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0화
흔한 GM의 게임 홍보법 (1)
지구인 용사 나석익, 통칭 마르디노는 정말 일을 시원스럽게 잘했다. 워낙 이것저것 다 잘하는 데다 한번 시작한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면이 있어 억지로 계약을 해서 됐다고는 하더라도 훌륭한 ‘용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다.
“빨리 가세나, 사긱 군.”
“아, 알았다고. 급하면 네가 얘기하면 될 걸 하여간 귀찮은 건 다 나 시키지, 망할 새끼. 깰룩아, 네가 나 대신 히드라 동굴 좀 처리해 줘야겠다. 힐 버그 터졌어. 우선 던전부터 폐쇄시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좀 찾아보고 있어. 난 일단 저번에 그 또라이 유저 좀 보고 올게. 부탁한다.”
“깰룩?”
작업실에 도착한 지 채 몇 초 되지도 않아서, 석익은 드라비라의 등쌀에 떠밀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힐 버그라니, 무슨 소리지? 깰룩,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나.’
깰룩은 검토하던 추가 던전 기획안을 그대로 책상 위에 두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F―Pariton Canyon으로 이동, 깰룩.”
파리톤 협곡에 도착했을 때는 유저들의 말소리로 난리법석이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
깰룩은 머리를 내밀고 낭떠러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협곡 아래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유저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차례차례 히드라 동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지, 깰룩? 히드라 동굴이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
서둘러 변신 마법으로 석익처럼 모습을 바꾼 깰룩이 조용히 이동 마법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유저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시덕거리며 일행들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우리 오늘 내로 들어갈 순 있는 거야?”
“줄 줄어드는 속도 안 보여? 금방 들어갈 것 같은데.”
“여기 보스 몹이 그렇게 쎄다던데 진짠가 봐. 줄이 쭉쭉 줄어드네.”
“우리도 들어가자마자 녹는 거 아냐?”
“야, 입 안 다물어? 우리가 뭐 땜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거 꼭 잡아야 된다고! 보상 핵 쩐다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뒤지면 안 돼.”
“치, 그게 뭐 맘대로 되냐?”
대화를 엿듣고 있던 깰룩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어, 저기.”
“누구세요?”
“지나가다 두 분 말씀하시는 게 좀 들렸는데, 여기서 대체 어떤 보상들이 나온대요, 깨, 깨, 게이머 님?”
어렵게 포장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두 유저는 깰룩의 말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네? 아, 그건 저희도 잘 모르는데 뭔가 엄청 희귀한 무기를 준다더라고요. 뭐였지, 히드라의 대퇴골 메이스? 날갯죽지 클로? 여튼 그런 건데 다 전설 템이래요. 대박이죠.”
듣고 있던 깰룩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전설 아이템 중에 그런 게 있었나?’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다.
“감사합니다, 깨, 깨, 깨알 같은 정보네요.”
“혹시 님도 관심 있으면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마침 저희 둘밖에 없어서 파티 좀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아, 아뇨. 전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럼 수고하세요, 깨, 깨, 개대박 템 얻으세요.”
깰룩은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아마도 이상한 헛소문이 퍼져서 낚인 유저들이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빨리, 빨리 여기 폐쇄시켜야 돼. 이대로 계속 뒀다가 고객 센터로 사기라며 항의라도 들어오는 날엔…….’
깰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동 마법을 사용해 개발 팀 사무실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수많은 외계인들이 넥타이를 휘날리며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동태 눈을 한 채 디스플레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고 있던 토미닉이 갑자기 빛과 함께 나타난 깰룩을 놀라 쳐다보았다.
“아니, 깰룩 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토미닉이 깡총거리며 뛰어왔다.
“글쎄, 깰룩이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깰룩!”
“아참, 또 깜빡했네요. 계속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만…….”
‘이게 다 마르디노 때문이야.’
깰룩이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석익이 계속 ‘깰룩이’라고 부르는 탓에 다른 이들도 점점 깰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음부턴 꼭…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토 팀장님. 지금 당장 파리톤 협곡 좀 통제해 주세요, 깰룩.”
“예? 파리톤 협곡이요? 아, 맞다. 저희도 마침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토미닉은 어떻게 해도 답이 없다는 듯 개미핥기 같은 혀를 내둘렀다.
“엥?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깰룩?”
토미닉이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손가락을 휘두르자, 디스플레이 마법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건…….”
“네, 맞아요. 히드라 동굴에 트래픽 걸렸어요.”
“트래픽? 그럼 지금 폐쇄 못합니까, 깰룩?”
“예? 폐쇄라니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나도 몰라요, 자세힌. 마르디노 님이 거기 폐쇄하라고 하셔서, 깰룩.”
“폐쇄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강제로 서버를 다운시키면… 근데 아마 저희 맘대로 그런 짓을 했다간 마르디노 님이 저희 머리채를 다 뜯어놓을 텐데요.”
깰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뇨! 무조건! 무조건 해야 됩니다, 깰룩! 지금 당장!”
“예?”
토미닉은 갑작스런 고함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 오더코르트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가 선택한 용사, 마르디노가 갖고 있는 유일한 흠. 그건 바로 드라비라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성격이었다.
“마르디노 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뭔지 알아요, 깰룩?”
“뭔데요?”
“쓸모없는 놈입니다, 깰룩.”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시킨 것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놈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산 꼭대기에 세워놓고 다이빙하라고 시키겠죠. 저희 모두 레이자냐처럼 되고 말 거예요, 깰룩.”
토미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레이자냐는 아직도 병원에 있습니까?”
“예. 전 그 모습을 직접 봤어요. 병문안을 갔거든요, 깰룩. 온몸에 드라비라를 닮은 버섯 수십 개가 자라났다고요, 깰룩.”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토미닉이 이번엔 이를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죠, 깰룩. 지금은 입에서 배변을 토해내고 있대요. 반대로 음식을 먹으려면…….”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정도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토 팀장님! 우리 선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요, 깰룩!”
“아니, 저도 그러고 싶지만…….”
“맘대로 서버 다운시켰다가 망해도 죽겠지만, 아무 짓도 안 하고 있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될 거라고요! 이잇, 정 못하겠으면 저리 비켜요! 내가 직접 할 거예요, 깰룩!”
깰룩은 토미닉을 지나쳐 시스템 장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어! 깰룩 님, 그렇게 아무거나 만지시면 안 됩니다!”
쿵쾅쿵콰앙!
깰룩은 직원들 사이에 난입하여 시스템 장비를 이것저것 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안 돼! 난 그렇게 될 순 없어, 깰룩! 그렇게 될 순 없다고!”
삑! 삐익!
왜앵― 왜앵―
“헉!”
빨간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며 사무실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이,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뭐야! 무슨 일인지 빨리 확인해!”
토미닉이 급히 외치자, 안 그래도 정신없던 개발 팀원들은 입 밖으로 영혼을 뱉어내며 탈곡기처럼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토미닉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노랗게 변했다.
“플레이어 데이터가 망가졌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뭔 소리예요, 깰룩? 데, 데이터가 망가졌다니.”
옆에 서 있던 직원 하나가 이미지 마법을 띄웠다.
“‘맘이Siri네’라는 유저의 데이터가 엉켰습니다. 이거 다시 복구하려면 저 유저 로그아웃부터 시켜야 해요. 안 그러면 못 고쳐요. 계정을 새로 업데이트해야 하니까…….”
개발 팀의 분위기는 가히 우주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잠깐, 맘이시리네면 마르디노 님이 만나러 간다고 한 그 또라이 유저 아닌가?’
깰룩의 얼굴이 순간 시체처럼 변했다.
만약 지금 이 사태를 석익이 알게 된다면, 자신은 털을 다 쥐어뜯기고 평생 벌거숭이로 살게 될 것이다.
“지, 지금 그 유저 어딨어요, 깰룩?”
“잠시만요. 조회해 보겠습니다. 아, 여기 있네요. 지금 막 퀘스트 완료하고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잘하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미안해요, 토 팀장님. 뒤를 부탁합니다, 깰룩.”
“어, 어? 어디 가십니까! 이거 해결하셔야…….”
하지만 깰룩은 이미 이동 마법의 좌표에 수식을 대입한 후였다.
깰룩은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디스플레이 창을 띄웠다. 맘이시리네의 좌표가 한순간에 마을로 이동되었다.
‘귀환서를 썼나 보네. 좋았어, 이제 이대로 로그아웃만 해주면!’
* * *
‘하, 여긴가? 긴 여정이었어……. 힐 버그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게 무슨 고생이람.’
파리톤 협곡에서 보살이를 퇴근시킨 뒤 포탈을 타고 개인 작업실로 막 도착한 날 반겨준 것은 길길이 뛰는 배불뚝이의 흉측한 얼굴이었다. 빨리 도드리온 늪지대로 가서 그 또라이 유저를 만나야 한다는 거였다.
‘홍보고 나발이고 이게 무슨 생난리야.’
결국 그 등쌀에 다시 작업실 밖으로 나선 나는 더 슬픈 문제와 마주했다. 어째선지 게임 필드 외부의 포탈들이 전부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동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맵이 얼마나 넓은데 테스트 이후로는 가본 적도 없는 도드리온 늪지의 좌표가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중간중간 부유 마법을 써가며 직접 두 다리를 써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오, 힘들어. 뭔 놈의 늪지대를 이렇게 먼 데다 만들어놓은 거야? 이래서 유저들이 여기까지 오기나 하겠어? 하, 씨. 좌표 따놔야지. 내가 다시 이 짓을 하면 성을 간다.’
ID카드의 지도를 확인하니, 수도인 파라알에서 서쪽으로 14㎞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맞게 찾아온 거 같긴 한데. 드럽게 넓은데 여기 어디에 있다는 건지.’
두리번거리며 늪지대로 들어가려던 그때, 깰룩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마, 마르디노 님. 다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뭐? 왜?”
― 방금 전에 그 맘이시리네라는 유저가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마을로 귀환했습니다, 깰룩.
나는 조용히 먹 같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맣고 어두운 게 내 마음 같구나.
“아오, 진짜! 똥개 훈련이냐?”
너무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작업실 좌표로 이동 마법 술식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휴, 그나마 돌아갈 때는 마법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지.”
― 어? 어어? 마르디노 님!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씨, 이번엔 또 뭐야! 아,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마. 별로 듣고 싶지 않…….”
― 그 유저가 이번에는 파라마스타 왕국 북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깰룩.
“북쪽? 거기 파리톤 협곡 있는 곳이잖아. 설마 너 히드라 동굴 아직도 폐쇄 안 했어?”
추궁하듯이 묻자, 깰룩이가 조금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 저, 그게, 폐쇄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 유저들 사이에서 히드라의 동굴이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화제가 되었나 봐요. 보스 몹을 잡으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헛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깰룩. 다른 사냥터나 마을에 있던 유저들까지 그쪽으로 몰려서 트래픽이…….
나는 순간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조용한 늪지대에 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윽고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설마.”
― 예, 폐쇄가 안 된대요, 깰룩.
“하아아아아아…….”
조용히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여기 와서 정말 머리털이 남아나질 않는다.
“파라마스타 섭종시켜.”
― 예?
메시지 마법을 통해 들려오는 깰룩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섭종시키라고, 섭종! 공지 띄우고 가능한 빨리, 최소 한 시간 내로 닫아. 다른 왕국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 하, 하지만…….
“창고 정리할래?”
― 지, 지금 당장 서버 닫으라고 전하겠습니다, 깰룩.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뭐? 파라마스타에 아직 남아 있는 유저가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섭종 시켰잖아?”
깰룩이는 내 기분이 더럽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ID카드를 화,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깰룩.”
신경질적으로 ‘카드’를 외쳤다. 은색 테두리가 있는 얇고 투명한 아티팩트가 마술처럼 손에 나타났다.
[서버 정보
파라마스타(원활)
동시 접속자 수: 1]
“진짜 남아 있잖아? 씨, 왜 한 명이 로그아웃이 안 된 거지? 빨리 위치 추적해. 마을이야?”
깰룩이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움직여 유저의 위치를 추적했다.
“파, 파리톤 협곡입니다, 깰룩.”
“뭐? 파리톤 협곡? 히드라 동굴?”
그럼 설마 로그아웃 안 됐다는 유저가…….
쿵!
그 순간, 작업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배불뚝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긱 군! 큰일이네!”
“넌 또 뭐야? 니들은 대체 큰일이 몇 번이나 일어나는 거냐!”
“지금 언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이것 보게나!”
배불뚝이가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손을 급히 들어 다급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흔한 GM의 게임 홍보법 (1)
지구인 용사 나석익, 통칭 마르디노는 정말 일을 시원스럽게 잘했다. 워낙 이것저것 다 잘하는 데다 한번 시작한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면이 있어 억지로 계약을 해서 됐다고는 하더라도 훌륭한 ‘용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다.
“빨리 가세나, 사긱 군.”
“아, 알았다고. 급하면 네가 얘기하면 될 걸 하여간 귀찮은 건 다 나 시키지, 망할 새끼. 깰룩아, 네가 나 대신 히드라 동굴 좀 처리해 줘야겠다. 힐 버그 터졌어. 우선 던전부터 폐쇄시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좀 찾아보고 있어. 난 일단 저번에 그 또라이 유저 좀 보고 올게. 부탁한다.”
“깰룩?”
작업실에 도착한 지 채 몇 초 되지도 않아서, 석익은 드라비라의 등쌀에 떠밀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힐 버그라니, 무슨 소리지? 깰룩,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나.’
깰룩은 검토하던 추가 던전 기획안을 그대로 책상 위에 두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F―Pariton Canyon으로 이동, 깰룩.”
파리톤 협곡에 도착했을 때는 유저들의 말소리로 난리법석이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
깰룩은 머리를 내밀고 낭떠러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협곡 아래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유저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차례차례 히드라 동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지, 깰룩? 히드라 동굴이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
서둘러 변신 마법으로 석익처럼 모습을 바꾼 깰룩이 조용히 이동 마법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유저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시덕거리며 일행들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우리 오늘 내로 들어갈 순 있는 거야?”
“줄 줄어드는 속도 안 보여? 금방 들어갈 것 같은데.”
“여기 보스 몹이 그렇게 쎄다던데 진짠가 봐. 줄이 쭉쭉 줄어드네.”
“우리도 들어가자마자 녹는 거 아냐?”
“야, 입 안 다물어? 우리가 뭐 땜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거 꼭 잡아야 된다고! 보상 핵 쩐다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뒤지면 안 돼.”
“치, 그게 뭐 맘대로 되냐?”
대화를 엿듣고 있던 깰룩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어, 저기.”
“누구세요?”
“지나가다 두 분 말씀하시는 게 좀 들렸는데, 여기서 대체 어떤 보상들이 나온대요, 깨, 깨, 게이머 님?”
어렵게 포장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두 유저는 깰룩의 말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네? 아, 그건 저희도 잘 모르는데 뭔가 엄청 희귀한 무기를 준다더라고요. 뭐였지, 히드라의 대퇴골 메이스? 날갯죽지 클로? 여튼 그런 건데 다 전설 템이래요. 대박이죠.”
듣고 있던 깰룩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전설 아이템 중에 그런 게 있었나?’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다.
“감사합니다, 깨, 깨, 깨알 같은 정보네요.”
“혹시 님도 관심 있으면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마침 저희 둘밖에 없어서 파티 좀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아, 아뇨. 전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럼 수고하세요, 깨, 깨, 개대박 템 얻으세요.”
깰룩은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아마도 이상한 헛소문이 퍼져서 낚인 유저들이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빨리, 빨리 여기 폐쇄시켜야 돼. 이대로 계속 뒀다가 고객 센터로 사기라며 항의라도 들어오는 날엔…….’
깰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동 마법을 사용해 개발 팀 사무실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수많은 외계인들이 넥타이를 휘날리며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동태 눈을 한 채 디스플레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고 있던 토미닉이 갑자기 빛과 함께 나타난 깰룩을 놀라 쳐다보았다.
“아니, 깰룩 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토미닉이 깡총거리며 뛰어왔다.
“글쎄, 깰룩이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세요, 깰룩!”
“아참, 또 깜빡했네요. 계속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만…….”
‘이게 다 마르디노 때문이야.’
깰룩이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석익이 계속 ‘깰룩이’라고 부르는 탓에 다른 이들도 점점 깰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음부턴 꼭…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토 팀장님. 지금 당장 파리톤 협곡 좀 통제해 주세요, 깰룩.”
“예? 파리톤 협곡이요? 아, 맞다. 저희도 마침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토미닉은 어떻게 해도 답이 없다는 듯 개미핥기 같은 혀를 내둘렀다.
“엥?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깰룩?”
토미닉이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손가락을 휘두르자, 디스플레이 마법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건…….”
“네, 맞아요. 히드라 동굴에 트래픽 걸렸어요.”
“트래픽? 그럼 지금 폐쇄 못합니까, 깰룩?”
“예? 폐쇄라니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나도 몰라요, 자세힌. 마르디노 님이 거기 폐쇄하라고 하셔서, 깰룩.”
“폐쇄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강제로 서버를 다운시키면… 근데 아마 저희 맘대로 그런 짓을 했다간 마르디노 님이 저희 머리채를 다 뜯어놓을 텐데요.”
깰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뇨! 무조건! 무조건 해야 됩니다, 깰룩! 지금 당장!”
“예?”
토미닉은 갑작스런 고함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 오더코르트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가 선택한 용사, 마르디노가 갖고 있는 유일한 흠. 그건 바로 드라비라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성격이었다.
“마르디노 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뭔지 알아요, 깰룩?”
“뭔데요?”
“쓸모없는 놈입니다, 깰룩.”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시킨 것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놈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산 꼭대기에 세워놓고 다이빙하라고 시키겠죠. 저희 모두 레이자냐처럼 되고 말 거예요, 깰룩.”
토미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레이자냐는 아직도 병원에 있습니까?”
“예. 전 그 모습을 직접 봤어요. 병문안을 갔거든요, 깰룩. 온몸에 드라비라를 닮은 버섯 수십 개가 자라났다고요, 깰룩.”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토미닉이 이번엔 이를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죠, 깰룩. 지금은 입에서 배변을 토해내고 있대요. 반대로 음식을 먹으려면…….”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정도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토 팀장님! 우리 선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요, 깰룩!”
“아니, 저도 그러고 싶지만…….”
“맘대로 서버 다운시켰다가 망해도 죽겠지만, 아무 짓도 안 하고 있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될 거라고요! 이잇, 정 못하겠으면 저리 비켜요! 내가 직접 할 거예요, 깰룩!”
깰룩은 토미닉을 지나쳐 시스템 장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어! 깰룩 님, 그렇게 아무거나 만지시면 안 됩니다!”
쿵쾅쿵콰앙!
깰룩은 직원들 사이에 난입하여 시스템 장비를 이것저것 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안 돼! 난 그렇게 될 순 없어, 깰룩! 그렇게 될 순 없다고!”
삑! 삐익!
왜앵― 왜앵―
“헉!”
빨간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며 사무실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이,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뭐야! 무슨 일인지 빨리 확인해!”
토미닉이 급히 외치자, 안 그래도 정신없던 개발 팀원들은 입 밖으로 영혼을 뱉어내며 탈곡기처럼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토미닉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노랗게 변했다.
“플레이어 데이터가 망가졌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뭔 소리예요, 깰룩? 데, 데이터가 망가졌다니.”
옆에 서 있던 직원 하나가 이미지 마법을 띄웠다.
“‘맘이Siri네’라는 유저의 데이터가 엉켰습니다. 이거 다시 복구하려면 저 유저 로그아웃부터 시켜야 해요. 안 그러면 못 고쳐요. 계정을 새로 업데이트해야 하니까…….”
개발 팀의 분위기는 가히 우주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잠깐, 맘이시리네면 마르디노 님이 만나러 간다고 한 그 또라이 유저 아닌가?’
깰룩의 얼굴이 순간 시체처럼 변했다.
만약 지금 이 사태를 석익이 알게 된다면, 자신은 털을 다 쥐어뜯기고 평생 벌거숭이로 살게 될 것이다.
“지, 지금 그 유저 어딨어요, 깰룩?”
“잠시만요. 조회해 보겠습니다. 아, 여기 있네요. 지금 막 퀘스트 완료하고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잘하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미안해요, 토 팀장님. 뒤를 부탁합니다, 깰룩.”
“어, 어? 어디 가십니까! 이거 해결하셔야…….”
하지만 깰룩은 이미 이동 마법의 좌표에 수식을 대입한 후였다.
깰룩은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디스플레이 창을 띄웠다. 맘이시리네의 좌표가 한순간에 마을로 이동되었다.
‘귀환서를 썼나 보네. 좋았어, 이제 이대로 로그아웃만 해주면!’
* * *
‘하, 여긴가? 긴 여정이었어……. 힐 버그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게 무슨 고생이람.’
파리톤 협곡에서 보살이를 퇴근시킨 뒤 포탈을 타고 개인 작업실로 막 도착한 날 반겨준 것은 길길이 뛰는 배불뚝이의 흉측한 얼굴이었다. 빨리 도드리온 늪지대로 가서 그 또라이 유저를 만나야 한다는 거였다.
‘홍보고 나발이고 이게 무슨 생난리야.’
결국 그 등쌀에 다시 작업실 밖으로 나선 나는 더 슬픈 문제와 마주했다. 어째선지 게임 필드 외부의 포탈들이 전부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동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맵이 얼마나 넓은데 테스트 이후로는 가본 적도 없는 도드리온 늪지의 좌표가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중간중간 부유 마법을 써가며 직접 두 다리를 써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오, 힘들어. 뭔 놈의 늪지대를 이렇게 먼 데다 만들어놓은 거야? 이래서 유저들이 여기까지 오기나 하겠어? 하, 씨. 좌표 따놔야지. 내가 다시 이 짓을 하면 성을 간다.’
ID카드의 지도를 확인하니, 수도인 파라알에서 서쪽으로 14㎞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맞게 찾아온 거 같긴 한데. 드럽게 넓은데 여기 어디에 있다는 건지.’
두리번거리며 늪지대로 들어가려던 그때, 깰룩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마, 마르디노 님. 다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뭐? 왜?”
― 방금 전에 그 맘이시리네라는 유저가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마을로 귀환했습니다, 깰룩.
나는 조용히 먹 같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맣고 어두운 게 내 마음 같구나.
“아오, 진짜! 똥개 훈련이냐?”
너무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작업실 좌표로 이동 마법 술식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휴, 그나마 돌아갈 때는 마법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지.”
― 어? 어어? 마르디노 님!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씨, 이번엔 또 뭐야! 아,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마. 별로 듣고 싶지 않…….”
― 그 유저가 이번에는 파라마스타 왕국 북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깰룩.
“북쪽? 거기 파리톤 협곡 있는 곳이잖아. 설마 너 히드라 동굴 아직도 폐쇄 안 했어?”
추궁하듯이 묻자, 깰룩이가 조금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 저, 그게, 폐쇄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 유저들 사이에서 히드라의 동굴이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화제가 되었나 봐요. 보스 몹을 잡으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헛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깰룩. 다른 사냥터나 마을에 있던 유저들까지 그쪽으로 몰려서 트래픽이…….
나는 순간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조용한 늪지대에 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윽고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설마.”
― 예, 폐쇄가 안 된대요, 깰룩.
“하아아아아아…….”
조용히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여기 와서 정말 머리털이 남아나질 않는다.
“파라마스타 섭종시켜.”
― 예?
메시지 마법을 통해 들려오는 깰룩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섭종시키라고, 섭종! 공지 띄우고 가능한 빨리, 최소 한 시간 내로 닫아. 다른 왕국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 하, 하지만…….
“창고 정리할래?”
― 지, 지금 당장 서버 닫으라고 전하겠습니다, 깰룩.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뭐? 파라마스타에 아직 남아 있는 유저가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섭종 시켰잖아?”
깰룩이는 내 기분이 더럽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ID카드를 화,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깰룩.”
신경질적으로 ‘카드’를 외쳤다. 은색 테두리가 있는 얇고 투명한 아티팩트가 마술처럼 손에 나타났다.
[서버 정보
파라마스타(원활)
동시 접속자 수: 1]
“진짜 남아 있잖아? 씨, 왜 한 명이 로그아웃이 안 된 거지? 빨리 위치 추적해. 마을이야?”
깰룩이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움직여 유저의 위치를 추적했다.
“파, 파리톤 협곡입니다, 깰룩.”
“뭐? 파리톤 협곡? 히드라 동굴?”
그럼 설마 로그아웃 안 됐다는 유저가…….
쿵!
그 순간, 작업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배불뚝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긱 군! 큰일이네!”
“넌 또 뭐야? 니들은 대체 큰일이 몇 번이나 일어나는 거냐!”
“지금 언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이것 보게나!”
배불뚝이가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손을 급히 들어 다급하게 허공을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