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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하준이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어, 어디 가요?”
단영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울음을 뚝 그치고는 불안스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하준의 바지 밑단을 작은 손으로 꽉 움켜잡는 걸 잊지 않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단 결의가 보였다.
“무리한 부탁이란 거 아는데…… 엄마 올 때까지만 같이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시고, 집엔 어린 동생이 있어요. 자꾸 울어서, 오늘은 꼭 엄마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 혼자 기다리면 조금 무서…… 아니, 심심해서 그래요.”
순간, 하준은 누군가가 무거운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기분이 들었다. 이 작은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호의가 싫었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이었다.
황무지 같은 사막 한가운데에 뚝 떨어져 버린 자신에게 생명수를 건네줄 사람. 어쩌면, 너는 곁을 지켜 줄 어른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준은 묵묵히 단영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기다렸어.”
그러다 이내 대답 듣길 포기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단영은 강한 힘에 이끌려 어정쩡한 자세로 휘청거렸다. 하준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순발력 있게 어깨를 받쳐 주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다. 손에 닿은 그녀의 교복 와이셔츠가 차가웠다. 하준의 눈가가 살풋 찡그려졌다.
“안 올 거야.”
“뭐라고요?”
단영의 눈빛이 돌연 사나워졌다.
“너희 어머니. 안 오실 거라고.”
지나가던 일곱 살 어린아이도 알 법한 해답이었다.
“와요! 반드시 올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확신하는 그의 말을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
“취미야? 두 번씩 묻게 만드는 거.”
하준이 한쪽 다리에 힘을 풀고 삐딱하게 섰다.
“……단영이요.”
“안 들려.”
“최, 단영.”
“아, 귀가 간지럽다.”
“최단영!”
전보단 조금 커진 음성이었지만, 하준은 일부러 안 들리는 척했다. 단영에게 들키지 않도록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기까지 했다.
“다시.”
“최단영이라고요!”
단영은 눈을 질끈 감고 젖 먹던 힘을 다해 꽥 소리쳤다.
“씩씩하네.”
한쪽 눈을 슬며시 뜨자,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하준이 동공 속에 담겼다. 예뻤다. 멋있었다.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청량한 미소였다. 단영은 순간 멍했다.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 보지 말고.”
이어진 하준의 말을 단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은.”
절레절레. 단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는.”
“……없어요.”
힘없는 대답에, 하준은 무거운 숨을 흘려보냈다.
“결정해. 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가든지. 아니면 너희 어머니 올 때까지 밤새도록 기다려 보든지.”
“…….”
단영은 묵묵부답이었다. 배도 고팠고, 함께 기다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자리를 뜰 순 없었다. 엄마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준에게 같이 밤새도록 기다려 달라 말하기도 미안했다.
날은 추웠고, 그와는 오늘 처음 만났으므로.
“좋아. 기다려, 그럼.”
하준은 거리낌 없이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영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왜요. 왜 이렇게까지 해 줘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까는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며.”
“밤새도록은 아니었어요.”
“그거나, 이거나.”
하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
“그럴 수도 있고.”
하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사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했는지 하준 저 자신조차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단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같이 기다려는 주는데, 하나만 약속해.”
“뭔데요…….”
“오늘 이후로 절대 울지 않겠다고.”
“…….”
“약속해.”
잠깐의 동정일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작은 변덕이 생겼을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자신 없으면 일어나.”
단영은 그 말을 듣고도 우물쭈물했다. 답답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단절된 상태로 침묵만 유지됐다.
이래저래 눈치만 살피던 단영을 힐긋거린 하준이 별안간 말문을 텄다.
“중학생답지 않게 무거운 고민 떠안고 살지 마. 너 아직 그럴 때 아니야.”
“…….”
“많이 웃어.”
아직은 많이 어린 나이. 한창 투정 부리며 지내야 할 사춘기 여중생.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도 받아 보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네 주변 또래 애들처럼 예쁘고, 좋은 것만 담고 살아.”
단영은 눈을 깜빡였다. 걱정이 되어 위로해 주는 느낌이라기보다, 흘러가듯이 말하는 투였다. 어차피, 안 볼 사이니까.
“지금처럼 울적하게 있지 말고.”
“…….”
“그런다고 달라질 거, 하나도 없으니까.”
파도처럼 넘실대는 지금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너 지금 얼굴 되게 못생겨 보여.”
하준은 당연하게 여겨 왔다. 부족함 없이 자란 집안 환경, 가족, 친구, 평범한 학교생활. 그런데 그 당연한 것들이 어쩌면 너에겐 너무나 간절하고 먼 꿈일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세상엔 행복한 일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다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버티라고. 보란 듯이 버텨 내 보이라고.
그렇게 경멸하던 오지랖을 그녀의 앞에서 부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런데요…….”
단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왜.”
“오빤, 친구 많아요?”
어색한 공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피하고 싶어 아무렇게나 꺼낸 질문이었다.
“몇 명 있어. 왜. 많을 것 같아 보여?”
“네. 그래서 부러워요. 저는 한 명도 없거든요.”
평범한 여중생이 될 자신이 부족하단 뜻이다.
“그럼 너도 해.”
“……네?”
“너도 내 친구 하라고. 그럼 되잖아.”
“친구라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 같지 않나요. 단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날카로운 그의 인상이 무서웠다.
“뭐. 싫어?”
“아,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오빠는 저랑 알던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게 뭐가 대수라고. 하준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
“아는 사람이랑 친구 할 거면 뭐 하러 해. 잘 모르는 사이니까 친구 하자는 거지.”
“힘들게 친해졌는데, 별로면 어떡해요?”
“내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고 털어 내면 되잖아.”
“그게 돼요? 전 무서울 것 같은데…….”
“걱정 마. 난 안 그러니까. 나름 안목 좋은 편이야.”
그때였다. 고요함을 뚫고 꼬르륵, 하며 단영의 배꼽 알람이 크게 울렸다. 단영은 적잖게 민망한 모양인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고, 하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만 가자.”
그렇게 말하며, 하준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 툭툭 바지를 털고 똑바르게 섰다.
그 뒷모습이 크게 보였다면,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먹구름이 사라져 간다. 단순히 스쳐 지나간 소나기였나 보다. 굵었던 빗줄기가 점차 얇아졌다.
“어, 어디를요?”
하준이 살짝 몸을 틀어 단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밥 먹으러.”
단영은 그 커다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망설이는 것이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무작정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미울 텐데, 끝까지 엄마 걱정뿐이다.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하준은 그런 단영이 답답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 휴대폰 줄 테니까, 정말 아니다 싶을 땐 경찰에 신고해. 그럼 되잖아.”
그가 좋은 사람일 거란 보장은 없다.
“빨리.”
그런데도 무작정 잡고 싶어졌다. 저질러 보고 싶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이 흩날리고, 마음은 파동을 친다. 바람에 섞인 비가 너무 시원했다. 찬 공기 냄새가 싱그럽다.
그녀의 작은 손이 천천히 커다란 손바닥 위로 얹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하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넌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거야.”
“그게 뭔데요?”
“용기.”
용기 내는 거.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어른들도 어려워해.
하준의 말에 단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제 쉬운 일들만 남았네.”
마법 같은 일이다. 그렇게 싫기만 했던 비가, 여느 때보다 좋아졌다.
그의 말 한마디로.
“축하해, 최단영.”
세상이 변했다.
* * *
똑똑똑.
연구실 문을 정확히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하준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가뿐히 밀어 올렸다.
“들어오세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연구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등장한 사람은 단아한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연신 주변을 의식하면서 머뭇거렸다.
하준의 눈이 자연스럽게 여학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녀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
“아까 교수님께서 대표 정해지면 연구실 들르라고 하셨잖아요.”
아, 대표. 옛 생각에 잠겨도 푹 잠겼었나 보다. 했던 말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부탁드릴 것도 있고요.”
“부탁? 나한테?”
“네.”
하준은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가죽 의자를 밀고 엉덩이를 떼어 냈다.
“의외네.”
정말 그랬다. 여학생은 대충 봐도 낯가림이 심한 편인 것 같았다. 보통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눈에 띄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텐데. 하준은 어쩐지 모순된 기분이 들었다.
여학생의 눈동자가 힐끔 하준에게 향하자, 그가 바로 해명했다.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대표는 제비뽑기로 정했어요.”
하준은 책상에 허리를 기댄 채 눈썹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이것들 봐라. 그렇게 좋아 죽을 땐 언제고. 아까 그거 다 가식이었어?”
“그게 아니라……. 서로 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뽑기로 결정한 거였어요.”
그래? 하준은 만족스럽단 의미를 담아 씩 웃었다.
“이름은?”
“김지영이요.”
기어들어 갈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그가 눈가를 구기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김……지영이요.”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하준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최단영이랑 이름 끝 글자가 같네. 정말 별거 아닌 거였다. 다소 억지스러운 끼워 맞추기였으나, 하준은 아무렴 좋았다.
“미안. 바빠서 아직 학생 명단을 제대로 확인 못 했다. 이름 못 외웠다고 서운해하지 마.”
물론, 관심이 없던 것도 있었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교수님 강의 듣는 학생들이 한두 명도 아니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지영은 얌전히 눈을 내렸다. 하준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별안간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거리 유지하고 있을 생각인데? 38선도 아니고. 나, 너 안 잡아먹는다.”
단영과 얽혔던 과거가 절로 떠올랐다. 지영은 연구실 문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바짝 문 앞에 붙어 있었고, 하준은 집무 책상에 기대어 섰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하준이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어, 어디 가요?”
단영은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울음을 뚝 그치고는 불안스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하준의 바지 밑단을 작은 손으로 꽉 움켜잡는 걸 잊지 않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단 결의가 보였다.
“무리한 부탁이란 거 아는데…… 엄마 올 때까지만 같이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시고, 집엔 어린 동생이 있어요. 자꾸 울어서, 오늘은 꼭 엄마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 혼자 기다리면 조금 무서…… 아니, 심심해서 그래요.”
순간, 하준은 누군가가 무거운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기분이 들었다. 이 작은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호의가 싫었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이었다.
황무지 같은 사막 한가운데에 뚝 떨어져 버린 자신에게 생명수를 건네줄 사람. 어쩌면, 너는 곁을 지켜 줄 어른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준은 묵묵히 단영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기다렸어.”
그러다 이내 대답 듣길 포기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단영은 강한 힘에 이끌려 어정쩡한 자세로 휘청거렸다. 하준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순발력 있게 어깨를 받쳐 주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다. 손에 닿은 그녀의 교복 와이셔츠가 차가웠다. 하준의 눈가가 살풋 찡그려졌다.
“안 올 거야.”
“뭐라고요?”
단영의 눈빛이 돌연 사나워졌다.
“너희 어머니. 안 오실 거라고.”
지나가던 일곱 살 어린아이도 알 법한 해답이었다.
“와요! 반드시 올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확신하는 그의 말을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
“취미야? 두 번씩 묻게 만드는 거.”
하준이 한쪽 다리에 힘을 풀고 삐딱하게 섰다.
“……단영이요.”
“안 들려.”
“최, 단영.”
“아, 귀가 간지럽다.”
“최단영!”
전보단 조금 커진 음성이었지만, 하준은 일부러 안 들리는 척했다. 단영에게 들키지 않도록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기까지 했다.
“다시.”
“최단영이라고요!”
단영은 눈을 질끈 감고 젖 먹던 힘을 다해 꽥 소리쳤다.
“씩씩하네.”
한쪽 눈을 슬며시 뜨자,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하준이 동공 속에 담겼다. 예뻤다. 멋있었다.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청량한 미소였다. 단영은 순간 멍했다.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 보지 말고.”
이어진 하준의 말을 단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은.”
절레절레. 단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는.”
“……없어요.”
힘없는 대답에, 하준은 무거운 숨을 흘려보냈다.
“결정해. 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가든지. 아니면 너희 어머니 올 때까지 밤새도록 기다려 보든지.”
“…….”
단영은 묵묵부답이었다. 배도 고팠고, 함께 기다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자리를 뜰 순 없었다. 엄마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준에게 같이 밤새도록 기다려 달라 말하기도 미안했다.
날은 추웠고, 그와는 오늘 처음 만났으므로.
“좋아. 기다려, 그럼.”
하준은 거리낌 없이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영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왜요. 왜 이렇게까지 해 줘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까는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며.”
“밤새도록은 아니었어요.”
“그거나, 이거나.”
하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
“그럴 수도 있고.”
하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사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했는지 하준 저 자신조차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단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같이 기다려는 주는데, 하나만 약속해.”
“뭔데요…….”
“오늘 이후로 절대 울지 않겠다고.”
“…….”
“약속해.”
잠깐의 동정일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작은 변덕이 생겼을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자신 없으면 일어나.”
단영은 그 말을 듣고도 우물쭈물했다. 답답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단절된 상태로 침묵만 유지됐다.
이래저래 눈치만 살피던 단영을 힐긋거린 하준이 별안간 말문을 텄다.
“중학생답지 않게 무거운 고민 떠안고 살지 마. 너 아직 그럴 때 아니야.”
“…….”
“많이 웃어.”
아직은 많이 어린 나이. 한창 투정 부리며 지내야 할 사춘기 여중생.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도 받아 보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네 주변 또래 애들처럼 예쁘고, 좋은 것만 담고 살아.”
단영은 눈을 깜빡였다. 걱정이 되어 위로해 주는 느낌이라기보다, 흘러가듯이 말하는 투였다. 어차피, 안 볼 사이니까.
“지금처럼 울적하게 있지 말고.”
“…….”
“그런다고 달라질 거, 하나도 없으니까.”
파도처럼 넘실대는 지금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너 지금 얼굴 되게 못생겨 보여.”
하준은 당연하게 여겨 왔다. 부족함 없이 자란 집안 환경, 가족, 친구, 평범한 학교생활. 그런데 그 당연한 것들이 어쩌면 너에겐 너무나 간절하고 먼 꿈일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세상엔 행복한 일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다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버티라고. 보란 듯이 버텨 내 보이라고.
그렇게 경멸하던 오지랖을 그녀의 앞에서 부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런데요…….”
단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왜.”
“오빤, 친구 많아요?”
어색한 공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피하고 싶어 아무렇게나 꺼낸 질문이었다.
“몇 명 있어. 왜. 많을 것 같아 보여?”
“네. 그래서 부러워요. 저는 한 명도 없거든요.”
평범한 여중생이 될 자신이 부족하단 뜻이다.
“그럼 너도 해.”
“……네?”
“너도 내 친구 하라고. 그럼 되잖아.”
“친구라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 같지 않나요. 단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날카로운 그의 인상이 무서웠다.
“뭐. 싫어?”
“아,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오빠는 저랑 알던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게 뭐가 대수라고. 하준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
“아는 사람이랑 친구 할 거면 뭐 하러 해. 잘 모르는 사이니까 친구 하자는 거지.”
“힘들게 친해졌는데, 별로면 어떡해요?”
“내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고 털어 내면 되잖아.”
“그게 돼요? 전 무서울 것 같은데…….”
“걱정 마. 난 안 그러니까. 나름 안목 좋은 편이야.”
그때였다. 고요함을 뚫고 꼬르륵, 하며 단영의 배꼽 알람이 크게 울렸다. 단영은 적잖게 민망한 모양인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고, 하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만 가자.”
그렇게 말하며, 하준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 툭툭 바지를 털고 똑바르게 섰다.
그 뒷모습이 크게 보였다면,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먹구름이 사라져 간다. 단순히 스쳐 지나간 소나기였나 보다. 굵었던 빗줄기가 점차 얇아졌다.
“어, 어디를요?”
하준이 살짝 몸을 틀어 단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밥 먹으러.”
단영은 그 커다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망설이는 것이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무작정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미울 텐데, 끝까지 엄마 걱정뿐이다.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하준은 그런 단영이 답답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 휴대폰 줄 테니까, 정말 아니다 싶을 땐 경찰에 신고해. 그럼 되잖아.”
그가 좋은 사람일 거란 보장은 없다.
“빨리.”
그런데도 무작정 잡고 싶어졌다. 저질러 보고 싶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이 흩날리고, 마음은 파동을 친다. 바람에 섞인 비가 너무 시원했다. 찬 공기 냄새가 싱그럽다.
그녀의 작은 손이 천천히 커다란 손바닥 위로 얹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하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넌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거야.”
“그게 뭔데요?”
“용기.”
용기 내는 거.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어른들도 어려워해.
하준의 말에 단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제 쉬운 일들만 남았네.”
마법 같은 일이다. 그렇게 싫기만 했던 비가, 여느 때보다 좋아졌다.
그의 말 한마디로.
“축하해, 최단영.”
세상이 변했다.
* * *
똑똑똑.
연구실 문을 정확히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하준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가뿐히 밀어 올렸다.
“들어오세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연구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등장한 사람은 단아한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연신 주변을 의식하면서 머뭇거렸다.
하준의 눈이 자연스럽게 여학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녀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
“아까 교수님께서 대표 정해지면 연구실 들르라고 하셨잖아요.”
아, 대표. 옛 생각에 잠겨도 푹 잠겼었나 보다. 했던 말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부탁드릴 것도 있고요.”
“부탁? 나한테?”
“네.”
하준은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가죽 의자를 밀고 엉덩이를 떼어 냈다.
“의외네.”
정말 그랬다. 여학생은 대충 봐도 낯가림이 심한 편인 것 같았다. 보통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눈에 띄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텐데. 하준은 어쩐지 모순된 기분이 들었다.
여학생의 눈동자가 힐끔 하준에게 향하자, 그가 바로 해명했다.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대표는 제비뽑기로 정했어요.”
하준은 책상에 허리를 기댄 채 눈썹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이것들 봐라. 그렇게 좋아 죽을 땐 언제고. 아까 그거 다 가식이었어?”
“그게 아니라……. 서로 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뽑기로 결정한 거였어요.”
그래? 하준은 만족스럽단 의미를 담아 씩 웃었다.
“이름은?”
“김지영이요.”
기어들어 갈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그가 눈가를 구기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김……지영이요.”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하준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최단영이랑 이름 끝 글자가 같네. 정말 별거 아닌 거였다. 다소 억지스러운 끼워 맞추기였으나, 하준은 아무렴 좋았다.
“미안. 바빠서 아직 학생 명단을 제대로 확인 못 했다. 이름 못 외웠다고 서운해하지 마.”
물론, 관심이 없던 것도 있었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교수님 강의 듣는 학생들이 한두 명도 아니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지영은 얌전히 눈을 내렸다. 하준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별안간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거리 유지하고 있을 생각인데? 38선도 아니고. 나, 너 안 잡아먹는다.”
단영과 얽혔던 과거가 절로 떠올랐다. 지영은 연구실 문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바짝 문 앞에 붙어 있었고, 하준은 집무 책상에 기대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