 문 순간.
“우욱!”
지독한 쓴맛이 혀를 강타했다. 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끔찍한 맛이었다. 참지 못하고 내용물을 뱉어 냈지만 입 안에 남은 쓴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콜록.”
숨도 쉬기 힘들다.
“사람 살……려.”
머리가 어질어질 하더니 시야가 기울었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대답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레이라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장난치실 때가 아니에요! 아가씨!”

* * *

기절했었나 보다. 숨 가쁘게 나를 찾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으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몸을 일으키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으니 어쩌면 오늘 밤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눈 감기 전만 해도 분명 오전이었는데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노로 불꽃을 뿜어 댈 유모와 입을 딱 다물고 인상을 쓰고 계실 아버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분명 많이 화가 나셨을 텐데 그 뒷감당을 할 생각을 하니 무지막지하게 막막해졌다.
“빨리 가야겠어.”
급한 마음에 바구니도 버려두고 뛰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문이 음산한 소리를 냈지만 평소와 달리 오싹하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우, 힘들어!”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지른다. 결국 저택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언덕쯤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마음은 벌써 저 멀리 달려 집 안으로 들어선 지 오래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로이를 데려올걸.”
몸이 힘드니 마구간에서 쉬고 있을 애마가 떠올랐다. 갈색 털에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진 로이는 느려 터진 나를 쉽고 빠르게 옮겨 줄 좋은 친구였다. 몰래 찾아낸 서재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로이를 두고 오기로 한 선택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다리가 뻣뻣해지고 숨이 가빠 더 움직이기 힘들어질 때쯤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
저택의 정원이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뭐지? 설마 나 때문인가?”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집안의 하인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상했다. 수많은 말들과 그 위에 올라탄 남자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따라다니는 횃불을 든 남자들.
“누구지?”
낯선 이들이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이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을 울렸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집으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갈 곳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지만 저곳엔 아버지와 유모가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집으로 가야 했다.
“아! 거기가 있었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이지만 분명 저택의 구석진 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다. 무너진 담벼락을 수리하다 우연히 생긴 구멍의 일부였는데 그곳에서 놀기를 좋아했던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가 그대로 내버려 둔 곳이었다.
아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게 교묘하게 숨겨진 구멍은 이젠 더는 기억하는 이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나조차도 오늘이 아니었다면 떠올리지도 않았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그래! 그쪽으로 가 보자.”
집을 바로 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빙빙 둘러 조심스럽게 통로를 향해 접근했다.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다행히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은 구멍은 담쟁이덩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빡빡하게 몰려 있는 줄기들을 헤치고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빳빳한 줄기가 얼굴을 때려 따가운 상처를 만들어 냈지만 머뭇거리거나 움츠리지 않았다.
힘들게 통로에 들어서 밖의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가까운 곳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얼마 전 시녀로 들어온 유모의 조카였다.
“제시?”
“정말 아가씨예요?”
“그래 나야.”
내 목소리를 들은 제시가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가까이 오자 제시의 얼굴이 보였다. 천으로 싼 보퉁이 몇 개를 든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어서 피하셔야 해요. 빨리 빠져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