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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9화

마녀와 기사 (2)




수도를 나선 지 30분이 지났다.

카밀리온과 맘이시리네는 간간이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지만, 옆에서 함께 걷는 붉은 로브의 유저는 ID카드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쩐지 맘이시리네는 자꾸만 그 여성이 신경 쓰여 몰래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원래 조용한 성격인 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원래도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다.

“근데 있잖아요, 저 옆에 분은 누구세요?”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묻자, 카밀리온이 긴 혀를 덜렁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아직 소개를 안 드렸군요. 이분은 제가 따로 고용한 헌터님이십니다.”

그제야 붉은 로브의 유저는 처음으로 눈을 들고, 황급히 ID카드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해제시켰다.

“아이고, 죄송해요. 커뮤니티 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인사하는 것도 잊고 있었네요. 저는 칼랄루라고 해요.”

“아, 네. 반갑습니다. 맘이시리네예요.”

둘은 가볍게 악수를 했다.

“맘이시리네? 특이한 닉네임이네요.”

“칼랄루 님도요. 시리라고 불러주세요.”

가만히 있을 때는 몰랐는데, 칼랄루는 상당히 쾌활한 성격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벌써 수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먼 언덕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온통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나무들뿐이었다. 총천연색의 나무들은 보라색이나 하늘색 이파리가 섞여 알록달록하고, 사탕처럼 매끈하고 반짝거렸다.

“맵 진짜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저거 봐요. 열매도 달려 있어요.”

개발자들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근데 시리 님, 커스터마이징 하는 데 얼마 들었어요?”

“네? 저 커스터마이징 안 했는데요?”

“엥? 말도 안 돼! 그럼 이게 진짜 가슴이란 말이에요?”

칼랄루가 갑자기 맘이시리네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맘이시리네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 손을 세게 밀쳐 냈다.

“아, 죄송해요. 진짜라고 하시길래 궁금해서 그만…….”

맘이시리네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카밀리온을 슬쩍 돌아보니, 민망해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하지만 눈이 워낙 커서 몰래 곁눈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다 보였다.

‘뭐야, 진짜. 재수 없게.’

“죄송해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시리 님이 너무 예뻐서 그렇죠. 세상에, 피부 좀 봐.”

칼랄루가 맘이시리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변태인가?’

황당함을 넘어 짜증이 난 맘이시리네는 칼랄루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며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러자 칼랄루가 미묘한 웃음을 띠며 한 걸음 다가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요.”

“뭐요?”

되물었을 때, 칼랄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져 있었다.

“님, 초보시죠?”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이었지만, 사실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맘이시리네가 그저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오므리자 칼랄루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접촉 방지 기능 안 켜놓으신 것 같은데, 제가 만약 남자였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네?”

“정식 오픈한 지 한 달 만에 이용 제재를 당한 유저들만 몇 명인 줄 아세요? 세 자리 수가 넘어가요. 공지 안 읽어보셨어요?”

“…….”

게임에서 나오는 글이란 세 줄 이상은 모조리 스킵 아닌가?

맘이시리네는 말없이 입만 삐죽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처음 보는 유저인데 악수도 덥석 하질 않나, 낯선 사람한테 아무런 경계도 없고. 게임 속이라지만 정말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 현실이랑 똑같아요.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로그아웃도 안 되잖아요. 얼마나 위험한데요. 누가 나쁜 마음먹고 접근해서 외진 곳으로 유인한 다음 강도 짓이나 성폭행을 할 수도 있어요. 거짓말 같죠? 근데 이미 있었어요. 20건이나. 그중 3할이 동성 플레이어 간의 성폭행이래요.”

“서, 성폭행 사건이 있었어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밀리온이 뒤늦게 다가오더니 주저하며 설명했다.

“명예 훼손, 주거 침입, 절도, 강도, 사기, 횡령… 온갖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물론 아주 강력한 처벌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범죄가 줄지 않고 있다는 건 뭐겠어요. 유저가 많은 만큼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미친 인간들도 많이 들어왔단 소리죠.”

칼랄루가 거들었다.

“시리 님, ID카드 좀 줘 보실래요?”

맘이시리네는 무의식적으로 카드를 불러내 건네주려다가, 흠칫 놀라며 다시 손을 뒤로 뺐다.

“올.”

칼랄루가 박수를 쳤다.

“잘하셨어요. ID카드는 막 아무한테나 주면 안 돼요. 절대로. 그리고 아까 전에 저한테 닉네임 알려주셨죠?”

맘이시리네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거 진짜 닉네임이에요?”

“…….”

왠지 의기소침해졌다.

‘설마 닉네임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든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칼랄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안 돼요. 닉네임을 막 알려주면 이상한 사람들한테 스토킹 당할 수도 있고, 나중에 집 같은 거 얻었을 때 이름만 가지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막 찾아올 수도 있어요. 도둑이나 어쌔신 계열 성향이 있으면 잠겨 있는 건물도 침입할 수 있어요.”

“히익!”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그럼 칼랄루 님은 저한테 가짜 닉네임을 알려주신 거예요?”

칼랄루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맘이시리네는 울상을 지었다.

앞서 걷던 카밀리온이 멈춰 서더니, 어깨 어림까지 내려오는 은빛의 나뭇가지를 위로 들어 올려주었다. 모두 허리를 숙이고 그 밑을 지났다.

“ID카드에 들어가서 보안·치안 항목을 눌러보세요.”

“들어갔어요.”

“접촉 방지 기능이 있을 거예요. 찾았어요? 그걸 ON으로 해두세요.”

“했어요.”

[접촉 방지 기능 ON. 불순한 의도를 가진 플레이어의 신체 접촉을 방지합니다.]

“오오.”

“잘했어요. 이제부터 누가 나쁜 의도로 시리 님을 만지려고 하면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프리징 마법에 걸릴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거 절대로 끄지 마요.”

“고마워요. 절대로 안 끌게요. 아까 다짜고짜 가슴을 막 만지시길래 변태인 줄 알았어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좋으신 분이라 다행이에요.”

“어? 저 변태 맞는데요? 호호호!”

“…….”

“기사님, 좋은 인연을 만나셨군요.”

뭣도 모르는 카밀리온이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응, 아니야.’

“아, 아무튼 이제부터 정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요.”

“되도록이면 ID카드를 많이 활용하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별도로 설정해 둔 가짜 닉네임이 들리도록 하는 닉네임 변조 기능도 있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사용해 보세요. 공지가 올라올 때마다 꼭 읽으시고, 유저들끼리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수시로 들어가 보시고요. 괜찮은 정보들이 엄청 많거든요. 물론 그만큼 헛소문도 많이 돌지만.”

칼랄루가 말했다.

‘ID카드라…….’

붙잡고 읽는 게 너무 귀찮아서 냅두고 있었는데, 언제 한번 날 잡고 들여다봐야겠다고 맘이시리네는 결심했다.

도드리온 늪지대로 가는 동안 칼랄루는 이것저것을 얘기해 주었다.

체월은 혁신적인 게임인 만큼 다른 게임에서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콘텐츠나 기능이 굉장히 많았다. 어쩌다 보니 생초보나 다름없게 된 맘이시리네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칼랄루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늪지대에 도착했다.

“아이고, 다리야.”

“꽤 머네요.”

어느새 주변은 새벽 시간처럼 푸르스름했다. 하루 종일 걸은 것이다.

“오늘은 블루문이네요. 크리티컬 대미지가 잘 박히는 날이에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살짝 보이기 시작한 파란 달이 세 개 떠올라 있었다. 일정 기간마다 달 색이 변화하고, 게임에도 영향을 준다고 칼랄루가 설명했다.

늪지대로 들어서자, 신발 바닥에 질척이는 진흙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다들 이 아쿠아슈즈로 갈아 신으시죠.”

카밀리온이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은색에 아기자기하게 생긴 구두 세 켤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주는 거예요?”

“우와! 감사합니다!”

맘이시리네와 칼랄루가 잽싸게 신발을 집어 들었다.

“…침수 방지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빌려주려고 했을 뿐인데 얼떨결에 뜯기게 된 카밀리온이 슬픈 얼굴로 덧붙였다.

그때, 칼랄루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게 하포링포들인가요?”

하얀색의 무언가가 늪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오, 맞습니다.”

“호호홍! 찾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칼랄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로브를 반쯤 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완드를 꺼냈다.

무어라 주문을 외우자, 완드는 무수한 빛을 쏟아내며 기다란 나무지팡이로 모습을 바꾸었다.

늪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하포링포들에 닿을 수도 없는 맘이시리네는 늪가에 선 채 입을 헤 벌리고 칼랄루를 구경했다.

칼랄루가 무언가 작게 중얼거리며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파지지직!

노란 번갯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번개는 꼭 새장처럼 하늘을 둥글게 감쌌다.

카밀리온은 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거기엔 각종 조리 도구와 섬뜩하게 생긴 날붙이들, 그리고 온갖 괴상한 것들을 담은 작은 유리병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초록색 레몬처럼 보이는 식물이 든 병을 꺼내 물이 든 냄비에 그 액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육포 같은 것을 넣어 잘 버무렸다.

물에 젖자 육포는 비에 젖은 종이처럼 풀어지며 시퍼런 색으로 변했다. 왠지 오래된 타이어 냄새 같은 게 났다.

마지막으로 카밀리온은 그것을 작은 크기의 완자로 뭉친 후, 주변 바닥에 흩뿌렸다.

“자, 이제 숨어 있읍시다.”

둘은 카밀리온이 손짓하는 대로 근처에 있는 덤불 속으로 들어가 자세를 낮추고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멀리 있던 하포링포들이 하나둘씩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허겁지겁 여기저기에 흩어진 완자들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하포링포는 작은 강아지만 한 크기에 흰 털이 북실북실한 익룡들이었다.

하포링포들이 완자를 거의 다 먹었을 때, 카밀리온이 작게 속삭였다.

“이제 슬슬 준비합시다. 제가 신호하면 두 분은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가세요. 양팔을 머리 위로 들고 마구 흔들면서요. 가능한 동작을 크게 하셔야 합니다. 그냥 시끄럽게 뛰어다니시면 됩니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시고… 지금입니다!”

신호와 동시에 맘이시리네와 칼랄루가 덤불 밖으로 뛰쳐나갔다.

“와아아아악!”

그러자 하포링포들은 뒤집어질 듯 놀라며 날개를 푸덕거리더니, 앞다투어 하늘로 도망쳤다. 바람에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파지지직!

칼랄루가 미리 쳐둔 라이트닝 제일에 하포링포들이 걸려들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노랗고 파란 광채가 번쩍번쩍 튀었고, 익룡들은 모두 감전이 된 채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하포링포들을 지켜보며 셋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쩐다.”

“이래서 마법사를 찾고 계셨군요. 번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정확합니다. 자, 이제 이것들을 챙깁시다.”

맘이시리네와 칼랄루는 카밀리온을 도와 기절한 하포링포들을 건져서 발을 노끈으로 묶어 다발로 만들었다.

띠링!

[대상인 카밀리온과의 동행 퀘스트 완료.]

[‘마을 귀환서’를 보상으로 받으셨습니다. 가방으로 자동 전송합니다.]

[10,000코른을 보상으로 받으셨습니다. ID카드 계좌로 자동 입금됩니다.]

[카밀리온과의 친밀도가 상승했습니다.]

“여러분 덕에 별 탈 없이 빠르게 끝났습니다. 이것도 하나씩 받으시죠.”

카밀리온은 칼랄루와 나에게 각각 초록색 레몬을 한 개씩 주었다.

“이게 뭐예요?”

“처음 보셨나 보군요. 이건 프라콘이라고 하는 건데, 강력한 저주나 마법의 효력을 없애주는 과일입니다. 이래 봬도 구하려면 꽤 어려운 물건이니까 잘 보관해 주세요. 한 방울의 즙만으로도 효력이 좋으니 잔뜩 짜두었다가 두고두고 쓰시면 편합니다.”

“이거 아까 냄비에 넣은 그거 아니에요?”

칼랄루가 묻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맞아요. 하포링포들은 마법도 통하지 않고 물리적인 타격도 입지 않는 괴상한 녀석들이거든요.”

“아, 그래서 완자를 먼저 먹인 거군요. 그냥은 마법에 당하지 않을 테니까.”

“맞습니다. 구울의 썩은 피부는 하포링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거든요.”

“구, 구울? 우우욱, 쏠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고 만 맘이시리네는 창백한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