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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5화
저주받은 날
처음 오더코르트에 오게 된 이후, 얼마간은 꿈꾸는 듯한 시간이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은 누나들도 없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가며 밥 먹듯 야근해야 하는 직장도 없다.
온통 이상한 외계인들뿐이었지만, 모두 굉장히 친절했다. 지구에서는 맨날 이리저리 치여 다녔는데 우주가 선택한 용사 대접을 받으니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 와서 사귄 오더코르트 친구들로부터 마법도 배웠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편리하고 대단한 학문이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직관적이면서도, 온갖 비상식적인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오더코르트인들과 이야기하면서 마법을 연구하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하는 기발한 마법을 생각해 내는 게 즐거웠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배불뚝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구의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다구.”
시조새 크기의 까마귀인 질라크가 날카로운 손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질라크는 이 빌어먹을 행성에 처음 떨어졌을 때,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마법을 알려준 친구 중 하나였다.
“마법이 그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는 거지?”
로도리네와 크로키리, 로레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언제나 그랬듯 마을 뒷산에서 한창 마법 실험을 하다 지쳐 아무렇게나 풀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보편화되어 있다면서 마법을 겁나 못 쓰는 놈들은 뭐야? 나보다 못 쓰는 애들도 있던데.”
대답한 것은 열대 지역의 곤충처럼 알록달록한 털을 가진 원숭이 모습을 한 로레나였다.
“호르핌들 말이군요.”
“호르핌?”
로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잘 쓰지 못하는 오더코르트인들을 뜻해요. 카킹들이나 아란탈들의 지배를 받는 하수인들이라고 할까.”
“아, 여기 신분 사회였지. 노예나 서민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비슷해요. 마법이란 건 어쨌든 사용하기 꽤 까다로우니까요. 지구에도 스마트폰은 엄청 많지만, 지구인들 전부가 직접 어플을 제작한다든가, 고장이 나면 스스로 수리를 한다든가, 전문가 수준으로 활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용하기 까다롭다고? 별로 까다롭진 않은 것 같은데.”
그야 이론적으로 왜 이게 이렇게 되는가를 분석하려고 하면 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마법은 쉽게 말하면 그냥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너처럼 쉽게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로돌.”
로도리네가 돌이 여기저기 박힌 육중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로도리네는 말끝에 ‘로돌’이라고 하는 사투리 비슷한 것을 썼다.
부엉이 눈을 한 초록색 도마뱀인 크로키리도 사투리를 쓰는 친구였다.
“맞아. 너처럼 이렇게 단기간에 싹 습득해 버리는 경우는 처음 봐, 키리. 어쩌면 고대의 아란탈들 이상일걸. 지금 네가 새로 만들어낸 마법만 몇 가진 줄 알아? 아마 하크라티 님이 살아 돌아와도 너 정도는 아닐 거야, 키리. 대체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하는 건지.”
“헐, 용사 어쩌고 하더니 진짜 내가 그 정도라고? 말했잖아, 지구에서는 게임이든 현실이든 모두가 치고 박고 싸운다니까. 난 그냥 수식만 짠 거라고.”
오더코르트에 와서 제일 놀란 건, 여기에 죽고 죽이는 전쟁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였다.
오더코르트인들은 일상에서 마법을 쓰면서도, 마법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어렵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지구로 치면 일반인들은 별 관심도 없는 고고학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린 죽어도 기억까지 가진 채로 무한히 다시 태어나니까.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키리.”
현재 오더코르트인은 모두가 불멸의 존재였다. 영원한 평화라는 건 ‘불사’라는 특징 아래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멸망이라는 미래도 함께 가져왔다.
마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더 빨리 마나를 소비해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없으니 마법은 점점 더 너무 느긋한 방향으로만 발전했고, 오더코르트인들은 무한히 부활할 뿐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
행성 전체 인구의 무조건 불변.
그것이 오더코르트인들이 나까지 소환해 가며 지구인들을 끌어들이려 한 이유였다.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 미친 듯이 늘어나는 마나를 다 소비할 수 있으니까.
이대로 가만있으면 이 순진하고 착한 외계인 친구들은 물론 나까지 꼼짝없이 죽는 것이다.
입맛이 썼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구.”
질라크가 돌연 말했다.
“사긱, 아까 그 마법 다시 써 줘라, 키리.”
“석익이다, 석익! 몇 번을 말해야 돼!”
“사긱…….”
“석익이라니까!”
지구로 가면 이 이름부터 갈아치우든지 해야지!
크로키리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는 구석에 처박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쪽으로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이놈은 짜증 한번 냈다고 쭈그러져서는. 애냐?”
“미안하다, 키리. 도무지 니 이름은 발음이 안 돼.”
“됐다, 됐어. 뭐라 그랬냐? 아까 쓴 마법이…….”
화르르륵!
그때, 갑자기 뒷목이 따끔할 정도의 강력한 열기가 등 뒤를 덮쳤다.
“위험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크로키리였다.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크로키리가 밀치는 대로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이며 바닥을 굴러야 했다.
뒤늦게 돌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벌 떼처럼 날아드는 수십 개의 불덩이였다.
크로키리가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땅이 갈라지며 폭포수 같은 물이 하늘로 솟구쳤다. 거대한 화구들은 굳건한 성벽처럼 솟아오른 물기둥들을 통과하면서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순간, 로도리네가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키더니, 골키퍼처럼 화구 쪽으로 뛰어들었다.
퍼버버벙!
수십 개의 화구들이 로도리네의 암석 같은 몸체에 부딪히며 요란스러운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사이 질라크는 나를 등에 둘러업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기 봐, 누가 있어.”
아래를 가리키며 말하자, 질라크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복면을 뒤집어쓴 인영이 작게 보였다.
“저건 대체 누구냐구. 너랑 비슷한 모습이라구.”
“진짜네. 실루엣이 꼭 지구인 같아.”
그때, 복면인이 로켓처럼 위로 뛰어올랐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젠장, 찢어지자!”
질라크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부유 마법을 써서 반대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복면인은 방향을 왼쪽으로 틀더니, 질라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공중을 울렸다. 질라크가 허공에서 몸을 세운 채 활개 치고 있었다. 푸른 마나가 그를 중심으로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콰르릉!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쳐 복면인을 덮쳤다.
그러나 복면인은 번개에 직격되고도 멀쩡했다. 옅은 녹색의 구 같은 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윈드 실드? 저 녀석이 저걸 어떻게?’
그러고 보니 아까의 화염구도 그렇고, 복면인이 쓰고 있는 것은 전부 내가 손수 만든 마법들이었다. 함께 마법을 만들며 놀던 여기 있는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복면인은 그대로 질라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질라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궤도를 급격하게 틀자 내가 있는 곳까지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로 직후, 질라크의 몸에서 마법진 세 개가 백합처럼 피어났다.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한 것이다.
‘아니야, 늦어!’
그러나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복면인의 손이 질라크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질라크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빛이 되어 사라졌다.
“오에아 타 카우…….”
나는 즉시 복면인 쪽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미처 주문을 완성시키기도 전에 복면인의 발차기가 내 복부에 와 꽂혔다.
“크흣!”
간신히 손을 교차해 발차기를 막아냈다.
마법만 쓰는 줄 알았는데, 허공인데도 복면인은 바람개비처럼 몸을 틀면서 아주 능숙하게 격투술을 펼쳤다. 공격이 비 오듯 쏟아졌다.
‘미친, 겁나 빠르네!’
수세에 몰리는 순간, 로레나가 화염에 휩싸인 채 대포알처럼 날아왔다.
크로키리와 로도리네 또한 어느새 주문을 완성시킨 건지, 엄청난 수압의 물줄기와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밑에서 쏘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면인은 놀라지도 않고 허공에서 유유히 움직이며 모조리 피해냈다.
“야, 너 누구야!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뒤질세라 쫓아가며 외쳤지만, 줄곧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계속 피하기만 하던 복면인이 방향을 틀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로레나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씹냐!”
부름에 몰려든 검붉은 마나가 내게 휘감기며 소용돌이쳤다.
로레나도 복면인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고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에서 매서운 화염이 태양처럼 솟구쳤다.
복면인은 아래에서 덮쳐 오는 크로키리의 물줄기와 로도리네의 바위 탄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움직였다. 오직 그를 노리고 쏘아진 마법들이 서로 충돌하며 허공에서 소멸했다.
날아가면서 완성시킨 주문이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며 발동되었다.
“이거나 먹어라!”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마법진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일대의 대기를 모두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 복면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내 존재를 간과하고 있던 복면인은 폭풍에 휩쓸린 한 송이의 눈꽃처럼 정신없이 나부끼다가 땅에 처박혔다.
로레나와 눈빛을 교환하며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동 마법의 하얀 빛이 걷힌 순간, 로레나는 기다리고 있던 복면인의 발길에 걷어차여 날아갔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손쓸 틈도 없이 빛에 휩싸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로레나!”
이가 저절로 부드득 갈렸다.
질라크도 그렇고 그냥 닿기만 했는데 저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강제 이동 마법인가?
다시 이동 마법을 써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이동되자마자 구속당한 걸지도 모른다.
콰드드득!
땅속에서 나타난 로도리네가 복면인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내리쳤다.
하나 복면인은 고무공처럼 가볍게 튀어 오르며 공격을 피해내더니, 로도리네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한순간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그대로 주먹에 강타당하자, 로도리네 역시 빛이 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 새끼가!”
나는 다시 한 번 마나를 몸에 휘감았다. 하지만 크로키리가 앞을 막아섰다.
“사긱! 비켜, 키리!”
그러고는 갑자기 발을 뒤로 뻗어 내 가슴을 타척했다. 나는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그사이 크로키리가 초록색 손을 하늘로 뻗었다.
어느새 생겨난 먹구름이 머리 위에서 거칠게 울부짖었다. 순식간에 거센 폭우가 휘몰아쳤다.
그때,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던 복면인이 손을 하늘로 뻗었다.
“미친, 저게 말이 돼?”
그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동작에 몰아치던 폭우가 멎었다.
‘그 짧은 사이에 역주문이라도 외웠다는 거야?’
복면인은 말없이 발을 거칠게 한 번 굴렀다.
그러자 우둘투둘한 바위들이 피라미드처럼 솟아오르며 크로키리를 단번에 속박했다. 그것 또한 내가 만든 마법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급히 이동 마법의 좌표를 계산했다. 그러나 복면인이 한발 빨랐다.
“사긱…….”
내가 볼 수 있던 건 복면인과 함께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크로키리의 당황한 눈빛뿐이었다.
“…뭐야, 이게.”
나는 모두가 사라져 버린 텅 빈 산속에 홀로 남았다. 복면인은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애써 침착하려고 하며 수식의 흔적을 역산해 보았다.
‘이동 마법은 맞는 것 같은데 좌표를 지워놨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걘 또 뭐고?’
이때까지 만나본 아란탈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아니, 오더코르트인이 아니다. 지구인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행성의 사람? 아니면 또 다른 지구인?
복면인은 심지어 내가 만든 마법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역주문까지 펼치는 게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지도 못하던 그때, 눈앞에 빛이 번쩍이며 마나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꽃가루처럼 흩어진 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배불뚝이였다.
“어? 배불뚝이! 마침 잘 왔어, 큰일이야!”
“꽤나 다급해 보이는군, 사긱 군.”
배불뚝이는 촉수를 쓰다듬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상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날 공격했어! 그 새끼가 애들까지 싹 다 잡아갔다고. 그런데 좌표 추적이 안 돼! 그러니까 나처럼 지구인 같은 모습에 복면 같은 걸 쓰고 있는데…….”
급히 설명하고 있을 때, 배불뚝이가 씨익 웃으며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사긱 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네.”
“아씨, 뭐라는 거야. 급하다니까!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모른다고!”
“아닐세. 그것보단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 이제는 정말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뭔 개소리야? 계약서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저번에 내가 분명 안 한다고 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애들이…….”
“사긱 군, 그러니까 내 말은…….”
배불뚝이는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건 누구한테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르는 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용사’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빨리 계약을 하라는 소리일세. 이젠 정말로 우리가 더 이상 기다려 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뭐?”
“간단하네. 지금 당장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 ‘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너 방금 뭐라 했냐? 설마 이게 다 니 짓이야?”
그제야 모든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멱살을 움켜쥐려고 하자, 배불뚝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껄껄껄, 이제야 알았나? 생각보다 눈치가 없구만그래. 자네가 이런 마법들을 만들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예상 밖의 수확이었네. 나도 설마 그것들을 빼돌릴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닥쳐,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주변에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몸에 휘감겼다.
“어허! 그러면 안 되지.”
배불뚝이가 급히 한 손을 펼쳤다. 배불뚝이와 나 사이에 이미지 마법이 떠올랐다.
‘서울?’
화면 속에는 아주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분명 서울이었다.
그 한가운데엔 고급스러운 흰 망토에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쪽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우주중앙청 사람이지. 자네의 대답 여하에 따라, 지구를 없애 버릴지, 아니면 그대로 두고 게임 개발에 착수할지가 결정될 거네.”
“지구를 없앤다고?”
“그래. 힘들게 자네를 불러왔는데, 자네가 우리 행성을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하지 않아서 멸망해 버리면 우리는 꽤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니 서로에게 공정한 조건을 부여할 생각이네. 만약 자네가 거절한다면 지구도 오더코르트와 함께 공멸하는 걸세. 자네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지구인들 전체의 목숨이 자네에게 달려 있다 이걸세.”
“…….”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 개자식,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그저 자네가 계약만 하면 되는 일일세. 그렇게만 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물론 그때부터는 오더코르트의 멸망을 막기 위해 같이 힘써줘야겠지만 말일세. 뭐 하고 있나? 어서 서명하지 않고.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네.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있거든.”
그러고는 턱밑의 징그러운 촉수를 쓰다듬으며 꺽꺽거리고 웃어젖혔다.
“촉수 같은 놈.”
“허허, 촉수는 내 자랑이라네, 사긱 군. 욕을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된…….”
“너 턱 위로는 손 안 닿지. 코도 촉수로 파냐?”
“…….”
“등 쪽으로도 안 닿잖아. 뒤도 촉수로 닦겠네.”
“…….”
“드러운 새끼. 촉수로 교수형 당할 놈. 관도 촉수로 내릴 놈.”
배불뚝이는 조용히 촉수를 쓰다듬고 있던 짤막한 손을 내렸다.
“뒤는 촉수로 안 닦네만.”
“뭐라고? 그걸로 밥도 먹는다고? 냄새나서 잘 못 들었어.”
“…….”
씩씩거리며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두었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나 나석익은 저 더러운 촉수 새끼랑 계약하겠다.”
그러자 기분 나쁜 붉은 마나가 흘러나와 배불뚝이와 나를 휘감고 소용돌이쳤다. 적색 마나들은 둘로 나뉘어 심장 쪽을 향해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걸로 계약은 성사되었네. 나나 자네나, 먼저 계약을 깨뜨린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걸세. 이것이 바로 계약 마법의 힘이지.”
“아니까 꺼져라, 빨리. 촉수 다 뽑아버리기 전에.”
그 소리는 여전히 무서운지, 배불뚝이는 뒤뚱거리며 내게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입을 나불거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아참, 아까 우주중앙청에서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건 거짓말이었네. 그저 접속기를 개발하기 위해 쓸 만한 회사를 찾고 있는 중이지.”
“닥쳐, 오물 단지 같은 새끼야.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내가 넌 줄 아냐?”
오더코르트를 살린다고 지구를 멸망시킨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우주중앙청’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데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든 아니든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말하는 대로 해줬을 뿐.
“그래도 계약을 했으니, 자네 친구들의 목숨은 살려두겠네. 하지만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슬슬 진짜 촉수를 뽑힐 게 걱정이 되었는지, 배불뚝이는 그대로 이동 마법을 전개해 사라졌다.
“그럼 수고하게나, 사긱 군. 자네가 만들어낼 게임이 어떨지 기대하겠네. 하하하하!”
저주받은 날
처음 오더코르트에 오게 된 이후, 얼마간은 꿈꾸는 듯한 시간이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은 누나들도 없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가며 밥 먹듯 야근해야 하는 직장도 없다.
온통 이상한 외계인들뿐이었지만, 모두 굉장히 친절했다. 지구에서는 맨날 이리저리 치여 다녔는데 우주가 선택한 용사 대접을 받으니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 와서 사귄 오더코르트 친구들로부터 마법도 배웠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편리하고 대단한 학문이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직관적이면서도, 온갖 비상식적인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오더코르트인들과 이야기하면서 마법을 연구하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하는 기발한 마법을 생각해 내는 게 즐거웠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배불뚝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구의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다구.”
시조새 크기의 까마귀인 질라크가 날카로운 손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질라크는 이 빌어먹을 행성에 처음 떨어졌을 때,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마법을 알려준 친구 중 하나였다.
“마법이 그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는 거지?”
로도리네와 크로키리, 로레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언제나 그랬듯 마을 뒷산에서 한창 마법 실험을 하다 지쳐 아무렇게나 풀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보편화되어 있다면서 마법을 겁나 못 쓰는 놈들은 뭐야? 나보다 못 쓰는 애들도 있던데.”
대답한 것은 열대 지역의 곤충처럼 알록달록한 털을 가진 원숭이 모습을 한 로레나였다.
“호르핌들 말이군요.”
“호르핌?”
로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잘 쓰지 못하는 오더코르트인들을 뜻해요. 카킹들이나 아란탈들의 지배를 받는 하수인들이라고 할까.”
“아, 여기 신분 사회였지. 노예나 서민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비슷해요. 마법이란 건 어쨌든 사용하기 꽤 까다로우니까요. 지구에도 스마트폰은 엄청 많지만, 지구인들 전부가 직접 어플을 제작한다든가, 고장이 나면 스스로 수리를 한다든가, 전문가 수준으로 활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용하기 까다롭다고? 별로 까다롭진 않은 것 같은데.”
그야 이론적으로 왜 이게 이렇게 되는가를 분석하려고 하면 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마법은 쉽게 말하면 그냥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너처럼 쉽게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로돌.”
로도리네가 돌이 여기저기 박힌 육중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로도리네는 말끝에 ‘로돌’이라고 하는 사투리 비슷한 것을 썼다.
부엉이 눈을 한 초록색 도마뱀인 크로키리도 사투리를 쓰는 친구였다.
“맞아. 너처럼 이렇게 단기간에 싹 습득해 버리는 경우는 처음 봐, 키리. 어쩌면 고대의 아란탈들 이상일걸. 지금 네가 새로 만들어낸 마법만 몇 가진 줄 알아? 아마 하크라티 님이 살아 돌아와도 너 정도는 아닐 거야, 키리. 대체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하는 건지.”
“헐, 용사 어쩌고 하더니 진짜 내가 그 정도라고? 말했잖아, 지구에서는 게임이든 현실이든 모두가 치고 박고 싸운다니까. 난 그냥 수식만 짠 거라고.”
오더코르트에 와서 제일 놀란 건, 여기에 죽고 죽이는 전쟁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였다.
오더코르트인들은 일상에서 마법을 쓰면서도, 마법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어렵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지구로 치면 일반인들은 별 관심도 없는 고고학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린 죽어도 기억까지 가진 채로 무한히 다시 태어나니까.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키리.”
현재 오더코르트인은 모두가 불멸의 존재였다. 영원한 평화라는 건 ‘불사’라는 특징 아래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멸망이라는 미래도 함께 가져왔다.
마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더 빨리 마나를 소비해야 한다.
하지만 전쟁이 없으니 마법은 점점 더 너무 느긋한 방향으로만 발전했고, 오더코르트인들은 무한히 부활할 뿐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
행성 전체 인구의 무조건 불변.
그것이 오더코르트인들이 나까지 소환해 가며 지구인들을 끌어들이려 한 이유였다.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 미친 듯이 늘어나는 마나를 다 소비할 수 있으니까.
이대로 가만있으면 이 순진하고 착한 외계인 친구들은 물론 나까지 꼼짝없이 죽는 것이다.
입맛이 썼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구.”
질라크가 돌연 말했다.
“사긱, 아까 그 마법 다시 써 줘라, 키리.”
“석익이다, 석익! 몇 번을 말해야 돼!”
“사긱…….”
“석익이라니까!”
지구로 가면 이 이름부터 갈아치우든지 해야지!
크로키리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는 구석에 처박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쪽으로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이놈은 짜증 한번 냈다고 쭈그러져서는. 애냐?”
“미안하다, 키리. 도무지 니 이름은 발음이 안 돼.”
“됐다, 됐어. 뭐라 그랬냐? 아까 쓴 마법이…….”
화르르륵!
그때, 갑자기 뒷목이 따끔할 정도의 강력한 열기가 등 뒤를 덮쳤다.
“위험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크로키리였다.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크로키리가 밀치는 대로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이며 바닥을 굴러야 했다.
뒤늦게 돌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벌 떼처럼 날아드는 수십 개의 불덩이였다.
크로키리가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땅이 갈라지며 폭포수 같은 물이 하늘로 솟구쳤다. 거대한 화구들은 굳건한 성벽처럼 솟아오른 물기둥들을 통과하면서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순간, 로도리네가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키더니, 골키퍼처럼 화구 쪽으로 뛰어들었다.
퍼버버벙!
수십 개의 화구들이 로도리네의 암석 같은 몸체에 부딪히며 요란스러운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사이 질라크는 나를 등에 둘러업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기 봐, 누가 있어.”
아래를 가리키며 말하자, 질라크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복면을 뒤집어쓴 인영이 작게 보였다.
“저건 대체 누구냐구. 너랑 비슷한 모습이라구.”
“진짜네. 실루엣이 꼭 지구인 같아.”
그때, 복면인이 로켓처럼 위로 뛰어올랐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젠장, 찢어지자!”
질라크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부유 마법을 써서 반대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복면인은 방향을 왼쪽으로 틀더니, 질라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공중을 울렸다. 질라크가 허공에서 몸을 세운 채 활개 치고 있었다. 푸른 마나가 그를 중심으로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콰르릉!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쳐 복면인을 덮쳤다.
그러나 복면인은 번개에 직격되고도 멀쩡했다. 옅은 녹색의 구 같은 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윈드 실드? 저 녀석이 저걸 어떻게?’
그러고 보니 아까의 화염구도 그렇고, 복면인이 쓰고 있는 것은 전부 내가 손수 만든 마법들이었다. 함께 마법을 만들며 놀던 여기 있는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복면인은 그대로 질라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질라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궤도를 급격하게 틀자 내가 있는 곳까지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로 직후, 질라크의 몸에서 마법진 세 개가 백합처럼 피어났다.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한 것이다.
‘아니야, 늦어!’
그러나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복면인의 손이 질라크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질라크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빛이 되어 사라졌다.
“오에아 타 카우…….”
나는 즉시 복면인 쪽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미처 주문을 완성시키기도 전에 복면인의 발차기가 내 복부에 와 꽂혔다.
“크흣!”
간신히 손을 교차해 발차기를 막아냈다.
마법만 쓰는 줄 알았는데, 허공인데도 복면인은 바람개비처럼 몸을 틀면서 아주 능숙하게 격투술을 펼쳤다. 공격이 비 오듯 쏟아졌다.
‘미친, 겁나 빠르네!’
수세에 몰리는 순간, 로레나가 화염에 휩싸인 채 대포알처럼 날아왔다.
크로키리와 로도리네 또한 어느새 주문을 완성시킨 건지, 엄청난 수압의 물줄기와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밑에서 쏘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면인은 놀라지도 않고 허공에서 유유히 움직이며 모조리 피해냈다.
“야, 너 누구야!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뒤질세라 쫓아가며 외쳤지만, 줄곧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계속 피하기만 하던 복면인이 방향을 틀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로레나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씹냐!”
부름에 몰려든 검붉은 마나가 내게 휘감기며 소용돌이쳤다.
로레나도 복면인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고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에서 매서운 화염이 태양처럼 솟구쳤다.
복면인은 아래에서 덮쳐 오는 크로키리의 물줄기와 로도리네의 바위 탄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움직였다. 오직 그를 노리고 쏘아진 마법들이 서로 충돌하며 허공에서 소멸했다.
날아가면서 완성시킨 주문이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며 발동되었다.
“이거나 먹어라!”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마법진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일대의 대기를 모두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 복면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내 존재를 간과하고 있던 복면인은 폭풍에 휩쓸린 한 송이의 눈꽃처럼 정신없이 나부끼다가 땅에 처박혔다.
로레나와 눈빛을 교환하며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동 마법의 하얀 빛이 걷힌 순간, 로레나는 기다리고 있던 복면인의 발길에 걷어차여 날아갔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손쓸 틈도 없이 빛에 휩싸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로레나!”
이가 저절로 부드득 갈렸다.
질라크도 그렇고 그냥 닿기만 했는데 저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강제 이동 마법인가?
다시 이동 마법을 써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이동되자마자 구속당한 걸지도 모른다.
콰드드득!
땅속에서 나타난 로도리네가 복면인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내리쳤다.
하나 복면인은 고무공처럼 가볍게 튀어 오르며 공격을 피해내더니, 로도리네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한순간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그대로 주먹에 강타당하자, 로도리네 역시 빛이 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 새끼가!”
나는 다시 한 번 마나를 몸에 휘감았다. 하지만 크로키리가 앞을 막아섰다.
“사긱! 비켜, 키리!”
그러고는 갑자기 발을 뒤로 뻗어 내 가슴을 타척했다. 나는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그사이 크로키리가 초록색 손을 하늘로 뻗었다.
어느새 생겨난 먹구름이 머리 위에서 거칠게 울부짖었다. 순식간에 거센 폭우가 휘몰아쳤다.
그때,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던 복면인이 손을 하늘로 뻗었다.
“미친, 저게 말이 돼?”
그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동작에 몰아치던 폭우가 멎었다.
‘그 짧은 사이에 역주문이라도 외웠다는 거야?’
복면인은 말없이 발을 거칠게 한 번 굴렀다.
그러자 우둘투둘한 바위들이 피라미드처럼 솟아오르며 크로키리를 단번에 속박했다. 그것 또한 내가 만든 마법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급히 이동 마법의 좌표를 계산했다. 그러나 복면인이 한발 빨랐다.
“사긱…….”
내가 볼 수 있던 건 복면인과 함께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크로키리의 당황한 눈빛뿐이었다.
“…뭐야, 이게.”
나는 모두가 사라져 버린 텅 빈 산속에 홀로 남았다. 복면인은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애써 침착하려고 하며 수식의 흔적을 역산해 보았다.
‘이동 마법은 맞는 것 같은데 좌표를 지워놨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걘 또 뭐고?’
이때까지 만나본 아란탈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아니, 오더코르트인이 아니다. 지구인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행성의 사람? 아니면 또 다른 지구인?
복면인은 심지어 내가 만든 마법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역주문까지 펼치는 게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지도 못하던 그때, 눈앞에 빛이 번쩍이며 마나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꽃가루처럼 흩어진 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배불뚝이였다.
“어? 배불뚝이! 마침 잘 왔어, 큰일이야!”
“꽤나 다급해 보이는군, 사긱 군.”
배불뚝이는 촉수를 쓰다듬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상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날 공격했어! 그 새끼가 애들까지 싹 다 잡아갔다고. 그런데 좌표 추적이 안 돼! 그러니까 나처럼 지구인 같은 모습에 복면 같은 걸 쓰고 있는데…….”
급히 설명하고 있을 때, 배불뚝이가 씨익 웃으며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사긱 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네.”
“아씨, 뭐라는 거야. 급하다니까!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모른다고!”
“아닐세. 그것보단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 이제는 정말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뭔 개소리야? 계약서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저번에 내가 분명 안 한다고 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애들이…….”
“사긱 군, 그러니까 내 말은…….”
배불뚝이는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건 누구한테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르는 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용사’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빨리 계약을 하라는 소리일세. 이젠 정말로 우리가 더 이상 기다려 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뭐?”
“간단하네. 지금 당장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 ‘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너 방금 뭐라 했냐? 설마 이게 다 니 짓이야?”
그제야 모든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멱살을 움켜쥐려고 하자, 배불뚝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껄껄껄, 이제야 알았나? 생각보다 눈치가 없구만그래. 자네가 이런 마법들을 만들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예상 밖의 수확이었네. 나도 설마 그것들을 빼돌릴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닥쳐, 개자식! 죽여 버릴 거야!”
주변에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몸에 휘감겼다.
“어허! 그러면 안 되지.”
배불뚝이가 급히 한 손을 펼쳤다. 배불뚝이와 나 사이에 이미지 마법이 떠올랐다.
‘서울?’
화면 속에는 아주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분명 서울이었다.
그 한가운데엔 고급스러운 흰 망토에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이쪽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우주중앙청 사람이지. 자네의 대답 여하에 따라, 지구를 없애 버릴지, 아니면 그대로 두고 게임 개발에 착수할지가 결정될 거네.”
“지구를 없앤다고?”
“그래. 힘들게 자네를 불러왔는데, 자네가 우리 행성을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하지 않아서 멸망해 버리면 우리는 꽤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니 서로에게 공정한 조건을 부여할 생각이네. 만약 자네가 거절한다면 지구도 오더코르트와 함께 공멸하는 걸세. 자네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지구인들 전체의 목숨이 자네에게 달려 있다 이걸세.”
“…….”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 개자식,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그저 자네가 계약만 하면 되는 일일세. 그렇게만 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물론 그때부터는 오더코르트의 멸망을 막기 위해 같이 힘써줘야겠지만 말일세. 뭐 하고 있나? 어서 서명하지 않고.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네.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있거든.”
그러고는 턱밑의 징그러운 촉수를 쓰다듬으며 꺽꺽거리고 웃어젖혔다.
“촉수 같은 놈.”
“허허, 촉수는 내 자랑이라네, 사긱 군. 욕을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된…….”
“너 턱 위로는 손 안 닿지. 코도 촉수로 파냐?”
“…….”
“등 쪽으로도 안 닿잖아. 뒤도 촉수로 닦겠네.”
“…….”
“드러운 새끼. 촉수로 교수형 당할 놈. 관도 촉수로 내릴 놈.”
배불뚝이는 조용히 촉수를 쓰다듬고 있던 짤막한 손을 내렸다.
“뒤는 촉수로 안 닦네만.”
“뭐라고? 그걸로 밥도 먹는다고? 냄새나서 잘 못 들었어.”
“…….”
씩씩거리며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두었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나 나석익은 저 더러운 촉수 새끼랑 계약하겠다.”
그러자 기분 나쁜 붉은 마나가 흘러나와 배불뚝이와 나를 휘감고 소용돌이쳤다. 적색 마나들은 둘로 나뉘어 심장 쪽을 향해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걸로 계약은 성사되었네. 나나 자네나, 먼저 계약을 깨뜨린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걸세. 이것이 바로 계약 마법의 힘이지.”
“아니까 꺼져라, 빨리. 촉수 다 뽑아버리기 전에.”
그 소리는 여전히 무서운지, 배불뚝이는 뒤뚱거리며 내게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입을 나불거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아참, 아까 우주중앙청에서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건 거짓말이었네. 그저 접속기를 개발하기 위해 쓸 만한 회사를 찾고 있는 중이지.”
“닥쳐, 오물 단지 같은 새끼야.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내가 넌 줄 아냐?”
오더코르트를 살린다고 지구를 멸망시킨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우주중앙청’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데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든 아니든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말하는 대로 해줬을 뿐.
“그래도 계약을 했으니, 자네 친구들의 목숨은 살려두겠네. 하지만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슬슬 진짜 촉수를 뽑힐 게 걱정이 되었는지, 배불뚝이는 그대로 이동 마법을 전개해 사라졌다.
“그럼 수고하게나, 사긱 군. 자네가 만들어낼 게임이 어떨지 기대하겠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