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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CHAPTER 1. 도망자들 (5)
“제대로 데려온 것 맞나.”
기사가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갑옷에 새겨진, 끝이 오른쪽으로 뻗은 날개 문양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산적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비굴해 보일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틀림없습니다. 헤헤.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든 외모 아닙니까.”
확실히 어디에 둔다 해도 홀로 눈에 띄는 외모였다. 특히 별빛을 녹여 만든 것처럼 빛나는 백금발은,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헬레나 조르쥬가 집착할 만했다.
저 애를 찾아올 때까지 곡기마저 끊겠다 발악하던 주인의 딸을 떠올린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평생 충성을 약속한 가문의 유일무이한 아가씨가 제멋대로인 성미로 자란 것엔 존경하는 주인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
‘어렵게 얻으신 따님이니 어여쁠 만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린 소년 한 명을 잡겠다 벌여 놓은 짓을 보면서 오냐오냐 받아 주는 태도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공작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사랑하는 딸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리라.
조르쥬 공작은 백전노장의 위대한 기사지만,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사내였다. 게다가 공작 부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 하나 남은 가족을 더욱 아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것이 주인의 흠이라면 자신이 그 흠이 보이지 않도록 잘 메우면 된다.
그게 죄 없는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패트릭은 사지가 단단히 묶인 채 마차의 벽에 기대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놓쳤다고 했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는데, 확실히 사람 찾는 일에는 전문 용병들이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아이가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한 용병들은 조르쥬 공작이 찾는 수배범이 있다며 마을에 알렸고 마을 사람들은 당장 협조를 약속했다. 황실의 권력자가 마을에 끼칠 해가 두려웠으리라.
“눈은 왜 가려 둔 거지.”
눈까지 가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차피 저 녀석은 자신을 쫓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패트릭의 물음에 괜스레 찔끔한 용병이 서둘러 말했다.
“아, 저건 꼬마가 부탁한 겁니다.”
“스스로?”
용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러면 큰일이 생길 거라면서 어찌나 사납게 재촉해 대는지.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 줬습니다. 약이 너무 강했는지 상태도 영 별로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확실히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불규칙한 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아픈 아이를 납치한 모양새가 된 패트릭은 쯧 혀를 찼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개인적인 도덕심과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저울질한다면 명백하게 후자로 무게가 기울어졌다. 패트릭은 용병들에게 약속한 보수를 건네고, 기사들에게 출발을 명령했다.
마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점점 더 심해지는 한기에 온몸을 떨었다. 너무 뜨거운 불 속에 손을 넣으면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한기였다. 게다가…… 어딘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비슷한 느낌을 겪었던 것 같은.
“도……대체 뭘 먹인 거야.”
빵에 들어 있던 약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나는 이를 악물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제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실뱀이 온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위험이 닥쳤다는 징조였다.
마나는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미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때였다.
‘사랑해.’
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들은 끊이지 않았다.
‘넌 내 거야.’
그는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목소리들을 떨쳐 낼 수 있는 것처럼.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전부 너 때문이야. 마나.’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도 목소리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가 아플 만큼 쩡쩡 울렸다.
“아니야.”
마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가 다시 요란하게 넘어졌다. 두 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던 탓이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지만 마나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바닥을 기는 데 전념했다.
“아냐. 싫어…….”
‘그 일’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절대로.
마나는 구르듯이 마차 문에 몸을 부딪쳤다.
쾅!
문은 단단하게 닫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마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몸을 내던졌다.
쾅!
쾅!
쾅!
마침내 문이 열렸다.
소란에 문을 연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 얌전히 있지 않으면…….”
“너네…… 다 꺼져.”
마나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뭐?”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여기서 전부 꺼지라고.”
패트릭은 마나를 응시했다. 열에 붉게 들뜬 피부와 연신 떨리는 몸이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잠이라도 자든지 해라. 성에 도착하면 의사를 불러 줄 테니.”
“지금…… 당장…… 꺼지라고!”
마나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쉬어라.”
패트릭이 마차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파바바박!
느닷없이 쏟아진 화살비에 곳곳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몇 초 먼저 살기를 감지한 패트릭은 재빨리 마차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아 살을 막았지만, 바깥의 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끼이익.
마차가 불안정하게 멈춰 섰다. 곧 마차 밖을 에워싸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패트릭은 반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마나를 흘깃 바라보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패트릭 경, 무사하십니까!”
패트릭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들이 다가왔다. 패트릭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방의 산적인 모양입니다. 말과 마부가 전부 죽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패트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산적이 아니다.”
“네?”
그때였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인형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남아 있는 기사들의 배는 되어 보이는 수에 기사들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경계 태세를 취하며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머리 나쁜 도적놈이라도 이 문양이 뭘 뜻하는지는 안다. 제국 제일가는 공작가의 마차를 고작 산적 따위가 습격해? 그럴 리가.”
마차를 에워싼 복면인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단 하나 얼굴을 감싼 복면에 그려진 문양만은 똑같았다.
가지와 뿌리의 모양과 길이가 똑같은 백색의 나무.
패트릭이 나직하게 선언했다.
“반역자다.”
“엑시오타……!”
기사들이 반역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복면인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실력은 기사들이 한 수 위였으나 수적으로 현저히 불리했다. 어린아이 한 명 데려오는 일에 기사 다섯이라면 차고 넘쳤지만, 무장한 반역자 무리를 상대하는 데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패트릭은 제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검을 쳐 내며 생각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엑시오타는 목적 없이 움직이지 않아.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우리를 모두 죽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겨우…….’
그제야 패트릭은 자신이 마차와 멀리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마차 가까이에는 복면인들뿐이었다. 패트릭은 서둘러 마차로 걸음을 옮겼지만 그때마다 날아오는 검에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반역자 놈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패트릭이 이를 악물며 마차를 노려보았다.
한편, 마차 앞에 도착한 복면인들 중 눈가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 말했다.
“모두 준비한 천을 눈에 써라.”
복면인들은 모두 색이 입혀진 투명한 천으로 눈을 감쌌다. 남자 또한 같은 천으로 눈을 감싼 뒤 마차의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동시에 코를 막았다.
지독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복숭아 무더기가 한 번에 썩은 것 같은 냄새였다. 아니, 냄새라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린 짐승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듯 마구잡이로 이성을 갉아먹었다. 그 흉악한 식사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코를 틀어막아도 온몸의 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끔찍한 냄새에 남자가 넋을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말은…… 없으셨는데…….”
다른 이들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꿈속에 있는 듯 머리가 몽롱하고 눈앞이 흐려졌다. 생각이나 이성 따위가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텅 빈 공허감만이 느껴졌다.
그 빈자리를 비집고 차지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기름을 얹은 짚더미에 성냥을 던진 것처럼 순식간에 타오르는 욕망.
‘갖고 싶다.’
그들은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았다.
형편없는 모양새로 쓰러진 소년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숫제 애원하는 듯 아이가 말했다.
“도……가.”
복면인들이 휘청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며 말했다.
“도망가!”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열려 있는 마차 문을 통해 순식간에 냄새가 퍼져 나갔다.
마차 바깥에서 일던 요란한 소요가 일순 멈췄다. 서로 검을 맞대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직전의 전투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그들은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내 거야…….”
그가 마차로 향하려는 순간 검이 가슴을 꿰뚫었다. 제가 찌른 이가 방금까지만 해도 같은 동료였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복면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 거야.”
금방의 침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켜!”
“안 비키면 죽여 버릴 테다!”
그들은 서로를 밀치며 마차로 달려들었다. 가로막는 것은 누구든 베어 버렸다. 검으로 베고, 활을 쏘고, 무기를 잃으면 이빨과 손톱 등을 이용해서 방해자들을 처단했다.
“저건 내 거야!”
그곳의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외쳤다. 한 걸음이라도 마차와 가까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단 한 사람, 평화만 빼고.
CHAPTER 1. 도망자들 (5)
“제대로 데려온 것 맞나.”
기사가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갑옷에 새겨진, 끝이 오른쪽으로 뻗은 날개 문양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산적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비굴해 보일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틀림없습니다. 헤헤.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든 외모 아닙니까.”
확실히 어디에 둔다 해도 홀로 눈에 띄는 외모였다. 특히 별빛을 녹여 만든 것처럼 빛나는 백금발은,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헬레나 조르쥬가 집착할 만했다.
저 애를 찾아올 때까지 곡기마저 끊겠다 발악하던 주인의 딸을 떠올린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평생 충성을 약속한 가문의 유일무이한 아가씨가 제멋대로인 성미로 자란 것엔 존경하는 주인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
‘어렵게 얻으신 따님이니 어여쁠 만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린 소년 한 명을 잡겠다 벌여 놓은 짓을 보면서 오냐오냐 받아 주는 태도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공작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사랑하는 딸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리라.
조르쥬 공작은 백전노장의 위대한 기사지만,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사내였다. 게다가 공작 부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 하나 남은 가족을 더욱 아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것이 주인의 흠이라면 자신이 그 흠이 보이지 않도록 잘 메우면 된다.
그게 죄 없는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패트릭은 사지가 단단히 묶인 채 마차의 벽에 기대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놓쳤다고 했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는데, 확실히 사람 찾는 일에는 전문 용병들이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아이가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한 용병들은 조르쥬 공작이 찾는 수배범이 있다며 마을에 알렸고 마을 사람들은 당장 협조를 약속했다. 황실의 권력자가 마을에 끼칠 해가 두려웠으리라.
“눈은 왜 가려 둔 거지.”
눈까지 가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차피 저 녀석은 자신을 쫓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패트릭의 물음에 괜스레 찔끔한 용병이 서둘러 말했다.
“아, 저건 꼬마가 부탁한 겁니다.”
“스스로?”
용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러면 큰일이 생길 거라면서 어찌나 사납게 재촉해 대는지.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 줬습니다. 약이 너무 강했는지 상태도 영 별로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확실히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불규칙한 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아픈 아이를 납치한 모양새가 된 패트릭은 쯧 혀를 찼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개인적인 도덕심과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저울질한다면 명백하게 후자로 무게가 기울어졌다. 패트릭은 용병들에게 약속한 보수를 건네고, 기사들에게 출발을 명령했다.
마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점점 더 심해지는 한기에 온몸을 떨었다. 너무 뜨거운 불 속에 손을 넣으면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한기였다. 게다가…… 어딘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비슷한 느낌을 겪었던 것 같은.
“도……대체 뭘 먹인 거야.”
빵에 들어 있던 약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나는 이를 악물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제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실뱀이 온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위험이 닥쳤다는 징조였다.
마나는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미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때였다.
‘사랑해.’
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들은 끊이지 않았다.
‘넌 내 거야.’
그는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목소리들을 떨쳐 낼 수 있는 것처럼.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전부 너 때문이야. 마나.’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도 목소리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가 아플 만큼 쩡쩡 울렸다.
“아니야.”
마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가 다시 요란하게 넘어졌다. 두 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던 탓이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지만 마나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바닥을 기는 데 전념했다.
“아냐. 싫어…….”
‘그 일’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절대로.
마나는 구르듯이 마차 문에 몸을 부딪쳤다.
쾅!
문은 단단하게 닫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마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몸을 내던졌다.
쾅!
쾅!
쾅!
마침내 문이 열렸다.
소란에 문을 연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 얌전히 있지 않으면…….”
“너네…… 다 꺼져.”
마나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뭐?”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여기서 전부 꺼지라고.”
패트릭은 마나를 응시했다. 열에 붉게 들뜬 피부와 연신 떨리는 몸이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잠이라도 자든지 해라. 성에 도착하면 의사를 불러 줄 테니.”
“지금…… 당장…… 꺼지라고!”
마나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쉬어라.”
패트릭이 마차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파바바박!
느닷없이 쏟아진 화살비에 곳곳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몇 초 먼저 살기를 감지한 패트릭은 재빨리 마차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아 살을 막았지만, 바깥의 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끼이익.
마차가 불안정하게 멈춰 섰다. 곧 마차 밖을 에워싸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패트릭은 반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마나를 흘깃 바라보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패트릭 경, 무사하십니까!”
패트릭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들이 다가왔다. 패트릭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방의 산적인 모양입니다. 말과 마부가 전부 죽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패트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산적이 아니다.”
“네?”
그때였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인형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남아 있는 기사들의 배는 되어 보이는 수에 기사들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경계 태세를 취하며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머리 나쁜 도적놈이라도 이 문양이 뭘 뜻하는지는 안다. 제국 제일가는 공작가의 마차를 고작 산적 따위가 습격해? 그럴 리가.”
마차를 에워싼 복면인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단 하나 얼굴을 감싼 복면에 그려진 문양만은 똑같았다.
가지와 뿌리의 모양과 길이가 똑같은 백색의 나무.
패트릭이 나직하게 선언했다.
“반역자다.”
“엑시오타……!”
기사들이 반역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복면인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실력은 기사들이 한 수 위였으나 수적으로 현저히 불리했다. 어린아이 한 명 데려오는 일에 기사 다섯이라면 차고 넘쳤지만, 무장한 반역자 무리를 상대하는 데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패트릭은 제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검을 쳐 내며 생각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엑시오타는 목적 없이 움직이지 않아.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우리를 모두 죽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겨우…….’
그제야 패트릭은 자신이 마차와 멀리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마차 가까이에는 복면인들뿐이었다. 패트릭은 서둘러 마차로 걸음을 옮겼지만 그때마다 날아오는 검에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반역자 놈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패트릭이 이를 악물며 마차를 노려보았다.
한편, 마차 앞에 도착한 복면인들 중 눈가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 말했다.
“모두 준비한 천을 눈에 써라.”
복면인들은 모두 색이 입혀진 투명한 천으로 눈을 감쌌다. 남자 또한 같은 천으로 눈을 감싼 뒤 마차의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동시에 코를 막았다.
지독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복숭아 무더기가 한 번에 썩은 것 같은 냄새였다. 아니, 냄새라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린 짐승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듯 마구잡이로 이성을 갉아먹었다. 그 흉악한 식사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코를 틀어막아도 온몸의 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끔찍한 냄새에 남자가 넋을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말은…… 없으셨는데…….”
다른 이들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꿈속에 있는 듯 머리가 몽롱하고 눈앞이 흐려졌다. 생각이나 이성 따위가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텅 빈 공허감만이 느껴졌다.
그 빈자리를 비집고 차지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기름을 얹은 짚더미에 성냥을 던진 것처럼 순식간에 타오르는 욕망.
‘갖고 싶다.’
그들은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았다.
형편없는 모양새로 쓰러진 소년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숫제 애원하는 듯 아이가 말했다.
“도……가.”
복면인들이 휘청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며 말했다.
“도망가!”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열려 있는 마차 문을 통해 순식간에 냄새가 퍼져 나갔다.
마차 바깥에서 일던 요란한 소요가 일순 멈췄다. 서로 검을 맞대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직전의 전투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그들은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내 거야…….”
그가 마차로 향하려는 순간 검이 가슴을 꿰뚫었다. 제가 찌른 이가 방금까지만 해도 같은 동료였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복면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 거야.”
금방의 침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켜!”
“안 비키면 죽여 버릴 테다!”
그들은 서로를 밀치며 마차로 달려들었다. 가로막는 것은 누구든 베어 버렸다. 검으로 베고, 활을 쏘고, 무기를 잃으면 이빨과 손톱 등을 이용해서 방해자들을 처단했다.
“저건 내 거야!”
그곳의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외쳤다. 한 걸음이라도 마차와 가까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단 한 사람, 평화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