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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게 무슨 소리야? 유모는 어쩌고? 또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어?”
그냥 나가자는 제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떠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모, 아니 유모님의 명이에요. 여기서 기다렸다가 아가씨가 오시면 함께 도망치라고 하셨어요.”
“유모가?”
유모의 말이라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아가씨, 제발! 안전한 곳에 가면 말씀드릴게요. 여긴 너무 위험해요. 언제 들키게 될지 몰라요.”
제시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줄어들었다. 우리 집을 차지한 저치들에게 들킬까 몹시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다급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보니 더 고집을 피우기 힘들었다.
“알았어. 일단 나가자.”
우선 제시가 가지고 있는 짐 몇 개를 빼앗아 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보퉁이는 상당히 무거웠고 부피도 꽤 컸다. 혼자서 다 들면 빠르게 움직이기 힘들 터라 제시도 거부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담벼락에서 기어 나온 후,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버려진 건물에 들어선 제시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보통 때라면 힘들어하는 제시를 배려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제시는 내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와락 한마디를 외쳤다.
“반역이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제시를 응시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리 집 사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가 들렸다.
“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제시는 이제 바닥에 엎어져 거의 통곡하고 있었다.
“반역이래요, 아가씨. 주인님이 반역을 하셨다고.”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해?”
울면서 웅얼거리는 입은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쏟아 냈지만 중요한 부분은 모두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도에서 기사단이 왔어요. 공작 전하도 함께 오셨다고.”
기사단을 이끄는 공작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훼이트비앙?”
이 나라에서 가장 힘이 센 공작가문이자 수도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기사단을 소유하고 있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대대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때때로 일어나는 반역을 소탕하는 일이나 은밀한 심부름을 맡기도 하는 곳이었다.
내 말을 들은 제시는 그 이름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훼이트비앙 공작이 직접 내려왔다고?”
대단하신 공작이 이런 시골구석까지 직접 출정할 정도라면 확실히 반역이 일어난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 반역의 전조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반역?”
믿기지 않아 들은 정보를 나열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니, 우리 가문은 귀족이라기 민망할 정도로 세력도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낡은 저택 하나가 전부인, 전형적인 가난한 시골 귀족이었다.
“으허허헝.”
“그럴 리가 없잖아.”
비통한 제시의 울음소리가 텅 빈 건물을 울렸다. 어두운 건물에 제시와 단둘이 남은 나는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다 다음 날 아버지가 수도로 끌려가셨다는 소식만 간신히 전해 들었다.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유모는?”
“…….”
부서진 저택에 유모는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수도로 끌려갔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반역일 리가 없어. 그건 전부 모함이야.”
“이모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아가씨와 피해 있으라고 하셨는걸요.”
제시는 밤새 들고 있었던 보퉁이를 내게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패물과 집에 남아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저들이 나를 찾고 있니?”
“네. 아가씨를 찾는다고 몇 명의 기사들을 두고 갔어요. 아직 저택 주위를 돌아보고 있대요.”
지금은 주위만 돌아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수색 범위를 넓힐 것이다.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수도로 가야겠어.”
“네?”
“누명이 벗겨지든 아니든, 무조건 수도로 가야 해.”
내 말을 들은 제시는 펄쩍 뛰며 내 팔을 잡았다.
“너무 위험해요! 전부 아가씨를 찾아다니고 있을 텐데 그러다 잡히면 어쩌시려고요?”
“그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내 얼굴을 아는 이는 얼마 없잖아. 집을 아무리 뒤져도 그리지 않은 초상화가 나올 리도 없고.”
집에 있는 그림이라곤 몇 대 전 가주의 초상화가 전부였다.
“우리 가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히 귀족이라고 부르기도 웃길 만큼 가진 것도 없는걸. 그러니 날 열심히 찾지도 않을 거고. 조금 찾다가 금방 돌아갈 거야. 오히려 수도가 더 안전할지도 몰라.”
수도에 가야 아버지와 유모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확률은 낮지만 만약 누명이 벗겨진다면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곳도 수도였다.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고향으로 돌아가.”
“하지만…….”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는 제시의 손에 약간의 돈을 쥐여 줬다.
“유모의 소식을 알게 되면 너에게도 알려 줄게.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진 넌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 우리 집에서 일했었다는 사실 자체도 숨겨. 그냥 다른 곳에서 일했다고 해.”
그렇게 제시와 헤어지고 나서는 줄곧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가 혼자서 수도까지 올라가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수도에 도착했을 즈음엔 가진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결혼 패물이 전부였다.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반역자들의 처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누군가는 목이 잘렸고 누군가는 노예로 팔리고. 누군가는 광산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패물을 다 처분하고도 아버지와 유모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가족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알아낸 것이라곤 이 모든 일을 조사하고 처리한 것이 훼이트비앙 공작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막막했다. 무엇이든 의욕은 충만한데 더는 할 수 있는 일도 방법도 없었다. 멍하니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쫓겨났다면서?”
“벌써 몇 명째인지 모르겠네.”
인파가 몰린 곳에 다가가니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아가씨 한 명이 몹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로 추측하건데 수도에서 자주 보이는 광경인 것 같았다.
“암만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거긴 가는 게 아니여. 쯧쯧.”
“거기가 어디요? 돈만 많이 주면 못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어디긴. 훼이트비앙이지.”
그때,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리는 대화 중 딱 한 마디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거기라면 공작가가 아니오? 공작가에서 일하는 것이 나쁠 게 뭐가 있소? 나라면 얼씨구나 하고 들어가겠는데.”
“왜 나쁠 게 없어? 들어가기만 하면 반년도 안 돼서 쫓겨나오니 그렇지.”
“반년?”
“그렇다니까? 저렇게 울면서 나오는 애가 한둘이 아니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공작에게 접근할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크게 심호흡하고 용기를 내 아가씨를 둘러싸고 있는 원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괜찮아요?”
넘어졌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던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아주 가엾어 보였다.
“도와줄까요?”
다정하게 말을 거니 망설이던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잡아 일으키고 옆에 쓰러져 있던 짐 가방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니 천천히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뚫어 버릴 듯 강렬한 시선들이 사라지자 훨씬 편해졌는지 아가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많이 울어 잠긴 목소리였다.
“어디 가서 잠깐이라도 앉을래요? 뭐라도 먹고 마시고 나면 훨씬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좋아요. 그치만 이 근처는 말고 좀 떨어진 데로 갔으면 좋겠어요.”
아까 몰려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 같았다. 어려울 것도 없는 주문이었기에 흔쾌히 긍정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난 아직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가게도 없거든요.”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기운을 차린 아가씨가 나를 데려간 곳은 좁은 골목 입구의 한산한 식당이었다. 손님에게 큰 관심이 없는 털털한 주인장은 주문한 음식만 내려놓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전 메리라고 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전 레이라예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시시콜콜한 쓸데없는 주제를 굴리다 본론으로 돌아왔다. 당장 캐묻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가 달았지만 성급하게 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나만 손해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거예요?”
“실은, 오늘 해고당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유모는 어쩌고? 또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어?”
그냥 나가자는 제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떠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모, 아니 유모님의 명이에요. 여기서 기다렸다가 아가씨가 오시면 함께 도망치라고 하셨어요.”
“유모가?”
유모의 말이라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아가씨, 제발! 안전한 곳에 가면 말씀드릴게요. 여긴 너무 위험해요. 언제 들키게 될지 몰라요.”
제시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줄어들었다. 우리 집을 차지한 저치들에게 들킬까 몹시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다급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보니 더 고집을 피우기 힘들었다.
“알았어. 일단 나가자.”
우선 제시가 가지고 있는 짐 몇 개를 빼앗아 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보퉁이는 상당히 무거웠고 부피도 꽤 컸다. 혼자서 다 들면 빠르게 움직이기 힘들 터라 제시도 거부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담벼락에서 기어 나온 후,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버려진 건물에 들어선 제시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보통 때라면 힘들어하는 제시를 배려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제시는 내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와락 한마디를 외쳤다.
“반역이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제시를 응시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리 집 사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가 들렸다.
“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제시는 이제 바닥에 엎어져 거의 통곡하고 있었다.
“반역이래요, 아가씨. 주인님이 반역을 하셨다고.”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해?”
울면서 웅얼거리는 입은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쏟아 냈지만 중요한 부분은 모두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도에서 기사단이 왔어요. 공작 전하도 함께 오셨다고.”
기사단을 이끄는 공작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훼이트비앙?”
이 나라에서 가장 힘이 센 공작가문이자 수도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기사단을 소유하고 있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대대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때때로 일어나는 반역을 소탕하는 일이나 은밀한 심부름을 맡기도 하는 곳이었다.
내 말을 들은 제시는 그 이름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훼이트비앙 공작이 직접 내려왔다고?”
대단하신 공작이 이런 시골구석까지 직접 출정할 정도라면 확실히 반역이 일어난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 반역의 전조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반역?”
믿기지 않아 들은 정보를 나열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니, 우리 가문은 귀족이라기 민망할 정도로 세력도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낡은 저택 하나가 전부인, 전형적인 가난한 시골 귀족이었다.
“으허허헝.”
“그럴 리가 없잖아.”
비통한 제시의 울음소리가 텅 빈 건물을 울렸다. 어두운 건물에 제시와 단둘이 남은 나는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다 다음 날 아버지가 수도로 끌려가셨다는 소식만 간신히 전해 들었다.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유모는?”
“…….”
부서진 저택에 유모는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수도로 끌려갔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반역일 리가 없어. 그건 전부 모함이야.”
“이모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아가씨와 피해 있으라고 하셨는걸요.”
제시는 밤새 들고 있었던 보퉁이를 내게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패물과 집에 남아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저들이 나를 찾고 있니?”
“네. 아가씨를 찾는다고 몇 명의 기사들을 두고 갔어요. 아직 저택 주위를 돌아보고 있대요.”
지금은 주위만 돌아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수색 범위를 넓힐 것이다.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수도로 가야겠어.”
“네?”
“누명이 벗겨지든 아니든, 무조건 수도로 가야 해.”
내 말을 들은 제시는 펄쩍 뛰며 내 팔을 잡았다.
“너무 위험해요! 전부 아가씨를 찾아다니고 있을 텐데 그러다 잡히면 어쩌시려고요?”
“그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내 얼굴을 아는 이는 얼마 없잖아. 집을 아무리 뒤져도 그리지 않은 초상화가 나올 리도 없고.”
집에 있는 그림이라곤 몇 대 전 가주의 초상화가 전부였다.
“우리 가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히 귀족이라고 부르기도 웃길 만큼 가진 것도 없는걸. 그러니 날 열심히 찾지도 않을 거고. 조금 찾다가 금방 돌아갈 거야. 오히려 수도가 더 안전할지도 몰라.”
수도에 가야 아버지와 유모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확률은 낮지만 만약 누명이 벗겨진다면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곳도 수도였다.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고향으로 돌아가.”
“하지만…….”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는 제시의 손에 약간의 돈을 쥐여 줬다.
“유모의 소식을 알게 되면 너에게도 알려 줄게.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진 넌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 우리 집에서 일했었다는 사실 자체도 숨겨. 그냥 다른 곳에서 일했다고 해.”
그렇게 제시와 헤어지고 나서는 줄곧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가 혼자서 수도까지 올라가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수도에 도착했을 즈음엔 가진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결혼 패물이 전부였다.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반역자들의 처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누군가는 목이 잘렸고 누군가는 노예로 팔리고. 누군가는 광산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패물을 다 처분하고도 아버지와 유모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가족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알아낸 것이라곤 이 모든 일을 조사하고 처리한 것이 훼이트비앙 공작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막막했다. 무엇이든 의욕은 충만한데 더는 할 수 있는 일도 방법도 없었다. 멍하니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쫓겨났다면서?”
“벌써 몇 명째인지 모르겠네.”
인파가 몰린 곳에 다가가니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아가씨 한 명이 몹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로 추측하건데 수도에서 자주 보이는 광경인 것 같았다.
“암만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거긴 가는 게 아니여. 쯧쯧.”
“거기가 어디요? 돈만 많이 주면 못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어디긴. 훼이트비앙이지.”
그때,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리는 대화 중 딱 한 마디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거기라면 공작가가 아니오? 공작가에서 일하는 것이 나쁠 게 뭐가 있소? 나라면 얼씨구나 하고 들어가겠는데.”
“왜 나쁠 게 없어? 들어가기만 하면 반년도 안 돼서 쫓겨나오니 그렇지.”
“반년?”
“그렇다니까? 저렇게 울면서 나오는 애가 한둘이 아니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공작에게 접근할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크게 심호흡하고 용기를 내 아가씨를 둘러싸고 있는 원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괜찮아요?”
넘어졌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던 아가씨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아주 가엾어 보였다.
“도와줄까요?”
다정하게 말을 거니 망설이던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잡아 일으키고 옆에 쓰러져 있던 짐 가방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니 천천히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뚫어 버릴 듯 강렬한 시선들이 사라지자 훨씬 편해졌는지 아가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많이 울어 잠긴 목소리였다.
“어디 가서 잠깐이라도 앉을래요? 뭐라도 먹고 마시고 나면 훨씬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좋아요. 그치만 이 근처는 말고 좀 떨어진 데로 갔으면 좋겠어요.”
아까 몰려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 같았다. 어려울 것도 없는 주문이었기에 흔쾌히 긍정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난 아직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가게도 없거든요.”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기운을 차린 아가씨가 나를 데려간 곳은 좁은 골목 입구의 한산한 식당이었다. 손님에게 큰 관심이 없는 털털한 주인장은 주문한 음식만 내려놓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전 메리라고 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전 레이라예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시시콜콜한 쓸데없는 주제를 굴리다 본론으로 돌아왔다. 당장 캐묻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가 달았지만 성급하게 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나만 손해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거예요?”
“실은, 오늘 해고당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