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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CF 광고, 화보 포스터 촬영이 주 업무인 <오브> 스튜디오는 색다른 촬영 기법과 출중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어, 이 바닥에선 꽤 인정받고 있는 업체였다.
스튜디오 직원들은 대부분 해외 촬영 때문에 자릴 비우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일정 오프로 당첨된 단영과 그녀의 대학 동문 후배인 은효 단둘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여유였다. 물론, 다음 주부턴 꽉 채워진 일정 때문에 숨 쉴 틈조차 없이 바빠지겠지만, 단영은 지금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싶었다.
“아…… 비 오네.”
힐끔 날씨를 확인한 단영이 중얼거렸다.
출근할 때부터 우중충한 날씨가 어째 위태롭다 했더니, 이내 떨어진 빗방울이 토옥, 톡 창문을 두드렸다. 반가운 봄비가 찾아왔다.
“선배.”
자리로 다가온 은효를 발견한 단영이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을 슬쩍 떼어 냈다.
은효는 단영의 밑에서 포토그래퍼 일을 배우고 있는 남자 후배였다. 그를 볼 때마다 남동생 단태가 생각나, 부쩍 정을 주게 됐다.
“응?”
“저, 작업 다 끝나서 먼저 퇴근해 볼게요.”
“벌써?”
그 말에 억울하다는 듯, 은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라뇨. 밤샘 작업 하느라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갔는데.”
정말이었다. 그의 눈 밑으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하며, 어제와 같은 옷차림, 부스스한 머리가 작업 과정이 얼마나 고됐는지를 대신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일 때문에 정신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러냐.”
일은 무슨. 남자한테 대차게 차이고 다니느라 정신없었지.
바늘로 양심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 들었으나, 굳이 후배에게 치부를 드러낼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한 단영은 급히 화두를 돌렸다.
“……어쨌든 수고 많았어. 아, 그리고 이번에 네가 작업한 그 여배우 있잖아. 누구였지?”
“서윤지요?”
“응. 퇴근하는 길에 서윤지 씨 매니저한테 작업 끝났다고 문자 하나 넣어 줘. 안 받으면 엔터로 직접 해 주고. 오늘까지 확답받아야 돼.”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은효는 대답 대신 깊은숨을 푸욱 내쉬었다.
“선배. 저 다음부턴 서윤지 씨 일 또 들어오면 작업 패스하면 안 될까요?”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세요. 다짜고짜 없는 가슴을 D컵으로 만들어 달라고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 기껏 키워 줬더니 뭐라는지 압니까?”
“뭐라는데?”
단영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그건 D컵이 아니라, B 85거든요? 여자 가슴 안 만져 봤어요? 이래요.”
서윤지의 새침한 말투를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은효가 우스워, 단영은 그만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배, 이건 웃을 일이 아니에요. B 85. 와, 나 진짜. 한 소리 하려다가 찡찡거리는 거 듣기 싫어서 대충 알겠다 했거든요? 근데 이번엔 축 처졌다고 다시 줄여 달라잖아요. 지가 원하는 모양은 이게 아니라면서. 뭐라더라, 물방울 모양?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어요.”
“…….”
“가슴 수정을 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뭣보다 매번 새벽 시간대만 골라서 연락하는데, 기본 매너가 없는 건지, 대놓고 엿 먹이겠단 의도인 건지…….”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는 은효 앞에서 단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참아. 연예인들 까탈스러운 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
“거기서 끝났으면 말도 안 해요. 허벅지 줄여 달라, 턱 깎아 달라, 눈 키워 달라. 심지어는 발목까지 얇게 해 달라잖아요. 저 무슨 성형외과 의사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요.”
은효의 불만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뒀다간 주구장창 밤새도록 신세 한탄할 게 뻔했다.
단영은 우쭈쭈, 그랬어? 내 새끼, 수고 많았어. 하며 어화둥둥 은효를 달래 주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화기가 가라앉은 모양이다. 은효는 그만 가 보겠단 말을 끝으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어휴…….”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된 단영은 기지개를 쭉 켰다. 때마침,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웬일이야?”
발신자는 하나뿐인 막둥이 혈육, 단태였다.
― 멀쩡한 집 버려두고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건데.
퉁명스러웠지만 꼴에 하나뿐인 남동생이라고, 외박한 누나가 걱정은 됐나 보다.
“아, 미안. 나 어제 술 많이 마셔서 도하준 집에서 잤는데, 말해 주는 걸 깜빡했다.”
― 하준이 형이 누나 술 취한 거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
“말도 마. 안 그래도 출근할 때까지 주구장창 잔소리 들었으니까. 귀 떨어지는 줄 알았어.”
― 잘하는 짓이다.
어째, 누군가를 절로 생각나게 할 법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단태는 유독 하준을 잘 따랐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라며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준의 모교에 입학하고 말겠다며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되겠어? 무려 한국대야.’ 단영은 코웃음 쳤지만 그녀를 대놓고 비웃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한국대 수시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기어코 하준의 대학 후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민재는 뜻밖의 쾌거에 단태를 업고 방방 뛰었었다. 집안 경사가 났다면서. 물론, 무뚝뚝한 세훈과 하준은 수고 많았다며 단태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 전부였다.
단영이 컴퓨터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2시 30분.
“학교야? 밥은?”
― 먹었어.
“군대는 언제쯤 갈 생각인데? 우편물 보니까 병무청에서 온 거 있더라.”
― 1학년 종강하면 바로 갈 거야. 하준이 형 말로는 그때가 시기적으로 제일 좋댔어.
단영이 열여섯 살이었을 때, 단태는 고작 코찔찔이 아홉 살 난 초등학생이었다. 그 초딩이 언제 이렇게 커서……. 그녀는 새삼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체감했다.
하준이 자신을 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째 기분이 묘하다.
― 누나.
대뜸 단태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가라앉았다.
“왜?”
― 엄마랑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단영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 누나 일 바쁜 거 알고 입장도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연락은 자주 좀 해. 미우나 고우나 엄마잖아. 하준이 형한테 미안해 죽겠어.
“네가 도하준한테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는데.”
순간, 단영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단태가 한숨을 밀어 내며 말을 이었다.
― 엄마가 통화하면서 말해 줬는데, 하준이 형이 우리 대신 꼬박꼬박 잊지 않고 부산 다녀갔었대.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많이 나눴다더라. 솔직히 누나보단 형이 훨씬 더 바쁜 사람이잖아. 미안하지도 않아?
아, 도하준 진짜. 그는 매번 이런 식으로 뒤에서 자신을 나쁜 년, 불효녀 만드는 데 선수였다. 단영은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 용돈도 드렸다는데, 워낙 큰돈이라 받기가 너무 미안해서, 엄마가 어쩔 줄 몰…….
“무슨 소리야. 엄마 용돈은 내가 매달 보내 주고 있는데. 도하준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사람 몹쓸 년으로 만들고 있어.”
― 오버하지 마. 그런 거 가지고 누나 몹쓸 년이라 생각할 사람 한 명도 없으니까.
단영이 입술을 꽉 물었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준이었다. 너 두고 보자. 단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최단태. 잠깐 전화 끊지 말고 기다려. 양반 되기 글러 먹은 인간한테 전화 왔어.”
― 그냥 끊고 형 전화 받아. 누나가 그렇게 반응할 거 예상하고 형이 절대 말하지 말라 했는데……. 어쨌든 형한텐 뭐라 하지 마. 내 입장만 난감해지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단영은 부재중 문자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익숙한 하준의 전화번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그 당시의 엄마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한 상태였다. 음주, 도박을 일삼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와, 24시간 식당 주방 일을 해야 했던 엄마의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도박에 필요한 밑돈이 부족해질 때면, 그는 매번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돈을 갈취해 갔고, 엄마가 절대 안 된다며 극구 거절하기라도 하는 날엔, 온갖 가전제품과 물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어려서부터 제법 눈치가 빨랐던 단영은 그런 상황이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애써 의연한 척 굴며 저보다 어린 단태를 옆집에 맡겨 놓곤 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빈집을 치우는 건, 늘 단영의 몫이었다.
“이해는 한다고, 나도…….”
머리로는 알겠다. 엄마이기 이전에 지아비에게 맘껏 사랑받고 싶은 여자일 테고,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란 걸. 그래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도중에 도망친 그녀를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용서하고 이해하려 노력은 해 봤지만,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큰 숨을 들이마셨다.
다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도하준은 잘못한 게 없어. 스스로에게 세뇌하며 단영은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어.”
― 전화받는 태도 봐라.
낮은 음성이 단영의 고막을 울렸다.
“새삼스럽게 무슨.”
― 흘려듣지 말고, 고칠 생각부터 해.
누가 교수 아니랄까 봐. 단태와의 통화로 진작 예민해진 상태에서 호통까지 듣게 되니 단영은 더 삐뚤어졌다. 짜증도 났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고맙기도 했다. 이 감정은 대체 뭔지.
3분쯤 흘렀을까. 지금처럼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침묵이 단영은 싫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정적을 깨려 하지 않았고, 하준 역시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며 닦달하거나 추궁한 적 없이 차분히 기다려 주곤 했는데, 그게 참 편안했다.
한 가지 주제를 두고 토론 아닌 토론이 벌어지거나, 미묘한 감정의 골 때문에 다툴 위기가 되면 이 방법이 명약이었다. 어느 정도 침착함이 찾아오자, 먼저 말문을 튼 쪽은 단영이었다.
“비 온다.”
― 그러네.
다소 뜬금없는 말에도 하준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었다.
― ……화는. 다 풀렸고?
“화난 적 없거든.”
― 그래, 그렇다 쳐.
싱겁긴. 금방 포기할 거면서 묻긴 또 왜 물어봐. 단영은 괜히 궁금해졌다.
“궁금하지도 않아?”
― 앞으로 배고프면 말로 해. 짜증 부리지 말고.
“야.”
― 오빠.
됐다. 말을 말자.
“학교는 어때? 애들이 짓궂게 굴거나 하진 않았어? 최소한 멘탈 정돈 나갔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다?”
― 내가 너냐.
하여간, 뭔 말을 못 해요. 단영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욕했다.
― 최단영. 너 지금 내 욕 했지.
귀신이 따로 없다. 괜히 덜미 잡혔다간 앞으로 지겹도록 휘둘려야 했기에, 하준의 질문을 무시하기로 했다.
“……밥은 먹었어? 설마, 같이 식당 갈 사람 없다고 혼자 화장실 가서 먹은 건 아니지?”
― 학생이며 교수며 하도 귀찮게 달라붙어서 할 수 없이 혼자 샌드위치 먹었다.
“변명 한번 참 절절하게 한다.”
단영의 입가로 은근한 미소가 걸쳐졌다. 그와 동시에 픽, 하고 옅게 터진 하준의 웃음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점차 거칠어졌다. 투두둑 투두둑 창문에 부딪치는 빗줄기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했다.
“무슨 비가 저렇게 공격적으로 내려……. 장마철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 우산은.
아, 우산.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단영이 다급하게 우산꽂이 쪽으로 다가갔다.
“있을…….”
우산은커녕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없네.”
― 한 시간 뒤에 전화하면 내려와.
“됐어. 바로 밑에 편의점 있으니까 사면 돼.”
그게 아니라. 하준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뚝 끊긴 흐름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이어졌다.
― ……같이 밥 먹어 줘.
푸흡. 단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빵 터트렸다. 맞다. 도하준 왕따였지.
“알겠어, 빨리 와. 개강한 기념으로 누나가 쏠게.”
마치, 대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분명 교수님인데 학교에 있어서 그런가. 단태의 동기처럼 느껴져 자꾸 웃음꽃이 피었다.
― 전화하면 나와.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 미련한 짓 하지 말고.
무심함이 뚝뚝 흘러넘쳤지만, 혹여 찬바람 때문에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하고 있단 걸 안다. 단영은 그렇게 하겠다며 고분고분 순응했다.
― 먼저 끊어.
늘 그렇듯이 오늘도 하준은 그녀가 먼저 휴대폰을 내려 둘 때까지 기다렸다.
“응.”
싫다 해도 소용없었다. 단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금 바깥을 바라보았다. 비가 주륵주륵 시원하게 내린다.
단영은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특별했던 그날이 자꾸만 생각나서.
도하준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