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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민유수
쨍그랑. 우당탕. 주인집에서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야?
일주일이 넘게 질리도록 들어온 소리. 사채업자가 보낸 깡패들이 주인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소리였다. 지은 지 오래되어 낡은 이 집은 방음이 전혀 안 됐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가 볼까?”
“그냥 있어라.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구.”
할머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수저를 뜰 수가 없었다. 밥맛이 모조리 떨어져 버렸다.
제때 집세 안 내냐며 매번 윽박을 지르다시피 하는 주인집 아주머니야 꼴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얼굴 보며 사는 이웃 지간이었다. 바로 옆집에서 저런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괜한 생각 말거라. 어설프게 나섰다가 일만 커진다. 어디 저런 것들이 사람이더냐?”
“우리는 괜찮은 거야? 저 사람들 쫓겨나면 우리도 같이 쫓겨날 거 아니야.”
“…….”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국을 뜨던 할머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산 사람이야 어디 발 들일 데 하나 없을라구. 너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혀.”
할머니도 내 말에 밥맛이 떨어졌는지 곧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을 들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등이 많이 휘어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하고 불편해 보였다. 할머니는 이제 연세가 많으셨다.
“걱정하지 말라구? 나는 단 하루도 걱정 없이 살아 본 적이 없어, 할머니…….”
할머니의 쓸쓸한 등만큼이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쨍그랑. 다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위태위태한 벼랑 끝, 거기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게 전부인 삶이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할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에 대한 부질없는 적개심만 차올랐다. 먹었던 것이 올라오려고 하는지 속이 울렁댔다. 다 토해 내고 싶었다. 그게 뭐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맞은편에 있는 주인집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자들을 향해 시끄러우니 좀 닥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올 작정이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뛰쳐나간 나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멈춰서고 말았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주인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웬 남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빈틈없이 갖춰 입은 검은 정장을 보니, 주인집을 찾아온 깡패 중 한 명인 듯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들던 남자와 우연히 시선이 부딪쳤다. 남자의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전신을 훑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한동안, 남자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뗀 건 나였다.
“얼마나 받아요?”
뜬금없는 나의 물음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 새로 엷은 연기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를 주시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아서 뭐 하게.”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말투였다.
“궁금해요. 좀 알려 주면 안 돼요?”
남자는 살짝 짜증이 났는지 담배를 떨어뜨린 다음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한 7천 정도? 왜? 네가 대신 갚아 주기라도 할래?”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남자가 눈에 띌 만큼 미간을 구겼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려고 웃은 건 아니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정말로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남자는 내가 주인집의 빚이 얼마인지 묻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얼마냐고 물은 건.”
“…….”
“그쪽 보수.”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떼인 돈 받아 주고 얼마나 버냐고 물은 거예요.”
“…….”
“많이 벌면, 나도 하게.”
그 순간, 남자의 입술에 어렴풋이 미소가 걸리는 게 보였다. 좀처럼 웃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미소가 걸리니 그래도 기계처럼 차갑던 인상에 조금 생기가 어렸다.
“너 같은 어린애가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일이 아니야.”
남자는 내 말이 우습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별안간 남자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남자가 장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그것만으로도 뭔가 위압적이었다. 하나, 나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가온 남자가 끼고 있던 검은색 가죽 장갑 한쪽을 빼내더니, 드러낸 맨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허억,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얼어붙었다.
남자가 펼쳐 보인 손바닥 안에는 긴 칼자국이 나 있었다. 자국은 꽤 깊어서 벌어진 살갗 사이로 붉은 생살이 보였고,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건 분명, 보통의 여학생이라면 몸서리치며 눈길을 돌렸을 만큼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홀린 듯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가 내보인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말이다. 천천히, 그 상처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붉고 깊은 상처를 보는 것이 마치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고 또 아픈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방치한 상처. 누구도 손대 주지 않고, 나조차도 손댈 길이 없는 그런 상처. 순간이지만 그런 강렬한 동질감에 휩싸여 무섭거나 징그럽다는 느낌보다는 안타깝고 가엾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 손가락이 닿자 남자는 손바닥을 움츠렸다. 그리고 기이한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나를 마조히스트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마조, 뭐? 그게 뭔데?”
남자는 정말 모른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뭐랄까, 이상한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꽤 미남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유난히 검은 머리색은 그만큼이나 검은 눈과 잘 어우러져 있었고, 날렵하게 솟은 코와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물어진 서늘한 입매는 차가워 보였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밀랍 인형처럼 하얗고 단단한 얼굴은 완벽하게 좌우 대칭으로 보였다.
“손 이리 줘 봐요.”
나는 집에서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을 때 쓰던 하얀색 손수건을 풀었다. 머리가 귀찮게 흘러내려 어깨를 덮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남자의 상처 난 손바닥에 가만히 감아 주었다.
“앞으론, 이렇게 다니지 마요. 상처 덧나요.”
남자의 시선이 손수건이 감긴 자신의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급히 후회가 밀려들었다. 남자의 상처를 감싸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너무 강렬해서 내 행동이 지나친 건 아닌지 의식하지 못했다.
남자가 제 상처를 보여 준 건 다만 내게 경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일은 나 같은 어린애는 감히 엄두도 내선 안 된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런데 나는 그걸 집착적으로 바라본 것도 모자라서 어설프게 감싸 주기까지 했으니, 남자가 나를 이상한 여자 보듯 하는 게 이해가 갔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뒤돌아서자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새파래진 얼굴로 달려와 나의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그러곤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그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다.
그게 바로 나와 그 남자, 이강후의 첫 만남이었다.
* * *
“아줌마, 떡볶이 2천 원어치, 순대 2인분 주세요.”
“떡볶이는 순대 위에 뿌려 주세요.”
“내장 많이 넣어 주세요!”
윤아와 미진 그리고 나는 야간자율학습이 시작하기 전 학교 앞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서 석식을 해결했다. 우리가 읊는 대사는 늘 비슷비슷했다. 내가 먼저 주문을 하면, 미진이 떡볶이를 순대 위에 뿌려 달라고 부탁하고, 윤아는 특별히 내장을 많이 넣어 달라며 외쳤다.
“난 내장은 싫은데.”
미진이 퉁명스럽게 덧붙이자 윤아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 내가 다 먹을 거야.”
그런 둘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학교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특히 이 둘과 함께 있을 때면, 더없이 행복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허름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집과 불편한 걸음으로 하루도 폐지 줍는 일을 거르지 않던 할머니가 싫었다. 집에 들어가서 할머니와 단둘이 비좁은 단칸방에 처박혀 있을 바에야 남들은 그렇게 싫어하는 야자를 하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맛있는 냄새와 하얀 김을 풍기며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우리는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앉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포크로 음식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먹고도 뒤돌아서면 배가 고플 나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말도 없이 배만 채우고 있는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미진이 자세를 낮추더니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저 남자 봐. 진짜 잘생겼다.”
미진이 고갯짓으로 분식집 바깥을 가리켰다. 남자에도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나와 윤아는 재빠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공교롭게도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길 건너편에 서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진짜 잘생겼네. 근데 난 좀 무섭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지 않아?”
윤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곤 마지막 남은 떡볶이를 찍어 들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수 넌 어떤데?”
미진이 물어 오는 바람에 나는 결국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난 윤아 의견에 찬성.”
나는 오뎅 국물이 담긴 접시를 들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요즘 잘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 정도면 그냥 보통 아냐? 그리고 무슨 조폭 같아. 머리도 시커멓고, 옷도 시커멓고. 아직 춥지도 않은데 웬 가죽 장갑? 저렇게 시커멓게 하고 여고 앞에 서 있는 것부터가 수상해. 여학생들 보려고 온 거 아냐? 왜, 요즘 여학생들 노리는 변태들 많잖아.”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긴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동조해 주고 말았을 것을, 나는 나도 모르게 필요 이상의 말들을 덧붙이고 있었다. 저 가죽 장갑 속의 상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알은 체하고 싶은 유치함이 발동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가 이렇게나 세세하게 감상을 말했는데도 윤아와 미진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래?”
윤아와 미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오뎅 국물을 든 채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미진이 재빨리 고갯짓을 했다. 마치 뒤를 확인해 보라는 듯이. 아무 생각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
맙소사. 나는 그대로 굳어졌다. 내 뒤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남자가 서 있었다. 얼마 전 주인집에 돈을 받으러 찾아왔던 그 남자가.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미진과 윤아의 반응을 보니 내가 한 말을 모두 다 들은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우리들을 한 번씩 쭉 훑어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셋은 얼어 버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이 남자, 풍기는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리 셋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명 먼저 자리를 뜨자는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저 남자가 꼼짝 말라는 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나 보러 온 건 아니야.”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우리 셋은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남자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내가 여학생들을 보러 온 게 아니냐며 떠들어 댔던 것을 기억해 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선 나에게로 오롯이 시선을 맞춰 왔다.
“민유수. 너 보러 왔다.”
남자의 입에서 또렷하게 내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그만 들고 있던 국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1. 민유수
쨍그랑. 우당탕. 주인집에서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야?
일주일이 넘게 질리도록 들어온 소리. 사채업자가 보낸 깡패들이 주인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소리였다. 지은 지 오래되어 낡은 이 집은 방음이 전혀 안 됐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가 볼까?”
“그냥 있어라.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구.”
할머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수저를 뜰 수가 없었다. 밥맛이 모조리 떨어져 버렸다.
제때 집세 안 내냐며 매번 윽박을 지르다시피 하는 주인집 아주머니야 꼴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얼굴 보며 사는 이웃 지간이었다. 바로 옆집에서 저런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괜한 생각 말거라. 어설프게 나섰다가 일만 커진다. 어디 저런 것들이 사람이더냐?”
“우리는 괜찮은 거야? 저 사람들 쫓겨나면 우리도 같이 쫓겨날 거 아니야.”
“…….”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국을 뜨던 할머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산 사람이야 어디 발 들일 데 하나 없을라구. 너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혀.”
할머니도 내 말에 밥맛이 떨어졌는지 곧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을 들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등이 많이 휘어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하고 불편해 보였다. 할머니는 이제 연세가 많으셨다.
“걱정하지 말라구? 나는 단 하루도 걱정 없이 살아 본 적이 없어, 할머니…….”
할머니의 쓸쓸한 등만큼이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쨍그랑. 다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위태위태한 벼랑 끝, 거기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게 전부인 삶이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할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에 대한 부질없는 적개심만 차올랐다. 먹었던 것이 올라오려고 하는지 속이 울렁댔다. 다 토해 내고 싶었다. 그게 뭐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맞은편에 있는 주인집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자들을 향해 시끄러우니 좀 닥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올 작정이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뛰쳐나간 나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멈춰서고 말았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주인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웬 남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빈틈없이 갖춰 입은 검은 정장을 보니, 주인집을 찾아온 깡패 중 한 명인 듯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들던 남자와 우연히 시선이 부딪쳤다. 남자의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전신을 훑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한동안, 남자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뗀 건 나였다.
“얼마나 받아요?”
뜬금없는 나의 물음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 새로 엷은 연기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를 주시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아서 뭐 하게.”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말투였다.
“궁금해요. 좀 알려 주면 안 돼요?”
남자는 살짝 짜증이 났는지 담배를 떨어뜨린 다음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한 7천 정도? 왜? 네가 대신 갚아 주기라도 할래?”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남자가 눈에 띌 만큼 미간을 구겼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려고 웃은 건 아니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정말로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남자는 내가 주인집의 빚이 얼마인지 묻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얼마냐고 물은 건.”
“…….”
“그쪽 보수.”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떼인 돈 받아 주고 얼마나 버냐고 물은 거예요.”
“…….”
“많이 벌면, 나도 하게.”
그 순간, 남자의 입술에 어렴풋이 미소가 걸리는 게 보였다. 좀처럼 웃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미소가 걸리니 그래도 기계처럼 차갑던 인상에 조금 생기가 어렸다.
“너 같은 어린애가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일이 아니야.”
남자는 내 말이 우습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별안간 남자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남자가 장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그것만으로도 뭔가 위압적이었다. 하나, 나는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가온 남자가 끼고 있던 검은색 가죽 장갑 한쪽을 빼내더니, 드러낸 맨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허억,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얼어붙었다.
남자가 펼쳐 보인 손바닥 안에는 긴 칼자국이 나 있었다. 자국은 꽤 깊어서 벌어진 살갗 사이로 붉은 생살이 보였고,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건 분명, 보통의 여학생이라면 몸서리치며 눈길을 돌렸을 만큼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홀린 듯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가 내보인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말이다. 천천히, 그 상처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붉고 깊은 상처를 보는 것이 마치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고 또 아픈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방치한 상처. 누구도 손대 주지 않고, 나조차도 손댈 길이 없는 그런 상처. 순간이지만 그런 강렬한 동질감에 휩싸여 무섭거나 징그럽다는 느낌보다는 안타깝고 가엾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 손가락이 닿자 남자는 손바닥을 움츠렸다. 그리고 기이한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나를 마조히스트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마조, 뭐? 그게 뭔데?”
남자는 정말 모른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뭐랄까, 이상한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꽤 미남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유난히 검은 머리색은 그만큼이나 검은 눈과 잘 어우러져 있었고, 날렵하게 솟은 코와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물어진 서늘한 입매는 차가워 보였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밀랍 인형처럼 하얗고 단단한 얼굴은 완벽하게 좌우 대칭으로 보였다.
“손 이리 줘 봐요.”
나는 집에서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을 때 쓰던 하얀색 손수건을 풀었다. 머리가 귀찮게 흘러내려 어깨를 덮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남자의 상처 난 손바닥에 가만히 감아 주었다.
“앞으론, 이렇게 다니지 마요. 상처 덧나요.”
남자의 시선이 손수건이 감긴 자신의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급히 후회가 밀려들었다. 남자의 상처를 감싸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너무 강렬해서 내 행동이 지나친 건 아닌지 의식하지 못했다.
남자가 제 상처를 보여 준 건 다만 내게 경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일은 나 같은 어린애는 감히 엄두도 내선 안 된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런데 나는 그걸 집착적으로 바라본 것도 모자라서 어설프게 감싸 주기까지 했으니, 남자가 나를 이상한 여자 보듯 하는 게 이해가 갔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뒤돌아서자 때마침 문을 열고 나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새파래진 얼굴로 달려와 나의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그러곤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그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다.
그게 바로 나와 그 남자, 이강후의 첫 만남이었다.
* * *
“아줌마, 떡볶이 2천 원어치, 순대 2인분 주세요.”
“떡볶이는 순대 위에 뿌려 주세요.”
“내장 많이 넣어 주세요!”
윤아와 미진 그리고 나는 야간자율학습이 시작하기 전 학교 앞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서 석식을 해결했다. 우리가 읊는 대사는 늘 비슷비슷했다. 내가 먼저 주문을 하면, 미진이 떡볶이를 순대 위에 뿌려 달라고 부탁하고, 윤아는 특별히 내장을 많이 넣어 달라며 외쳤다.
“난 내장은 싫은데.”
미진이 퉁명스럽게 덧붙이자 윤아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 내가 다 먹을 거야.”
그런 둘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학교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특히 이 둘과 함께 있을 때면, 더없이 행복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허름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집과 불편한 걸음으로 하루도 폐지 줍는 일을 거르지 않던 할머니가 싫었다. 집에 들어가서 할머니와 단둘이 비좁은 단칸방에 처박혀 있을 바에야 남들은 그렇게 싫어하는 야자를 하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맛있는 냄새와 하얀 김을 풍기며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우리는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앉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포크로 음식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먹고도 뒤돌아서면 배가 고플 나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말도 없이 배만 채우고 있는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미진이 자세를 낮추더니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저 남자 봐. 진짜 잘생겼다.”
미진이 고갯짓으로 분식집 바깥을 가리켰다. 남자에도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나와 윤아는 재빠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공교롭게도 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길 건너편에 서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진짜 잘생겼네. 근데 난 좀 무섭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지 않아?”
윤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곤 마지막 남은 떡볶이를 찍어 들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수 넌 어떤데?”
미진이 물어 오는 바람에 나는 결국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난 윤아 의견에 찬성.”
나는 오뎅 국물이 담긴 접시를 들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요즘 잘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 정도면 그냥 보통 아냐? 그리고 무슨 조폭 같아. 머리도 시커멓고, 옷도 시커멓고. 아직 춥지도 않은데 웬 가죽 장갑? 저렇게 시커멓게 하고 여고 앞에 서 있는 것부터가 수상해. 여학생들 보려고 온 거 아냐? 왜, 요즘 여학생들 노리는 변태들 많잖아.”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긴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동조해 주고 말았을 것을, 나는 나도 모르게 필요 이상의 말들을 덧붙이고 있었다. 저 가죽 장갑 속의 상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알은 체하고 싶은 유치함이 발동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가 이렇게나 세세하게 감상을 말했는데도 윤아와 미진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래?”
윤아와 미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오뎅 국물을 든 채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미진이 재빨리 고갯짓을 했다. 마치 뒤를 확인해 보라는 듯이. 아무 생각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
맙소사. 나는 그대로 굳어졌다. 내 뒤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남자가 서 있었다. 얼마 전 주인집에 돈을 받으러 찾아왔던 그 남자가.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미진과 윤아의 반응을 보니 내가 한 말을 모두 다 들은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우리들을 한 번씩 쭉 훑어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셋은 얼어 버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이 남자, 풍기는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리 셋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명 먼저 자리를 뜨자는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저 남자가 꼼짝 말라는 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나 보러 온 건 아니야.”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우리 셋은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남자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내가 여학생들을 보러 온 게 아니냐며 떠들어 댔던 것을 기억해 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선 나에게로 오롯이 시선을 맞춰 왔다.
“민유수. 너 보러 왔다.”
남자의 입에서 또렷하게 내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그만 들고 있던 국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