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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고개를 숙이면 닿을 듯, 남자의 얼굴이 가까웠다. 강렬한 시선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미쳤어, 당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그거 하나였다. 이 남자는 정말 미쳤다.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이강후.”

“…….”

“내 이름, 기억해 둬.”

“…….”

“기억 못 하면, 다음엔 네 머릿속이 아니라 네 손바닥에 직접 새겨 줄 거니까.”

남자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황량한 비탈길을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게 내려갔다.

‘네 손바닥에 직접 새겨 줄 거니까.’

남자의 마지막 말이, 내가 보았던 남자의 손바닥 상처와 겹쳐져, 귓가를 맴돌았다.



* * *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강후가 그 이름 석 자를 내 머릿속에 새기기 위해 저지른 그 끔찍한 일로부터, 나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나는 구급차를 불렀고, 응급실까지 호준과 함께 갔다. 호준의 부모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달려오셨다.

호준의 모친은 피가 범벅된 티셔츠를 입고 망연자실하게 응급실 앞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뺨을 때렸다.

“너 뭐야! 우리 아들 저 지경 될 때까지 넌 뭐 했어? 넌 뭐 했냐고 이 계집애야!”

그녀가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흔들어 댔다. 호준의 부친이 진정하라며 그녀를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돌아간 뺨을 다시 돌리지도 못한 채 그냥 그녀가 흔드는 대로 몸을 맡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호준이 저 지경이 된 건 나 때문이었고, 저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도 나였다.

“죄송해요…….”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짜내 그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호준의 모친은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더니 이내 바닥으로 밀쳐 버렸다.

“근본도 없는 것. 애비 어미도 없이 산다더니. 네 악재가 내 아들한테 들러붙었어.”

근본도 없는 것.

애비 어미도 없이 산다더니.

기어이, 그 말을 들어 버리고 말았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과욕이었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누려 보겠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과욕이었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호준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욕심이, 화를 부르고 만 것이다.

세상이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지금,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강후. 내 이름. 기억해 둬.’

그의 가면 같은 얼굴, 칼날같이 서늘한 목소리, 메마른 눈동자. 어느 것 하나 잊히지 않는다. 떨치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졌다.

나는 지금, 정말 그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학교에서도 지옥은 계속됐다. 호준의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혜영의 어머니가 혜영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고, 혜영은 또 친구들에게 그 말을 전했다. 삽시간에 호준이 나와의 데이트에서 정체불명의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호준이 경찰서에서 정체 모를 남자에게 맞았다고 얘기한 것마저 어느 순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소문은 퍼지고 부풀려져 온갖 추측성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가 조직폭력배와 원조 교제를 하던 중 호준을 꾀어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내가 학교에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내내, 더러운 것을 보듯 눈치를 주고, 들으라는 듯이 악담을 퍼트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잔인한 그 언어의 폭력 속에서 모욕당하고, 지쳐 갔으며, 그렇게 서서히 그 모든 것에서 무뎌져 갔다.

그러나 호준 모친의 말처럼 악재 그 자체였던 나에게, 불행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지옥의 정점을 찍은 건,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 미진이었다.

“더러워.”

복도에 모여 있던 여학생 무리 중 하나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또 시작되려나 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지나쳐 교실로 들어갔다. 야외에서 진행된 체육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평소보다도 더 집요하게 나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내 책상 앞에 다다랐을 때, 결국 나는 아이들이 모두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더러워. 걸레 같은 년.」



책상 위에 쓰인 글귀였다. 글자들은 하나하나 칼로 긁어 만든 듯 날카롭게 새겨져 있었고, 옆에는 오물이 잔뜩 묻은 축축한 걸레가 널려 있었다. 그것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속에 든 걸 다 게워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있던 미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밌는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나는 이게 미진의 짓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녀가 조직폭력배와 원조 교제를 하더라는 소문을 낸 장본인이라는 것도.

그날 이후 내가 조직폭력배 정부라는 소문이 거의 확정적인 진실처럼 전교를 떠돌아다녔다. 미진은 이강후와 분식집에서 마주쳤던 이야기까지 엮어 내가 조직폭력배와 호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서 호준이 그 지경이 되었다는 얘기까지 꾸며 냈다.

그 시절 유일하게 나에게 남은 친구는 윤아였다. 윤아는 아이들의 뭇매 같은 시선을 꿋꿋하게 견디며 나와 등하교를 같이 했고, 점심과 저녁도 같이 먹었다.

“민유수. 이따위 일로 주눅 들지 마.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자. 이 지긋지긋한 학교 따위, 벗어나 버리면 돼.”

윤아는 그 시절 나의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미진은 윤아만큼이나 나와 친했던 친구였고 우리 셋은 항상 몰려다녔었는데 내게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추측건대, 미진은 아마도 그 남자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호준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 몇 주 동안에도 미진은 몇 번이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내게 물었었다. 그리고 방향도 다르면서 하굣길은 꼭 나와 함께했다. 마치 누군가와 마주치기를 고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치기 어린 작은 질투가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지옥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그녀는 끝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미진을 원망하고 미워할 힘도 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오직 그 남자, 이강후를 증오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므로.



* * *



[유수야. 보고 싶다.]

호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는 그것이 정말 호준에게서 온 문자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다시 수신음이 울렸다.

[미안해.]

그것이 호준에게서 내가 받은 마지막 문자였다. ‘미안해’라는 세 글자에는 아마도 이런 뜻이 함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서 미안해.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웃고 있는데 웃을수록 한없이 서글퍼졌다.

나를 두고 떠나던 날, 엄마도 나에게 똑같이 말했었다. 사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그러나 엄마도 아마 이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으로 더는 너와 함께 살 수 없어서 미안해…….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교실을 나와 버렸다. 야자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이어졌지만 무시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제일 먼저 나타난 버스를 타고 무작정 시내로 나왔다. 날씨가 제법 차던,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교복 재킷을 교실에 두고 온 바람에 나는 온몸으로 칼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추위를 느낄 만한 감각이 살아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나는 정처 없이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튕겨져 나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몇 시간을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붉은 네온사인이 가득 찬 어느 사창가였다. 슬립 차림의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들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유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을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술 취한 아저씨들 몇 명이 여자들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서는 광경을 몇 차례 목격한 것 빼고는, 골목은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나는 여전히 온몸이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병적인 강박에 사로잡힌 채, 무언가 더 위험한 것이 없나 주위를 살폈다. 망가지고 싶어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골목 뒤편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따라 골목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에이, 씨발. 화란이 그년이 영업을 좆같이 하니까 남는 게 없어요.”

“병신아, 그게 왜 그년 탓이냐. 여기도 이제 다 된 거지. 재개발되면 다 쓸려 나갈 거라고.”

신랄한 욕설들이 먼저 들려왔다. 골목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타이어 무더기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검은색 정장에 껄렁한 자세, 쏟아지는 욕설들까지. 한눈에 봐도 주인집에 들이닥치곤 했던 조폭들처럼 위험해 보였다.

“뭐야, 네년은.”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한 남자가 눈썹을 씰룩이며 내뱉은 말이었다. 위협을 느낄 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재밌어?”

뜬금없는 나의 물음에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는 게 재미있냐고, 당신들은.”

“하하하하!”

중간에 있는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머지 두 남자도 비릿하게 따라 웃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못 들었수, 형님? 사는 게 재밌냐고 묻잖수.”

중간에 있는 남자는 나머지 두 남자에게 형님이라고 불렸다. 아마도 그가 대장 노릇을 하는 듯했다. 그가 나머지 두 놈을 뒤에 두고, 내게 바짝 다가섰다.

“그런 게 궁금하냐?”

“어.”

내 짧은 대답이 불편하게 들렸는지 웃음기가 남아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친절하게 대답해 드리지. 사는 게 존나 엿 같고 재밌어.”

“…….”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다, 애송아.”

남자의 회색빛 탁한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우린 네가 어떤 맛일지 궁금하거든.”

남자가 괴팍하게 나를 밀쳐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는, 그가 휘두르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싶었다.

나는 남자의 발길질이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각오한 것과는 달리 어떤 폭력도 벌어지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자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나를 향해 다시금 비릿한 미소를 흘리더니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야!”

“가만히 있어. 이제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니까.”

나는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그제야 자각이 됐다. 나는 그저 뭔가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일을 벌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터질 것처럼 고통스럽게 부풀어 있는 이 감정의 응어리를 터뜨려 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납치까지 당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 대 얻어터지고 말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이때의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쉽게 제어하지 못했고, 내가 벌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미숙한 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가 어리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내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사이, 남자는 더 깊은 골목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꼈는지, 남자가 주변을 살폈다. 그가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하냐!”

여전히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은 나지 않았다.

“새끼들, 하여튼 굼뜨기는.”

남자는 짜증이 났는지 잠시 나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닿자마자 도망가려는 나를 남자가 걷어찼다.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의 발에 맞은 남자의 허리가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꺾였다. 이어서 남자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추락해 버렸다. 그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