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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망상에 잠겨 있는 동안 저도 모르게 마주 잡은 손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나 보다. 그린은 정신을 차리고 망상을 몰아냈다.
“사실 그 뒤로 한 번은 만날 줄 알았는데.”
“?”
현재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지호가 소장실로 들어왔다.
“얘기 다 끝났으면 이제 직원들하고도 인사 좀 할까 싶은데.”
“나가 봐요.”
“네.”
뭐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꼭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는 방해꾼은 있기 마련. 그린은 현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린은 지호의 뒤를 따라 걸으며 회사 분위기를 눈으로 익혀 본다. 미래 건축사무소의 직원은 총 열 명으로 현재와 그린을 포함한 디자이너가 여섯 명, 그리고 지호를 포함한 행정직이 네 명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있을 건 다 있는 회사였다.
지호는 직원들과 인사를 마친 그린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디자이너 이그린’이라고 쓰인 자리에 앉자 감동 비슷한 것이 밀려들어 왔다.
“아, 그 꽃은 나 소장이 환영의 의미로 선물한 겁니다.”
책상 한쪽 구석에 부바르디아가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꽃잎을 살짝 스치자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그린의 아버지는 확고한 교육 철학이 있었다. 자식들의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학비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지원해 주었다. 그린이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막내 그루는 지원을 안 해 주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그린과 그림이 훌륭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군말 없이 대학에 갔고 지금은 열심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따로 배워야 할 것도 많은 학과에 진학하고 보니 평범한 아르바이트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맞선 대타였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수입은 좋았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일을 의뢰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서, 얼굴이 많이 노출되면 더는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열 번 남짓. 그중에 하루, 현재를 만났고 지금은 그와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왜요?”
저도 모르게 현재를 쳐다보았나 보다.
“그냥요.”
“나 잘생긴 거 나도 알아요.”
현재의 말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농담인데 뭘 또 그렇게 받아들여.”
현재가 투덜거린다.
“농담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지호가 소리쳤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만, 그걸 또 그렇게 대놓고 말할 건 또 뭐람. 그린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덧 그린이 미래 건축사무소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실무는 처음인지라 아직은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실수투성이였지만 그린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현재는, 아직은 그린에게 크게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조금 더 다듬어 볼 생각이었다.
“밥이라도 먹고 할래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 둘만 남아 있던 사무실에서 현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그린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어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켰다. 어쩐 일인지 면이 퉁퉁 불어서 왔지만 음식을 보니 갑자기 밀려드는 허기에 그냥 먹기로 했다.
“힘들지 않아요? 계속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아뇨. 지금은 그냥 다 재밌어요. 그런데 소장님은 왜 지금까지 퇴근 안 하셨어요?”
“난 좀 봐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현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왜 뽑으신 거예요?”
“이그린 씨가 조경 설계를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물어보라더니 되레 묻고 있다. 그린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만 너무 바로 대답해 버리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서요.”
“우리가 세우는 건축물 자체가 이미 자연과 양립할 수 없는데도?”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멋지잖아요.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처럼, 아파트 사이로 시내가 흐르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서울은 이미 자연과 공존하며 발전해 왔다고 생각해요. 한강이 있어 준 덕분에.”
그 말을 하는 그린의 눈동자는 이곳이 아닌 상상 속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리는 세상, 그녀가 바라는 도시는, 이미 그녀 안에 있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 현재는 몹시도 기다려졌다.
“그 대답이 내 대답입니다.”
현재가 말했다. 그린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먹은 것들을 치우고, 커피를 한 잔 타서 자리로 돌아오니 그 잠깐 사이에 현재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일상이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린은 담요를 들어 현재의 몸 위에 덮어 주고 조용히 돌아섰다.
“!”
그때 손목이 잡혀 와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곤 뒤를 돌았다. 엎드린 채로 손목을 잡은 현재가 말했다.
“이러면 나 설레는데.”
느릿하게 눈을 맞춰 오는 현재에 당황한 그린이 잡혀 있던 손목을 빼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과장되게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시선을 피하는 그린을 잠시 보다가 몸을 일으킨 현재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같이 나갑시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자자, 갑시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막무가내로 떠미는 현재에, 그린은 별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호의와 호감을 구분하는 건 어렵다. 물론 현재가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호의든 호감이든 어느 정도의 선까지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고민은 늘 있어 왔다. 이런 걸 고민하는 자신이 참 촌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그린이었다. 세련된 애티튜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돼요.”
집 근처에 도착한 그린이 말했다.
“집이 여기예요?”
눈앞에 보이는 주택을 가리키며, 현재가 물었다.
“아뇨. 좀 더 들어가야 돼요.”
“골목이 좀 좁네요. 일단 내려요. 잠깐 차 세우고 같이 걸어갑시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손사래를 친 그린이 말했다. 이미 신세는 충분히 지고도 남았다.
“불도 다 꺼졌는데 위험하게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나 그렇게 매너 없는 남자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왜요? 집까지 알려 줄 만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린이 대답이 없자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 현재가 말했다.
“이력서에 주소 다 쓰여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좁은 골목길을 말없이 걷다가 빨간 벽돌집 앞에서 멈췄다. 크진 않지만 잘 가꾼 마당과 하얀 울타리가 있는 예쁜 집이었다. 익숙한 향기에 꼬리를 흔들며 뛰어온 베니가 짖으려 하자 그린이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다.
“이름이 뭐예요?”
“베니요.”
“무슨 뜻인데?”
“제가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좀 좋아해서요.”
가볍게 웃은 현재가 고개를 들어 집을 보며 말했다.
“예쁜 집이네요. 배롱나무도 있고.”
“네. 저희 가족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집이에요.”
“어떤 의미요?”
“돌아가신 엄마가 디자인하신 집이거든요.”
“……미안해요.”
“오래전 일인걸요, 뭐.”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에 미안해하는 현재에게 그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도 때때로 너무 보고 싶은 엄마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던 슬픔은 어느덧 아름다운 추억으로 덧칠해졌다. 시간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린은 가끔 잊힌다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그린 씨는 어머니를 닮았나 보네요.”
“엄마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요.”
추억의 어딘가를 더듬는 것 같은 그린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현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컸네.”
“…….”
“엄마 없이도.”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난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요. 피곤할 텐데 푹 자요. 이불 잘 덮고.”
그린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현재를 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문 뒤에 등을 기대고 서서 머리 위에 남아 있는 감촉을 되새겨 보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린은 가족들이 깨지 않게 까치발로 뛰어 욕실로 향했다. 이럴 땐 세수가 답이다.
망상에 잠겨 있는 동안 저도 모르게 마주 잡은 손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나 보다. 그린은 정신을 차리고 망상을 몰아냈다.
“사실 그 뒤로 한 번은 만날 줄 알았는데.”
“?”
현재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지호가 소장실로 들어왔다.
“얘기 다 끝났으면 이제 직원들하고도 인사 좀 할까 싶은데.”
“나가 봐요.”
“네.”
뭐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꼭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는 방해꾼은 있기 마련. 그린은 현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린은 지호의 뒤를 따라 걸으며 회사 분위기를 눈으로 익혀 본다. 미래 건축사무소의 직원은 총 열 명으로 현재와 그린을 포함한 디자이너가 여섯 명, 그리고 지호를 포함한 행정직이 네 명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있을 건 다 있는 회사였다.
지호는 직원들과 인사를 마친 그린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디자이너 이그린’이라고 쓰인 자리에 앉자 감동 비슷한 것이 밀려들어 왔다.
“아, 그 꽃은 나 소장이 환영의 의미로 선물한 겁니다.”
책상 한쪽 구석에 부바르디아가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손끝으로 꽃잎을 살짝 스치자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그린의 아버지는 확고한 교육 철학이 있었다. 자식들의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학비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지원해 주었다. 그린이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막내 그루는 지원을 안 해 주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그린과 그림이 훌륭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군말 없이 대학에 갔고 지금은 열심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따로 배워야 할 것도 많은 학과에 진학하고 보니 평범한 아르바이트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맞선 대타였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수입은 좋았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일을 의뢰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서, 얼굴이 많이 노출되면 더는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열 번 남짓. 그중에 하루, 현재를 만났고 지금은 그와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왜요?”
저도 모르게 현재를 쳐다보았나 보다.
“그냥요.”
“나 잘생긴 거 나도 알아요.”
현재의 말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농담인데 뭘 또 그렇게 받아들여.”
현재가 투덜거린다.
“농담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지호가 소리쳤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만, 그걸 또 그렇게 대놓고 말할 건 또 뭐람. 그린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덧 그린이 미래 건축사무소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실무는 처음인지라 아직은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실수투성이였지만 그린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현재는, 아직은 그린에게 크게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조금 더 다듬어 볼 생각이었다.
“밥이라도 먹고 할래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 둘만 남아 있던 사무실에서 현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그린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어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켰다. 어쩐 일인지 면이 퉁퉁 불어서 왔지만 음식을 보니 갑자기 밀려드는 허기에 그냥 먹기로 했다.
“힘들지 않아요? 계속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아뇨. 지금은 그냥 다 재밌어요. 그런데 소장님은 왜 지금까지 퇴근 안 하셨어요?”
“난 좀 봐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현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왜 뽑으신 거예요?”
“이그린 씨가 조경 설계를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물어보라더니 되레 묻고 있다. 그린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만 너무 바로 대답해 버리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서요.”
“우리가 세우는 건축물 자체가 이미 자연과 양립할 수 없는데도?”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멋지잖아요.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처럼, 아파트 사이로 시내가 흐르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서울은 이미 자연과 공존하며 발전해 왔다고 생각해요. 한강이 있어 준 덕분에.”
그 말을 하는 그린의 눈동자는 이곳이 아닌 상상 속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리는 세상, 그녀가 바라는 도시는, 이미 그녀 안에 있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 현재는 몹시도 기다려졌다.
“그 대답이 내 대답입니다.”
현재가 말했다. 그린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먹은 것들을 치우고, 커피를 한 잔 타서 자리로 돌아오니 그 잠깐 사이에 현재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일상이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린은 담요를 들어 현재의 몸 위에 덮어 주고 조용히 돌아섰다.
“!”
그때 손목이 잡혀 와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곤 뒤를 돌았다. 엎드린 채로 손목을 잡은 현재가 말했다.
“이러면 나 설레는데.”
느릿하게 눈을 맞춰 오는 현재에 당황한 그린이 잡혀 있던 손목을 빼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과장되게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시선을 피하는 그린을 잠시 보다가 몸을 일으킨 현재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같이 나갑시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자자, 갑시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막무가내로 떠미는 현재에, 그린은 별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호의와 호감을 구분하는 건 어렵다. 물론 현재가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호의든 호감이든 어느 정도의 선까지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고민은 늘 있어 왔다. 이런 걸 고민하는 자신이 참 촌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그린이었다. 세련된 애티튜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돼요.”
집 근처에 도착한 그린이 말했다.
“집이 여기예요?”
눈앞에 보이는 주택을 가리키며, 현재가 물었다.
“아뇨. 좀 더 들어가야 돼요.”
“골목이 좀 좁네요. 일단 내려요. 잠깐 차 세우고 같이 걸어갑시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손사래를 친 그린이 말했다. 이미 신세는 충분히 지고도 남았다.
“불도 다 꺼졌는데 위험하게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나 그렇게 매너 없는 남자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왜요? 집까지 알려 줄 만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린이 대답이 없자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 현재가 말했다.
“이력서에 주소 다 쓰여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좁은 골목길을 말없이 걷다가 빨간 벽돌집 앞에서 멈췄다. 크진 않지만 잘 가꾼 마당과 하얀 울타리가 있는 예쁜 집이었다. 익숙한 향기에 꼬리를 흔들며 뛰어온 베니가 짖으려 하자 그린이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다.
“이름이 뭐예요?”
“베니요.”
“무슨 뜻인데?”
“제가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좀 좋아해서요.”
가볍게 웃은 현재가 고개를 들어 집을 보며 말했다.
“예쁜 집이네요. 배롱나무도 있고.”
“네. 저희 가족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집이에요.”
“어떤 의미요?”
“돌아가신 엄마가 디자인하신 집이거든요.”
“……미안해요.”
“오래전 일인걸요, 뭐.”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에 미안해하는 현재에게 그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도 때때로 너무 보고 싶은 엄마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던 슬픔은 어느덧 아름다운 추억으로 덧칠해졌다. 시간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린은 가끔 잊힌다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그린 씨는 어머니를 닮았나 보네요.”
“엄마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요.”
추억의 어딘가를 더듬는 것 같은 그린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현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컸네.”
“…….”
“엄마 없이도.”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난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요. 피곤할 텐데 푹 자요. 이불 잘 덮고.”
그린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현재를 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문 뒤에 등을 기대고 서서 머리 위에 남아 있는 감촉을 되새겨 보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린은 가족들이 깨지 않게 까치발로 뛰어 욕실로 향했다. 이럴 땐 세수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