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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신기하게도 주인집에 더 이상 조폭들이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몇천이나 되는 큰돈을 하루아침에 어디서 구했을까. 게다가 우연히 할머니와 집주인 아줌마가 나누는 대화도 듣게 되었다. 밀린 세 달 치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다. 나는 어렴풋이, 이 모든 일이 그 남자가 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날, 내가 교실 문을 열자마자 윤아와 미진이 달려왔다. 나는 애써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쳐 책상들을 빙 둘러 내 자리를 찾아갔다. 그러나 윤아와 미진은 다시 득달같이 달려와 아직 비어 있는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진이 먼저,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물어 왔다.

“무슨 관계야?”

“뭐가.”

내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아가 말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 어제 분식집 앞에서 만난 그 잘생긴 남자 말이야.”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둘은 어제 야자 때문에 마저 물어보지 못했던 게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나는 남자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고, 남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내 학교를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정말 몰라? 민유수, 너. 우리한테 숨기는 거 있지?”

“맞아. 모르는 게 말이 돼? 그 남자는 네 이름까지 알던데.”

“근데 너, 그 사람한테 정말 관심 없으면 나 좀 소개시켜 주면 안 돼? 진짜 내 타입인데.”

“야, 유수 보러 학교까지 찾아왔잖아. 네가 왜 끼어들어?”

윤아가 미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미진은 여전히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둘은 잠시 아옹다옹하다가 다시 무슨 대답이라도 해 보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난 정말 모른다니까? 나 어제 명찰 달고 나갔잖아. 내 명찰 보고 알은체한 거겠지. 지나가다 심심해서 장난 한번 쳐 본 게 분명해. 요즘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끝까지 집 앞에서 남자를 보았던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인집 부부가 그 남자와 다른 조폭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협박을 일삼았으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정말로 살인이라도 저지를 이들처럼 보였다.

나는 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지독하게 싫었다. 부모가 없는 것, 석식비를 내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것, 그런 환경들 때문에 쌓여 온 열등감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는 것, 그 모든 사실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끔찍했다. 당시 내 유일하고도 절실한 한 가지 바람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것을 누릴 수 있는 그런 평범하고 소박한 삶, 그게 가지고 싶은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과는 동떨어진, 나와 닮아 있는 남자의 위태로움이 두려웠다. 내가 남자의 상처를 감싸 준 건 아주 짧은 순간 발휘된 어설픈 동질감 때문이었을 뿐, 남자와 가까워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남자와 깨끗하게 선을 긋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그때, 혜영이 다가왔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혜영아. 너 어제 빅뱅 콘서트 갔다 왔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미진과 윤아가 혜영에게까지 일을 떠벌릴까 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마침 혜영 역시 어제 갔던 콘서트를 자랑하기 위해 우리 대화에 끼어든 것이리라 짐작하면서.

“응, 어제 대박이었지! 근데, 유수야. 그것보다 더 대박인 얘기 먼저 해 줄까?”

뜻밖에도 혜영이 하려고 했던 얘기는 콘서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혜영이 옆자리에서 의자를 끌고 와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무슨 중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보여서 미진과 윤아도 이내 혜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더 이상 그 남자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을 듯했다.

“유수, 너 지난번에 남일고 축제 갔었던 거 기억나?”

일주일 정도 지난 일이라 거의 잊고 있었다. 혜영의 주도하에 반 아이들과 함께 근방의 남고에서 열리는 축제에 갔었다. 처음 가 보는 남고 축제에 잔뜩 기대를 했다가 실망만 안고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혜영이 우리 셋에게로 몸을 숙이며 아주 중대한 기밀이라도 흘리는 듯 속닥거렸다.

“그때 남일고 다니는 내 친구 하나가 유수 널 보고 완전히 반했대. 어제 나한테 네 연락처 좀 알려 달라고 문자가 왔지 뭐야.”

“꺄악!”

“웬일이야!”

나는 혜영이 전한 소식에도 놀랐지만, 윤아와 미진이 연달아 터뜨린 비명에 더 깜짝 놀랐다.

“대박이다! 민유수 얘는 갑자기 왜 이렇게 남자 복이 터지는 거야?”

“걔 이름이 뭐야? 잘생겼어?”

“나 걔랑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어. 얼굴도 괜찮고, 공부까지 잘해.”

“모태 솔로 민유수, 드디어 연애 한번 해 보려나?”

나보다도 신나 보이는 그녀들 때문에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나도 하기 싫어서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안 하고 살았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이 컸다. 십몇 년을 할머니와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생활하며 살아온 나에게 연애란 사치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요즘의 나는 사춘기의 신열에 들떠 있었고, 이제 조금 사치가 부려 보고 싶어지려던 참이었다.

“아무튼 이 몸이 친절히도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 주려고 나섰지. 이번 주말에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내가 걔한테 네 휴대폰 번호 찍어 줬어. 잘했지?”

“어우, 이 계집애. 벌써 거기까지 나가면 어떻게 해! 유수한텐 물어보지도 않고서!”

“물어보긴 뭘 물어 봐. 일단 만나 보면 되지. 만나 보고 아니면 마는 거고.”

흥분한 채 떠들어 대는 아이들을 나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나에게 한눈에 호감을 가졌다는 그 누군가에 대한 막연한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연애라는 걸 한번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순진하게도,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 * *



혜영을 통해 알게 된 그 친구의 이름은 박호준이었다. 처음 호준과 연락을 시작했을 때는 그냥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험 기간이 겹치는 바람에 한동안 문자만 주고받다가 오늘 드디어 만나서 첫 데이트를 했다. 실제로 본 호준은 생각보다 조금 튀는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웃을 때 둥글게 접히는 눈이 인상적인, 호감형의 소년이었다.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남자아이와 연락을 주고받고 이렇게 만나서 스스럼없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내 또래의 보통 여자아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호준이 예매해 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영화관 안은 굉장히 북적였다.

“예매 안 해 뒀으면 못 볼 뻔했다, 그치?”

호준은 자신의 준비성과 세심함을 확인받으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내가 웃자 호준은 쑥스러웠는지 들고 있던 팝콘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괜스레 콜라에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십 대의 연인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우리는 풋풋한 설렘을 안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는 사실 조금 지루했다. 너무 뻔한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라 보다가 하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 냈다. 호준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는지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동시에 참았던 하품을 하다가 눈이 마주쳐서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영화가 좀 지루했지? 내가 영화 고르는 데는 소질이 없나 봐.”

호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짓궂게 고개를 끄덕이자, 호준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해맑은 웃음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엔 유수 네가 골라.”

호준이 은근하게 ‘다음’을 말했다.

“응.”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호준을 따라 웃었다.

나는 호준에게 낡아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우리 집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사코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하지만 호준은 기어이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까지 나를 따라왔다.

“여기까지. 진짜 더 이상은 안 돼. 늦었다. 얼른 들어가.”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이제 요 앞이야. 뛰어가면 몇 초밖에 안 걸려. 데려다줘서 고마워.”

“알겠어. 얼른 들어가.”

나보고 들어가라고 말하면서도 호준은 우물쭈물하며 쉽게 등을 돌리지 못했다.

“저기…….”

호준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내가 그 말을 마저 들었다면 ‘우리 사귀자’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그 말을 꺼내면 뭐라고 대답할지 그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호준의 다음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민유수.”

내 이름을 부르는, 지독하게도 낮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와 호준 사이를 갈라놓았다. 우리는 동시에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골목의 가로등 밑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 차가운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 나는 온몸의 마디마디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민유수.”

다시 한 번 내 이름이 불리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남자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검은색 눈동자와 검은색 슈트, 검은색 가죽 장갑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 같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이 남자가, 얼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로 두 번째로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러 낸 그가, 지금 무슨 짓인가를 저지르고야 말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해 버린 것 같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장난이 아니구나. 이 남자는 진심이다.

한순간의 끓어오른 감정을 식히지 못하고 그 남자를 향해 다가서고 만 그 짧은 순간을, 남자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우연인 게 없었다.

남자가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수야. 누구야? 혹시 오빠?”

호준은 나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거운 공기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애써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아마 호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남자는, 절대 내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민유수.”

남자가 세 번째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홀린 듯이 그에게서 떼지 못하던 시선을 겨우 거두고 호준을 쳐다봤다.

“호준아 먼저 갈래? 나 잠깐 이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아악!”

찰나의 순간이었다. 남자의 발에 차인 호준이 눈앞에서 쓰러져 버린 것은. 나는 믿기 힘든 광경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민유수. 생각보다 사람 보는 눈이 없군. 실망스러울 지경이야.”

남자는 나에게 시선을 맞춘 그대로, 쓰러진 호준을 향해 다시 다가섰다. 그는 호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호준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나는 달려가서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 미친 자식아! 이것 놔!”

“떼인 돈 받아 주는 것만 내 일이 아니야.”

“놓으라구!”

“가끔 이렇게 때리기도 하고…….”

남자의 눈동자가 고요했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죽이기도 하지.”

나를 치워 낸 남자가 다시 호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바닥에 엎어진 그를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시작했다. 호준의 비명과 함께 뭔가가 뭉그러지고 터지는 끔찍한 소리가 이어졌다. 남자의 무자비한 폭력은, 내가 뛰어들어 호준을 감싸 안을 때까지 계속됐다.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호준과, 그런 호준을 지켜 줄 힘이 없는 내 자신, 이런 일을 벌이고도 흐트러짐 한 점 없는 남자 때문에 정말로 정신이 이상하게 될 것만 같았다.

“비켜. 감싸지 마. 정말로 죽여 버린다.”

“왜 이래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내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는데!”

나는 호준을 감싸 안은 채 있는 힘껏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호준의 몸 어딘가에서 뜨겁고 물컹한 액체가 꿀렁이며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서웠다, 정말로. 호준이 어떻게 될까 봐, 호준이 정말 죽어 버릴까 봐, 온몸의 신경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무기물처럼 메마른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흑흑…….”

귀신이라도 저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악마라도, 저것보단 자비로울 것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짓밟고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남자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호준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차라리 내가 맞는 게 나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호준을 감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폭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

천천히 눈을 뜨자 어느새 다가와 주저앉은 채 나와 눈높이를 맞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잘못 같은 거 한 적 없어. 넌 다만 운이 나빴던 거다.”

“…….”

“나 같은 놈 눈에 띄었던 것 자체가, 빌어먹을 악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