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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하준은 통화가 끊긴 액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응시했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
여전히 시선은 바깥에 두고 있었지만, 손에 들린 휴대폰은 빛을 잃어버릴 새도 없이 번쩍거렸다.
학교로 출근하는 날은, 본부장인 하준의 부재를 대신 맡아 줄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회의 결과 보고나 결재 서류 사인 등을 목적으로 둔 직원들의 연락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금 하준은 직원들의 간절한 연락을 받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원하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시원한 비바람이 설설 불어닥쳤다. 교수 연구실 창가에 걸려 있던 커튼이 살랑살랑 춤을 추자, 반박자 늦게 하준의 고동색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다.
‘비 오는 날’은, 하준과 단영에게 특별했다. 처음 만났던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니까. 벌써 12년이나 지났지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연하기만 하다.
하준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을 느리게 문질렀다. 기분 좋은 일을 떠올리는 모양인지, 그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 * *

찰박찰박, 사람들의 걸음이 심상치 않다. 분명 오늘 아침 일기 예보에선 맑음일 거라 예고했는데, 봄비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찾아왔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빗줄기로 인해 사람들은 혼비백산 움직였다.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버스 터미널 입구는 인파로 붐볐다. 약속한 시간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거나,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있거나. 대부분 웃음이 가득했다.
울상이 된 얼굴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단영과, 짜증 섞인 표정을 한 하준을 제외하면 말이다.
“…….”
주변을 훑던 하준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멈췄다. 슬쩍 봐도 조막만 한 여자애였다. 차양 밑이었지만, 점차 거세진 바람 때문에 사선으로 날아드는 비를 피할 순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어깨가 현재 추위의 정도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얼어 죽든지, 말든지.”
하준은 극히 무심한 성격이었다. 타인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다거나, 선뜻 도움을 베풀어 줄 만큼 다정하지 못했다.
속으로 ‘불쌍하다’ 생각될 만도 한데,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했다. 하준의 무미건조한 눈이 다시금 정면으로 옮겨졌다.
“아, 왜 이렇게 안 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약속한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하준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다짜고짜 우산이 없다며 데리러 나와 달라는 민재의 부탁 때문이었다. 한창 바빠야 할 재수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으로 놀러 간 민재는 웬 연상녀와 눈이 맞았다고 했다.
만약 국대(국가 대표) 축구 선수 친필 사인만 아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시했을 거다.
하준이 민재에게 전화를 걸어 볼 요량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려는 찰나였다.
“학생, 괜찮아?”
웬 중년 여성의 큼지막한 음성에 반사적으로 다시금 하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 그 여자애다.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그녀를 불렀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초지일관 무릎을 꽉 껴안고는 얼굴을 푹 숙인 채였다.
“아이고, 이 상처 좀 봐! 아직 많이 어려 보이는데……. 119 불러 줄까? 아니면 경찰에 먼저 신고를 해야 하나?”
그 말에 하준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대충 봐서 몰랐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아주머니의 말처럼 도자기 같은 얼굴에 피멍과 상처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단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아줌마가 도와줄게. 응? 일단 일어나 봐. 그러다 얼어 죽겠어, 학생.”
단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꼼짝없이 자리를 지켰다.
당사자에게나 순수한 호의일 뿐이지, 받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귀찮기만 한 오지랖에 지나지 않을 텐데. 하준은 금세 흥미를 잃고 매정히 고개를 돌렸다.
일방적인 친절과 거절은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러다 끝내 지친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고집스러운 단영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
하준은 이제야 좀 조용해질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주변은 귀가 아프도록 소란스럽기만 한데, 왜 하필 훌쩍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건지.
처음은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5분, 10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으나, 민재는 올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찝찝함만 더욱 증폭될 뿐이다.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차 깊어졌다.
집 나온 고양이 같기도 하고,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 같기도 한 저 여자애가.
“아, 진짜…….”
눈에 밟혀 짜증 난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우산. 우산만 주고 오자. 발을 떼어 내기까진 쉽지 않았으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 더러운 기분만 떨쳐 낼 수 있다면, 뭐가 됐든 빨리 처리하고 싶었다.
하준은 넓은 보폭으로 막힘없이 단영에게 다가갔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그녀의 가슴팍 언저리에 새겨진 학교 마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째 익숙한 교복이라 했는데, 근처 중학교였다.
“……전 괜찮다니까요.”
하준이 무어라 물어보기도 전, 그녀는 울음기가 묻어난 음성으로 경계심부터 내비쳤다. 가깝게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 방금 전에 저를 귀찮게 했던 아주머니라 여긴 듯하다.
“야.”
‘저기요.’도 아니고, ‘괜찮아요?’도 아니었다. 무뚝뚝함이 줄줄 흐르는 듯한 ‘야.’, 그게 전부였다.
생각지도 못한 낮은 음성이 툭 튀어나오자, 단영이 느릿느릿 얼굴을 들었다. 처음으로 둘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하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이 참 인상적이다.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무척이나 깊이 있고 말갛다.
이상하게…… 숨이 잘 안 쉬어졌다.
하준은 하마터면 그 눈빛에 빨려 들어가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몸은 전보다 더 심하게 떨었다.
하준은 아주머니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남자가 두려운가? 아니면, 저 자신이 무서운 건가. 그는 최대한 사사로운 잡생각들을 지워 내고 무심히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건데.”
신경 쓰이게.
“들어가서 기다리면 될 걸, 왜 굳이 밖에 나와서 그러고 있어.”
그의 시니컬한 말투에도 단영은 답이 없었다. 그저 하준만 가만히 올려다볼 뿐이다. 파란색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무섭게 생긴 오빠. 그게 첫인상이었다. 단영은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그 찰나, 하준의 입술이 들썩였다.
“보니까, 입은 멀쩡한 것 같은데.”
하준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왜 말을 안 해.”
“…….”
“아. 나랑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뭐 그런 건가.”

아무래도 그런가 보다. 결코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순간 어이가 없어 실소가 짧게 터졌다.
저 봐. 또 떤다.
단영을 본 하준이 별안간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단영의 눈동자도 밑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시선이 얼추 맞춰졌다. 단영은 뚫어져라 하준을 응시했다. 날렵한 눈매 하며,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더욱 단영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다 봤어?”
그 말에 단영은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하준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섰다.
“그럼, 나도 이제 너 좀 볼게.”
여전히 단영은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은 무릎에 팔을 걸치고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뺨 한쪽에 물들어 있는 피멍이 꽤 아플 것 같았다. 관자놀이와 입술엔 피딱지가 보였다. 확신하건대, 타인에 의한 외상이었다.
그의 잇새로 절로 한숨이 샜다. 이미 왼손은 바지 주머니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준은 연고를 쥐었다 폈다 하며 갈등했다.
줘? 말아? 이게 뭐라고 고민이다. 축구, 농구 할 것 없이 운동을 즐겨 하던 하준이라, 상처가 생기는 일 정돈 빈번했기에 늘 연고를 지니고 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다.
“자.”
결국 꺼냈다. 단영은 커다란 손 위에 놓인 연고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아, 상처. 단영은 뒤늦게 이해했다.
“괜찮아요.”
“그럴 줄 알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하준은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초연했다. 그가 단영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그 악력이 어찌나 세던지, 무릎을 꼬옥 감싸고 있던 손이 쉽게 떨어졌다.
포기하고 돌아가리라 예측한 것이 완벽히 엇나가자, 당황한 그녀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서늘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계속 물어봤자 대답 안 해 줄 거 같으니까, 듣는 건 포기할게.”

작은 손바닥 위로 연고가 놓였다. 단영은 기분이 이상했다.
“자.”
간지럽기도 했고,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는 경찰이나 119에 신고하지도 않았고, 사정을 알려 달라며 유난을 떨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억지 부리지 말고 제때 발라.”
정말이지 고작 연고 하나 따위에 마음이, 자꾸만 마음이 이상하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단영은 연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애 얼굴에 흉터 생기면 안 예뻐.”
“…….”

끝까지 대답 안 하지. 됐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할 만큼 한 거다. 적어도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저 여자애를 상대로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은 없어졌으니까.
하준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 엄마요.”
바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내뱉은 ‘엄마’란 말에, 하준은 움직이려다 말고 멈칫했다.
“뭐?”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일단 무턱대고 저지르긴 했는데, 그다음부턴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몰라 단영은 혼란스러웠다.
“……아팠겠네.”
그러나 정작 하준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말을 뱉었다.
“네?”
“상처.”

하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한 번을 피하지 않고 단영의 눈만 똑바르게 주시했다. 그에 비해 단영은 그의 눈을 쉬이 마주치지 못했다.
“……이 상처는. 그러니까, 상처는 절대 맞아서 생긴 게 아니에요. 아빠를 말리려고 움직이다가, 우연히 아빠가 던진 작은 어항에 맞아서 그래요. 엄마를 따라가다 넘어지기도 했고요. 제 불찰이었어요.”
원망스럽단 말 한 번을 안 한다. 그래서 기특하긴 한데.
“안 물어봤어.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투는 무심했지만, 하준의 표정은 부드러이 풀어져 있었다.
“아…… 네.”
단영은 민망함이 밀려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꾹 씹었다. 그걸 용케 눈치챈 하준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장난이야. 그래서?”
“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놀리는 것 같아 그만둘까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단영은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짐들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싶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인데, 뭐 어때. 그런 가벼운 심정으로.
“주변 어른들이 신고해 주신 덕분에 경찰 아저씨가 아빠를 데려갔어요. 그 이후로 아빠는 집에 오지 않아요. ……물론, 엄마도요. 외할머니한테 저를 맡기고 가셨어요.”
두서없이 이어진 그녀의 말을 하준은 보채지 않고 덤덤히 들어 주었다.
“할머니 전화도 안 받아서 무작정 파출소에 찾아가 부탁했더니, 경찰 아저씨가 엄마랑 통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온다고 했는데…… 분명 오늘 오겠다고 그랬는데…….”
끝내 단영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참으려고 입술을 씹던 치아에 힘을 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주먹을 쥐기도 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 그게 뭐가 창피하다고 참고 있어.”
무심한 그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단영은 가까스로 참고 있던 울음을 빵 터트렸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엉엉 울었다.
어린 동생에게 들킬까, 늦은 새벽 홀로 끙끙 앓아야 했다.
어두운 집. 기댈 곳 없는 혼자.
모든 것이 막막했다. 쌓아 온 상념을 쏟아 내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그녀는 하염없이 통곡했다.
원망보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미움보단 지금 당장 엄마의 품이 그리워서. 아주 잠시였지만 다정했던 아빠가 보고 싶어서. 그래서 울었다. 오늘까지만 울고, 내일부턴 웃으려고.
“…….”
하준은 그런 단영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들겨 주지도, 괜찮아질 거란 희망 어린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정도, 연민도 없는. 묘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