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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7화
정직 통보
“트레일러 영상은 반응이 어떠냐?”
“그 클로즈 베타 플레이 영상보다는 조금 덜 화제가 되는 거 같습니다, 깰룩.”
나는 깰룩이가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아 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너무 비현실적이었나.”
“이미 정식 오픈이 되었으니까요, 깰룩. 현재 유저들 수준에서는 잘 감이 안 올 겁니다.”
“그러게 그냥 무난한 플레이 영상으로 가자니까는, 배불뚝이 그 새끼는…….”
“…….”
직속 상사가 하는 또 다른 상사 욕에, 깰룩이는 현명하게 침묵으로 대처했다.
뭐, 어차피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나는 다시 책상 위에 펼쳐 둔 몬스터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보험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 큰일이네!
“아씨, 깜짝아.”
그때, 갑자기 전면의 메인 디스플레이에 흉측한 배불뚝이의 면상이 대문짝만 하게 나타났다. 흠칫 놀라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계약서 위에 엎지르고 말았다.
― 사긱 군! 어서 파리톤 협곡으로 가주게!
“아, 왜 또.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그냥 다른 애 보내. 깰룩아, 이것 좀 닦아줘.”
“알겠습니다, 깰룩.”
― 그럴 수가 없네. 게임마스터는 자네 한 명 아닌가.
“그럼 이참에 인원을 늘리면 되겠네.”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배불뚝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턱에 난 촉수를 매만졌다.
― 흠, 그런가. 이사회에선 이번 임무부턴 자네에게 휴가를 주면 어떨까 얘기하던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가 거절했다고 답할 수밖에…….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일은 혼자 하는 게 최고지.”
― 껄껄껄, 자네가 좋아할 줄 알았네.
“닥쳐. 그래서 뭔 일인데?”
배불뚝이가 손을 움직이자, 옆쪽으로 또 다른 디스플레이 마법이 생겨났다. 파리톤 협곡에 있는 지하 동굴 필드의 로그 정보였다.
“미친, 실화냐? 여기서만 158명이 입장 제한을 당했다고? 그것도 두 시간 만에?”
입장 제한은 하루 동안 똑같은 던전에서 세 번 사망했을 경우 받는 패널티였다.
― 그렇다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확인해 주게.
“뭐야, 안에 아직 유저가 있는 거야? 두 시간 동안 폐쇄 안 하고 뭐 했냐?”
― 아트라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모든 곳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겠나. 우리도 방금 고객 센터 쪽에서 연락을 받고 알았다네.
하여간 이놈들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니까.
“하아. 알겠어, 알겠다구. 깰룩아, 네가 나 대신 추가 던전 기획안 좀 손보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깰룩.”
비척비척 일어나 포탈 위에 섰다.
“F―Pariton Canyon으로 이동.”
[이동 불가. 보안 작동 중.]
“입장 권한 변경. 관리자 모드.”
[보안이 해제되었습니다.]
[권한 : 게임마스터]
[Pariton Canyon의 포탈을 활성화합니다.]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님, 승인되었습니다. 3초 후 이동됩니다.]
빛이 사라지자, 눈앞에 아찔한 높이의 절벽과 까마득히 펼쳐진 협곡의 모습이 나타났다. 파라마스타 왕국 북쪽의 파리톤 협곡이었다.
저 멀리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거대한 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고, 그대로 시선을 옮기면 산자락을 파고든 계곡 사이로 평화로운 마을도 보였다. U 자형의 거대한 협곡 아래엔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유리 융단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절벽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가 물안개를 만들어내며 햇빛을 반사시켰다. 그야말로 대자연이 만든 한 폭의 멋진 풍경화였다.
“아, 나 여기 맵 싫어.”
그리고 디스플레이 마법으로 이쪽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깰룩이를 향해 한차례 짜증을 쏟아내며, 이동해 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낙하 시의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뒷목까지 올라왔다.
공중에서 움직이며 방향을 조절했다. 나뭇잎에 가려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절벽 아래쪽에 작은 균열이 있었다.
부유 마법을 써서 속도를 줄이며, 대각선 아래로 뻗은 균열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이고, 슬슬 위험하겠다.’
균열 위아래로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바위들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허공에서 뚝 멈춘 뒤 소리 없이 착지했다. 피어오른 먼지가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버그 캐 소리 들을라.’
유저들이 아직 있다고 했으니 혹시라도 이러고 들어오는 게 눈에 띄면 곤란하다.
횃불도 켜지 않고 동굴 벽에 붙어 은밀히 안쪽으로 이동했다. 동굴 안쪽에서 메아리치듯 유저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힐, 힐! 빨리요!”
“어? 어어? 히, 힐… 아아악!”
“안 돼!”
“아, 망했다. 저 님 부활 끝났어요.”
뭔가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와 유저들의 비명으로 동굴 안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 깰룩아, 맵 정보 좀 보내줘.
― 알겠습니다, 깰룩.
투명화 마법을 쓸지 어쩔지는 상황을 봐야 할 것 같고.
― 보냈습니다, 깰룩.
― 어, 땡큐.
ID카드를 불러내, 깰룩이가 보내준 맵 정보를 확인했다.
[파리톤 협곡 ― 히드라의 동굴
등장 몬스터: 히드라 보살리스크(E등급) 1마리, 아크니온(F등급) 5마리, 카라칼롭(F등급) 5마리, 티레논다미스(F등급) 15마리.
현재 남아 있는 몬스터: BOSS 히드라 보살리스크(E등급) 1마리.]
그래, 히드라 정도면 확실히 유저들로서는 버거운 몬스터긴 하지. 오픈 베타 전 디버깅 작업으로 돌았을 때 공략하기가 꽤 까다로웠으니까.
그래도 두 시간 동안 158명이나 입장 제한을 당할 정도는 아닌데.
“미쳐 버리겠네.”
안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문이었다. 정식 출시한 지도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여기에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쿠르릉.
보스 방에 들어선 순간, 진동과 함께 천장에서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석순 뒤에 몸을 감추고 슬쩍 바라보니, 쉴 새 없이 유저들을 내려치고 있는 보스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씨아오, 덴 브로미코 흐!(아오, 더럽게 안 맞네!)”
뱀의 몸에 짧고 반질반질한 금색 털이 눈에 띄는 소. 가장 큰 특징은 여섯 개나 되는 팔이다.
오더코르트인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압도적으로 해괴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보살리스크가 여섯 개의 갈고리에 꼬리까지 마구 휘두르며 날뛰고 있었다. 오더코르트어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하아, 하아. 아 씨, 또 MP 다 떨어졌어.”
“무슨 저딴 몬스터가 다 있어. 아오, 죽겠네.”
한쪽에는 수많은 석순들 사이에 숨어 헐떡이는 두 명의 유저가 있었다.
“아드리안 님, 엠 남았어요? 큰 걸로 한 방만 맞으면 누울 거 같은데.”
금이 간 안경을 낀 빼빼 마른 남자가 갈색 조끼를 걸친 남자에게 물었다.
“죄송해요, 패리호터 님. 저도 기본 스킬 두 번 쓰면 끝나요.”
“후, 로그아웃은 마을에서밖에 안 되고. 미치겠네, 정말…….”
흠, 그나마 아드리안이 패리호터보단 좀 나은 상황인 것 같은데. 저래서야 클리어는 못할 거 같고.
보살리스크는 히드라 중에서도 압도적인 자생력을 자랑한다. 조금만 여유를 줘도 HP를 회복해 버린다. 공격을 집중해 단번에 잡아야 한다.
― 깰룩아, 방금 여기에서 죽은 유저 있거든? 데이터랑 전신 스캔본 좀 보내. 음성 데이터도 같이. 일단 이 스테 클리어시키고 유저들 내보내야겠다.
―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깰룩.
[플레이어 정보
TiN(일본)
소속 왕국: 파라마스타
랭크: 1,419,456위
성별: 여
주 성향: 프리스트
누적 플레이 타임: 34시간]
ID카드 화면에 빨간 단발머리를 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랭크와 플레이 타임을 볼 때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선 안 될 것 같지만 뭐, 어차피 남은 유저도 두 명밖에 없으니 크게 상관없겠지.
아직 ID카드에 떠 있는 정보 창을 흘깃 확인하고, 손을 가볍게 휘둘러 변신 마법을 썼다.
배열한 마나가 흩어지고 난 뒤, 내 모습은 사제복을 입은 틴이라는 유저처럼 바뀌어 있었다.
콰아아앙!
“레네 티포타 기아 즈? 오치 아델포(또 어디 숨었어? 에이, 씨)!”
그사이 패리호터와 아드리안은 동굴 곳곳을 부수는 보살이를 피해 보스 방 입구 근처까지 물러나 있었다.
나는 석순 뒤에서 포복으로 그들의 뒤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바로 뒤까지 갔을 때, 목을 가볍게 매만져 음성 변조를 하고 다른 손으로는 패리호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허업! 깜짝이야.”
“티, 틴 님? 저승 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보다 세 번 죽었으니까 입불 아니에요?”
뒤를 돌아본 두 유저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식겁했다.
그저 태연자약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부활해서 광장에 가보니까 스크롤 상점이 있더라구요. 거기에 사망 횟수 초기화 스크롤이 있길래……. 그래도 힐러인데 먼저 죽은 게 죄송해서 가지고 있던 돈 탈탈 털어서 그거 한 장 샀어요.”
“오오! 그런 게 있었다니!”
응, 그런 거 없어. 아씨, 이렇게 말까지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스크롤 상점 만들어야겠네.
“이, 일단 힐 해드릴게요.”
나는 애써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연기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완드를 들어 올렸다.
“힐.”
“…….”
“힐!”
“…….”
“뭐 하세요?”
패리호터와 아드리안이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이를 꽉 물고, 완드를 쥔 손을 한껏 천장을 향해 치켜 올리며 외쳤다.
“힐!!”
“…….”
어? 이상하다, 왜 힐이 안 써지지?
그때, 소리를 듣고 나타난 건지 석순 사이에서 보살이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토 카코, 헤드레! 에고 덴 사스 아레세이!(여기 있었구나! 그만 좀 죽어라!)”
“오, 쒯! 피해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지만, 곧바로 보살이가 휘두른 꼬리가 석순들을 부수며 유저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패리호터는 옆구리를 얻어맞고 날아가 처박혔고, 곧바로 회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아드리안은 허겁지겁 석순들이 잔뜩 돋아나 있는 쪽으로 몸을 피했다.
서둘러 아드리안과 반대쪽으로 움직이자, 매뉴얼대로 보살이는 힐러인 나를 먼저 공격하기 위해 비늘 쓸리는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었다.
“크이, 구 타타리!(야야, 잠깐만!)”
손에 든 갈고리로 당장이라도 내려칠 듯하던 보살이가 움찔 굳었다.
반대쪽으로 도망치던 아드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팝핀을 추고 있었다.
망할, 나도 모르게 오더코르트어로 말 걸어버렸네.
― 야, 보살. 잠깐 멈춰 봐. 나야, 마르디노.
얼른 메시지 마법으로 고쳐 말하자, 보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쵸 이시라? 마르디노 카림?(예? 마르디노 님?)”
― 어, 일이 좀 있어서 왔어. 일단 가만있어 봐.
보살이는 영문도 모르고 허공에 여섯 개의 팔을 치켜든 채로 뻣뻣하게 멈춰 있었다.
그때, 갑자기 멈춘 보살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던 아드리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공격을 멈춘 걸까요?”
“…….”
나는 슬며시 아드리안의 혼란스러운 얼굴로부터 눈을 돌렸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 야, 일단 저거 치워.
“이나이, 일씨오.(옙, 잠시만요.)”
쾅!
보살이는 허공에 치켜들고 있던 손 중 하나를 그대로 내려치는 것으로 바로 아드리안을 처리했다.
좋았어, 이제 해결…이 아니지. 힐이 갑자기 왜 안 되는 거냐고. 테스트 때도 분명 다 확인했는데 갑자기 왜? 유저 탓은 아닐 텐데.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보살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보살아, 너 오늘 뭐 좀 이상한 건 못 느꼈냐?”
보살이가 금색 머리통을 모로 기울였다.
“예? 글쎄요. 똑같은 거 같았는데요. 유저들이 생각보다 좀 빨리 녹는구나 정도?”
“그러냐. 에휴, 오늘 영업 끝났으니까 그만 퇴근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망할, 로그 보면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아, 그리고 보살아. 당분간 여긴 폐쇄할 거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전하고. 알겠지?”
“네? 폐쇄라고요? 하지만 왜…….”
“그건 나중에 따로 공지해 줄게. 수고해라.”
침울해하는 보살이를 뒤로하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정직 통보
“트레일러 영상은 반응이 어떠냐?”
“그 클로즈 베타 플레이 영상보다는 조금 덜 화제가 되는 거 같습니다, 깰룩.”
나는 깰룩이가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아 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너무 비현실적이었나.”
“이미 정식 오픈이 되었으니까요, 깰룩. 현재 유저들 수준에서는 잘 감이 안 올 겁니다.”
“그러게 그냥 무난한 플레이 영상으로 가자니까는, 배불뚝이 그 새끼는…….”
“…….”
직속 상사가 하는 또 다른 상사 욕에, 깰룩이는 현명하게 침묵으로 대처했다.
뭐, 어차피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나는 다시 책상 위에 펼쳐 둔 몬스터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보험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 큰일이네!
“아씨, 깜짝아.”
그때, 갑자기 전면의 메인 디스플레이에 흉측한 배불뚝이의 면상이 대문짝만 하게 나타났다. 흠칫 놀라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계약서 위에 엎지르고 말았다.
― 사긱 군! 어서 파리톤 협곡으로 가주게!
“아, 왜 또.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그냥 다른 애 보내. 깰룩아, 이것 좀 닦아줘.”
“알겠습니다, 깰룩.”
― 그럴 수가 없네. 게임마스터는 자네 한 명 아닌가.
“그럼 이참에 인원을 늘리면 되겠네.”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배불뚝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턱에 난 촉수를 매만졌다.
― 흠, 그런가. 이사회에선 이번 임무부턴 자네에게 휴가를 주면 어떨까 얘기하던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가 거절했다고 답할 수밖에…….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일은 혼자 하는 게 최고지.”
― 껄껄껄, 자네가 좋아할 줄 알았네.
“닥쳐. 그래서 뭔 일인데?”
배불뚝이가 손을 움직이자, 옆쪽으로 또 다른 디스플레이 마법이 생겨났다. 파리톤 협곡에 있는 지하 동굴 필드의 로그 정보였다.
“미친, 실화냐? 여기서만 158명이 입장 제한을 당했다고? 그것도 두 시간 만에?”
입장 제한은 하루 동안 똑같은 던전에서 세 번 사망했을 경우 받는 패널티였다.
― 그렇다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확인해 주게.
“뭐야, 안에 아직 유저가 있는 거야? 두 시간 동안 폐쇄 안 하고 뭐 했냐?”
― 아트라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모든 곳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겠나. 우리도 방금 고객 센터 쪽에서 연락을 받고 알았다네.
하여간 이놈들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니까.
“하아. 알겠어, 알겠다구. 깰룩아, 네가 나 대신 추가 던전 기획안 좀 손보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깰룩.”
비척비척 일어나 포탈 위에 섰다.
“F―Pariton Canyon으로 이동.”
[이동 불가. 보안 작동 중.]
“입장 권한 변경. 관리자 모드.”
[보안이 해제되었습니다.]
[권한 : 게임마스터]
[Pariton Canyon의 포탈을 활성화합니다.]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님, 승인되었습니다. 3초 후 이동됩니다.]
빛이 사라지자, 눈앞에 아찔한 높이의 절벽과 까마득히 펼쳐진 협곡의 모습이 나타났다. 파라마스타 왕국 북쪽의 파리톤 협곡이었다.
저 멀리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거대한 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고, 그대로 시선을 옮기면 산자락을 파고든 계곡 사이로 평화로운 마을도 보였다. U 자형의 거대한 협곡 아래엔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유리 융단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절벽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가 물안개를 만들어내며 햇빛을 반사시켰다. 그야말로 대자연이 만든 한 폭의 멋진 풍경화였다.
“아, 나 여기 맵 싫어.”
그리고 디스플레이 마법으로 이쪽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깰룩이를 향해 한차례 짜증을 쏟아내며, 이동해 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낙하 시의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뒷목까지 올라왔다.
공중에서 움직이며 방향을 조절했다. 나뭇잎에 가려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절벽 아래쪽에 작은 균열이 있었다.
부유 마법을 써서 속도를 줄이며, 대각선 아래로 뻗은 균열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이고, 슬슬 위험하겠다.’
균열 위아래로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바위들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허공에서 뚝 멈춘 뒤 소리 없이 착지했다. 피어오른 먼지가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버그 캐 소리 들을라.’
유저들이 아직 있다고 했으니 혹시라도 이러고 들어오는 게 눈에 띄면 곤란하다.
횃불도 켜지 않고 동굴 벽에 붙어 은밀히 안쪽으로 이동했다. 동굴 안쪽에서 메아리치듯 유저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힐, 힐! 빨리요!”
“어? 어어? 히, 힐… 아아악!”
“안 돼!”
“아, 망했다. 저 님 부활 끝났어요.”
뭔가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와 유저들의 비명으로 동굴 안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 깰룩아, 맵 정보 좀 보내줘.
― 알겠습니다, 깰룩.
투명화 마법을 쓸지 어쩔지는 상황을 봐야 할 것 같고.
― 보냈습니다, 깰룩.
― 어, 땡큐.
ID카드를 불러내, 깰룩이가 보내준 맵 정보를 확인했다.
[파리톤 협곡 ― 히드라의 동굴
등장 몬스터: 히드라 보살리스크(E등급) 1마리, 아크니온(F등급) 5마리, 카라칼롭(F등급) 5마리, 티레논다미스(F등급) 15마리.
현재 남아 있는 몬스터: BOSS 히드라 보살리스크(E등급) 1마리.]
그래, 히드라 정도면 확실히 유저들로서는 버거운 몬스터긴 하지. 오픈 베타 전 디버깅 작업으로 돌았을 때 공략하기가 꽤 까다로웠으니까.
그래도 두 시간 동안 158명이나 입장 제한을 당할 정도는 아닌데.
“미쳐 버리겠네.”
안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문이었다. 정식 출시한 지도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여기에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쿠르릉.
보스 방에 들어선 순간, 진동과 함께 천장에서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석순 뒤에 몸을 감추고 슬쩍 바라보니, 쉴 새 없이 유저들을 내려치고 있는 보스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씨아오, 덴 브로미코 흐!(아오, 더럽게 안 맞네!)”
뱀의 몸에 짧고 반질반질한 금색 털이 눈에 띄는 소. 가장 큰 특징은 여섯 개나 되는 팔이다.
오더코르트인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압도적으로 해괴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보살리스크가 여섯 개의 갈고리에 꼬리까지 마구 휘두르며 날뛰고 있었다. 오더코르트어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하아, 하아. 아 씨, 또 MP 다 떨어졌어.”
“무슨 저딴 몬스터가 다 있어. 아오, 죽겠네.”
한쪽에는 수많은 석순들 사이에 숨어 헐떡이는 두 명의 유저가 있었다.
“아드리안 님, 엠 남았어요? 큰 걸로 한 방만 맞으면 누울 거 같은데.”
금이 간 안경을 낀 빼빼 마른 남자가 갈색 조끼를 걸친 남자에게 물었다.
“죄송해요, 패리호터 님. 저도 기본 스킬 두 번 쓰면 끝나요.”
“후, 로그아웃은 마을에서밖에 안 되고. 미치겠네, 정말…….”
흠, 그나마 아드리안이 패리호터보단 좀 나은 상황인 것 같은데. 저래서야 클리어는 못할 거 같고.
보살리스크는 히드라 중에서도 압도적인 자생력을 자랑한다. 조금만 여유를 줘도 HP를 회복해 버린다. 공격을 집중해 단번에 잡아야 한다.
― 깰룩아, 방금 여기에서 죽은 유저 있거든? 데이터랑 전신 스캔본 좀 보내. 음성 데이터도 같이. 일단 이 스테 클리어시키고 유저들 내보내야겠다.
―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깰룩.
[플레이어 정보
TiN(일본)
소속 왕국: 파라마스타
랭크: 1,419,456위
성별: 여
주 성향: 프리스트
누적 플레이 타임: 34시간]
ID카드 화면에 빨간 단발머리를 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랭크와 플레이 타임을 볼 때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선 안 될 것 같지만 뭐, 어차피 남은 유저도 두 명밖에 없으니 크게 상관없겠지.
아직 ID카드에 떠 있는 정보 창을 흘깃 확인하고, 손을 가볍게 휘둘러 변신 마법을 썼다.
배열한 마나가 흩어지고 난 뒤, 내 모습은 사제복을 입은 틴이라는 유저처럼 바뀌어 있었다.
콰아아앙!
“레네 티포타 기아 즈? 오치 아델포(또 어디 숨었어? 에이, 씨)!”
그사이 패리호터와 아드리안은 동굴 곳곳을 부수는 보살이를 피해 보스 방 입구 근처까지 물러나 있었다.
나는 석순 뒤에서 포복으로 그들의 뒤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바로 뒤까지 갔을 때, 목을 가볍게 매만져 음성 변조를 하고 다른 손으로는 패리호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허업! 깜짝이야.”
“티, 틴 님? 저승 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보다 세 번 죽었으니까 입불 아니에요?”
뒤를 돌아본 두 유저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식겁했다.
그저 태연자약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부활해서 광장에 가보니까 스크롤 상점이 있더라구요. 거기에 사망 횟수 초기화 스크롤이 있길래……. 그래도 힐러인데 먼저 죽은 게 죄송해서 가지고 있던 돈 탈탈 털어서 그거 한 장 샀어요.”
“오오! 그런 게 있었다니!”
응, 그런 거 없어. 아씨, 이렇게 말까지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스크롤 상점 만들어야겠네.
“이, 일단 힐 해드릴게요.”
나는 애써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연기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완드를 들어 올렸다.
“힐.”
“…….”
“힐!”
“…….”
“뭐 하세요?”
패리호터와 아드리안이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이를 꽉 물고, 완드를 쥔 손을 한껏 천장을 향해 치켜 올리며 외쳤다.
“힐!!”
“…….”
어? 이상하다, 왜 힐이 안 써지지?
그때, 소리를 듣고 나타난 건지 석순 사이에서 보살이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토 카코, 헤드레! 에고 덴 사스 아레세이!(여기 있었구나! 그만 좀 죽어라!)”
“오, 쒯! 피해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지만, 곧바로 보살이가 휘두른 꼬리가 석순들을 부수며 유저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패리호터는 옆구리를 얻어맞고 날아가 처박혔고, 곧바로 회색 빛이 되어 사라졌다. 아드리안은 허겁지겁 석순들이 잔뜩 돋아나 있는 쪽으로 몸을 피했다.
서둘러 아드리안과 반대쪽으로 움직이자, 매뉴얼대로 보살이는 힐러인 나를 먼저 공격하기 위해 비늘 쓸리는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었다.
“크이, 구 타타리!(야야, 잠깐만!)”
손에 든 갈고리로 당장이라도 내려칠 듯하던 보살이가 움찔 굳었다.
반대쪽으로 도망치던 아드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팝핀을 추고 있었다.
망할, 나도 모르게 오더코르트어로 말 걸어버렸네.
― 야, 보살. 잠깐 멈춰 봐. 나야, 마르디노.
얼른 메시지 마법으로 고쳐 말하자, 보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쵸 이시라? 마르디노 카림?(예? 마르디노 님?)”
― 어, 일이 좀 있어서 왔어. 일단 가만있어 봐.
보살이는 영문도 모르고 허공에 여섯 개의 팔을 치켜든 채로 뻣뻣하게 멈춰 있었다.
그때, 갑자기 멈춘 보살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던 아드리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공격을 멈춘 걸까요?”
“…….”
나는 슬며시 아드리안의 혼란스러운 얼굴로부터 눈을 돌렸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 야, 일단 저거 치워.
“이나이, 일씨오.(옙, 잠시만요.)”
쾅!
보살이는 허공에 치켜들고 있던 손 중 하나를 그대로 내려치는 것으로 바로 아드리안을 처리했다.
좋았어, 이제 해결…이 아니지. 힐이 갑자기 왜 안 되는 거냐고. 테스트 때도 분명 다 확인했는데 갑자기 왜? 유저 탓은 아닐 텐데.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보살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보살아, 너 오늘 뭐 좀 이상한 건 못 느꼈냐?”
보살이가 금색 머리통을 모로 기울였다.
“예? 글쎄요. 똑같은 거 같았는데요. 유저들이 생각보다 좀 빨리 녹는구나 정도?”
“그러냐. 에휴, 오늘 영업 끝났으니까 그만 퇴근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망할, 로그 보면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아, 그리고 보살아. 당분간 여긴 폐쇄할 거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전하고. 알겠지?”
“네? 폐쇄라고요? 하지만 왜…….”
“그건 나중에 따로 공지해 줄게. 수고해라.”
침울해하는 보살이를 뒤로하고 동굴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