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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 서진이 아버님. 그건 제가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죠?”
“영우의 성을 황 씨로 바꿔 주는 것은 번거롭잖습니까. 그러니 제 호적에 올리세요. 제가 김 씨니까 김영우, 괜찮지 않습니까?”
그의 무심한 말투는 종종 기계적인 언어로 처방 용어를 말하는 의사를 떠올리게 했다.
“저 머리가 나빠요.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금비는 심호흡을 한 뒤 간신히 말을 토해 냈다. 그는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설마…… 지금 저하고 결혼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죠?”
“부담 갖지 마십시오. 결혼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영우에게 아빠의 성과 추억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갈수록 어렵다. 급기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머리도 더 이상의 용량은 감당 못 한다고 아우성이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윤서는 재혼 이야기만 들으면 누구에게든 차가운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영전 사진과 유품으로 여전히 이 집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그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그가 청혼 비슷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는 어림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금비는 자신이 여자로서는 매력이 별로라고 인정해 왔다. 아담한 키며 수수하다는 말도 칭찬이 될 수 있는 외모의 여자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그는 금비에게 이성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돌연히 굳게 닫혀 버린 그의 입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금비는 찬찬히 기억의 창고를 열었다.
1. 공짜는 없다
스물일곱 살의 금비는 서울의 아파트 단지 안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딸을 데리고 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의 뒤로 숨어 있던 서진이는 다섯 살이었다. 금비는 다섯 살 이하인 ‘달님 반’ 담당이었다. 당시에는 정식 교사도 아닐뿐더러 주로 두세 살배기 아이들의 울음을 멈추게 하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게 주된 일이었기에 상담실로 들어가는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가 낯익어 보였다. 큰 키에 약간 마른 체구인 그는 균형 잡힌 골격 때문인지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다.
상담실 안을 훔쳐보고 나온 선생님들이 멋지다는 둥 차갑다는 둥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원장 선생님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남자와 함께 나왔다.
“안녕하세요. 김서진입니다.”
여자아이가 배꼽 인사를 한 뒤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금비는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는 자신의 세 살 아들을 바라보았다. 영우도 다섯 살이 되면 이렇게 낯가림 안 하고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검은 양복의 남자가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얼결에 금비도 허리를 굽혔다. 정식 교사가 아닌 보조 교사인 그녀에게까지 그가 인사를 챙길 줄은 몰랐다.
검은 양복이 나가자 선생님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왜 아빠가 데려왔을까?”
“맞벌이 시대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그래요. 가만! 최 선생님, 관심 있나 봐요.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쳐다보시더라. 참으세요. 부모님이세요.”
“아니, 뭐. 옷이 특이하잖아요. 검은 넥타이에 검은 양복.”
“하긴 그러네요. 어디 조문 가시나?”
그날 이후로도 그는 검은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날마다 조문을 가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의 검은 양복에 대한 집착은 어린이집에 호기심을 주었다. 평소 원생들의 환경을 친절히 설명해 주시던 원장 선생님은 무슨 이유인지 검은 양복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집에 갈 때는 50대 중반의 깡마르고 날카로워 보이는 여자가 서진이를 데려갔고, 아침에는 항상 검은 양복이 직접 데리고 왔다. 서울의 변두리라고 해도 토박이가 드문 아파트 단지였기에 주민들은 이웃끼리 적당히 무심한 채로 살고 있었다. 때문에 검은 양복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날아들지 않았다. 집안일을 봐준다는 50대의 여자도 입이 무거웠다.
그의 가족사는 일주일이 지나서 밝혀졌다. 원장 선생님이 아닌 서진이의 입을 통해서였다.
“우리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는데요.”
“그, 그랬구나. 물어봐서 미안해, 서진아.”
영우와 가깝게 지내는 서진이에게 금비는 금방 정이 들었다. 또래들과 원만히 지내면서 틈이 나면 영우와 블록을 같이 만들고 색칠 공부를 도와주는 행동거지가 오달져 보였다. 그러나 조숙한 아이라는 느낌이 어느 순간 각도를 달리했다. 한창 엄마를 찾을 나이인 서진이 영우를 통해 도리어 엄마 역할을 하려 든다는 의혹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이는 집안일을 봐주는 중년 여자를 고모라고 불렀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던 검은 양복의 누나라고 하기에는 터울이 커서 이 역시 선생님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여선생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등 공신은 철저히 비사교적이어서 깨지지 않는 그의 신비로움이었다. 덕분에 종종 입방아에 올랐다.
“서진이가 혹시 딸이 아니라 조카나 뭐 그런 친척 아이가 아닐까?”
“그러게. 한 부모 가정이라면 건너편 구립 어린이집에 우선순위로 들어갈 텐데, 여기로 온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직업이 뭘까?”
“가정기록표엔 프리랜서라고만 적혀 있더라고요.”
“모델이 아닐까? 몸매도 그렇고, 그치?”
“어머! 그러고 보니 진짜로 잡지에선가 한번 본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검은 양복의 신상마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조합해 갔다. 그럴 만도 했다. 금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혼이었으니.
대도시의 남루한 땟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마을은 도시 개발 지구로 선정되어 친근하기보단 산만했다. 어린이집을 끼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지나 퇴근을 하면서 금비는 늘 그래 왔듯 부러운 눈길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자는 과거와 달리 요즘은 서민 아파트촌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녀에겐 가장 작은 평수도 탐나는 궁전이었다. 남편이 조금만 현명했으면 지금쯤 이곳 아파트에 정착했으리라.
모처럼 평일 한낮의 햇살을 누리며 단지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단독주택이 밀집한 소방 도로 곳곳에 재개발이니 조합장 선출이니 하는 현수막 따위가 걸려 있었다. 조만간 이사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렇지만 남편을 채근할 수는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남편이었다.
사이버 학점으로 보육 교사 교육원을 수료한 금비는 곧 보육 교사 3급 자격증을 취득할 터였다. 실습을 마치고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외출했다. 정식 교사가 되면 수입이 좋아질 것이고, 남편도 조만간 취직을 할 테니 어두운 터널은 거의 벗어난 성싶었다.
주민 센터로 가려다가 신분증을 안 가져온 게 떠올라 집으로 향했다. 기와가 없는 2층집을 쳐다보자니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연립주택 전세를 빼서 남편의 카드빚을 갚은 뒤 월세로 얻은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세 식구의 유일한 둥지였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남편은 착실히 집을 지키면서 공부를 하나 보다. 직업 훈련소를 다니던 남편이 집에서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는 미심쩍어했다. 사이버 강좌를 들으며 정리한 노트를 보여 준 뒤에야 믿었다. 그 후로도 금비는 남편 몰래 컴퓨터 사용 기록을 검색해 보곤 했다. 확실히 남편은 취업 목표와 연관된 ‘건전한’ 사이트만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우에게 조금씩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사건 이후 다시는 남편 혼자 있을 때 영우를 집에 두지 않고자 했던 맹세도 곧 거둘 성싶다.
집 안에 들어선 금비는 이맛살을 모았다. 집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담배는 집 밖에서 피우라고 했건만.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컴퓨터 앞의 남편이 화들짝 놀랐다. 부랴부랴 키보드를 두드리며 당황하는 남편의 행동거지에 불길한 예감이 훅 밀려왔다. 이런 일이 반년 전에도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모니터가 점멸하기 전에 금비는 분명히 그래프를 보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화면이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었죠?”
그녀는 한달음에 컴퓨터로 다가가 전원을 다시 켰다.
“이게 왜 이래. 비켜!”
남편의 완력을 버텨 내며 금비는 그가 한 손으로 수습하는 경마 정보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켜 방문 기록을 확인했다.
“경마까지 해요?”
“재미야, 재미!”
“어쨌거나 아까 당신 주식 하고 있었잖아요!”
금비는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심장 부위를 손아귀로 움켜쥐며 간신히 내뱉었다.
“뭘 확인해! 공부하다가 시세나 구경하면서 잠깐 머리 좀 식혔다. 재미, 그냥 재미로…….”
“증권사 가서 확인해요. 당장 같이 가!”
창졸간에 알 수 없는 드센 기운에 휩싸여 그녀는 목청껏 소리쳤다. 여자의 이런 악다구니는 지옥의 가정에서나 나오는 거라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목청을 높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아니면, 당장 증권사 로그인해서 기록을 보여 줘요!”
“사람 말을 왜 못 믿고 지랄이야, 씨발!”
이미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남편 말을 믿고 싶었는데, 쌍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한 가닥 남은 희망을 놓아 버렸다. 처음 저 쌍욕을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들었을 때 얼마나 서럽고 충격적이었던가. 이제는 서러움보다 악이 앞선다.
“돈 없잖아. 어디서 났어! 잘난 시어머니가 주시진 않았을 테고…….”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농을 뒤졌다. 없다. 금비의 명의로 만든 통장이 사라졌다.
“찾아 쓴 거예요?”
“……아니.”
“왜 자신 있게 말 못 해요. 좋아요. 은행에 갔다가 증권사도 같이 가요!”
“채워 놓을게.”
“뭐라고요? 찾아 쓴 거예요? 이, 이, 나쁜…….”
급기야 그녀는, 늘 믿고 있었던 ‘인간의 품격’에 관한 선을 넘어 버렸다.
“나쁜 새끼! 너도 남자냐? 너도 사람이냐! 그 돈이 뭔 돈인 줄 알아! 군대 간 내 동생 돈을 네가 왜 손대! 가난한 누나 이사 가라고 빌려준 돈인 줄 너도 알잖아! 이사는 어떻게 할래. 여기 보증금으로 방 얻을 수 있어? 말해 봐. 이 미친 새끼야!”
“이년이 이제 보니 깡패네. 웃겨. 그동안 요조숙녀 연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냐?”
무릎을 꿇고 빌어도 용서하지 않을 참인데 도리어 비아냥거리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돈은 절대 손댈 수 없어서 최저 시급 받아 가지고 그걸로 월세 내고 굶으면서 살았다. 나는 굶으면서도 너는 남편이라고 꼬박꼬박 삼찬 오찬 챙겨 줬다!”
“갚을게.”
“틀렸어.”
“갚는다잖냐.”
“당신은 틀렸다고!”
영우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녀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영우가 있어서 죽지도 못하는 현실을 저주했다.
금비는 이내 어금니를 악물었다. 주저앉을 때가 아니었다. 거리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그나마 남은 돈이라도 건져야 했다.
“다 돌려줘요. 지금 은행에 같이 가요.”
“내가 찾아서 채워 놓는다니까!”
“가요!”
“자꾸 이러면 한 푼도 안 돌려준다.”
“당장 가요!”
완강한 금비의 태도 앞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그가 문득 비웃음을 흘렸다.
“사실 처남 돈도 아니잖아?”
“뭐라고요?”
“당신이 처남 대학 등록금 대 줬잖아.”
“미쳤군요. 지금 혼수 안 해 온 것 따질 처지야?”
“등록금 아니었음 어차피 당신 결혼 자금이었잖아.”
“치사한 자식. 너도 남자냐! 이 짐승아, 돈 내놓고 우리 끝내!”
“이거 놓고 말해, 깡패 년아!”
그녀는 그악스럽게 남편에게 매달렸다. 떼어 내는 남편을 다시 붙잡으려던 금비의 매운 손이 얼결에 그의 얼굴을 훑었다.
“아이, 씨발! 이년이!”
뺨에 난 손톱자국을 어루만지던 남편이 불쑥 주먹을 날렸다. 반년 전, 처음 맞았을 적에는 넋을 잃고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금비도 같이 주먹을 내밀었다. 예쁘지 않고 똑똑하지도 못한 여자가 주먹이 맵다는 일이 어디 흉이나 되겠는가.
집기가 날아가고 부서지는 상황에서 우습게도 그녀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보호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사이버 학습과 영우의 어린이 방송 채널은 여전히 필요하다.
퍽!
어디를 맞았는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서 고꾸라졌다.
“너도 참! 본색이 나오니 정말 지랄맞은 년이구나. 왜 어른들이 근본을 따지는지 알겠다.”
나뒹군 그녀의 육신 위로 남편은 한참 동안 독설을 배설한 뒤에 집을 나갔다. 이대로 누워서 영영 잠이 들고 싶었다. 근본, 본색. 과연 그럴까? 결혼 전만 해도 드라마에 나오는 부부 싸움 장면처럼, 남자가 아무리 화를 내도 여자가 다소곳이 받아 주면 남자 스스로 풀어지고 도리어 사랑이 새록새록 자란다고 믿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상대가 화를 내도 같이 얼굴을 붉히지 않으며 살아왔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도 금실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진화일까, 본색일까?
얼굴이 부어오르고 갈비뼈가 시렸다. 영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처참했다. 패잔병의 모습 그대로였다. 삶의 전쟁에서도, 애정 전선에서도 패배자가 되었다. 그것들을 감추기에는 얼굴의 피딱지들이 너무 또렷하다. 집 안에는 그 흔한 선글라스도 하나 없었다. 대충 치운 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용감하게 거리를 걸었다. 마감 시간 전에 은행에 들어갔다. 예전과는 달리 한결 까다로워진 절차를 거쳐 새로운 통장을 발급받았다. 정말로 돈이 죄다 인출되어 있었다. 다리가 풀렸다.
“손님! 손님!”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저, 서진이 아버님. 그건 제가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죠?”
“영우의 성을 황 씨로 바꿔 주는 것은 번거롭잖습니까. 그러니 제 호적에 올리세요. 제가 김 씨니까 김영우, 괜찮지 않습니까?”
그의 무심한 말투는 종종 기계적인 언어로 처방 용어를 말하는 의사를 떠올리게 했다.
“저 머리가 나빠요.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금비는 심호흡을 한 뒤 간신히 말을 토해 냈다. 그는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설마…… 지금 저하고 결혼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죠?”
“부담 갖지 마십시오. 결혼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영우에게 아빠의 성과 추억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갈수록 어렵다. 급기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머리도 더 이상의 용량은 감당 못 한다고 아우성이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윤서는 재혼 이야기만 들으면 누구에게든 차가운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영전 사진과 유품으로 여전히 이 집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그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그가 청혼 비슷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는 어림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금비는 자신이 여자로서는 매력이 별로라고 인정해 왔다. 아담한 키며 수수하다는 말도 칭찬이 될 수 있는 외모의 여자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그는 금비에게 이성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돌연히 굳게 닫혀 버린 그의 입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금비는 찬찬히 기억의 창고를 열었다.
1. 공짜는 없다
스물일곱 살의 금비는 서울의 아파트 단지 안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딸을 데리고 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의 뒤로 숨어 있던 서진이는 다섯 살이었다. 금비는 다섯 살 이하인 ‘달님 반’ 담당이었다. 당시에는 정식 교사도 아닐뿐더러 주로 두세 살배기 아이들의 울음을 멈추게 하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게 주된 일이었기에 상담실로 들어가는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가 낯익어 보였다. 큰 키에 약간 마른 체구인 그는 균형 잡힌 골격 때문인지 강인한 분위기를 풍겼다.
상담실 안을 훔쳐보고 나온 선생님들이 멋지다는 둥 차갑다는 둥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원장 선생님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남자와 함께 나왔다.
“안녕하세요. 김서진입니다.”
여자아이가 배꼽 인사를 한 뒤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금비는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는 자신의 세 살 아들을 바라보았다. 영우도 다섯 살이 되면 이렇게 낯가림 안 하고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검은 양복의 남자가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얼결에 금비도 허리를 굽혔다. 정식 교사가 아닌 보조 교사인 그녀에게까지 그가 인사를 챙길 줄은 몰랐다.
검은 양복이 나가자 선생님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왜 아빠가 데려왔을까?”
“맞벌이 시대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그래요. 가만! 최 선생님, 관심 있나 봐요.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쳐다보시더라. 참으세요. 부모님이세요.”
“아니, 뭐. 옷이 특이하잖아요. 검은 넥타이에 검은 양복.”
“하긴 그러네요. 어디 조문 가시나?”
그날 이후로도 그는 검은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날마다 조문을 가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의 검은 양복에 대한 집착은 어린이집에 호기심을 주었다. 평소 원생들의 환경을 친절히 설명해 주시던 원장 선생님은 무슨 이유인지 검은 양복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집에 갈 때는 50대 중반의 깡마르고 날카로워 보이는 여자가 서진이를 데려갔고, 아침에는 항상 검은 양복이 직접 데리고 왔다. 서울의 변두리라고 해도 토박이가 드문 아파트 단지였기에 주민들은 이웃끼리 적당히 무심한 채로 살고 있었다. 때문에 검은 양복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날아들지 않았다. 집안일을 봐준다는 50대의 여자도 입이 무거웠다.
그의 가족사는 일주일이 지나서 밝혀졌다. 원장 선생님이 아닌 서진이의 입을 통해서였다.
“우리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는데요.”
“그, 그랬구나. 물어봐서 미안해, 서진아.”
영우와 가깝게 지내는 서진이에게 금비는 금방 정이 들었다. 또래들과 원만히 지내면서 틈이 나면 영우와 블록을 같이 만들고 색칠 공부를 도와주는 행동거지가 오달져 보였다. 그러나 조숙한 아이라는 느낌이 어느 순간 각도를 달리했다. 한창 엄마를 찾을 나이인 서진이 영우를 통해 도리어 엄마 역할을 하려 든다는 의혹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이는 집안일을 봐주는 중년 여자를 고모라고 불렀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던 검은 양복의 누나라고 하기에는 터울이 커서 이 역시 선생님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여선생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등 공신은 철저히 비사교적이어서 깨지지 않는 그의 신비로움이었다. 덕분에 종종 입방아에 올랐다.
“서진이가 혹시 딸이 아니라 조카나 뭐 그런 친척 아이가 아닐까?”
“그러게. 한 부모 가정이라면 건너편 구립 어린이집에 우선순위로 들어갈 텐데, 여기로 온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직업이 뭘까?”
“가정기록표엔 프리랜서라고만 적혀 있더라고요.”
“모델이 아닐까? 몸매도 그렇고, 그치?”
“어머! 그러고 보니 진짜로 잡지에선가 한번 본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검은 양복의 신상마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조합해 갔다. 그럴 만도 했다. 금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혼이었으니.
대도시의 남루한 땟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마을은 도시 개발 지구로 선정되어 친근하기보단 산만했다. 어린이집을 끼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지나 퇴근을 하면서 금비는 늘 그래 왔듯 부러운 눈길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자는 과거와 달리 요즘은 서민 아파트촌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녀에겐 가장 작은 평수도 탐나는 궁전이었다. 남편이 조금만 현명했으면 지금쯤 이곳 아파트에 정착했으리라.
모처럼 평일 한낮의 햇살을 누리며 단지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단독주택이 밀집한 소방 도로 곳곳에 재개발이니 조합장 선출이니 하는 현수막 따위가 걸려 있었다. 조만간 이사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렇지만 남편을 채근할 수는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남편이었다.
사이버 학점으로 보육 교사 교육원을 수료한 금비는 곧 보육 교사 3급 자격증을 취득할 터였다. 실습을 마치고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외출했다. 정식 교사가 되면 수입이 좋아질 것이고, 남편도 조만간 취직을 할 테니 어두운 터널은 거의 벗어난 성싶었다.
주민 센터로 가려다가 신분증을 안 가져온 게 떠올라 집으로 향했다. 기와가 없는 2층집을 쳐다보자니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연립주택 전세를 빼서 남편의 카드빚을 갚은 뒤 월세로 얻은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세 식구의 유일한 둥지였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남편은 착실히 집을 지키면서 공부를 하나 보다. 직업 훈련소를 다니던 남편이 집에서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는 미심쩍어했다. 사이버 강좌를 들으며 정리한 노트를 보여 준 뒤에야 믿었다. 그 후로도 금비는 남편 몰래 컴퓨터 사용 기록을 검색해 보곤 했다. 확실히 남편은 취업 목표와 연관된 ‘건전한’ 사이트만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우에게 조금씩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사건 이후 다시는 남편 혼자 있을 때 영우를 집에 두지 않고자 했던 맹세도 곧 거둘 성싶다.
집 안에 들어선 금비는 이맛살을 모았다. 집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담배는 집 밖에서 피우라고 했건만.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컴퓨터 앞의 남편이 화들짝 놀랐다. 부랴부랴 키보드를 두드리며 당황하는 남편의 행동거지에 불길한 예감이 훅 밀려왔다. 이런 일이 반년 전에도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모니터가 점멸하기 전에 금비는 분명히 그래프를 보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화면이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었죠?”
그녀는 한달음에 컴퓨터로 다가가 전원을 다시 켰다.
“이게 왜 이래. 비켜!”
남편의 완력을 버텨 내며 금비는 그가 한 손으로 수습하는 경마 정보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켜 방문 기록을 확인했다.
“경마까지 해요?”
“재미야, 재미!”
“어쨌거나 아까 당신 주식 하고 있었잖아요!”
금비는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심장 부위를 손아귀로 움켜쥐며 간신히 내뱉었다.
“뭘 확인해! 공부하다가 시세나 구경하면서 잠깐 머리 좀 식혔다. 재미, 그냥 재미로…….”
“증권사 가서 확인해요. 당장 같이 가!”
창졸간에 알 수 없는 드센 기운에 휩싸여 그녀는 목청껏 소리쳤다. 여자의 이런 악다구니는 지옥의 가정에서나 나오는 거라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목청을 높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아니면, 당장 증권사 로그인해서 기록을 보여 줘요!”
“사람 말을 왜 못 믿고 지랄이야, 씨발!”
이미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남편 말을 믿고 싶었는데, 쌍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한 가닥 남은 희망을 놓아 버렸다. 처음 저 쌍욕을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들었을 때 얼마나 서럽고 충격적이었던가. 이제는 서러움보다 악이 앞선다.
“돈 없잖아. 어디서 났어! 잘난 시어머니가 주시진 않았을 테고…….”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농을 뒤졌다. 없다. 금비의 명의로 만든 통장이 사라졌다.
“찾아 쓴 거예요?”
“……아니.”
“왜 자신 있게 말 못 해요. 좋아요. 은행에 갔다가 증권사도 같이 가요!”
“채워 놓을게.”
“뭐라고요? 찾아 쓴 거예요? 이, 이, 나쁜…….”
급기야 그녀는, 늘 믿고 있었던 ‘인간의 품격’에 관한 선을 넘어 버렸다.
“나쁜 새끼! 너도 남자냐? 너도 사람이냐! 그 돈이 뭔 돈인 줄 알아! 군대 간 내 동생 돈을 네가 왜 손대! 가난한 누나 이사 가라고 빌려준 돈인 줄 너도 알잖아! 이사는 어떻게 할래. 여기 보증금으로 방 얻을 수 있어? 말해 봐. 이 미친 새끼야!”
“이년이 이제 보니 깡패네. 웃겨. 그동안 요조숙녀 연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냐?”
무릎을 꿇고 빌어도 용서하지 않을 참인데 도리어 비아냥거리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돈은 절대 손댈 수 없어서 최저 시급 받아 가지고 그걸로 월세 내고 굶으면서 살았다. 나는 굶으면서도 너는 남편이라고 꼬박꼬박 삼찬 오찬 챙겨 줬다!”
“갚을게.”
“틀렸어.”
“갚는다잖냐.”
“당신은 틀렸다고!”
영우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녀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영우가 있어서 죽지도 못하는 현실을 저주했다.
금비는 이내 어금니를 악물었다. 주저앉을 때가 아니었다. 거리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그나마 남은 돈이라도 건져야 했다.
“다 돌려줘요. 지금 은행에 같이 가요.”
“내가 찾아서 채워 놓는다니까!”
“가요!”
“자꾸 이러면 한 푼도 안 돌려준다.”
“당장 가요!”
완강한 금비의 태도 앞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그가 문득 비웃음을 흘렸다.
“사실 처남 돈도 아니잖아?”
“뭐라고요?”
“당신이 처남 대학 등록금 대 줬잖아.”
“미쳤군요. 지금 혼수 안 해 온 것 따질 처지야?”
“등록금 아니었음 어차피 당신 결혼 자금이었잖아.”
“치사한 자식. 너도 남자냐! 이 짐승아, 돈 내놓고 우리 끝내!”
“이거 놓고 말해, 깡패 년아!”
그녀는 그악스럽게 남편에게 매달렸다. 떼어 내는 남편을 다시 붙잡으려던 금비의 매운 손이 얼결에 그의 얼굴을 훑었다.
“아이, 씨발! 이년이!”
뺨에 난 손톱자국을 어루만지던 남편이 불쑥 주먹을 날렸다. 반년 전, 처음 맞았을 적에는 넋을 잃고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금비도 같이 주먹을 내밀었다. 예쁘지 않고 똑똑하지도 못한 여자가 주먹이 맵다는 일이 어디 흉이나 되겠는가.
집기가 날아가고 부서지는 상황에서 우습게도 그녀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보호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사이버 학습과 영우의 어린이 방송 채널은 여전히 필요하다.
퍽!
어디를 맞았는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서 고꾸라졌다.
“너도 참! 본색이 나오니 정말 지랄맞은 년이구나. 왜 어른들이 근본을 따지는지 알겠다.”
나뒹군 그녀의 육신 위로 남편은 한참 동안 독설을 배설한 뒤에 집을 나갔다. 이대로 누워서 영영 잠이 들고 싶었다. 근본, 본색. 과연 그럴까? 결혼 전만 해도 드라마에 나오는 부부 싸움 장면처럼, 남자가 아무리 화를 내도 여자가 다소곳이 받아 주면 남자 스스로 풀어지고 도리어 사랑이 새록새록 자란다고 믿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상대가 화를 내도 같이 얼굴을 붉히지 않으며 살아왔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도 금실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진화일까, 본색일까?
얼굴이 부어오르고 갈비뼈가 시렸다. 영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처참했다. 패잔병의 모습 그대로였다. 삶의 전쟁에서도, 애정 전선에서도 패배자가 되었다. 그것들을 감추기에는 얼굴의 피딱지들이 너무 또렷하다. 집 안에는 그 흔한 선글라스도 하나 없었다. 대충 치운 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용감하게 거리를 걸었다. 마감 시간 전에 은행에 들어갔다. 예전과는 달리 한결 까다로워진 절차를 거쳐 새로운 통장을 발급받았다. 정말로 돈이 죄다 인출되어 있었다. 다리가 풀렸다.
“손님! 손님!”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