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프롤로그
처음 와 보는 동네라 혹시라도 길을 헤맬까 싶어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호텔에 도착해 시계를 확인했을 땐 약속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평소 입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으려니, 달에 불시착한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하지만 달에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갈 이유도 없고, 달에 가고자 지원한다 해도 보나마나 바로 탈락할 것이 분명하다.
구두 굽으로 바닥을 툭툭 차올리다가 가방 속에 늘 넣고 다니는 크로키 북과 HB연필을 꺼냈다. 4B연필은 너무 물러서 섬세하고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가 어렵고, 새내기 때 잔뜩 겉멋이 들어 무조건 하나씩 사고 보는 제도샤프는 가격이 비싸서 보통은 보급형으로 나오는 천 원짜리 제도샤프나 HB연필을 주로 썼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큰맘 먹고 산 육천 원짜리 제도샤프를 누군가 훔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빈번했다. 내건 소중하고, 남의 건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들고 있던 HB연필을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 바람에 연필심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할 수 없이 커터 칼을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호텔 커피숍에 앉아 연필을 깎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오는 길에 보았던 거리와 주변 건물을 떠올렸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 다른 색을 입혀 본다. 거기엔 공원도 있고 녹지도 있다. 우리는 이미 자연을 훼손해서 생겨 난 ‘도시’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저 세우기에만 급급했던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은 환경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 친화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세상이 온 것이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을 공존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 내가 꾸는 꿈은 그런 것이었다.
정신없이 스케치를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다. 그리고 있는 나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키가 큰 남자가 나를, 정확히는 내 스케치를 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스케치에서 눈을 뗀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내 역할은 앉아 있기만 하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짐작으로 알 수 있는 건 평범한 남자는 아닐 거라는 것 정도였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남자를 본다. 키가 크고, 적당히 말랐으며, 하얀 얼굴에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이 남자는, 그냥 보기에도 평범한 남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웨이터를 부르고, 차를 주문하는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감탄했다. 그런 건 연습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몸에 배인 여유니까.
“그래서, 시간당 얼마를 받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최대한 연기를 해 보였다.
“맞선을 보러 나오는데 상대에 대해 조사도 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내게 이 일을 부탁한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고용한 건 단지 부모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거절의 의미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러면 제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는지도 아시겠네요. 피차 바쁜 사람들인데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차라리 잘되었다. 나는 크로키 북을 덮어 가방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안 되죠. 난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이아영’ 씨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아영은 나를 고용한 사람의 이름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가도 되는 건지, 아니면 저 남자와 한 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밥이나 먹고 가죠. 어차피 점심 안 먹었을 거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요.”
어차피 이아영이 나에게 요구한 건 자기 대신 나가 달라는 게 전부였다. 굳이 한 시간을 채울 이유는 없었다. 남자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가방을 들쳐 메다시피 들고 터덜터덜 걷다 말고 발이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감하게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돌이나 유리에 베이더라도 빨간약 한번 발라 주면 된다. 이 구두는 처음부터 내게 맞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이 일을 하게 됐을 때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쉽게 돈을 버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제법 일이 들어왔다. 시간과 돈 모두가 필요한 내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마천루 끝에 걸린 구름이 그림처럼 예뻤다.
멋대로 훼손해 놓고, 이제 와 자연 친화를 들먹인다는 게 우습지만, 인류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이거야 원, 뻥 차 버린 애인한테 뒤늦게 매달리는 거랑 뭐가 다른가. 원래 모든 것이 가까이에 있을 때는 잘 안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멀리 있어야 보이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빵, 하고 울려 걸음을 멈추고 섰다. 내 걸음을 따라 멈춘 차에서 그 남자가 내렸다.
“이름이나 좀 압시다.”
“제 이름이 왜 궁금하신데요?”
내가 물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이유도 없는 사이에서 이름을 묻는 건 무의미했다.
“다시 만날 테니까.”
“네?”
남자가 확신해, 나는 의아했다.
설마 재벌 남이 가난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이 이루어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제게 벌어지는 건 아닐 테고. 문득 머릿속으로 이런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나하고 밥을 안 먹겠다고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불었고, 옅은 머스크 향이 코끝에 닿았고,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예뻤다. 도시의 소음은 동떨어진 세계의 소리인 양 멀었다.
멋진 남자가 순간에 걸어온 마법인지도 몰랐다. 나는 홀린 듯이 말했다.
“이그린이에요.”
이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말은 내게 시답잖은 농담처럼 여겨졌다. 둘 사이에 이다음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이그린 씨.”
도시를 그리는 사람들
“우리 업계에 이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인가.”
산더미처럼 쌓인 포트폴리오에 시선을 던지며, 지호가 한탄했다. 몇 개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이 밀려왔다. 하기 싫은 숙제를 두고 걱정만 하고 있는 꼴이다. 꼭 개학 하루 전날에 닥친 벼락치기처럼.
참신함은커녕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작품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경험 삼아’라는 말로 제 모자란 재능, 혹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면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지만 그것이 오만이라면 곤란하다. 어느 쪽이든 별로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냥 대충 한번 던져 보는 것이다. 못 먹는 감 한번 찔러 보듯이. 그런 정도의 마음이라면 이쪽에서도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실력이 없다면 하다못해 성의라도 있어야 존중할 것이 아닌가.
“너만 봐도 인재라고는 할 수 없지.”
피곤할 걸로 치면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재가 말했다.
“야.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사람 끌어들인 건 너거든.”
지호가 발끈했다.
“넌 설계에는 정말 재능이 없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니까. 네 재능을 알아본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안 그러면 되지도 않는 설계에 매달려서 청춘을 허비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나름대로는 미국의 조경 건축가인 캐서린 구스타프슨처럼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건축과에 들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설계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대신 안목이 뛰어나 작품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현재가 높이 산 건 지호의 그런 능력이었다.
“그래…… 참 고맙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현재를 두고 다시 포트폴리오를 보는 일에 열중하던 지호의 눈에 꽤 괜찮은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야. 현재야. 이거 봐라. 괜찮지 않…… 응? 어디 갔지?”
프롤로그
처음 와 보는 동네라 혹시라도 길을 헤맬까 싶어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호텔에 도착해 시계를 확인했을 땐 약속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평소 입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으려니, 달에 불시착한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하지만 달에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갈 이유도 없고, 달에 가고자 지원한다 해도 보나마나 바로 탈락할 것이 분명하다.
구두 굽으로 바닥을 툭툭 차올리다가 가방 속에 늘 넣고 다니는 크로키 북과 HB연필을 꺼냈다. 4B연필은 너무 물러서 섬세하고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가 어렵고, 새내기 때 잔뜩 겉멋이 들어 무조건 하나씩 사고 보는 제도샤프는 가격이 비싸서 보통은 보급형으로 나오는 천 원짜리 제도샤프나 HB연필을 주로 썼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큰맘 먹고 산 육천 원짜리 제도샤프를 누군가 훔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빈번했다. 내건 소중하고, 남의 건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들고 있던 HB연필을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 바람에 연필심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할 수 없이 커터 칼을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호텔 커피숍에 앉아 연필을 깎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오는 길에 보았던 거리와 주변 건물을 떠올렸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 다른 색을 입혀 본다. 거기엔 공원도 있고 녹지도 있다. 우리는 이미 자연을 훼손해서 생겨 난 ‘도시’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저 세우기에만 급급했던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은 환경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 친화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세상이 온 것이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을 공존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 내가 꾸는 꿈은 그런 것이었다.
정신없이 스케치를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다. 그리고 있는 나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키가 큰 남자가 나를, 정확히는 내 스케치를 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스케치에서 눈을 뗀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내 역할은 앉아 있기만 하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짐작으로 알 수 있는 건 평범한 남자는 아닐 거라는 것 정도였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남자를 본다. 키가 크고, 적당히 말랐으며, 하얀 얼굴에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이 남자는, 그냥 보기에도 평범한 남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웨이터를 부르고, 차를 주문하는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감탄했다. 그런 건 연습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몸에 배인 여유니까.
“그래서, 시간당 얼마를 받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최대한 연기를 해 보였다.
“맞선을 보러 나오는데 상대에 대해 조사도 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내게 이 일을 부탁한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고용한 건 단지 부모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거절의 의미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러면 제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는지도 아시겠네요. 피차 바쁜 사람들인데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차라리 잘되었다. 나는 크로키 북을 덮어 가방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안 되죠. 난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이아영’ 씨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아영은 나를 고용한 사람의 이름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가도 되는 건지, 아니면 저 남자와 한 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밥이나 먹고 가죠. 어차피 점심 안 먹었을 거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요.”
어차피 이아영이 나에게 요구한 건 자기 대신 나가 달라는 게 전부였다. 굳이 한 시간을 채울 이유는 없었다. 남자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가방을 들쳐 메다시피 들고 터덜터덜 걷다 말고 발이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감하게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돌이나 유리에 베이더라도 빨간약 한번 발라 주면 된다. 이 구두는 처음부터 내게 맞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이 일을 하게 됐을 때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쉽게 돈을 버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제법 일이 들어왔다. 시간과 돈 모두가 필요한 내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마천루 끝에 걸린 구름이 그림처럼 예뻤다.
멋대로 훼손해 놓고, 이제 와 자연 친화를 들먹인다는 게 우습지만, 인류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이거야 원, 뻥 차 버린 애인한테 뒤늦게 매달리는 거랑 뭐가 다른가. 원래 모든 것이 가까이에 있을 때는 잘 안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멀리 있어야 보이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빵, 하고 울려 걸음을 멈추고 섰다. 내 걸음을 따라 멈춘 차에서 그 남자가 내렸다.
“이름이나 좀 압시다.”
“제 이름이 왜 궁금하신데요?”
내가 물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이유도 없는 사이에서 이름을 묻는 건 무의미했다.
“다시 만날 테니까.”
“네?”
남자가 확신해, 나는 의아했다.
설마 재벌 남이 가난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이 이루어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제게 벌어지는 건 아닐 테고. 문득 머릿속으로 이런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나하고 밥을 안 먹겠다고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불었고, 옅은 머스크 향이 코끝에 닿았고,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예뻤다. 도시의 소음은 동떨어진 세계의 소리인 양 멀었다.
멋진 남자가 순간에 걸어온 마법인지도 몰랐다. 나는 홀린 듯이 말했다.
“이그린이에요.”
이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말은 내게 시답잖은 농담처럼 여겨졌다. 둘 사이에 이다음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이그린 씨.”
도시를 그리는 사람들
“우리 업계에 이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인가.”
산더미처럼 쌓인 포트폴리오에 시선을 던지며, 지호가 한탄했다. 몇 개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이 밀려왔다. 하기 싫은 숙제를 두고 걱정만 하고 있는 꼴이다. 꼭 개학 하루 전날에 닥친 벼락치기처럼.
참신함은커녕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작품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경험 삼아’라는 말로 제 모자란 재능, 혹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면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지만 그것이 오만이라면 곤란하다. 어느 쪽이든 별로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냥 대충 한번 던져 보는 것이다. 못 먹는 감 한번 찔러 보듯이. 그런 정도의 마음이라면 이쪽에서도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실력이 없다면 하다못해 성의라도 있어야 존중할 것이 아닌가.
“너만 봐도 인재라고는 할 수 없지.”
피곤할 걸로 치면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재가 말했다.
“야.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사람 끌어들인 건 너거든.”
지호가 발끈했다.
“넌 설계에는 정말 재능이 없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니까. 네 재능을 알아본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안 그러면 되지도 않는 설계에 매달려서 청춘을 허비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나름대로는 미국의 조경 건축가인 캐서린 구스타프슨처럼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건축과에 들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설계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대신 안목이 뛰어나 작품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현재가 높이 산 건 지호의 그런 능력이었다.
“그래…… 참 고맙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현재를 두고 다시 포트폴리오를 보는 일에 열중하던 지호의 눈에 꽤 괜찮은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야. 현재야. 이거 봐라. 괜찮지 않…… 응? 어디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