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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CHAPTER 1. 도망자들 (4)
랄프꽃차의 좋은 점은 꿈조차 없는 깊은 잠을 자게 해 준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머리가 상쾌했다. 얼마나 자지 못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랄프는 한 달에 한 번 꽃을 피우니까 아마 그 정도겠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잠을 자지 못하는 건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어제 막 꽃을 피운 랄프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죽고 싶었을 거다.
‘죽을 수는 없었겠지만.’
평화는 기지개를 폈다.
반나절 정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창문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집은 아주 조용했다. 흔한 초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며 시계를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침묵에 잠겨 있던 평화는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없어진 기분인데.’
평화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멎었다.
찻잔이 두 개다.
“이런.”
그러고 보니 어제 데려온 아이가 있었다. 본인은 아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머리카락이 반짝반짝해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평화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지만 떠난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큰일 났네.”
평화는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나가 버린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평화에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평화는 몸도 돌리지 않고 그림자의 주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깨갱!”
그림자는 엄청난 속도로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몸체에 깔린 나무들이 큰 소리를 내며 우르르 부러졌다.
“아.”
평화가 침음을 내뱉었다.
“또 나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평화의 곁으로 거대한 검은 짐승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늑대를 닮았지만 검붉은 눈은 세 쌍이었고, 미간에는 두꺼운 뿔이 길쭉하게 솟아 있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꼬리가 맹렬히 흔들릴 때마다 애꿎은 근처의 나무들이 짚더미마냥 쓰러졌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평화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뽀삐. 앉아.”
착.
눈치를 살피던 뽀삐가 재빨리 엉덩이를 땅에 붙였다. 오랜 훈련의 성과를 보자 언짢았던 마음이 풀린 평화가 짐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장난 치지 말라니까. 이러다 주변에 나무라고는 하나도 안 남겠어.”
애교를 피우듯 가르릉 목을 울리는 뽀삐를 보며 평화가 피식 웃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귀여워서 혼을 낼 수가 없다.
뽀삐를 만난 건 맬킨 산맥에 정착한 첫날이었다. 제 영역에 침범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짜고짜 달려들기에 적당히 때려 주고 보내 줬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포기를 모르고 다시 달려들었다. 덕분에 평화는 맹획을 놓아주는 제갈량의 심정을 의도치 않게 체험하게 됐다.
‘마계 문이 열렸을 때 돌아가지 못한 건 멍청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귀엽게 봐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번 날뛸 때마다 주변을 작살내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뽀삐가 달려들면서 집 주변에 재배하던 약초가 전부 망가졌던 것이다.
다른 약초야 그렇다 쳐도 막 꽃봉오리가 핀 랄프가 뿌리 뽑혀 바닥을 나뒹굴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거 꽃 피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자라는 곳도 극소수, 아는 사람도 극소수, 무엇보다 끔찍할 만큼 예민한 식물이었다. 평화의 어중간한 재배 실력으로는 꽃을 보기 어려웠다. 꽃봉오리를 맺은 건 순전히 운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랄프가 거대한 발에 뭉개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심정이란……. 평화가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분명 일이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평화는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했다. 마물을 훈련시키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지만, 인내라면 평화의 주 종목이었다.
게다가 말썽쟁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운다고 생각하니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으니까. 어릴 때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았고, 머리가 크고 나서는 스스로 포기했었다.
‘어쩌면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
다른 생명을 책임져도 끄떡없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처지가 지겹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됐다. 특히 그녀처럼,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라면 더더욱.
‘호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깨진 유리 조각처럼 웃던 남자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평화는 부러 뽀삐에게 집중했다. 이미 몸뚱이가 부러진 나무 하나를 번쩍 들어 던지면 뽀삐가 신나게 뛰어가 물어 왔다. 공중으로 던지면 제비돌기를 하며 멋지게 잡기도 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척척 잘하네. 우리 뽀삐는 천재인가 봐.”
평화가 헤벌쭉한 얼굴로 뽀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은 지옥불을 담은 악마의 눈동자라며 공포에 질릴 검붉은 눈도 평화에게는 귀엽게만 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동물을 기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그런 자부심으로 뿌듯해진 평화는 있는 힘껏 나무를 던졌다. 나무는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한없이 날아갔다.
정신이 든 건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차!’
평화가 혀를 깨문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뽀삐와 놀아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 그 애가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동안 너무 해이해졌다. 스스로를 탓하며 입에 문 나무를 내려놓는 뽀삐에게 물었다.
“뽀삐야. 혹시 이 정도 키에 머리가 반짝반짝한 사람 봤어?”
평화의 말을 들은 뽀삐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마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맬킨 산맥은 녀석의 영역이니 모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평화는 뽀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쓰러진 나무들 중 상태가 괜찮은 것들을 골라 다시 심기 시작했다. 저보다 수십 배는 큰 나무를 들어 올리는데도 평화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렇게 대충 주변이 정리되어 갈 쯤 뽀삐가 돌아왔다. 발랄하게 뛰어온 뽀삐의 입에는 웬 헝겊 조각이 들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마나에게 감아 줬던 붕대였다. 피로 너덜너덜해진.
평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뽀삐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굴렸다. 평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였어?”
뽀삐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죽였다면 붕대가 아니라 시체를 물고 돌아왔겠지.’
끔찍한 상상을 해 버린 평화가 얼른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아무래도 붕대에서 평화의 냄새가 나니, 마나가 그녀의 물건을 훔쳐 갔다 생각하고 냉큼 되찾아온 모양이었다.
도둑 잡는 개마냥 맹렬하게 달려들었을 뽀삐를 상상하니 마나가 무사할지 걱정스러웠다. 어찌 잘 도망간 모양이지만, 이 정도로 무식한 덩치가 덤볐으면 다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다.
‘당장 죽지는 않았어도 죽어 가고 있을지도.’
너덜너덜한 붕대 상태를 보니 더 걱정이 됐다.
“그러니까 나가면 안 된다고 한 건데.”
겉옷을 가져와 걸치며 평화가 한숨을 쉬었다. 마물이 파수견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놀랄까 봐 말하지 않았던 건데 일이 꼬였다. 중간에 잠이 들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부분은 순전히 제 책임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대로 두는 건 찝찝하기도 하고.”
그녀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들었다면 ‘또 스스로 번거로운 일을 자초하는구나.’ 하며 혀를 찰 일이었지만, 역시 평화의 성미로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평화는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탔다.
✡ ✡ ✡
한편, 마나는 엘칸델이라는 이름의 마을에 도착했다. 산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작은 마을이었다. 적은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낯선 이의 등장에 경계와 흥미의 눈길이 따갑게 쏟아졌다.
마나는 평화의 집에서 가져온 로브의 후드를 좀 더 깊숙이 눌러썼다. 마물에게 공격당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찢어진 로브는 쓰레기통에서 꺼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얼굴을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도대체 그 마물은 왜 이 옷을 노렸던 거지.’
제 상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로브를 벗겨 가려는 듯 여섯 개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마물의 모습을 떠올린 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물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요정 특유의 빠른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과다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걸을 때마다 다 낫지 않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여자는 괜찮을까. 미친 데다가 좀 싸한 구석이 있었어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 한 몸 지키기도 버거운 주제에 도대체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 여자도 마나의 마력에 홀려 버렸다. 순전히 부주의했던 자신 탓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다. 어떤 인간인들 제 욕망을 그렇게 겉으로 까발리고 싶겠는가. 마나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냄새 나는 진흙탕 속에 처박은 것과 다름없었다.
절뚝이던 걸음이 느려졌다.
‘이런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신발도 벗겨져 맨발이었다. 한쪽 발에는 반쯤 풀린 붕대를 감았고 마물에게 물어뜯긴 다른 쪽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그 상태로 망연히 걷고 있으니 마나가 낯선 이가 아니었더라도 다들 한 번쯤 시선을 줬을 게 분명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마나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마을에 추적자의 발길이 닿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서둘러 안전한 곳을 찾아가야 할 텐데, 그런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갇혀 있거나 도망치는 일로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딱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왜 그곳을 떠올렸는지 마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제 마력에 홀린 여자의 집인데. 오직 그곳만 세상에서 도려내어진 듯 기이하게 흐르던 평온 때문일까. 아니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옳은 일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인간은 도덕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길고 험난한 여정에서 도덕은 자신이 가진 것들 중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돈도 권력도 없으면 살기 힘들지만, 도덕 정도는 없어도 문제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멋모르고 순진하다며 비웃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생은 사실 누구보다 치열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지고 가지 않아도 될 짐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가는 자의 생. 그 여자는 분명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을 망쳤다. 겨우 하잘 것 없는 눈 맞춤 하나로.
어쩌면 마나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또한 망쳤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내민 사람들을 파렴치한 마력으로 홀려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미치광이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부정해도 사실은…….
‘네가 우릴 이렇게 만들었어.’
속이 울렁거려서 마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냐. 내 탓이 아니야.”
그때 마나의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꼬마야. 괜찮니?”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마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 낡은 여성용 가죽 신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계속 말을 걸어 왔다.
“길을 잃은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
“어머. 얘야. 아줌마 나쁜 사람 아니란다. 무서워하지 마렴.”
다정한 목소리에도 마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났다. 곧 무언가가 그의 발밑에 놓였다. 마나는 곁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종이 봉지에 든 빵과 동화 몇 개였다.
여자의 신발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마나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후다닥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던 마나는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서서야 멈춰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뛰어오느라 반쯤 뭉개진 빵에서는 여전히 먹음직한 냄새가 났다.
저도 모르게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그 빌어먹을 새장에서 탈출한 뒤 뭔가를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먹으면 안 돼. 뭐가 들었는지 모르잖아.”
마나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빵 냄새를 맡은 뒤부터 미친 듯이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입 정도는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평범하고 다정한 목소리였고, 무엇보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정말로 한 입 정도는.
마나는 눈을 꾹 감고 빵을 깨물었다. 빵은 아주 부드러웠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나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을 보았다.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공작이……, 용병이……, 그런 단어들 사이로 유일하게 익숙한, 평범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봐. 이 방법이 제일 안전하다고 했잖아.”
아, 정말이지…….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다정? 평범? 모두 마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였다.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제 어리석은 희망이 결국은 자신을 망치고 만 것인데.
마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울 수는 없었으므로.
CHAPTER 1. 도망자들 (4)
랄프꽃차의 좋은 점은 꿈조차 없는 깊은 잠을 자게 해 준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머리가 상쾌했다. 얼마나 자지 못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랄프는 한 달에 한 번 꽃을 피우니까 아마 그 정도겠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잠을 자지 못하는 건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어제 막 꽃을 피운 랄프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죽고 싶었을 거다.
‘죽을 수는 없었겠지만.’
평화는 기지개를 폈다.
반나절 정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창문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집은 아주 조용했다. 흔한 초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며 시계를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침묵에 잠겨 있던 평화는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없어진 기분인데.’
평화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멎었다.
찻잔이 두 개다.
“이런.”
그러고 보니 어제 데려온 아이가 있었다. 본인은 아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머리카락이 반짝반짝해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평화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지만 떠난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큰일 났네.”
평화는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나가 버린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평화에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평화는 몸도 돌리지 않고 그림자의 주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깨갱!”
그림자는 엄청난 속도로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몸체에 깔린 나무들이 큰 소리를 내며 우르르 부러졌다.
“아.”
평화가 침음을 내뱉었다.
“또 나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평화의 곁으로 거대한 검은 짐승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늑대를 닮았지만 검붉은 눈은 세 쌍이었고, 미간에는 두꺼운 뿔이 길쭉하게 솟아 있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꼬리가 맹렬히 흔들릴 때마다 애꿎은 근처의 나무들이 짚더미마냥 쓰러졌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평화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뽀삐. 앉아.”
착.
눈치를 살피던 뽀삐가 재빨리 엉덩이를 땅에 붙였다. 오랜 훈련의 성과를 보자 언짢았던 마음이 풀린 평화가 짐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장난 치지 말라니까. 이러다 주변에 나무라고는 하나도 안 남겠어.”
애교를 피우듯 가르릉 목을 울리는 뽀삐를 보며 평화가 피식 웃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귀여워서 혼을 낼 수가 없다.
뽀삐를 만난 건 맬킨 산맥에 정착한 첫날이었다. 제 영역에 침범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짜고짜 달려들기에 적당히 때려 주고 보내 줬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포기를 모르고 다시 달려들었다. 덕분에 평화는 맹획을 놓아주는 제갈량의 심정을 의도치 않게 체험하게 됐다.
‘마계 문이 열렸을 때 돌아가지 못한 건 멍청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귀엽게 봐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번 날뛸 때마다 주변을 작살내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뽀삐가 달려들면서 집 주변에 재배하던 약초가 전부 망가졌던 것이다.
다른 약초야 그렇다 쳐도 막 꽃봉오리가 핀 랄프가 뿌리 뽑혀 바닥을 나뒹굴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거 꽃 피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자라는 곳도 극소수, 아는 사람도 극소수, 무엇보다 끔찍할 만큼 예민한 식물이었다. 평화의 어중간한 재배 실력으로는 꽃을 보기 어려웠다. 꽃봉오리를 맺은 건 순전히 운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랄프가 거대한 발에 뭉개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심정이란……. 평화가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분명 일이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평화는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했다. 마물을 훈련시키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지만, 인내라면 평화의 주 종목이었다.
게다가 말썽쟁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운다고 생각하니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으니까. 어릴 때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았고, 머리가 크고 나서는 스스로 포기했었다.
‘어쩌면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
다른 생명을 책임져도 끄떡없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처지가 지겹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됐다. 특히 그녀처럼,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라면 더더욱.
‘호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깨진 유리 조각처럼 웃던 남자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평화는 부러 뽀삐에게 집중했다. 이미 몸뚱이가 부러진 나무 하나를 번쩍 들어 던지면 뽀삐가 신나게 뛰어가 물어 왔다. 공중으로 던지면 제비돌기를 하며 멋지게 잡기도 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척척 잘하네. 우리 뽀삐는 천재인가 봐.”
평화가 헤벌쭉한 얼굴로 뽀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들은 지옥불을 담은 악마의 눈동자라며 공포에 질릴 검붉은 눈도 평화에게는 귀엽게만 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동물을 기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그런 자부심으로 뿌듯해진 평화는 있는 힘껏 나무를 던졌다. 나무는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한없이 날아갔다.
정신이 든 건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차!’
평화가 혀를 깨문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뽀삐와 놀아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 그 애가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동안 너무 해이해졌다. 스스로를 탓하며 입에 문 나무를 내려놓는 뽀삐에게 물었다.
“뽀삐야. 혹시 이 정도 키에 머리가 반짝반짝한 사람 봤어?”
평화의 말을 들은 뽀삐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마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맬킨 산맥은 녀석의 영역이니 모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평화는 뽀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쓰러진 나무들 중 상태가 괜찮은 것들을 골라 다시 심기 시작했다. 저보다 수십 배는 큰 나무를 들어 올리는데도 평화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렇게 대충 주변이 정리되어 갈 쯤 뽀삐가 돌아왔다. 발랄하게 뛰어온 뽀삐의 입에는 웬 헝겊 조각이 들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마나에게 감아 줬던 붕대였다. 피로 너덜너덜해진.
평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뽀삐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굴렸다. 평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였어?”
뽀삐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죽였다면 붕대가 아니라 시체를 물고 돌아왔겠지.’
끔찍한 상상을 해 버린 평화가 얼른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아무래도 붕대에서 평화의 냄새가 나니, 마나가 그녀의 물건을 훔쳐 갔다 생각하고 냉큼 되찾아온 모양이었다.
도둑 잡는 개마냥 맹렬하게 달려들었을 뽀삐를 상상하니 마나가 무사할지 걱정스러웠다. 어찌 잘 도망간 모양이지만, 이 정도로 무식한 덩치가 덤볐으면 다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다.
‘당장 죽지는 않았어도 죽어 가고 있을지도.’
너덜너덜한 붕대 상태를 보니 더 걱정이 됐다.
“그러니까 나가면 안 된다고 한 건데.”
겉옷을 가져와 걸치며 평화가 한숨을 쉬었다. 마물이 파수견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놀랄까 봐 말하지 않았던 건데 일이 꼬였다. 중간에 잠이 들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부분은 순전히 제 책임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대로 두는 건 찝찝하기도 하고.”
그녀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들었다면 ‘또 스스로 번거로운 일을 자초하는구나.’ 하며 혀를 찰 일이었지만, 역시 평화의 성미로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평화는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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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나는 엘칸델이라는 이름의 마을에 도착했다. 산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작은 마을이었다. 적은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낯선 이의 등장에 경계와 흥미의 눈길이 따갑게 쏟아졌다.
마나는 평화의 집에서 가져온 로브의 후드를 좀 더 깊숙이 눌러썼다. 마물에게 공격당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찢어진 로브는 쓰레기통에서 꺼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얼굴을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도대체 그 마물은 왜 이 옷을 노렸던 거지.’
제 상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로브를 벗겨 가려는 듯 여섯 개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마물의 모습을 떠올린 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물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요정 특유의 빠른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과다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걸을 때마다 다 낫지 않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여자는 괜찮을까. 미친 데다가 좀 싸한 구석이 있었어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 한 몸 지키기도 버거운 주제에 도대체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 여자도 마나의 마력에 홀려 버렸다. 순전히 부주의했던 자신 탓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다. 어떤 인간인들 제 욕망을 그렇게 겉으로 까발리고 싶겠는가. 마나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냄새 나는 진흙탕 속에 처박은 것과 다름없었다.
절뚝이던 걸음이 느려졌다.
‘이런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신발도 벗겨져 맨발이었다. 한쪽 발에는 반쯤 풀린 붕대를 감았고 마물에게 물어뜯긴 다른 쪽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그 상태로 망연히 걷고 있으니 마나가 낯선 이가 아니었더라도 다들 한 번쯤 시선을 줬을 게 분명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마나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마을에 추적자의 발길이 닿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서둘러 안전한 곳을 찾아가야 할 텐데, 그런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갇혀 있거나 도망치는 일로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딱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왜 그곳을 떠올렸는지 마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제 마력에 홀린 여자의 집인데. 오직 그곳만 세상에서 도려내어진 듯 기이하게 흐르던 평온 때문일까. 아니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옳은 일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인간은 도덕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길고 험난한 여정에서 도덕은 자신이 가진 것들 중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돈도 권력도 없으면 살기 힘들지만, 도덕 정도는 없어도 문제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멋모르고 순진하다며 비웃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생은 사실 누구보다 치열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지고 가지 않아도 될 짐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가는 자의 생. 그 여자는 분명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을 망쳤다. 겨우 하잘 것 없는 눈 맞춤 하나로.
어쩌면 마나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또한 망쳤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내민 사람들을 파렴치한 마력으로 홀려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미치광이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부정해도 사실은…….
‘네가 우릴 이렇게 만들었어.’
속이 울렁거려서 마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냐. 내 탓이 아니야.”
그때 마나의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꼬마야. 괜찮니?”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마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 낡은 여성용 가죽 신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계속 말을 걸어 왔다.
“길을 잃은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
“어머. 얘야. 아줌마 나쁜 사람 아니란다. 무서워하지 마렴.”
다정한 목소리에도 마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났다. 곧 무언가가 그의 발밑에 놓였다. 마나는 곁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종이 봉지에 든 빵과 동화 몇 개였다.
여자의 신발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마나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후다닥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던 마나는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서서야 멈춰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뛰어오느라 반쯤 뭉개진 빵에서는 여전히 먹음직한 냄새가 났다.
저도 모르게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그 빌어먹을 새장에서 탈출한 뒤 뭔가를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먹으면 안 돼. 뭐가 들었는지 모르잖아.”
마나가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빵 냄새를 맡은 뒤부터 미친 듯이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입 정도는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평범하고 다정한 목소리였고, 무엇보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정말로 한 입 정도는.
마나는 눈을 꾹 감고 빵을 깨물었다. 빵은 아주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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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마나는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을 보았다.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공작이……, 용병이……, 그런 단어들 사이로 유일하게 익숙한, 평범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봐. 이 방법이 제일 안전하다고 했잖아.”
아, 정말이지…….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다정? 평범? 모두 마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였다.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제 어리석은 희망이 결국은 자신을 망치고 만 것인데.
마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울 수는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