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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24화
한여름 밤의 꿈 (3)
“하, 귀찮게 이 배불뚝이 새끼.”
배불뚝이의 사무실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도 험하지도 않았지만, 세상에서 정말 최고로 귀찮은 길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엑스 어스 회장인 만큼, 하반기 패치 기획안의 최종 결재는 받아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깰룩이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했겠지만, 불쌍한 깰룩이는 며칠 전부터 제대로 더위를 먹고 앓아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퍼롱이에게 심부름을 보냈더니, 이놈의 자식은 사무실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채 한참이나 지나서 엉뚱한 직원 식당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퍼롱이는 나한테 들입다 욕을 먹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버렸다. 맘이시리네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며 퍼롱이를 품에 끌어안고 위로했다.
“너무 윽박지르지 마세요. 상처받아요.”
“자꾸 그렇게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 나빠집니다.”
요즘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번 데려왔더니 맘이시리네는 이제 아주 틈만 나면 작업실에 오려고 수작을 부렸다. 아마 맘이시리네는 내가 왜 그렇게까지 애들을 괴롭히는지 모를 것이다.
‘이게 다 배불뚝이 때문이지.’
어쨌든 직접 갈 수밖에 없는 상황.
탕탕!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문을 발로 대충 두드렸다. 문짝에는 꼴도 보기 싫은 배불뚝이의 초상화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턱에 달린 촉수를 국수 가락처럼 늘어트린 채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다.
“누군가?”
문 너머에서 배불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문 열어.”
그러자 갑자기 안쪽에서 우당탕하고 뭐가 쏟아지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한참 뭔가 하는 듯 시끄럽더니, 이윽고 쿵쿵거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나며 덜컥 문이 열렸다.
“사, 사긱 군?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배불뚝이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쯧쯧, 그래 가지고 건물이 무너지겠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배불뚝이가 더욱 당황한 얼굴로 문을 가로막고 섰다.
“뭐야. 비켜, 이 덩어리야.”
발로 열린 문을 걷어찼다.
“커헉!”
문에 박은 코를 움켜쥔 채 길을 막고 있는 배불뚝이 녀석을 팔꿈치로 퍽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배불뚝이는 뭘 그리 당황한 건지, 허겁지겁 뛰어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자네, 나중에 다시 와주겠나?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말이네.”
쩍쩍 갈라져 있는 파충류 비늘 사이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래? 너 좀 이상하다? 뭐 훔쳐 먹었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불뚝이의 사무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 아니면 어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순간, 뒤에서 반짝이고 있는 디스플레이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비치고 있었다. 이전에 배불뚝이가 ‘나이트’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 불청객이 왔군.
“뭐? 불청……!”
욱하는 순간, 배불뚝이가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촉수를 만지던 손바닥이 혐오스러워서, 내가 손이 다가온 즉시 허리를 뒤로 홱 젖혀 피했던 것이다.
― 아무튼 계획에 차질 없도록 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아,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화면을 향해 굽신거리며 외치는 배불뚝이의 말을 끝으로 푸른 화면이 비눗방울 터지듯 사라졌다.
“거참,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자네가 내 방에 직접 오는 날도 있고 말이야.”
통신이 끝나자 여유를 되찾은 배불뚝이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나라고 좋아서 여기 왔겠냐?”
“껄껄, 아마 자네가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이후로 처음이지?”
“이 촉수 새끼가. 내가 그날 얘기 꺼내지도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워워, 진정하게.”
이를 갈며 쏘아보자, 배불뚝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자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네.”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배불뚝이의 면상을 주먹으로 수백 번도 더 후려치고 있었다.
“지구 접속기가 빠르면 이번 주 안으로 설치될 걸세.”
“뭐? 너 그때 6개월은 걸릴 거라며.”
마나 폭주에 관련된 내 가설을 놓고 거래를 했을 당시, 배불뚝이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지구 접속기는 6개월 이내에 준비해 주겠네.”
“뭔데 그렇게 오래 걸려!”
“6개월도 빠른 거네, 사긱 군.”
배불뚝이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론상으론 쉬워 보여도 이것저것 따져 볼 게 많아서 말이야. 접속기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가 마나와는 차원이 다른 물질인 걸 어쩌겠나.”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자, 배불뚝이는 씩 미소를 지었다.
“접속기에 쓰인 에너지는 라브마라는 행성에서만 추출되는 ‘람’이라는 물질일세. 마나가 아니야.”
“람이라고?”
배불뚝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촉수들이 꼭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주렁주렁 흔들렸다. 혐오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람은 이 넓은 우주에서도 상위 1%에 속하는 엄청난 에너지라네. 우리가 지구에다 만들어 판 접속기도 다 오더코르트에서 어렵게 수입해 온 람으로 만든 거라네. 워낙 엄청난 힘을 가진 에너지다 보니 가져오는 것도 힘들거든.”
“어차피 내가 쓸 접속기 하나만 준비하면 되잖아. 뭔 상관이야.”
따지듯 묻자, 배불뚝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단지 그 한 대를 놓는 것만으로 오더코르트의 멸망이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의자를 밀치며 벌떡 일어나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깰룩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 그대로네. 이건 결코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쉽게 보여도 이것저것 따져 볼 게 꽤 많단 말이지. 지구 쪽에서도 자네가 넘어올 경우 혹여나 어떤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지 검토해 봐야 하고, 장시간 오더코르트에 노출된 자네 육체가 지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도 구축해 놔야 하네. 마치 지구인들이 오더코르트에서 보정 마법을 받아 게임 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일세.”
멍청한 배불뚝이 주제에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우우우…….”
어차피 계약서도 작성했겠다, 사기당할 걱정은 없다.
“알았어, 알았다고. 6개월이라 이거지.”
“그렇다매, 망할 촉수 새끼야!”
빽 소리치자, 배불뚝이는 반사적으로 촉수를 보호하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진정하게, 사긱 군. 이건 얼마 전에 우주중앙청 관계자가 직접 이곳을 두루 살피고 내린 결론이네. 현재 체월의 동접자 수 정도면 지구 접속기도 한 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겠다고 하더군. 그쪽에서도 지구인들의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일 줄은 몰랐던 거지.”
배불뚝이는 턱을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펴더니, 민달팽이 같은 손가락을 내밀어 허공에 휘둘렀다.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들이 흩어졌고, 허공에 1400만을 웃도는 숫자가 나타났다. 현재 체월의 동시 접속자 수였다.
“이번엔 진짜겠지? 뻥이면 넌 진짜 곱게 못 죽을 줄 알아라.”
“아무렴 말인가. 단, 조건이 있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멱살을 틀어쥐었다.
“조건이 왜 따라붙어! 계약했잖아, 이 촉수 새끼야!”
“아, 안 돼!”
비명과도 같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배불뚝이의 턱주가리에 붙어 있던 촉수 두 가닥이 내 손가락에 얽혀 도마뱀 꼬리 잘리듯 툭 떨어졌다.
“으아악! 촉수가!”
울부짖는 배불뚝이의 멱살을 뒤로 밀치듯 놓아버렸다. 배불뚝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들을 바라보았다.
“내 촉수가, 두 개나…….”
나라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촉수고 나발이고, 조건은 뭔 소리냐고.”
그러자 배불뚝이는 바닥에 앉은 채로 눈을 치켜뜨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왜, 뭐. 하나 더 뽑아달라고?”
살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자, 배불뚝이는 바닥에 떨어진 촉수를 주워 들고 후다닥 물러났다.
“하여간 자네 성질머리는 알아줘야 하네.”
“집어치워. 좋은 말로 할 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그 촉수 진짜 다 뽑히기 싫으면.”
협박하듯 말하자, 내가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아는 배불뚝이는 몸서리를 쳤다.
“조, 조건이랄 것도 없네. 그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거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으니 말일세.”
어디 계속 해보라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보던 배불뚝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최단 기간 내에 지구로 갈 수 있게 해준 대신, 그만큼 자네가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렇게 오래 있을 수도 없고 말이야.”
“아,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서 뭐 어떡하겠단 건데.”
“오늘이나 내일 중에 자네 자택으로 한국 지부 직원이 파견을 나갈 걸세. 거기서 자네가 휴가 동안 지낼 수 있는 간단한 필드를 구축할 예정이지. 집 안에 말일세.”
배불뚝이는 랩을 하는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이거냐?”
“그런 셈이지.”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어디냐.
“우주중앙청에서도 자네의 공로를 인정해서 앞으로 차차 방문할 수 있는 지역을 늘려주겠다고 하더군. 조만간 한국 정도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될 거네.”
“아, 그래? 뭐야, 그러면 진작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 괜히 니 촉수만 뽑혔잖아. 안 됐네.”
“자네 성질이 고약한 걸세!”
“그래. 내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 야아, 어떡하냐. 안 됐네. 뭐 어때, 촉수는 또 자라잖아. 쪼잔하기는.”
나는 일부러 별로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들부들하는 배불뚝이의 표정은 참 볼만했다.
“그럼 접속기가 설치되는 대로 갈 수 있는 거지?”
“그렇네.”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뭐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사회를 통해 협의하겠지만, 이틀 후부터 일주일 정도 휴가를 주려고 하네.”
“일주일? 야, 장난하냐? 내가 여기서 몇 년을 굴렀는데! 상병도 그것보단 많이 나가겠다!”
죽일 듯이 노려보자, 배불뚝이가 흠칫거리며 더욱 물러섰다.
“애, 애초에 지구 접속기를 준댔지, 휴가를 준다고는 안 하지 않았나. 휴가를 주기로 한 건 저번 히드라 던전 사태 때부터였으니, 이 계약과는 별개일세. 어차피 휴가인 거 지구에 가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자네 휴가에 맞춰서 지구 접속기를 준비한 거라구.”
그래, 일주일이라도 집에 가는 게 어디냐.
지구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것 받게나.”
배불뚝이가 조그마한 복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마나 주머니일세. 자넨 이미 마법에 익숙해졌으니, 마나가 없는 지구에서 생활하려면 불편하지 않겠나. 그래서 준비한 선물일세. 자잘한 마법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나를 담아놨으니 일주일간 아껴 쓰게나. 마나는 알약 형태로 들어 있네. 필요할 때마다 한 개씩 삼키고 쓰면 될 걸세.”
“아, 그래? 고맙다.”
복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니, 동그란 파란색 구슬 같은 것이 몇 개 들어 있었다.
“호오, 그럼 이제 말해. 뭔 꿍꿍이로 이렇게 잘해주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배불뚝이가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꾸, 꿍꿍이라니, 무슨 소린가. 그동안 자네에게 신세진 일이 많으니 신경 좀 쓴 게지. 명색이 비즈니스 파트너 아닌가. 휴가비라고 생각하게, 껄껄껄.”
“웃기시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보나마나 그 우주중앙청인지 오미자 조청인지에서 주라 그랬겠지. 지구에 내가 알고 있는 얘기가 퍼지면 안 될 테니까. 그냥 이거 줄 테니 입 좀 다물어달라고 솔직하게 말해, 촉수 새끼야.”
배불뚝이는 억지 미소를 지은 채로 굳었다가, 애써 말을 돌렸다.
“차, 참. 자네 가족들의 기억은 지구 쪽에서 미리 손을 좀 봤다고 하네.”
“뭐? 손봤다니, 그게 뭔 소리야?”
“나도 정확힌 모르네. 듣기론 자네가 엑스 어스의 기획자로 스카우트되어 현재 미국 지부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
“호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걸 보면 우주중앙청인가, 유기농 유자청인가 하는 작자들의 입김이 세긴 센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이만 나가 보게.”
배불뚝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내 등을 냉큼 떠밀었다.
문밖으로 떠밀리는데, 문득 아까 멱살을 잡느라 아무데나 던져 둔 기획안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잠깐만, 깜빡 잊고 있었어. 저거 결재해.”
“음? 저게 뭔가?”
“이번 하반기 패치 기획안.”
“벌써 나왔나? 흐음, 알겠네. 내 한번 읽어보지.”
“어, 돌려줄 땐 직접 오지 말고. 얼굴 보기 싫으니까.”
배불뚝이의 방에서 나와 다시 작업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엑스 어스의 기획자라.’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미국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초거대 게임 회사에 스카우트된 거라 이거지? 한국에서는 이미 게임 쪽 다 씹어 먹은 체월의 기획자로?’
아마 더 이상 누나들이 날 예전처럼 막 대하진 못할 것이다.
그 후 휴가를 가기까지,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나를 더욱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러냐고 깰룩이를 붙잡고 물으니, 일하는 중에도 계속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는 게 너무 무섭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휴가 전날 저녁.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개인 작업실에 돌아오니, 어떤 낯선 사람이 드라비라와 함께 와 있었다.
“오, 왔군. 사긱 군, 인사하게. 우주중앙청에서 방문하신 시공의 사자시네.”
배불뚝이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시공의 사자라는 사람은 푸른 머리카락 위로 고글을 쓰고 있고, 오른쪽 팔에는 특이한 모양의 팔찌를 찬 남자였다. 중세 기사들이 입을 법한 갑옷에 고급스러운 흰 망토를 둘렀는데, 뒤집어쓸 수 있는 모자도 달려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후드였다.
“바힌 왕국의 클린핀이라고 합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아주 기품 있는 자세로 인사를 했다.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지구의… 나석익이라고 합니다.”
이 이상한 인사법은 대체 뭐냐고.
나는 괜히 머쓱해져 고개만 까딱 숙였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으시다구요.”
“네?”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묻자, 클린핀은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또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네. 하여간 이 주둥아리가 문제라니깐. 하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
이 작자도 정상은 아니구만.
“저 덩치 큰 놈을 지구에서 가져오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무거워도 좀 무거워야죠. 허리가 휘는 줄 알았어요.”
클린핀이 작업실 안쪽에 있는 내 침실을 가리켰다.
슬쩍 문 너머를 바라보니, 침대 옆에 놓인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SF 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알 모양의 캡슐.
“저거…….”
“껄껄,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네. 접속기지. 그것도 무려 다음 업데이트 버전이라더군. 듣기론 자네가 지구에서 음식물을 먹으면 그 영양소가 그대로 오더코르트에 있는 원래 몸에도 전달된다고 하네.”
심장이 터져 나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구 쪽에 건너가 있어도, 오더코르트에 남아 있는 본래 몸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닌가!
“무, 물론 그쪽에는 마나로 만든 가상의 자네가 생기는 것일세. 영양소가 전달된다고는 해도 아예 이리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네. 오더코르트가 멸망하면 자네도 죽는 걸세. 알겠는가?”
배불뚝이가 불안한 얼굴로 몇 번이나 얘기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그때, 클린핀이 차고 있던 팔찌를 슥 쳐다보더니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익 씨.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가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예?”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클린핀은 내 똥 씹은 표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오른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파지직!
그러자 갑자기 그의 앞에 포탈처럼 생긴 둥근 문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생겨났다.
“너도 수고해, 드라비라.”
“예! 들어가십시오!”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배불뚝이를 뒤로하고, 클린핀은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
그러고는 내가 미처 인사를 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휙 사라져 버렸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곧바로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시가 아깝다. 시공의 사자가 정신 빠진 놈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이러는 동안에도 지구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을 텐데.
“오오! 드디어 도착했군요!”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퍼롱이와 깰룩이가 나를 발견하고 재빨리 뛰어왔다.
“지금 바로 떠나시는 겁니까, 깰룩?”
“그래, 나 첫 휴가 간다.”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으니 푹 쉬다가 오십시오, 깰룩.”
“조심히 다녀오세요!”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둘 다 말썽 일으키지 말고, 일 잘하고 있어라. 사고 치면 갔다 와서 털 다 뽑아버릴 거야.”
“…….”
“그럼 다녀오게나, 사긱 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면 강제 로그아웃되게끔 설정돼 있으니 행여나 영영 지구에 있을 생각은 말게나.”
“치사한 촉수 새끼.”
물론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떠나기도 전에 기분을 잡쳐 놓지 말란 말이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데.
나는 얼른 접속기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헬멧을 쓰고 문을 닫았다.
‘후후후, 뭐 어때. 휴가라고, 휴가! 이게 얼마 만의 집이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전원을 켜자, 곧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방이 캄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구에 접속한 나는…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정말 이상한 꿈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은 그렇게 하늘로 날아가 흩어졌다.
한여름 밤의 꿈 (3)
“하, 귀찮게 이 배불뚝이 새끼.”
배불뚝이의 사무실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도 험하지도 않았지만, 세상에서 정말 최고로 귀찮은 길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엑스 어스 회장인 만큼, 하반기 패치 기획안의 최종 결재는 받아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깰룩이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했겠지만, 불쌍한 깰룩이는 며칠 전부터 제대로 더위를 먹고 앓아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퍼롱이에게 심부름을 보냈더니, 이놈의 자식은 사무실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채 한참이나 지나서 엉뚱한 직원 식당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퍼롱이는 나한테 들입다 욕을 먹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버렸다. 맘이시리네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며 퍼롱이를 품에 끌어안고 위로했다.
“너무 윽박지르지 마세요. 상처받아요.”
“자꾸 그렇게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 나빠집니다.”
요즘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번 데려왔더니 맘이시리네는 이제 아주 틈만 나면 작업실에 오려고 수작을 부렸다. 아마 맘이시리네는 내가 왜 그렇게까지 애들을 괴롭히는지 모를 것이다.
‘이게 다 배불뚝이 때문이지.’
어쨌든 직접 갈 수밖에 없는 상황.
탕탕!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문을 발로 대충 두드렸다. 문짝에는 꼴도 보기 싫은 배불뚝이의 초상화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턱에 달린 촉수를 국수 가락처럼 늘어트린 채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다.
“누군가?”
문 너머에서 배불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문 열어.”
그러자 갑자기 안쪽에서 우당탕하고 뭐가 쏟아지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한참 뭔가 하는 듯 시끄럽더니, 이윽고 쿵쿵거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나며 덜컥 문이 열렸다.
“사, 사긱 군?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배불뚝이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쯧쯧, 그래 가지고 건물이 무너지겠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배불뚝이가 더욱 당황한 얼굴로 문을 가로막고 섰다.
“뭐야. 비켜, 이 덩어리야.”
발로 열린 문을 걷어찼다.
“커헉!”
문에 박은 코를 움켜쥔 채 길을 막고 있는 배불뚝이 녀석을 팔꿈치로 퍽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배불뚝이는 뭘 그리 당황한 건지, 허겁지겁 뛰어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자네, 나중에 다시 와주겠나?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말이네.”
쩍쩍 갈라져 있는 파충류 비늘 사이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래? 너 좀 이상하다? 뭐 훔쳐 먹었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배불뚝이의 사무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 아니면 어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순간, 뒤에서 반짝이고 있는 디스플레이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비치고 있었다. 이전에 배불뚝이가 ‘나이트’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 불청객이 왔군.
“뭐? 불청……!”
욱하는 순간, 배불뚝이가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촉수를 만지던 손바닥이 혐오스러워서, 내가 손이 다가온 즉시 허리를 뒤로 홱 젖혀 피했던 것이다.
― 아무튼 계획에 차질 없도록 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아,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화면을 향해 굽신거리며 외치는 배불뚝이의 말을 끝으로 푸른 화면이 비눗방울 터지듯 사라졌다.
“거참,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군. 자네가 내 방에 직접 오는 날도 있고 말이야.”
통신이 끝나자 여유를 되찾은 배불뚝이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나라고 좋아서 여기 왔겠냐?”
“껄껄, 아마 자네가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이후로 처음이지?”
“이 촉수 새끼가. 내가 그날 얘기 꺼내지도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워워, 진정하게.”
이를 갈며 쏘아보자, 배불뚝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자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네.”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배불뚝이의 면상을 주먹으로 수백 번도 더 후려치고 있었다.
“지구 접속기가 빠르면 이번 주 안으로 설치될 걸세.”
“뭐? 너 그때 6개월은 걸릴 거라며.”
마나 폭주에 관련된 내 가설을 놓고 거래를 했을 당시, 배불뚝이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지구 접속기는 6개월 이내에 준비해 주겠네.”
“뭔데 그렇게 오래 걸려!”
“6개월도 빠른 거네, 사긱 군.”
배불뚝이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론상으론 쉬워 보여도 이것저것 따져 볼 게 많아서 말이야. 접속기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가 마나와는 차원이 다른 물질인 걸 어쩌겠나.”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자, 배불뚝이는 씩 미소를 지었다.
“접속기에 쓰인 에너지는 라브마라는 행성에서만 추출되는 ‘람’이라는 물질일세. 마나가 아니야.”
“람이라고?”
배불뚝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촉수들이 꼭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주렁주렁 흔들렸다. 혐오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람은 이 넓은 우주에서도 상위 1%에 속하는 엄청난 에너지라네. 우리가 지구에다 만들어 판 접속기도 다 오더코르트에서 어렵게 수입해 온 람으로 만든 거라네. 워낙 엄청난 힘을 가진 에너지다 보니 가져오는 것도 힘들거든.”
“어차피 내가 쓸 접속기 하나만 준비하면 되잖아. 뭔 상관이야.”
따지듯 묻자, 배불뚝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단지 그 한 대를 놓는 것만으로 오더코르트의 멸망이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의자를 밀치며 벌떡 일어나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깰룩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 그대로네. 이건 결코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쉽게 보여도 이것저것 따져 볼 게 꽤 많단 말이지. 지구 쪽에서도 자네가 넘어올 경우 혹여나 어떤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지 검토해 봐야 하고, 장시간 오더코르트에 노출된 자네 육체가 지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도 구축해 놔야 하네. 마치 지구인들이 오더코르트에서 보정 마법을 받아 게임 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일세.”
멍청한 배불뚝이 주제에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우우우…….”
어차피 계약서도 작성했겠다, 사기당할 걱정은 없다.
“알았어, 알았다고. 6개월이라 이거지.”
“그렇다매, 망할 촉수 새끼야!”
빽 소리치자, 배불뚝이는 반사적으로 촉수를 보호하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진정하게, 사긱 군. 이건 얼마 전에 우주중앙청 관계자가 직접 이곳을 두루 살피고 내린 결론이네. 현재 체월의 동접자 수 정도면 지구 접속기도 한 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겠다고 하더군. 그쪽에서도 지구인들의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일 줄은 몰랐던 거지.”
배불뚝이는 턱을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펴더니, 민달팽이 같은 손가락을 내밀어 허공에 휘둘렀다.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들이 흩어졌고, 허공에 1400만을 웃도는 숫자가 나타났다. 현재 체월의 동시 접속자 수였다.
“이번엔 진짜겠지? 뻥이면 넌 진짜 곱게 못 죽을 줄 알아라.”
“아무렴 말인가. 단, 조건이 있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멱살을 틀어쥐었다.
“조건이 왜 따라붙어! 계약했잖아, 이 촉수 새끼야!”
“아, 안 돼!”
비명과도 같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배불뚝이의 턱주가리에 붙어 있던 촉수 두 가닥이 내 손가락에 얽혀 도마뱀 꼬리 잘리듯 툭 떨어졌다.
“으아악! 촉수가!”
울부짖는 배불뚝이의 멱살을 뒤로 밀치듯 놓아버렸다. 배불뚝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들을 바라보았다.
“내 촉수가, 두 개나…….”
나라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촉수고 나발이고, 조건은 뭔 소리냐고.”
그러자 배불뚝이는 바닥에 앉은 채로 눈을 치켜뜨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왜, 뭐. 하나 더 뽑아달라고?”
살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자, 배불뚝이는 바닥에 떨어진 촉수를 주워 들고 후다닥 물러났다.
“하여간 자네 성질머리는 알아줘야 하네.”
“집어치워. 좋은 말로 할 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그 촉수 진짜 다 뽑히기 싫으면.”
협박하듯 말하자, 내가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아는 배불뚝이는 몸서리를 쳤다.
“조, 조건이랄 것도 없네. 그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거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으니 말일세.”
어디 계속 해보라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보던 배불뚝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최단 기간 내에 지구로 갈 수 있게 해준 대신, 그만큼 자네가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렇게 오래 있을 수도 없고 말이야.”
“아,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서 뭐 어떡하겠단 건데.”
“오늘이나 내일 중에 자네 자택으로 한국 지부 직원이 파견을 나갈 걸세. 거기서 자네가 휴가 동안 지낼 수 있는 간단한 필드를 구축할 예정이지. 집 안에 말일세.”
배불뚝이는 랩을 하는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이거냐?”
“그런 셈이지.”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어디냐.
“우주중앙청에서도 자네의 공로를 인정해서 앞으로 차차 방문할 수 있는 지역을 늘려주겠다고 하더군. 조만간 한국 정도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될 거네.”
“아, 그래? 뭐야, 그러면 진작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 괜히 니 촉수만 뽑혔잖아. 안 됐네.”
“자네 성질이 고약한 걸세!”
“그래. 내 성질이 고약하긴 하지. 야아, 어떡하냐. 안 됐네. 뭐 어때, 촉수는 또 자라잖아. 쪼잔하기는.”
나는 일부러 별로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들부들하는 배불뚝이의 표정은 참 볼만했다.
“그럼 접속기가 설치되는 대로 갈 수 있는 거지?”
“그렇네.”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뭐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사회를 통해 협의하겠지만, 이틀 후부터 일주일 정도 휴가를 주려고 하네.”
“일주일? 야, 장난하냐? 내가 여기서 몇 년을 굴렀는데! 상병도 그것보단 많이 나가겠다!”
죽일 듯이 노려보자, 배불뚝이가 흠칫거리며 더욱 물러섰다.
“애, 애초에 지구 접속기를 준댔지, 휴가를 준다고는 안 하지 않았나. 휴가를 주기로 한 건 저번 히드라 던전 사태 때부터였으니, 이 계약과는 별개일세. 어차피 휴가인 거 지구에 가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자네 휴가에 맞춰서 지구 접속기를 준비한 거라구.”
그래, 일주일이라도 집에 가는 게 어디냐.
지구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것 받게나.”
배불뚝이가 조그마한 복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마나 주머니일세. 자넨 이미 마법에 익숙해졌으니, 마나가 없는 지구에서 생활하려면 불편하지 않겠나. 그래서 준비한 선물일세. 자잘한 마법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나를 담아놨으니 일주일간 아껴 쓰게나. 마나는 알약 형태로 들어 있네. 필요할 때마다 한 개씩 삼키고 쓰면 될 걸세.”
“아, 그래? 고맙다.”
복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니, 동그란 파란색 구슬 같은 것이 몇 개 들어 있었다.
“호오, 그럼 이제 말해. 뭔 꿍꿍이로 이렇게 잘해주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배불뚝이가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꾸, 꿍꿍이라니, 무슨 소린가. 그동안 자네에게 신세진 일이 많으니 신경 좀 쓴 게지. 명색이 비즈니스 파트너 아닌가. 휴가비라고 생각하게, 껄껄껄.”
“웃기시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보나마나 그 우주중앙청인지 오미자 조청인지에서 주라 그랬겠지. 지구에 내가 알고 있는 얘기가 퍼지면 안 될 테니까. 그냥 이거 줄 테니 입 좀 다물어달라고 솔직하게 말해, 촉수 새끼야.”
배불뚝이는 억지 미소를 지은 채로 굳었다가, 애써 말을 돌렸다.
“차, 참. 자네 가족들의 기억은 지구 쪽에서 미리 손을 좀 봤다고 하네.”
“뭐? 손봤다니, 그게 뭔 소리야?”
“나도 정확힌 모르네. 듣기론 자네가 엑스 어스의 기획자로 스카우트되어 현재 미국 지부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
“호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걸 보면 우주중앙청인가, 유기농 유자청인가 하는 작자들의 입김이 세긴 센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이만 나가 보게.”
배불뚝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내 등을 냉큼 떠밀었다.
문밖으로 떠밀리는데, 문득 아까 멱살을 잡느라 아무데나 던져 둔 기획안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잠깐만, 깜빡 잊고 있었어. 저거 결재해.”
“음? 저게 뭔가?”
“이번 하반기 패치 기획안.”
“벌써 나왔나? 흐음, 알겠네. 내 한번 읽어보지.”
“어, 돌려줄 땐 직접 오지 말고. 얼굴 보기 싫으니까.”
배불뚝이의 방에서 나와 다시 작업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엑스 어스의 기획자라.’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미국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초거대 게임 회사에 스카우트된 거라 이거지? 한국에서는 이미 게임 쪽 다 씹어 먹은 체월의 기획자로?’
아마 더 이상 누나들이 날 예전처럼 막 대하진 못할 것이다.
그 후 휴가를 가기까지,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나를 더욱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러냐고 깰룩이를 붙잡고 물으니, 일하는 중에도 계속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는 게 너무 무섭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휴가 전날 저녁.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개인 작업실에 돌아오니, 어떤 낯선 사람이 드라비라와 함께 와 있었다.
“오, 왔군. 사긱 군, 인사하게. 우주중앙청에서 방문하신 시공의 사자시네.”
배불뚝이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시공의 사자라는 사람은 푸른 머리카락 위로 고글을 쓰고 있고, 오른쪽 팔에는 특이한 모양의 팔찌를 찬 남자였다. 중세 기사들이 입을 법한 갑옷에 고급스러운 흰 망토를 둘렀는데, 뒤집어쓸 수 있는 모자도 달려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후드였다.
“바힌 왕국의 클린핀이라고 합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아주 기품 있는 자세로 인사를 했다.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지구의… 나석익이라고 합니다.”
이 이상한 인사법은 대체 뭐냐고.
나는 괜히 머쓱해져 고개만 까딱 숙였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으시다구요.”
“네?”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묻자, 클린핀은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또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네. 하여간 이 주둥아리가 문제라니깐. 하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
이 작자도 정상은 아니구만.
“저 덩치 큰 놈을 지구에서 가져오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무거워도 좀 무거워야죠. 허리가 휘는 줄 알았어요.”
클린핀이 작업실 안쪽에 있는 내 침실을 가리켰다.
슬쩍 문 너머를 바라보니, 침대 옆에 놓인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SF 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알 모양의 캡슐.
“저거…….”
“껄껄,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네. 접속기지. 그것도 무려 다음 업데이트 버전이라더군. 듣기론 자네가 지구에서 음식물을 먹으면 그 영양소가 그대로 오더코르트에 있는 원래 몸에도 전달된다고 하네.”
심장이 터져 나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구 쪽에 건너가 있어도, 오더코르트에 남아 있는 본래 몸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닌가!
“무, 물론 그쪽에는 마나로 만든 가상의 자네가 생기는 것일세. 영양소가 전달된다고는 해도 아예 이리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네. 오더코르트가 멸망하면 자네도 죽는 걸세. 알겠는가?”
배불뚝이가 불안한 얼굴로 몇 번이나 얘기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그때, 클린핀이 차고 있던 팔찌를 슥 쳐다보더니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익 씨.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가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예?”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클린핀은 내 똥 씹은 표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오른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파지직!
그러자 갑자기 그의 앞에 포탈처럼 생긴 둥근 문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생겨났다.
“너도 수고해, 드라비라.”
“예! 들어가십시오!”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배불뚝이를 뒤로하고, 클린핀은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
그러고는 내가 미처 인사를 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휙 사라져 버렸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곧바로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시가 아깝다. 시공의 사자가 정신 빠진 놈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이러는 동안에도 지구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을 텐데.
“오오! 드디어 도착했군요!”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퍼롱이와 깰룩이가 나를 발견하고 재빨리 뛰어왔다.
“지금 바로 떠나시는 겁니까, 깰룩?”
“그래, 나 첫 휴가 간다.”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으니 푹 쉬다가 오십시오, 깰룩.”
“조심히 다녀오세요!”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둘 다 말썽 일으키지 말고, 일 잘하고 있어라. 사고 치면 갔다 와서 털 다 뽑아버릴 거야.”
“…….”
“그럼 다녀오게나, 사긱 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면 강제 로그아웃되게끔 설정돼 있으니 행여나 영영 지구에 있을 생각은 말게나.”
“치사한 촉수 새끼.”
물론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떠나기도 전에 기분을 잡쳐 놓지 말란 말이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데.
나는 얼른 접속기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헬멧을 쓰고 문을 닫았다.
‘후후후, 뭐 어때. 휴가라고, 휴가! 이게 얼마 만의 집이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전원을 켜자, 곧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방이 캄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구에 접속한 나는…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정말 이상한 꿈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은 그렇게 하늘로 날아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