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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6화

위기라고 쓰고 기회라고 읽는다




“사긱 군, 일은 잘 돼가나?”

배불뚝이 드라비라가 끔찍하게 생긴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꺼져.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

“껄껄, 여전히 까칠하구만.”

“너 같으면 안 까칠하게 생겼냐? 왜 개인 작업실까지 찾아와서 난리야. 닥치고 꺼져.”

어깨의 손을 쳐내고 다시 허공에 띄워놓은 디스플레이 마법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배불뚝이는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클로즈 베타가 망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그래도 자네가 있던 파라마스타 왕국을 제외한 모든 왕국들은 모두 무사히 튜토리얼을 완료했다네.”

“그 문제의 왕국이 문제라 문제인 거잖아! 꺼지라고!”

“껄껄걸, 문제가 많구만! 지구인들은 이런 걸 두고 라임 돋는다고 하던가?”

배불뚝이는 제가 한 생각이 재밌어 못 견디겠다는 듯 꺽꺽거리며 웃어 댔다. 나는 혐오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가 문제다, 네가. 이놈은 무슨 드립도 못 쳐.

웃을 때마다 흔들리는 턱밑의 촉수를 확 잡아 뽑아버리고 싶었다.

“나라고 한가해서 자네를 찾아온 건 아닐세. 보아하니 깰룩 군은 아직 안 왔나 보군.”

깔끔히 무시하자, 내 표정을 흘끔 쳐다본 배불뚝이는 헛기침을 했다.

“곧 정식 출시 아닌가.”

“그게 뭐. 나도 알아. 너희들이 기획에, 제작에, 테스트까지 다 나한테 떠넘겼잖아. 지금까지 테스트하고 있던 게 누구라고 생각하냐?”

배불뚝이, 드라진 코에롱 드라비라는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자네는 GM, 게임마스터 아닌가. 자네가 오픈 베타에 참여 안 하면 누가 하겠나?”

“너는 회장 주제에 참여 안 하잖아. 또 지들끼리 맘대로 나 집어넣는 걸로 결정했겠지, 썩을 놈들. 아오, 꼴 보기 싫으니까 좀 꺼져.”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쏘아붙였다. 하지만 배불뚝이는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지 연신 꺽꺽거리며 웃었다.

“뭐, 좋네. 게임만 잘 만들면 되지. 이제 곧 작업 시간일세. 듣기론 자네에게 꽤 반가운 작업이 될 것 같다고 하던데?”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배불뚝이 쪽으로 손만 홰홰 쳤다.

막말을 입에 단 채 살고, 밥 먹듯 기물을 파손하고, 툭탁 하면 오더코르트인들을 두드려 패지만, 이건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빡퉁이 올라서 못 견디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날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배불뚝이였다.

이 빌어먹을 게임, 체인지 더 월드와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그들은 내게 어떤 불이익도 가할 수 없었다.



을(나석익)은 갑(엑스 어스)과의 공동 작업, ‘체인지 더 월드’의 제작과 운영에 협력한다. 갑과 을은 공동 작업을 위해 서로를 적극 지원할 의무가 있다. 마나 폭주 지역이 계약일 기준 95% 이상 줄어들 시, 갑은 을을 지구로 귀환시켜 주어야 한다.

갑은 을의 편의를 보장하고, 을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권리를 훼손할 수 없다.

단, 갑은 ‘체인지 더 월드’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에 한해 을을 제지할 수 있다.



그렇다. 요는 그저 게임 제작 일만 열심히 잘하면 되는 거다.

내가 욕설을 퍼붓든, 폭행하든, 지갑을 털든 저들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게임을 위해서라면 오더코르트인을 죽이는 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여나 뭐라 해도 계약서 찢고 해고하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 외에도 계약서에는 나한테 심각하게 유리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조항들뿐이었다.

뭐 내가 쓴 것도 아니고, 저놈들이 멍청한 걸 어쩌겠는가.

“그럼 부탁하네. 나는 호르핌 노동자들 면접을 봐야 해서 이만 가지. 끝나는 대로 참석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응, 엿이나 먹어.”

보란 듯이 오른팔을 뒤로 뻗어 가운뎃손가락을 그에게 내밀었다.

배불뚝이는 낄낄거리며 작업실 문을 나서서 사라졌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면 디스플레이 화면에 떠 있는 현황 그래프가 날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 클로즈 베타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 지구에서는 접속기 주문이 폭주하여 제작 물량을 훌쩍 초과하고 있었다.

다른 게임과는 상대가 안 되는 현실감. 진짜 현실이니 당연하다.

거기다 게임성. 현직 게임 기획자이자 골수 게임 유저인 내가 직접 모든 과정에 참여해 만든 게임이다.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접속기 자체도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저렴하고,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유저가 많으면 좋긴 하다. 좋긴 한데.

‘문제는 그만큼 일이 빡세진다는 거지.’

한숨을 쉬던 그때, 문을 열고 깰룩이가 들어왔다. 표정이 꽤 어두워 보였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깰룩이는 대답 대신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미친.”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은 나는 참담함에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 *



“이번 일은 반드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하오!”

하르코스탄이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러자 탁상을 둘러앉아 있던 나머지 카킹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자제이자 심복인 카작들도 공감을 표했다.

“동의하는 바요. 감히 이 신성한 오더코르트를 더럽히다니, 이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오.”

아트라 대륙 북쪽에 위치한 튜라마스타 왕국의 카킹, 제니켈이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폭행을 당한 카작들이 내 아들 말고도 무려 열세 명이나 더 있더군.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말도 마시오. 금품 갈취와 절도 행각은 피해 규모를 헤아릴 수도 없었소. 얼핏 듣기론 아란탈들 쪽 피해가 더 심각하던데. 폭행당한 인원이 거의 서른 명이 넘는다지?”

“그쪽이 알 바는 아닙니다. 이제 호들갑은 그쯤 떨고 신경 끄세요.”

“뭣이?”

“아니,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잖아요?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 진짜 모르겠네요. 다른 행성 사람들이 넘어오는 건데 그럼 설마 아무 문제가 없겠어요?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고 제가 분명히 지난번 회의 때 말씀드렸을 텐데요.”

회의적인 얼굴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란탈의 수장이자 엑스 어스의 이사 중 한 명인 포센투냐였다. 나머지 아란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제니켈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 말한 문제란 것에 설마 강간이나 살인 같은 중범죄도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오?”

“그건…….”

“거기까진 예측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떻겠나, 포센투냐?”

줄곧 대화를 지켜보던 드라비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뭐? 이 망할 놈아. 넌 도대체 누구 편이냐?”

옆에 있던 드라비라의 오랜 친구인 티렌타가 그의 어깨를 밀치며 역정을 냈다.

“꺽꺽꺽, 걱정하지 말게. 아직은 아란탈 쪽이니.”

“‘아직은’이라고?”

“완전히 미쳤네, 이거.”

포센투냐와 티렌타가 드라비라와 카킹들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반면, 카킹들은 드라비라의 말에 꽤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껄껄! 조크네, 조크! 표정들 풀게나.”

“허허허, 드라비라 회장은 여전히 재밌는 사람이군. 아참,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소.”

하르코스탄이 드라비라를 보며 말했다.

“마르디노에 대한 얘기요.”

그 한마디가 가져온 파급력은 엄청났다.

‘마르디노 님?’

조용히 있던 깰룩도 퍼뜩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하르코르탄에게 집중되었고, 드라비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사긱 군과 무슨 일 있었나?”

하르코스탄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아니, 글쎄 이방인 주제에 카킹을 무슨 돌 쪼가리처럼 취급하는 게 아니겠소? 과인은 그자가 너무 기고만장해지지 않았나 싶소. 언젠가 한 번쯤은 제대로 그 콧대를 꺾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드라비라 당신 생각은 어떻소? 분명히 말하지만, 절대 이대로 그런 막돼먹은 자에게 오더코르트의 운명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십니까, 깰룩?”

깰룩이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다른 아란탈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하르코스탄 님이 하신 말씀은 천 년 전 베트라 대륙으로 도망간 배도자들이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깰룩. 설마 그 칼갱이들은 아닐 테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는지 해명해 주셔야겠는데요, 깰룩.”

“미안하네만 자네는 좀 빠져주겠나? 짐은 드라비라 회장에게 물은 거네만.”

쾅!

깰룩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제대로 대답을 해주시죠!”

“깰룩 군, 진정하게나. 이럴 때가 아닐세.”

옆에 있던 드라비라가 난처해하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깰룩의 주변에 있는 다른 아란탈들도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일어섰다.

“진정? 야, 드라비라. 너 미쳤어? 지금 우리가 진정하게 생겼냐? 마르디노는 지금 우리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야.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행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근데 뭐? 콧대를 꺾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리냐?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어야지.”

티렌타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진정들 하게. 아무래도 하르코스탄이 사긱 군과 트러블을 겪은 모양이야. 그래서 조금 경솔한 발언을 했던 것 같네.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방금 들은 이야기는 모두 없던 얘기로 해주게나. 그리고 하르코스탄, 자네는 이런 얘기를 공석에서 하면 어떡하나. 자중해 주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드라비라와 하르코스탄은 서로 헛기침을 하며 어물쩍거렸다.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읽은 아란탈들은 눈을 흘기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하르코스탄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크흠, 빨리 진행해야겠군. 깰룩 군, 자료 화면 좀 부탁하네.”

“…….”

깰룩이 말없이 이미지 마법을 띄웠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계약상 드라비라의 부하 직원이었기에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런데 방금 깰룩이라고 했소? 자네 언제 개명했나?”

알리마스타 왕국의 카킹인 로네초프가 물었으나 무시했다. 드라비라가 그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테니 집중 좀 해주게. 이건 이번 일의 진행 상황이네. 다들 보다시피 문제를 일으킨 범죄자들은 이미 모두 지구 쪽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네.”

“그런가?”

“조금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거네. 모두 콩밥을 먹게 되겠지. 하지만 고작 이 얘길 하려고 자네들을 부른 게 아니네. 더 큰 문제가 있어. 앞으로의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이것이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적절한 예방이 필요한 시기란 것이지. 카킹들의 말처럼 말일세.”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결국 아란탈 쪽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왜 자꾸 아까부터 카킹 녀석들을 옹호하고 있는 건데? 어? 정신 차려, 넌 아란탈이야! 저놈들은 위선자고!”

티렌타가 눈을 부라렸다. 이마에서 회오리처럼 둘둘 말린 뿔이 솟아나왔다.

포센투냐 또한 카킹들을 흘겨보며 충고했다.

“맞아, 드라비라. 저 녀석들은 지금 지구인들을 이용해서 자기들 배만 불릴 생각을 하고 있어. 오더코르트의 멸망을 막을 생각 따윈 조금도 없다고.”

“거 말들이 심한 것 아닌가? 우리가 왜 멸망에 관심이 없다는 겐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님이 알 바예요? 거 못 알아들으면 가만히나 좀 계시죠.”

“님이라니, 짐의 이름은 하르코스탄이네!”

그러자 아란탈들이 모두 소리 내어 그를 비웃었다.

“쯧쯧, 내가 말을 말지.”

포센투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킹들은 끝까지 아란탈들이 왜 비웃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드라비라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설명했다.

“님은 지구인들이 인칭 대명사로 쓰곤 한다네. 주로 게임상에서 말일세.”

그제야 카킹들과 카작들이 조용해졌다.

“하여간 저놈들은 언제나 시대에 뒤처지는구만. 그런 줄도 모르고 제 잘났다고 콧대만 높아선, 에휴.”

심기가 뒤틀린 하르코스탄이 코웃음을 쳤다.

“포센투냐, 당신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소. 아직도 아란탈의 명성이 예전 같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요? 막말로 하크라티 님과 그 제자 분들이 돌아가신 후로는 뭐 하나 한 게 없지 않소. 허울만 좋지, 죄다 똑똑한 척만 하는 바보들인 것을! 세상천지가 다 아는 사실 아니오!”

“뭐라고? 추락한 왕족 주제에 어디서 감히 하크라티 님 이름을 꺼내!”

“짐이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좋아, 틀려도 아주 단단히 틀렸다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주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포센투냐가 달려들어 양손으로 하르코스탄의 수염을 잡아 뜯자, 하르코스탄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울부짖었다. 난리 통에 변신 마법까지 풀리자, 집채만 한 크기의 꽃무늬 개구리로 돌아가 버린 하르코스탄 덕에 회의실은 발 디딜 공간도 없어졌다.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뒷문을 열고 몰래 빠져나온 건 드라비라와 깰룩, 둘뿐이었다.

“하여간 늘 힘이 넘치는 작자들이야.”

“…깰룩.”

엉망이 된 회의실을 청소해야 할 생각을 하니 깰룩은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연거푸 쉬던 그때.

우직! 콰과광!

회의실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

청소가 아니라 아예 건축을 새로 해야 할 판이다.

“쯧쯧, 아무래도 더 이상 회의는 불가능할 것 같구만. 하는 수 없지. 깰룩 군, 이걸 사긱 군에게 가져다주게나.”

“이게 뭡니까, 깰룩?”

깰룩이 드라비라가 내미는 양피지 한 장을 받아 들었다.

“이번 범죄 관련 실태 보고서네. 우리 대신 사긱 군과 함께 대책을 마련해 주게나. 만약에 이걸 왜 자기가 해야 하냐고 투덜거리면, 그냥 이사회와 왕족들이 합의한 일이라고 대충 둘러대게.”

“…예.”

천하의 석익이 시킨다고 순순히 하겠냐마는.

“그리고 저거.”

드라비라는 완전히 박살 난 회의실 쪽을 가리켰다.

“대충 치워주게나. 다 돌려보내고.”

깰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드라비라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뒤뚱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하아아아아…….”

결국 깰룩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의실 잔해 위에서 아직도 쌈박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 * *



“그랬다 이거지.”

손에 들린 양피지에서 배불뚝이 놈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어차피 지도 나한테 올 거면서, 이걸 굳이 깰룩이한테 전하라고 시켰다는 데서 놈의 교활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수작질을 다 간파할 수 있었다.

배불뚝이가 내게 일을 몽땅 떠넘기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그것보다 진짜 머리 아픈 문제는 클로즈 베타 때부터 생각지도 못한 범죄자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깰룩? 이대로 가다간 극악무도한 범죄 게임이라고 흠만 잡힐 것 같은데…….”

“걱정 마.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긴 해. 벌써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히스테리를 부릴 거라 생각했는지 자라목을 한 채 내 눈치만 보고 있던 깰룩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 벌써 작업 시간이네요, 마르디노 님. 이제 슬슬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뭐? 벌써?”

시간 참 빠르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도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럼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어디라 그랬지?”

“제2실험실입니다.”

개인 작업실 한편의 포탈 위에 오르자, 깰룩이가 흰 털을 펄럭이며 뛰어와 붙어 섰다.

“S―181153으로 이동.”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님, 승인되었습니다. 3초 후 이동됩니다.]

눈앞에 마나로 이루어진 오더코르트 문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이 짓을 대체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하냐.”

투덜거리자, 깰룩이는 현명하게도 이동 마법이 끝나자마자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필드로 향하는 문을 열고 한편에 서 있자, 운영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직원으로부터 메시지 마법이 들어왔다.

― 곧 작업 시작합니다.

― 알고 있어.

[00:00:19:04]

한쪽에 띄워놓은 타이머를 물끄러미 보던 나는 손을 내저어 디스플레이 마법을 해제시켰다.



서울 한강 변두리.

쐐액―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63빌딩 꼭대기에 처박혔다.

콰광!

건물 파편이 아스팔트를 부수며 떨어졌다. 한강 공원에 있는 시민들의 시선이 모두 몽글몽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63빌딩을 향했다.

“뭐, 뭐야? 무슨 테러 일어난 거 아냐?”

푸른 하늘에 갑작스레 노을이 졌다. 하얀 구름들이 모두 물감에 물들듯 서서히 붉게 변해갔다.

크아아아아!

순간,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린 불덩어리들이 63빌딩에 쑤셔 박혔다.

“으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온몸이 저릿저릿 떨릴 정도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때, 까맣게 솟아오르는 연기를 뚫고 거대한 날개를 펼친 무언가가 나타났다.

“드, 드래곤?”

붉은빛의 용이 날카로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우회했다.

“저건 뭐야? 저기 사람이 있어!”

누군가가 허공을 가리켰다.

한편, 63빌딩 안에 있던 몇몇 시민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드래곤조차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곳에, 감색의 긴 망토를 세차게 펄럭이며 오연히 허공에 서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드래곤의 이름이 무색하구나, 레이자냐.”

“감히, 인간 따위에게 내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한 기억은 없다.”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비교적 근처에서 소리를 들은 이들이 귀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그러나 남자는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칼립테타이 메 토 포스.”

허공 가득 푸른 마법진이 생겨나며, 남자의 양손에 찬연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망토 사이로 보이는 갑옷에도 푸른 문자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남자는 한 손가락으로 용을 겨눈 채 미소 지었다.

“그 인간의 속도도 쫓아오지 못하면서 말이 많군. 드래곤들은 다 말이 많나?”

“건방진! 씹어 먹어주마!”

빛이 사방으로 터진 그 순간, 레이자냐가 그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나며 눈 깜짝할 사이 아가리를 쩍 벌린 드래곤이 빛줄기를 뚫고 근처에 도달했다.

뒤이어 뿜어낸 끓는 용암 같은 화염이 남자를 덮쳤다. 창밖으로 그를 바라보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도 않은 듯, 공중에서 한 바퀴 크게 도는 것으로 화염을 피해냈다. 동시에 빛을 감은 손으로 용을 공격해 갔다.

그가 이동하는 궤적을 따라 붉은 용이 기다란 모가지를 틀자, 마치 커터 칼로 종이 자르듯 매서운 불줄기가 도시를 가로질렀다.

콰아아아앙!

곳곳에서 연기와 불이 솟구치고, 사방으로 빛이 터지며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화염에 적중된 빌딩 외벽이 흐물흐물 녹아 내렸다.

“저게 무슨…….”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대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촬영하거나 전화를 걸어 댔다.

“죽어라!”

분노한 드래곤이 몸을 떨쳤다. 사방에서 화염이 폭발하며 남자가 있는 허공을 집어삼켰다.

남자는 공중에서 실이 끊어진 것처럼 밑으로 뚝 떨어지며 불길 속에서 벗어났다.

추락은 한강의 수면이 살짝 물결칠 정도로 아주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찔함에 뒷머리가 쭈뼛 서는 듯했다.

그러나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이자냐를 향해 오만한 얼굴로 말했을 뿐이었다.

“씹어 먹는 데 오래도 걸리는군.”

“닥쳐라! 한낱 인간 주제에!”

용의 아가리가 다시 한 번 벌어졌다.

화르르르륵!

화염이 빛살 같은 속도로 남자를 덮쳤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가 손을 움직이자, 빛무리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촤아아아악―

브레스가 한강을 갈랐고, 삽시간에 한강 공원이 증기로 자욱해졌다.

“테 헤로나 파오, 오 기아틴 피아나 페타크시에…….”

흰 증기 속에서 소리도 없이 드래곤의 뒤에 나타난 남자는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바람에 증기가 걷히자, 허공을 수놓은 까마득한 숫자의 마법진이 드러났다.

레이자냐는 급히 방향을 틀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남자가 빛이 나는 두 손을 아래로 향한 후였다. 한강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 마지막 간다. 준비해.

― 예, 알겠습니다.

한강을 온통 진동시킬 만큼 큰 용오름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하늘을 가렸다.

“끝이다.”

크아아아악!

폭풍은 드래곤을 완전히 집어삼켰고, 이내 파공음과 함께 강바닥을 드러내며 비산했다. 흩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햇빛이 쪼개졌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줄기 아래 남자만이 당당히 서 있었다.

“그 오만함이… 언젠가 네놈을 쓰러뜨릴 것이다…….”

레이자냐의 마지막 말이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 허공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저주에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아니, 최후에 서 있는 건 내가 될 거다. 지금처럼 말이지.”

“…….”

“오케이, 컷!”

크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팟, 눈부신 조명이 켜졌다.

동시에 생동감 넘치는 서울의 풍경이 눈 녹듯 흩어져 사라졌고, 주변에 서성이던 시민들의 모습도 모두 각양각색의 외계인들로 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깰룩.”

어느새 다가온 깰룩이가 물을 건넸다. 나는 한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마구 들이켰다.

“후, 개더워.”

마지막 연습과 촬영까지, 거의 두 시간 이상을 화염 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였다. 아무리 냉각 마법을 썼다지만 스튜디오 전체가 찜통 수준이었다.

짝. 짝. 짝.

어쩐지 소리에서 냄새가 나는 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멋졌네, 사긱 군.”

“그러면 그렇지. 너일 줄 알았다.”

배불뚝이 드라비라가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해왔다. 나는 들고 있던 물병으로 그 손을 밀어냈다.

“더워. 징그러. 들러붙지 마. 꺼져.”

“예의 그 영상이 벌써 1억 뷰를 찍었더군. 개인이 찍은 영상이 그 정도인데 지금 촬영한 홍보 영상이 공식 채널로 올라가면 얼마나 큰 반향을 가져올지 기대가 되는구만.”

대답 없이 물병을 열어 머리에 쏟아부었다. 깰룩이가 옆에서 부지런히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 영상’이란 현재 온갖 SNS와 인터넷 플랫폼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 플레이 영상이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먼저 너무나 현실적인 게임의 퀄리티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플레이어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렇다, 그 영상 속 플레이어는 바로 내가 클로즈 베타 때 만난 그 또라이 유저였다.

나중에 깰룩이가 찍은 영상을 보면서도 전혀 몰랐지만, 나한테 속아 히든 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전부터 촬영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게 클로즈 베타의 플레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클로즈 베타 때부터 이런 플레이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더 현실적이고 실감 나는 걸까, 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얼굴 제대로 바꾸기나 해.”

방금 촬영한 홍보 영상은 이미지 마법으로 내 얼굴을 변경해서 내보낼 예정이었다. 유저들과는 달리 내 얼굴은 따로 변신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커스터마이징이 불가능하니까.

“그건 걱정 말게나. 참, 레이자냐 군이 방금 응급실로 실려 갔다네.”

“그래서 어쩌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배불뚝이가 빙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딱히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네.”

재수 없는 자식.

“촬영 끝났으면 난 이제 간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열심이군, 사긱 군. 하긴 열심히 일해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지.”

배불뚝이가 턱에 붙은 채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들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시하고 일어나서 걸음을 옮기던 내가 문득 물었다.

“맞다. 마나 폭주 감지기는?”

“제작 중이네.”

“아직도?”

“아직도라니, 그게 얼마나 까다로운 아티팩트인 줄 모르나 보군. 베이스 마법만 56중첩이라네. 크기도 작아서 여간 고생이 아닐세. 정교하게 새겨야 하니까 말이야. 자네가 말한 부가 기능도…….”

말이 길다.

“알았으니까 오류만 안 생기게 해. 정식 출시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내놔.”

“허허, 걱정 말게나, 자네도 참.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가? 지난 삼 년 동안 느꼈겠지만, 여기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고?”

“미친놈.”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도 게임 제작자였던 나다. 게임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너 같으면 곧 멸망해 버릴 이딴 행성에 있고 싶겠냐, 새끼야.”

정식 출시까지 앞으로 사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