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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알은척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메리는 내가 노력할 것도 없이 술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귀족가에서 일하는 하녀들에겐 경력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어머!”
내가 할 일은 그저 적당한 추임새를 곁들이는 것뿐이었다.
“이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메리의 말에 따르면 공작가에 들어간 하녀들은 보통 3~4개월 안에 해고된다고 했다.
“그렇게 자주 사람이 바뀌어도 괜찮은 거예요?”
귀족가의 고용인들은 잘 바뀌지 않는다. 대를 이어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메리와 같은 경우는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당연히 안 괜찮죠. 거기 집사님도 몹시 애를 쓰시고 계시는데 일이 쉽지가 않아요.”
하지만 미식가로 유명한 공작은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를 자주 자른다고 했다.
“그분의 입맛에 맞는 요리사는 몹시 드물어요.”
원래 고위 귀족의 식사를 책임질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니 대단한 미식가인 공작의 입맛에 대충이라도 맞출 정도의 능력이면 부르는 곳이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정도의 대단한 요리사들을 수없이 갈아치운 공작가는 지금 일하는 셰프가 나가고 나면 더 부를 사람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래서 불만이 있으면 대신 하녀를 자르는 거죠. 자꾸 잘리니 이제 식사 시중을 들겠다고 나서는 하녀들이 없어요. 요즘은 신입들에게 담당을 미뤄 버리는 추세고요.”
억울한 점이 많았는지 메리는 기밀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다.
“이젠 소문이 퍼져서 그곳에서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저, 메리. 혹시 공작가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일자리가 필요해서 그래요? 제가 다른 곳을 소개해 줄게요. 거긴 그냥 포기해요!”
그자가 맛이 있니, 없니 같은 별 쓸데없는 것을 따지는 동안 지은 죄도 없이 끌려간 아버지는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하셨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울분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래요. 많이 준다니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버티다 나오려고요.”
하녀를 자르거나 음식을 탐하는 시간을 아껴 제대로 일만 했다면 우리 가문이 엉뚱한 누명을 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 즐거움을 위해서는 저토록 까다롭게 구는 인간이 타인의 운명이 걸린 일에는 왜 그리 경솔했을까. 못해도 두 번 세 번 알아보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확실히 했어야 했다.
미식가라고? 맛있는 음식이 아니면 안 돼?
“정 그렇다면…….”
분노로 이글거리는 가운데 공작에게 딱 맞는, 완벽한 복수 방법이 떠올랐다.
만구초.
그걸 이용한다면 맛있는 음식을 따지는 일 따위는 생각도 못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쫄쫄 굶다 배고파 죽게 될지도 몰랐다. 잔인한 생각이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는 공작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통쾌했다.
그래서 나는 신분을 숨기고 공작가에 잠입했다.
#2. thinking of a plan for revenge
늘 사람이 부족한 공작가의 집사는 내게서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처음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지만 메리의 말대로 식사 시중을 드는 일을 기피하는 고참들 덕에 생각보다 빠르게 본채로 입성할 수 있었다.
나는 본채에 들어간 그날부터 만구초를 찾아 씻고 말려 평범한 찻잎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를 노렸다. 들키지 않고 오래도록 고통을 주기 위해선 내가 의심받지 않을 만한 때와 장소가 필요했다.
“레이라! 레이라!”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함께 일하는 엘리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일 손님이 온데. 어쩌면 좋지?”
그 말을 들은 다른 하녀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여럿이 동시에 입을 열자 휴게실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손님이 오시면 무슨 문제라도 생겨? 다들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손님 접대가 끝나면 꼭 한두 명씩 더 잘려.”
손님이 오면 아무래도 식사 시간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기 마련이었다. 가짓수가 늘어나면 다이닝 룸에 들어가야 하는 하녀의 수도 늘어나고 그만큼 실수도 늘어나게 된다.
최고참의 말에 따르면 원래도 까다로웠던 공작은 손님이 오는 날엔 더더욱 까다로워져서 평소라면 그냥 넘길 사소한 점도 참지 않는다고 했다.
불안에 떠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내일이야말로 만구초를 쓸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에 초대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데리고 다니는 수행원들만 해도 수가 꽤 될 터. 저택이 어수선하고 복잡할 때야말로 일을 벌이기 딱 좋았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토를 하거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 대단한 명성에도 금이 갈 것이었다. 다른 하녀들이 불안에 떠는 동안 나는 홀로 기대에 차 생기가 돌았다.
“레이라. 넌 긴장되지 않니?”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나보다 몇 달 먼저 공작가에 들어온 루나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일이면 본인이 잘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루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몸이 굳어 버리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거야 그렇지만.”
옆에서 내 말을 들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잘못해서 쫓겨난 사람은 드물지.”
그렇다. 아무리 잘하고 실수하지 않아도, 공작이 기분 나쁘면 잘리는 거다. 겁에 질려 웅성거리던 하녀들의 분위기가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운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군.”
집사였다. 서류와 펜을 들고 온 그를 보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나도 그 속에 끼어 티 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휴게실은 종이 한 장 떨어지는 소리라도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릴 것 같은 긴장감이 서렸다.
“내일 중요한 손님이 오실 예정이다. 평소보다 더 규모가 큰 정찬을 준비해야 하는데. 식사 시중을 담당할 사람이 추가로 더 필요하게 되었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말이 나왔다. 본채에 들어온 지 두 달째. 공작가에서 오래 근무한 하녀들보단 신입이 식사 시중 담당으로 정해지는 규칙 아닌 규칙이 있으니, 집사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레이라 양. 본채에 적응은 좀 했는가?”
“예, 선배님들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다른 하녀라면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거나 회피하려 들었을 테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원하던 기회를 날리는 바보짓은 할 수 없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집사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온화해졌다.
“그것참 다행이군. 그럼 내일 정찬 자리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겠네.”
집사는 나 외에도 몇 명의 하녀를 더 지목한 뒤 휴게실을 나갔다. 상사가 사라지자 참았던 숨소리들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엘리사가 옆구리를 찔렀다.
“괜찮아?”
“응?”
“지목됐잖아. 원래는 내 차례였을 텐데.”
슬슬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엘리사의 옆구리를 마주 찔렀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집사님이 내 이름부터 먼저 부르셨잖아.”
그랬다. 아까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나보다 조금 먼저 들어온 엘리사를 지목했을지도 몰랐다. 신입에게 식사 시중을 시키는 관행이 있다곤 해도 중요한 정찬 자리에 미덥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난 괜찮아. 지금 피한다 해도 이곳에 있는 걸 조금 연장하는 정도잖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에 엘리사가 죄책감을 가지길 바라지 않았다. 내가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을 확인한 엘리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도와줄게.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고마워.”
엘리사의 친절한 제안은 아주 고마운 것이었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다. 아니, 받아서는 안 되었다. 음모가 들통 나기라도 한다면 죄 없는 엘리사가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넘겼다. 다행히도 점점 다가오는 정찬 시간 덕분에 엘리사를 비롯한 모두는 타인에게 신경을 쓰기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그중 가장 많이 바쁜 사람은 손님 앞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식사 시중을 맡은 하녀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담당 하녀들을 불러 모은 하녀장은 새 옷을 지급했다. 새 옷을 입은 다음은 깐깐한 검사가 이어졌다.
“깔끔하게 중앙으로 틀어 올려라. 머리카락 한 올도 내려오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손톱이 불결하게 이게 뭐냐. 짧게 자르고 깨진 부분이 없도록 잘 다듬어라.”
“입술 연지 같은 것은 집어치워! 네년들의 입술에 누가 시선을 준다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알은척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메리는 내가 노력할 것도 없이 술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귀족가에서 일하는 하녀들에겐 경력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어머!”
내가 할 일은 그저 적당한 추임새를 곁들이는 것뿐이었다.
“이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메리의 말에 따르면 공작가에 들어간 하녀들은 보통 3~4개월 안에 해고된다고 했다.
“그렇게 자주 사람이 바뀌어도 괜찮은 거예요?”
귀족가의 고용인들은 잘 바뀌지 않는다. 대를 이어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메리와 같은 경우는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당연히 안 괜찮죠. 거기 집사님도 몹시 애를 쓰시고 계시는데 일이 쉽지가 않아요.”
하지만 미식가로 유명한 공작은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를 자주 자른다고 했다.
“그분의 입맛에 맞는 요리사는 몹시 드물어요.”
원래 고위 귀족의 식사를 책임질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니 대단한 미식가인 공작의 입맛에 대충이라도 맞출 정도의 능력이면 부르는 곳이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정도의 대단한 요리사들을 수없이 갈아치운 공작가는 지금 일하는 셰프가 나가고 나면 더 부를 사람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래서 불만이 있으면 대신 하녀를 자르는 거죠. 자꾸 잘리니 이제 식사 시중을 들겠다고 나서는 하녀들이 없어요. 요즘은 신입들에게 담당을 미뤄 버리는 추세고요.”
억울한 점이 많았는지 메리는 기밀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다.
“이젠 소문이 퍼져서 그곳에서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저, 메리. 혹시 공작가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일자리가 필요해서 그래요? 제가 다른 곳을 소개해 줄게요. 거긴 그냥 포기해요!”
그자가 맛이 있니, 없니 같은 별 쓸데없는 것을 따지는 동안 지은 죄도 없이 끌려간 아버지는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하셨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울분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래요. 많이 준다니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버티다 나오려고요.”
하녀를 자르거나 음식을 탐하는 시간을 아껴 제대로 일만 했다면 우리 가문이 엉뚱한 누명을 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 즐거움을 위해서는 저토록 까다롭게 구는 인간이 타인의 운명이 걸린 일에는 왜 그리 경솔했을까. 못해도 두 번 세 번 알아보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확실히 했어야 했다.
미식가라고? 맛있는 음식이 아니면 안 돼?
“정 그렇다면…….”
분노로 이글거리는 가운데 공작에게 딱 맞는, 완벽한 복수 방법이 떠올랐다.
만구초.
그걸 이용한다면 맛있는 음식을 따지는 일 따위는 생각도 못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쫄쫄 굶다 배고파 죽게 될지도 몰랐다. 잔인한 생각이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는 공작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통쾌했다.
그래서 나는 신분을 숨기고 공작가에 잠입했다.
#2. thinking of a plan for revenge
늘 사람이 부족한 공작가의 집사는 내게서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처음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지만 메리의 말대로 식사 시중을 드는 일을 기피하는 고참들 덕에 생각보다 빠르게 본채로 입성할 수 있었다.
나는 본채에 들어간 그날부터 만구초를 찾아 씻고 말려 평범한 찻잎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를 노렸다. 들키지 않고 오래도록 고통을 주기 위해선 내가 의심받지 않을 만한 때와 장소가 필요했다.
“레이라! 레이라!”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함께 일하는 엘리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뛰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일 손님이 온데. 어쩌면 좋지?”
그 말을 들은 다른 하녀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여럿이 동시에 입을 열자 휴게실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손님이 오시면 무슨 문제라도 생겨? 다들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손님 접대가 끝나면 꼭 한두 명씩 더 잘려.”
손님이 오면 아무래도 식사 시간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기 마련이었다. 가짓수가 늘어나면 다이닝 룸에 들어가야 하는 하녀의 수도 늘어나고 그만큼 실수도 늘어나게 된다.
최고참의 말에 따르면 원래도 까다로웠던 공작은 손님이 오는 날엔 더더욱 까다로워져서 평소라면 그냥 넘길 사소한 점도 참지 않는다고 했다.
불안에 떠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내일이야말로 만구초를 쓸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에 초대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데리고 다니는 수행원들만 해도 수가 꽤 될 터. 저택이 어수선하고 복잡할 때야말로 일을 벌이기 딱 좋았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토를 하거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 대단한 명성에도 금이 갈 것이었다. 다른 하녀들이 불안에 떠는 동안 나는 홀로 기대에 차 생기가 돌았다.
“레이라. 넌 긴장되지 않니?”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나보다 몇 달 먼저 공작가에 들어온 루나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일이면 본인이 잘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루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몸이 굳어 버리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거야 그렇지만.”
옆에서 내 말을 들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잘못해서 쫓겨난 사람은 드물지.”
그렇다. 아무리 잘하고 실수하지 않아도, 공작이 기분 나쁘면 잘리는 거다. 겁에 질려 웅성거리던 하녀들의 분위기가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운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군.”
집사였다. 서류와 펜을 들고 온 그를 보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나도 그 속에 끼어 티 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휴게실은 종이 한 장 떨어지는 소리라도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릴 것 같은 긴장감이 서렸다.
“내일 중요한 손님이 오실 예정이다. 평소보다 더 규모가 큰 정찬을 준비해야 하는데. 식사 시중을 담당할 사람이 추가로 더 필요하게 되었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말이 나왔다. 본채에 들어온 지 두 달째. 공작가에서 오래 근무한 하녀들보단 신입이 식사 시중 담당으로 정해지는 규칙 아닌 규칙이 있으니, 집사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레이라 양. 본채에 적응은 좀 했는가?”
“예, 선배님들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다른 하녀라면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거나 회피하려 들었을 테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원하던 기회를 날리는 바보짓은 할 수 없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집사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온화해졌다.
“그것참 다행이군. 그럼 내일 정찬 자리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겠네.”
집사는 나 외에도 몇 명의 하녀를 더 지목한 뒤 휴게실을 나갔다. 상사가 사라지자 참았던 숨소리들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엘리사가 옆구리를 찔렀다.
“괜찮아?”
“응?”
“지목됐잖아. 원래는 내 차례였을 텐데.”
슬슬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엘리사의 옆구리를 마주 찔렀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집사님이 내 이름부터 먼저 부르셨잖아.”
그랬다. 아까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나보다 조금 먼저 들어온 엘리사를 지목했을지도 몰랐다. 신입에게 식사 시중을 시키는 관행이 있다곤 해도 중요한 정찬 자리에 미덥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난 괜찮아. 지금 피한다 해도 이곳에 있는 걸 조금 연장하는 정도잖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에 엘리사가 죄책감을 가지길 바라지 않았다. 내가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을 확인한 엘리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도와줄게.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고마워.”
엘리사의 친절한 제안은 아주 고마운 것이었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다. 아니, 받아서는 안 되었다. 음모가 들통 나기라도 한다면 죄 없는 엘리사가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넘겼다. 다행히도 점점 다가오는 정찬 시간 덕분에 엘리사를 비롯한 모두는 타인에게 신경을 쓰기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그중 가장 많이 바쁜 사람은 손님 앞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식사 시중을 맡은 하녀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담당 하녀들을 불러 모은 하녀장은 새 옷을 지급했다. 새 옷을 입은 다음은 깐깐한 검사가 이어졌다.
“깔끔하게 중앙으로 틀어 올려라. 머리카락 한 올도 내려오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손톱이 불결하게 이게 뭐냐. 짧게 자르고 깨진 부분이 없도록 잘 다듬어라.”
“입술 연지 같은 것은 집어치워! 네년들의 입술에 누가 시선을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