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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말도 없이 사라진 현재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지호가 다시 포트폴리오에 시선을 둔다. 머릿속으로 설계를 구체화해 본다. 이건 틀림없이 괜찮은 작품이 될 것이다. 지호는 포트폴리오를 덮어 표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이……그린? 특이한 이름이네.”



바람이라도 쐴 겸 사무실 밖으로 나온 현재는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빼곤 다시 집어넣었다. 얼마 전 창수가 말한 타운 하우스 이야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울 외곽에 짓게 될 타운 하우스는 세대수를 줄이고 남은 면적을 조경에 투자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파트는 머지않은 시간에 착공을 시작할 것이다. 물론 입찰이라는 큰 산이 남아 있지만 작은 시도라도 해 보려면 지금으로선 인원도, 인재도 역부족이었다.

회사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납득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라고 했다. 조경 건축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의 꿈이었다. 경영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성과가 필요했다.

건축사무소를 차리고 벌써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성과는커녕 직원들 월급도 겨우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과는 달리 환하게 반짝거리는 건축사무소의 간판을 본다.

[미래 건축사무소]

내일이 밝기만을 바라며 이름을 지었지만 현재는 캄캄하고, 미래는 아득하다. 긴 한숨 끝에 돌아서던 현재는 문득 몇 해 전 만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크로키 북에 섬세하게 그려 내린 그녀의 스케치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을.

이그린, 그 특이한 이름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린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사과를 먹으며 잡지를 보고 있었다. 잡지는 건축에 관한 것으로 표지를 장식한 사람은 올해 크라이슬러 디자인상의 수상자였다. 그린은 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또 자신이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오래전에 만났지만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신 나간 선 자리에서 만났던 그 남자. 그 남자의 이름은 나현재였다. 미래 건축사무소 소장 나현재. 꽤 그럴듯하고 멋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구인광고를 낸 것은 그린이 생각하기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린은 고민하지 않고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사실 이미 몇 군데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포트폴리오는 훌륭하지만 우리 회사와는 맞지 않습니다, 라는 게 공통된 탈락의 이유였다. 그린은 자신의 작품이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건축물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을 뜬구름이라 표현한다면 그녀는 재능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허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잠깐이었지만, 스케치를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은 다정했다.

그린은 많은 것이 궁금했다. 나현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그의 미래는 어떤 도시를 그리고 있는지.



“스무 개 정도로 추려 봤어. 사실 추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나마 눈에 든 게 이 정도뿐이지만.”

밤새 검토한 포트폴리오를 현재의 책상에 내려놓은 지호가 말했다. 퀭한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곧잘 투덜거리긴 하지만 지호가 건축사무소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재에게도, 지호에게도 이곳은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만 쌓아 올린 소중한 공간인 것이다.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어?”

“있었지. 두 명 정도.”

“그럼 그것만 보자. 다른 건 볼 필요 없잖아.”

“그럴 것 같아서 따로 표시를 해 놨지.”

지호가 포스트잇을 붙여 둔 포트폴리오 두 개를 꺼내 현재에게 건넸다.

“이쪽은 왜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 오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완성형의 실력을 갖추고 있고, 이쪽은 좀 애매하긴 한데…… 뭐랄까. 마음이 끌린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현재는 조경 건축의 가치를 공존에 두었다. 모든 건축물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세운다. 그것이 그가 정한 나름의 철칙이었다. 타협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왔다. 상을 받고 이름은 알렸지만, 그것이 아버지가 바라는 성과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에게 현재는 이상주의자로 여겨지곤 했다.

“둘 다를 뽑을 순 없어.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거야?”

“글쎄. 당장 투입해야 할 인력이라면 이쪽이고, 좀 더 먼 미래를 본다면 이쪽이겠지.”

두 번째 포트폴리오를 넘기는 현재의 눈이 커졌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을 때 현재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사람으로 하자.”

“옳으신 결정입니다.”



합격 전화를 받고, 그린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드디어 취직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현재와의 재회가 무척 기대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볼까. 알아본다면 무슨 말을 해올까. 그럼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설렘과 기대를 안고 어느덧 건축사무소 앞에 섰다. 입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걸음걸음마다 심장 소리가 쿵쿵 귀에 울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 이번에 합격한 사람인데요.”

“아, 이그린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반갑게 맞아 주는 여직원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소장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문이 열리는 동안 모든 일이 초 단위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창가 앞에 돌아서 있는 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천천히 몸을 돌린 남자가 그린을 보고 활짝 웃었다. 모든 것이, 그린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이그린 씨.”

마법 같은 순간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그린은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에도 지금 이 순간, 이 장면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재가 그린을 처음 만났던 그때, 그는 건축은 취미로나 하라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었다. 보기 싫은 맞선 자리에 억지로 나가며 이대로 건축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그린의 스케치는 지쳐 있던 그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가 꿈꾸던 모든 것이 그 스케치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아마 지금의 자신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그린을 스카우트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당시 현재는 건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첫 만남 이후 몇 번의 맞선 자리에 더 나가며 그때마다 현재는 그곳에 그린이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라도 물어보는 건데, 하는 후회를 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그의 안에서 이그린이라는 이름도 점점 희미해졌다.

현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땐 스케치에 마음을 뺏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쩌다 그린에 대해 떠올리게 되어도 기억나는 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구두, 제 몸만큼이나 커다랬던 가방, 높게 묶어 올린 포니테일, 그 정도였다. 이제야 마주한 그린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예쁘장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지나왔지만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현재도 운명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지금이 가장 알맞은 때였을 것이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린이 물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죠. 어떻게 잊겠어요.”

“아, 참. 상 받은 거 축하드려요.”

“어떻게 알았어요?”

“잡지에서 봤어요.”

싫다는 걸 지호가 억지로 참가시킨 대회였다. 이번 기회에 회사 이름도 알리면 얼마나 좋겠냐고. 상도 받고 회사 이름도 알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겨우 그뿐이었는데 뜬금없이 그린의 이 말에 보람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인 거 한 번에 알아봤어요? 엄청 인상적이었나 봐. 하긴 내 얼굴이 그렇게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니죠.”

뭐가 좋은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는 현재에 그린은 당황했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위트인지 밑도 끝도 없는 자기애인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그때 그 스케치 봤을 때 다시 만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설마하니 이렇게 내 사무실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잘 왔어요, 이그린 씨.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현재가 손을 내민다. 그린은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소매를 접어 둘둘 말아 올린 하얀 셔츠, 단추는 한두 개쯤 풀려 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매어진 채로, 한 손은 이마를 짚고 한 손으로는 빠르게 스케치를 하고 있는, 조금은 피곤한 인상의 남자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