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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7화

저항은 발전을 만든다 (2)





“죽어라!”

“씨아아알!(으아아악!)”

누가 다가오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파란 도마뱀은 깜짝 놀라 발라당 나자빠졌다. 유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그 위로 내리쳤다.

카앙!

시퍼런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져 단단한 바닥에 박혔다.

“어? 뭐야, 어디 갔지?”

아마도 검을 내리치는 순간, 눈앞에서 몬스터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오 씨, 무거워.’

아슬아슬하게 투명화 마법을 시전함과 동시에, 벌벌 떤 채 굳어 있던 녀석을 끌어당기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대로 한적한 곳까지 녀석을 끌고 온 뒤, 투명화를 해제하고 플레이어로 보이도록 변신 마법을 걸었다. 파란 머리카락의 지구인으로 변한 녀석은 아직도 눈을 질끈 감은 채 떨고 있었다.

“야, 눈 떠.”

“으으으으.”

“눈 뜨라고.”

무릎을 발로 툭툭 치자, 움찔거리며 눈을 어렵게 뜬다.

“너 이…….”

고용도 안 된 주제에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것인지 추궁하려던 찰나,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달려들었다.

“뭐, 뭐야!”

당황해서 얼른 팔꿈치로 밀어냈지만, 녀석은 더욱 악착같이 들러붙었다.

“이 미친놈아! 저리 안 꺼져?”

질색하며 손바닥으로 밀어내자, 이마가 위로 당겨져 한껏 못생기게 변한 얼굴이 드러났다.

“흑흑흑.”

심지어 눈물, 콧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흐어어어엉!”

그러고는 내 팔에 들러붙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다고?”

조금 부끄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까부터 계속 헤맨 거야?”

“…네.”

“야, 너 고용도 안 된 외부인이잖아! 너 여기 와서 다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녀석은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산재 처리도 안 돼, 보험금도 못 타, 치료도 못 받어, 그냥 꼼짝없이 병원비 폭탄 맞는 거야. 어? 이게 뭔 소린지 알아? 부모님은 너 이러고 있는 거 알고 계셔?”

“…아니요.”

“너 그렇게 세상 니 편한 대로 살면 안 되는 거야. 어? 아무리 길치라도 그렇지, 갑자기 사라졌다가 어디서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릴 너희 부모님이 들으셨다고 생각해 봐. 어? 기분이 어떠시겠어?”

“…….”

어느새 그의 큰 눈망울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불효자 되는 거 한순간이다, 너. 소풍도 아니고 이런 위험한 데 돌아다니고 말이야. 걱정하실 거 아냐!”

“흑, 흑흑.”

“뚝!”

무섭게 고함을 치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디서 질질 짜? 또 울면 때릴 거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녀석은 눈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엔 어떻게 온 건지 설명해.”

엑스 어스 사는 통째로 공간 왜곡 마법을 걸어 유저들이 절대 찾을 수 없도록 숨겨두었다. 아무리 길을 잃었다고 해도 그곳에서 이 필드까지 홀로 올 수는 없다.

“강당…….”

“강당?”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파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강당이 뭐 어쨌는데.”

“회, 회사 건물에서 길을 헤매다 넓은 강당 같은 곳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왠지 나오려니까 문이 열리질 않아서 혼자 울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호르핌들이 막 엄청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분들이 마구 몰려오더니 제 옆자리에 앉기 시작했어요. 전 거기에 갇혀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얼떨결에 그 사람들과 같이 강연을 들었어요.”

“강연?”

“네.”

분명 오늘 아침에 회사 일정표를 확인했을 때, 새로운 던전 오픈 이벤트 외에 그 어떠한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비상소집이라도 열린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깰룩이가 그걸 내게 보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고.

‘그럼 둘 중 하나군.’

깰룩이도 모르고 있었거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거나.

무엇이 어찌 됐건, 결론은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나 자신뿐이라는 거다.

생각을 마친 나는 조용히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마나를 응집시켰다.

얇은 막처럼 펼쳐진 마나가 주변을 둥글게 둘러쌌다. 마나로 이루어진 막 안에서 푸른 문자들이 거품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깰룩이와의 신호는 완벽히 끊어졌다. 깰룩이는 더 이상 내 모습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강연은 무슨 내용이었어?”

녀석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막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사실 하도 어려운 말들뿐이라 자세힌 못 알아들었어요. 대충 기억나는 건… 뭐라 그랬더라? 자기들이 살기 위해선 무슨, 새로운 것들을 모두 부숴 버려야 한다고? 암튼 뭐 그런 말들을 했어요.”

“새로운 것들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그건 몰라요. 못 봤거든요. 덩치가 엄청 큰 분이 제 앞에 있어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요.”

“말투는 알 거 아냐. 억양이라든가, 사투리 같은 거.”

“말투요? 어… 말투는 뭐랄까, 조금 특이했는데… 왕족들이 쓰는 말투였는데, 이상하게 단어는 아란탈이 쓸 법한 걸 쓰더라구요. 제가 듣기엔 굉장히 이상했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투였어요.”

“골치 아프네.”

내가 아는 한 그런 말투를 쓰는 오더코르트인은 배불뚝이 드라비라밖에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배불뚝이에게는 이런 짓을 꾸밀 명분이 없다. 분명 썩을 놈, 망할 놈, 삼대가 고자여도 싼 놈이지만, 내가 아는 배불뚝이는 이 게임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호르핌 이상의 오더코르트인은 모두 마법을 쓸 줄 알고, 마법만 있다면 변신이나 사칭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독특한 말투는 흉내를 내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배불뚝이를 아주 잘 아는 다른 놈이라고 보는 게 맞을 터.

“그래, 뭐 됐다. 그때 분위긴 어땠냐?”

“분위기…….”

녀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다들 되게 흥분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흥분?”

“아니, 아니에요. 흥분되었다기보다는…….”

“환호? 열광? 분노?”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자, 녀석은 눈을 크게 뜨고 손뼉을 쳤다.

“오, 맞아요! 분노! 그런 느낌이었어요! 어쩐지 다들 엄청 화가 난 것 같았어요.”

“…….”

그거 하나 생각해 내는 데 참 오래도 걸린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니까 거기서 막 화내던 녀석들이 갑자기 어딘가로 막 몰려 나갔고, 거기 딸려서 걷다 보니까 얼떨결에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거지?”

녀석은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헉, 어떻게 아셨어요? 아직 말도 안 했는데.”

“마법.”

“우와! 대단해요!”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는 것을 보니 왠지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네 말이 사실이면 완전 망했네.”

“네? 왜요?”

“왜긴 왜야. 그건 뒤에서 몰래 직원들을 조종하는 녀석이 있단 소리잖아. 뭐 땜에 그러는진 알 수 없지만, 새 걸 부순다, 어쩐다 하는 거는 아마 새로 나온 던전들을 말하는 거겠지. 문제는 그러자고 선동한 놈이 대체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야. 짚이는 사람이 있긴 한데,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놈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 리가 없단 말이지. 그놈은 어찌 됐든 나랑 같이 이 게임의 잘되길 바랄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이번 일이 잘못돼서 유저들이 대폭 줄어든다든가 했다간 가장 노발대발할 것도 그놈이고.

“으으, 뭔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쉽게 생각해. 네가 만약 학교를 다니고 있다 쳐. 근데 어느 날 전학생이 왔어. 그럼 보통 어떠냐?”

“음… 좀 어색하긴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죠, 보통.”

“그치? 개중엔 전학생과 친해지려는 애들도 있을 거고, 별로 관심 없는 애들도 있을 거야. 대부분은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겠지. 그게 정상이란 말이야. 근데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봐. 반 친구들이 전부 걔를 따돌리고 막 때리는 거지.”

“에이, 웬만하면 그렇게까지는 안 하죠.”

“그래, 근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그리고 알고 보니까 뒤에 숨어서 반 친구들을 선동한 놈이 있었던 거야. 문제는 그 학생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거고. 지금 상황이 딱 이래. 뭔 소린지 이해했어?”

“아하.”

녀석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예요?”

“뭐?”

“굳이 뒤에 숨어서 왕따를 시키고 있는 사람을 힘들게 찾아야 돼요?”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찾아내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야 할 거 아냐.”

그러자 뜻밖에 녀석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뭐 그런 결말도 나쁘진 않겠네요. 근데 만약 저라면 좀 더 평화로운 스토리로 갈 것 같아요.”

“스토리?”

“그냥 그 사람이 퍼뜨린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애들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반 친구들이 모두 그 전학생을 좋아하도록 만들면, 자연스럽게 따돌림시키려 했던 사람이 도리어 망신을 당하지 않겠어요? 굳이 누군지 찾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저라면 그런 시나리오로 갈 것 같은데요.”

그러고는 티 없이 미소 지었다.

“너 이름이 뭐냐?”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더 있냐?”

“파로롱 데이로니 퍼로커다일이라고 해요.”

“퍼로, 뭐?”

도대체가 이놈의 오더코르트인들 이름은 하나같이 길고 외우기가 어렵다.

“파라롱 데이로니 퍼로…….”

“퍼롱이?”

“네?”

“그래, 퍼롱이. 이름 마음에 드네.”

그래서 언제부턴가 오더코르트인들의 이름을 그냥 대충 기억나는 대로 부르게 되었다. 어차피 그들도 내 이름을 ‘사긱’이라고 발음하지 않던가. 피차일반이다.

“저기, 제 이름은 퍼롱이가 아니라, 퍼로…….”

“퍼롱아, 혹시 그쪽 관련해서 공부한 적 있냐?”

퍼롱이는 대답 대신 입을 꼭 다물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얘가 대답 하나 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빨리빨리 대답 안 할래? 그쪽 관련해서 공부한 적 있냐고.”

“그쪽이라면……?”

“스토리 말이야, 시나리오!”

호통을 치자, 퍼롱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는…….”

“으아아아아악!”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광장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쩐지 눈으로 보기에도 규모가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얼른 주변에 쳐두었던 차단 마법을 해제시켰다.

― 마르디노 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깰룩? 갑자기 모습도 안 보이고 연락도 안 되셔서 깜짝 놀랐어요!

차단 마법이 해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왔다.

― 몰라, 신호가 불안정한가 보지.

플레이어들의 뒤로 히드라와 비오리우스 무리가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는…….

‘아즈칸?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녀석이라 알고 있다.

웬만해서는 잊기도 힘든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며, 허공에서 크게 한번 활개를 친 백색의 드래곤이 광장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제트기라도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유저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 백색 화염이 솟구쳤다.

― 이것들이 정말 작정을 했나 본데.

― 어, 어떻게 할까요, 깰룩?

― 어떡하긴 뭘 어떡해. 줘 패야지.

“무, 무, 무슨 일이에요?”

퍼롱이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내 뒤에 숨었다.

“나도 몰라. 그냥 죽고 싶어 안달난 놈들이 설치고 있나 보다.”

퍼롱이의 양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어엇, 뭐 하세요?”

“너 잠시 깰룩이한테 가 있어야겠다.”

“깰룩이?”

개인 작업실의 좌표를 떠올리며 이동 마법 수식을 계산했다. 주변으로 푸른색의 마나가 서리며 오더코르트 문자가 반짝반짝 떠올랐고, 퍼롱이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

― 깰룩아, 방금 보낸 애 좀 잘 데리고 있어라.

― 이건 누굽니까, 깰룩?

― 지금 대답할 시간 없어, 이따 방에서 얘기해.

“나파카아지오테 바 타우 즈크지.”

연달아 이동 마법을 펼쳤다. 모여든 빛이 걷히자, 나는 번들번들한 백색 갑각을 몸에 두른 드래곤 앞에 와 있었다.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주문을 외우자, 허공에 수없이 많은 마법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에아 타 카우온 아바베아온.”

마나가 온 대지를 눈처럼 뒤덮었다. 땅이 흔들거리며 호두 껍데기 쪼개지듯 갈라졌고, 곧 그 사이에서 검붉은 용암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을 손에 휘감듯 부드럽게 손짓하자, 용암이 손길을 따라 용출했다.

콰아아아악!

용암 줄기들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사방으로 꿈틀대며 주변에 있던 히드라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히드라들이 녹아 사라졌다.

이것은 일종의 공포탄이었다. 더 이상 날뛰면 이제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경고.

저 아래 작게 보이는 호르핌들이 모두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갑작스레 모든 몬스터들이 멈춰 허공을 바라보자, 도망치던 유저들도 멈춰 서서 나와 아즈칸 쪽을 손가락질했다.

아즈칸은 내 앞에 있었지만, 굳은 채로 용암에 휩쓸려 사라지는 다른 호르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 아즈칸.

“마르디노 카림.(마르디노 님.)”

메시지 마법을 보내자, 순백의 드래곤은 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나와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 눈 돌리지 마.

아즈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 니들이 이렇게 나온 이상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겠지? 나랑 함께한 시간이 삼 년인데, 안 그래?

부름에 반응한 마나가 미친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대기가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호르핌들이 두려운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 선택해라.

아즈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포기할래, 아니면 죽을래.

침묵은 길었다. 광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했다.

허공에 뜬 채 한참 고민하던 아즈칸이 이윽고 눈을 떴다.

“남 포라티 토타룸(계속 투쟁하겠습니다).”

주위에 있던 다른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두렵지만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 그래? 안 됐군.

망설임 없이 손을 하늘 위로 높이 쳐들었다.

“오 바나니카룸, 라 아라. 닐라틴 멜, 코티 에라. 바루탐 이룬칼.”

주변으로 모여든 거대한 마나가 서로 뒤엉키며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하늘은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컴컴해졌고, 갈라진 땅의 틈으로 보이는 용암은 붉은 빛을 냈다. 하늘과 땅이 당장이라도 모두 뒤집힐 듯했다.

콰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며 온 사방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기류가 소용돌이치자, 아즈칸은 제자리에서 날갯짓하기도 버거운 듯 휘청거리며 더 위로 떠올랐다.

“아, 아나이 우라이야탈 콘투 오예베투카 미카붐(그, 그렇지만 대화로 푸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아즈칸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며 마법을 취소시켰다.

“헐, 아직 살아 있는 랭커가 있어!”

“이럴 수가, 드래곤한테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뒤를 힐끔 돌아보니, 대피했던 몇몇의 플레이어들이 다시 광장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구석에 맘이시리네도 보였다.

유저들은 차마 마법으로 아예 쪼개져 버린 광장을 건너오지 못하고 저편에서 구경 중이었다. 몬스터 무리와 유저들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나뉘어 있는 꼴이었다.

‘좀 어렵게 됐는데.’

성가신 랭커들은 아즈칸한테 전멸한 듯했지만, 아직 생존해 있는 유저들이 문제였다.

대화로 풀자고 한 이상 호르핌들과 계속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화하기엔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걸렸다.

분명 저승에 가 있는 유저들 또한 이 모습을 실시간 중계를 통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무슨 좋은 수가 없으려나?’

바로 그때,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릉.

먹구름 속에서 샛노란 번갯불이 번쩍이자, 아즈칸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에, 에이, 마르디노 카림? 문타이야 우라이야탈 아누마티카빌리아…….(저, 저기, 마르디노 님? 아까 대화로 하신다고…….)”

― 응? 저거 내가 한 거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