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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여자 나이 스물아홉에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까지 줄줄이 치러 냈다. 그러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 * *

언젠가 그가 말했다.
‘여름이 노망을 부리네요.’
해를 삼킨 먹장구름이 바짝 내려앉았다. 별장 어귀로 들어서자 사나운 바람을 타고 온 빗방울이 후드득 금비의 얼굴을 때렸다. 펼쳐 든 우산도 곧 뒤집혔다. 바람과 드잡이를 하는 사이에 종아리부터 웃옷까지 축축하게 젖었다. 공연히 치마를 입고 나왔다. 오늘은 멋진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를 만나는 자리인지라 금비는 거울 앞에서 안 하던 패션쇼를 치렀다. 결국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가 마뜩잖게 내린 결론이 가장 여성스러운 옷을 걸치는 것이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세워진 정자를 지나쳐 미루나무가 길게 뻗어 있는 개울을 건너자 늦여름 숲에 숨어 있던 윤서의 별장이 보였다. 금비가 근무하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윤서의 별장을 가리켜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라고 불렀다. 검은 양복을 즐겨 입고 대낮에는 좀처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집주인의 신비로운 일상이 어느 선생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나머지 선생님들이 맞장구를 치다 보니 굳어진 명칭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등을 후려쳤다. 또다시 우산이 뒤집히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빗물이 머리로 쏟아졌다. 흠뻑 젖은 금비는 윤서의 표현을 빌려 불퉁거렸다.
“노망난 여름 같으니. 숫제 똥칠을 하네!”
그때 드라큘라 성 쪽에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켜고 다가와 금비 앞에 멈추었다.
차창이 내려졌고, 갸름한 얼굴 중앙으로 콧날이 시원하게 솟은 남자가 촉촉한 눈동자로 금비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뽀얀 피부와 날렵한 턱선 탓에 그는 서른세 살의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하지만 내면의 웅숭깊음으로 보자면 또래들을 압도했다. 그가 바로 여름이 노망을 부린다고 말했던 김윤서였다.
“타세요.”
“젖었는데…….”
“어서요!”
금비가 조수석에 앉자 윤서는 정자까지 내려가 차를 돌렸다.
“택시를 타고 오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윤서가 특유의 높낮이가 없는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덧 2년째 겪는 말투다. 말에 감정을 싣지 않아도 그가 힐책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비가 올 줄 몰랐어요.”
숲길을 좋아해 어지간해서는 차를 타기보단 걸어 다니는 금비의 취향을 그가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책망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추궁하는 성격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다.
윤서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갑자기 금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며 금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몸이 바짝 굳었다. 그는 콘솔 박스를 열어 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 작은 접촉에 가슴이 쿵쾅거렸던 일이 객쩍어 금비는 배시시 웃으며 수건을 받았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다 말고 젖은 시트를 닦아 냈다. 그가 힐긋 보았다. 눈길이 닿은 시간은 지극히 짧았지만 분명 금비의 젖은 머리카락을 콕 찍고 갔다. 푹 젖은 머리카락이 처량해 보일 것 같아 새삼 부끄러워진 금비는 변명했다.
“나무한테 물벼락을 맞았어요.”
“저런, 나무가 재채기를 했군요.”
“재채기…… 그, 그러네요.”
하긴. 늙은 여름이 노망을 부린다는데, 나무가 재채기를 못 하랴.
흰색 울타리를 거느린 정문으로 차가 다가가자 육중한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가사도우미로 올 땐 늘 작은 문을 이용했기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차에서 내려 정원을 지나자 앞치마를 두른 두 명의 중년 여성이 현관문 앞에서 금비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따로 가사도우미를 부른다고 듣긴 했지만 두 명인 줄은 몰랐다. 아니, 두 명이 아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또 다른 두 명의 남자 조리사들이 보였다.
“어, 엄마!”
안방 문이 열리고 영우가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윤서의 딸인 서진이도 다가와 배꼽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서진이는 물론이고 영우도 금비의 차림새를 신기한 양 살폈다.
“치, 치마 입어, 입었어요, 엄마?”
금비는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라 윤서를 힐끔거렸다. 마을에서 드라큘라 백작으로 불리는 윤서는 자신의 성 안에서 가장 소중한 공주인 서진이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봐 왔던 익숙한 ‘서진이 아버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를 보자 막연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비 좀 닦으세요.”
가사도우미가 두툼한 수건을 공손히 내밀었다. 금비가 삶고 빨기도 했던 수건이었다. 금비는 헝클어진 차림새를 대충 수습한 뒤 거실의 그랜드 피아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 윤서가 건네준 음표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면 이 순간 초대의 의미도 알 것 같으련만.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서진이의 여섯 살 생일상을 차려 주었던 출장 조리사 할아버지가 젊은 조리사와 함께 또 다른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집안일을 책임지는 최 여사도 오늘 하루만큼은 손님의 모습으로 자리했다. 서진이와 영우는 마치 친남매처럼 어깨를 맞붙인 채 조리사의 화려한 손놀림에 푹 빠져 즐거워했고, 윤서는 포도주를 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주인공도 모르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보죠?”
“네?”
금비의 당연한 물음에 정작 초대한 윤서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는 투였다.
“일단 드시죠. 그러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말은 법정의 판사만큼이나 권위가 있었다. 금비는 습관적으로 그의 말을 따르며, 역시 습관적으로 영우에게 먼저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놔두시죠.”
그가 말렸다.
“영우도 이제 다섯 살인데 이번 기회에 배워 두는 것도 좋습니다.”
그의 말에 금비는 조리사 할아버지에게 바닷가재 먹는 법을 배우고 있는 서진이와 영우를 바라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살을 바르는 일이 번거로워 껍질이 다 발라진 버터구이를 겨냥해 포크질을 했다. 봄에 있었던 서진이의 생일날 이후로 생애 두 번째 먹는 바닷가재 요리였다. 특히 오늘은 짭조름한 풍미가 뛰어나서 더욱 맛있었다.
조리사 할아버지가 연신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고, 두 명의 가사도우미는 접시와 포크를 교체하는 등 정중하게 시중을 들었다. 한두 숟가락이 겨우 담긴 트뤼플(송로버섯) 크림소스 접시를 비우자 또 새로운 음식이 나왔다.
“훌륭한 숙성 기술을 가진 자는 훌륭한 요리사라고 말해 주는 음식이랍니다.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라 한결 부드러울 겁니다.”
얄밉지 않을 만큼만 뽐을 내는 조리사 할아버지였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윤서의 차가운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수다를 풀어내지 못한 할아버지가 캐비어를 젤라틴으로 마감한 디저트를 내놓으면서 기어이 한마디를 더 풀어놓았다.
“흔한 푸딩과는 태생부터 다릅죠. 캐비어는 푸아그라, 트뤼플과 함께 세계 3대 진미로 쳐준답니다.”
조리사는 표정에 인색한 금비의 식사 모습에 조바심이 났을지도 모른다. 귀한 음식이니 기왕이면 알고 먹으라는 오지랖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허기졌던 금비는 돌연 식욕을 잃어버렸다. 왜 이리 불편할까?
한때 영우가 아파서 기운이 없으면 망설이다가 한두 개 사서 죽을 끓였던, 전복으로 만든 다양한 요리가 외곽에 밀려나 있는 식탁이었다. 더욱이 금비 단 한 사람을 초대하면서 네 명의 일꾼을 따로 불렀다. 언젠가 금비는 이런 식탁을 앞에 두고 계급사회니, 세습된 부 따위를 생각하느라 맛을 즐기지 못했다.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이 식탁의 비용과 셋집 시절의 월세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굴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쓴웃음이 나오고 입맛도 써 버렸던 것이다.

조리사와 도우미가 돌아가고, 아이들은 2층에서 뛰어놀았다.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영우의 여린 목청이 이따금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여섯 살을 코앞에 두고도 낯을 가리고 말을 더듬거리는 아이가 서진이 곁에서는 수다스럽다. 서진이도 영우와 함께 있으면 진종일 지치지 않고 종알거린다.
어느덧 널찍한 창으로는 어둠의 커튼이 드리워졌고, 할로겐 조명을 품은 유리로는 물안개가 꽃처럼 번지고 있었다.
윙윙.
발코니에 다녀왔기에 비바람이 진즉에 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신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방음이 뛰어난 집을 뚫고 자신의 귀를, 심장을 뒤흔들고 있는 바람의 정체를 금비는 알 것 같았다. 바로 한 남자가 몰고 온 바람이었다. 과연 윤서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명이 도드라졌다.
“드십시오.”
윤서가 붉은 포도주를 채운 잔을 건네주었다. 그렇잖아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소주를 한 병 따고 싶었던 금비는 주저 없이 잔을 비웠다. 그가 다시금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저녁에 단둘이 마주 앉은 일 자체만 해도 그에게는 파격인데 대작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특유의 무심한 표정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이 묘하게 어떤 안도감을 준다.
“술이 들어가니 좀 편해 보이군요.”
“제가 불편하게 보였나 봐요?”
“떨고 계셔서 걱정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나 해서요.”
“아뇨. 익숙한 상황들이 잠깐 낯설어 보여서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익숙한 상황이요?”
그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재차 확인하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는 말을 금비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생각에 골몰한 끝에 금비가 얻은 답은 늘 같았다. 가사도우미 이상은 아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노예근성이 견고했다.
그가 찬찬히 금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속내를 읽기라도 했다는 양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막상 익숙한 상황을 얻고 나면 안주하고 싶지요. 더 좋은 길이 있어도 익숙한 것에 대한 기득권 때문에 스스로를 묶어 버린답니다.”
마치 그녀의 노예근성은 귀찮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힐난하는 듯싶었다. 그 노예근성이 밑바닥 삶의 인내심에는 유용했다는 반박을 포기한 채 금비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쯤에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씀해 주시죠.”
“아! 그래야죠.”
윤서가 술잔을 비웠다. 입가로 붉은 술이 피처럼 흘러내렸다. 금비는 자신도 모르게 큭, 웃어 버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한 번 뜰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거짓말엔 원체 소질이 없었다. 그렇다고 피를 마신 드라큘라가 생각났다고 말해 줄 수는 없잖은가.
“그보다…… 법원 일 그 후로 뒤끝은 없나요?”
“네. 또 신세를 졌어요. 감사드려요.”
“협의가 모양새는 좋아 보여도 소송에 비해 나중에 번거로운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젠 괜찮을 겁니다.”
그는 ‘협의’나 ‘소송’ 뒤에 ‘이혼’이라는 낱말을 도려냈다. 변호사 친구를 소개시켜 줄 때부터 줄곧 단어 하나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금비는 협의 이혼을 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도박에 빠져 사는 전남편에게 시달렸다. 무엇보다 영우가 협상의 대상이 되는 일을 참을 수 없었다. 윤서의 도움으로 마침내 법원의 판사로부터 ‘다른 말 안 하기’라는 최종 판결을 받아 낼 터였다. 그런데 영우의 성을 금비의 성으로 바꿔 주는 데는 실패할 것 같다. 엄마의 성을 따름으로써 아이가 얻게 될 행복과 이익을 법원에 납득시키기엔 아직 그녀의 상황이 여러모로 부족했다. 무엇보다 전남편의 시부모가 손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오늘 저녁 주인공은 황금비 씨입니다.”
“서, 서진이 아버님!”
“제가 황금비 씨한테 청할 일이 있습니다. 성인 남자가 성인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청입니다.”
금비는 입 안에 굴리고 있던 술을 하마터면 내뿜을 뻔했다. 성인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청이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가망성은 희박하지만 몸을 줘야 한다면 기꺼이 줄 생각까지도 했다. 정숙한 여자의 삶을 칭송하는 이야기 따위는 생존의 공포 속에선 개나 줘 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영우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고, 헤어진 남편이나 시댁에도 떳떳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그에게 갚을 빚이 있었다. 부담은 쌓이고 또 쌓였다. 어떤 형태로든 갚지 않으면 금비 스스로 질식할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방법이 늘 문제였다. 그것이 변변찮은 몸뚱이로 가능하다면 청산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영우를 저의 호적에 올리십시오.”
“네?”
금비는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풀썩 주저앉았다. 놀라움보다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