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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CHAPTER 1. 도망자들 (3)
“그대의 충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나도 뭘 하나 준비해 봤소.”
“소신은 폐하의 곁 외에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지식한 그대야 그렇다 해도 조르쥬 영애 입장은 다르지 않겠는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 이야기가 나오자 공작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호수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애를 위해 드레스 몇 벌을 준비했소. 나야 여인의 옷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보기 나쁘지 않아. 우리 눈 높은 황실 재단사가 제 역작들이라 소개할 만하더군. 영애가 입어 준다면 재단사 대대의 영광이 되겠지.”
뜻밖의 선물에 공작은 퍽 감동한 얼굴이었다.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도 큰 영광일 것입니다. 폐하.”
“이왕 얘기를 꺼냈으니 지금 주는 게 좋겠지. 아, 연회는 계속 진행하도록 해. 공작에게 선물을 전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
그러나 불경하게도, 조르쥬 공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왕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호수스가 연회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 없는 이가 궁내에 단 한 명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공작에게 선물을 전해 주겠다는 말도 연회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곧장 자리를 뜨는 그를 애타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었으나 호수스는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지. 이래서 권력이 좋군.’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나며 호수스가 생각했다.
길고 고달픈 과정을 거쳐 겨우 얻어 낸 왕좌는 고작 그 정도의 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아니었다면 연회장에 끌려다닐 일도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죽었을 테니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사실 호수스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연회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불편할 뿐이다.
형이자 선왕인 발터무드가 워낙 방종한 자였다 보니 그와는 다르게 살겠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설원 요를림에서 죽은 눈쥐를 뜯어 먹던 게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한데, 겨우 몇 달 만에 비단옷과 기름진 고기가 익숙해졌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상하게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날들이 더 안온하며 행복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한참 말없이 복도를 걷던 호수스는 뒤늦게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조르쥬 공작을 의식했다. 난처한 심정이었으나 입을 여는 호수스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영애가 퍽 상심했다지. 귀히 여겼던 것이 새장 밖으로 도망갔다고.”
공작은 왕의 의중을 짚어 보려 고심했으나 별달리 건진 것은 없었다. 그저 한담을 나누고자 하시나. 그 정도의 깊이로 대답했다.
“아이가 어려 철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금방 잊겠지요.”
“몬테 백작과 낯까지 붉히며 데려왔다 들었는데 안타까운 일이군.”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공백이 문장 사이에 있었다. 호수스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새장 문을 좀 더 단단히 잠갔어야지.”
그 말은 평소 눈치가 부족하다는 평이 자자한 조르쥬 공작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공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피온 님은…….”
왕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런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겨우 이름 두 자에 흔들리는 왕이라니.
‘형님을 욕할 게 못 되는군.’
호수스는 공작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히 돌아섰다.
“부디 내 선물이 영애가 상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왕은 선물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공작은 그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차고 넘칩니다. 폐하.”
“그리고 피온은…….”
호수스는 마른 눈가를 쓸었다.
온갖 부귀영화도,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도 마다하고 떠난 자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쥐여 주어도 잡지 못할 여자.
그녀가 떠난 3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했다.
그러나 잊지 못했다.
결국은, 버리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나 쉽게 그를 버렸던 것과는 달리.
“꽤 긴 요양이었지.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군.”
그런 이를 사랑해서, 호수스는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다.
✡ ✡ ✡
시 피나하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설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하늘과 색색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난 들판을 보았다. 그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 바람에서 비에 젖은 잎사귀 냄새가 났다.
꿈이라는 사실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시 피나하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하니까. 요정계의 문은 영영 닫혀 버렸으므로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나는 눈을 떴다. 온갖 종류의 말린 잎 따위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방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꿈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이것 때문이었군.’
마나는 긴 한숨을 쉬며 등을 세웠다. 악몽이 아닌 꿈은 오랜만이었다. 딱히 좋은 꿈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오히려 이런 꿈이 더 악질적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니까.
‘그보다 정말 푹 자 버렸나 보네.’
제 마력에 홀린 여자의 품에서 잠이 들다니. 도대체 스스로가 어디까지 부주의할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갇혀 지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해도 최소한의 자기 보호 본능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나는 찡그린 미간을 손가락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어디 갔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나의 마력에 홀린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마나가 벗어나면 큰 불안증을 느꼈다. 그래서 보통 혼자 있을 때의 마나는 신체 어딘가가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구속구를 찾아 봐도 발견한 거라곤 손과 발에 감겨진 붕대 정도였다. 어찌나 말끔하게 묶어 놨는지 눈으로 보고서야 붕대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준이다.
‘이게 구속구는 아닐 테고.’
의구심을 뒤로한 채 마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마른 잎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는 아주 가볍게 돌아갔다. 그 사실에 마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게 얼마만이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나는 괜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굳이 힘들여 찾을 필요 없이, 여자는 소파에 앉아 약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이미 마나를 발견한 듯싶었다.
“일어났네요. 좀 더 자도 됐는데.”
예상과 다른 태연한 태도에 마나는 당황했다.
“난…….”
“잠깐 앉아 있어요. 차 좀 줄게요. 쓴 거 별로죠?”
“……아마도.”
얼떨결에 대답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탕을 좀 넣을게요. 세 스푼 정도면 되려나.”
거실에서 부엌이 바로 보이는 구조라서 마나는 여자의 행동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날갯죽지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동여매는 모습이나 찬장에서 설탕이 든 유리병을 꺼내는 모습, 주전자를 부드럽게 기울여 차를 따르는 모습 따위를.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보는 기분이 들어 마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빈 허공으로 돌렸다.
여자는 금방 김이 나는 찻잔을 건넸다.
“마셔요.”
“내가 왜? 뭐가 들었는지 알고.”
제가 위축됐다는 사실을 감추고자 마나가 부러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나다잎을 달인 거예요. 살을 빨리 아물게 하고 흉이 지지 않게 해 주죠. 좀 쓰긴 하지만 설탕을 넣었으니까 걱정 마요.”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열 살배기 꼬맹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쓴 게 싫다고 투정 부릴 나이는 옛적에 지났다.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받아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옛적에 알았고.’
호의적인 행동이 사실은 호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마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따뜻한 품을 가진 아주머니가 내민 사탕을 먹고 눈을 떴을 때 마나는 그 집 창고에 갇혀 있었다.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가 마나의 목에 목줄을 채웠고, 사랑을 속삭이던 소녀가 그를 새장에 가뒀다.
그러니 그에게 홀린 여자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세어 보라고 한다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마나는 건조하게 웃었다.
“네가 먼저 먹어.”
여자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역시 뭔가 탔나.’
긴장한 마나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여자는 찻숟가락을 찻잔에 담갔다. 적당히 붉은 입술이 찻숟가락을 빨았다. 마침내 여자가 마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하나도 안 써요.”
그리고 약간 인상을 썼다.
“오히려 다네요. 나는 단건 별로라서…….”
단걸 싫어해서 마나의 말에 당황한 듯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마나는 여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결국 찻잔을 받았다.
꿀꺽.
마나는 깨끗하게 비운 잔을 도로 건넸다. 여자는 처음으로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노려봐도 꿈쩍도 않더니…….’
참 이상한 곳에서 긴장한다고 생각하며, 마나는 혀에 남은 설탕 알갱이들을 녹였다.
달았다.
마나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그제야 안도한 듯 평소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마나는 제멋대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내 집이요.”
그걸 물은 게 아닐 텐데? 라는 듯한 마나의 시선에 여자가 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여긴 맬킨 산맥 부근이에요.”
“뭐?”
맬킨이라면 그가 추적자들에게 잡혔던 산이었다. 마나가 다급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왜 여기 있어? 그놈들 금방 추적해 올 거야. 사람 찾는 데 이골 난 놈들이라고.”
“괜찮아요. 이쪽은 지형이 험해서 사람이 오기 힘들거든요. 마물도 있고.”
“아니, 넌 대체 왜 그렇게 태평……. 잠깐, 뭐라고? 마물?”
“네. 꽤 귀여워요.”
태평한 소리를 하며 여자가 자기 몫의 차를 가지고 마나의 옆에 앉았다. 마나가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리든 말든 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나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며 말했다.
“마물이 나오는데 여기 산다는 거야? 너 머리가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바람 빠진 풍선마냥 푸스스 가볍게 웃었다.
“왜, 왜 웃는 거야?”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냐?’
남들과 다른 행동 패턴은 원래 미쳐 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제 마력에 홀려 미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원래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을 홀린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행동이 예상 밖인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여자는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누가 걱정해 준 건 오랜만이라서.”
‘미친 게 확실하군.’
정신 나갔냐는 말의 어디가 걱정이란 말인가. 마나는 여자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너 말이야. 이런 산골에 처박혀 있지 말고 바깥 생활도 좀 하는 게 어때? 그리고 대체 뭘 먹는 거야? 끔찍한 냄새가 나.”
마나는 여자가 들고 있는 찻잔을 노려보았다.
“아. 잠을 못 자서요. 정말 오랫동안……. 당신도 일어났으니 이제 실례 좀 할게요.”
“뭐?”
여자는 대답 대신 그 ‘끔찍한’ 냄새가 나는 차를 들이켰다. 지독한 맛일 게 분명한데도 표정은 덤덤하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켜보던 마나가 덜 익은 사과를 깨문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설탕을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늘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여자가 주저 없이 옆에 몸을 누였다. 바로 옆에 마나가 앉아 있는데도!
“……!”
여자의 머리카락이 맨팔에 닿는 감촉에 마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이 닿았던 부분이 새털이 스친 양 간지러웠다. 마나가 팔을 북북 긁는 사이 여자는 완전히 몸을 편하게 펴고 눈마저 감았다.
“나는 좀 잘 테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사용해요.”
……정말 자겠다고? 지금? 이렇게 갑자기?
혼란스러운 마나의 얼굴을 여자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뜨는 것도 귀찮다는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는 피, 아니, 평화예요. 주평화. 그냥 평화라고 부르면 돼요. 당신은 뭐라고 부르죠?”
아마 그녀가 그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녀가 잠든다면, 마나는 바로 이곳을 뛰쳐나갈 테니까.
그러나 마나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마나.”
“마나? 와……. 재밌네요. 그 이름으로 불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리고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죽은 것처럼 기척 하나 없이 잠들어 있는 여자를 마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솜 인형처럼 늘어진 여자는 놀랍도록 무해하게 보였지만 이 세상에 무해한 인간 따윈 없다. 적어도 마나에게는.
마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달아날 수 있을 때 달아나야지. 언제까지,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마나는 둥글게 깎아 놓은 나무 문고리를 꽉 잡았다. 문은 역시 쉽게 열렸다. 열린 틈으로 낮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마나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안 돼요.”
쾅.
거짓말처럼 문이 닫혔다. 마나는 굳은 얼굴로 뒤돌았다. 여전히 부드럽게 늘어진 여자가 눈을 반쯤 뜬 채 마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저렇게나 무방비한 자세인데 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철벽……보다는 좀 더 유동적이고 위협적인 생물체 같다. 예컨대 방금 배를 채운 맹수라든지.
‘등을 돌리면 죽고 말 거야.’
목 뒤가 서늘해졌다.
무표정하게 마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절대로…… 나가면…… 안 돼요.”
그리고 어느 순간 감긴 눈이 뜨이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탁 끊어지듯 긴장이 풀렸다. 마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도대체…… 뭐였지?’
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가면 어쩌나 싶을 만큼 거세게 뛰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찌나 긴장했었는지 어깨에 약간의 근육통까지 느껴졌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마나는 얼빠진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CHAPTER 1. 도망자들 (3)
“그대의 충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나도 뭘 하나 준비해 봤소.”
“소신은 폐하의 곁 외에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지식한 그대야 그렇다 해도 조르쥬 영애 입장은 다르지 않겠는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 이야기가 나오자 공작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호수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애를 위해 드레스 몇 벌을 준비했소. 나야 여인의 옷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보기 나쁘지 않아. 우리 눈 높은 황실 재단사가 제 역작들이라 소개할 만하더군. 영애가 입어 준다면 재단사 대대의 영광이 되겠지.”
뜻밖의 선물에 공작은 퍽 감동한 얼굴이었다.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도 큰 영광일 것입니다. 폐하.”
“이왕 얘기를 꺼냈으니 지금 주는 게 좋겠지. 아, 연회는 계속 진행하도록 해. 공작에게 선물을 전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
그러나 불경하게도, 조르쥬 공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왕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호수스가 연회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 없는 이가 궁내에 단 한 명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공작에게 선물을 전해 주겠다는 말도 연회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곧장 자리를 뜨는 그를 애타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었으나 호수스는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지. 이래서 권력이 좋군.’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나며 호수스가 생각했다.
길고 고달픈 과정을 거쳐 겨우 얻어 낸 왕좌는 고작 그 정도의 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아니었다면 연회장에 끌려다닐 일도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죽었을 테니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사실 호수스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연회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불편할 뿐이다.
형이자 선왕인 발터무드가 워낙 방종한 자였다 보니 그와는 다르게 살겠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설원 요를림에서 죽은 눈쥐를 뜯어 먹던 게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한데, 겨우 몇 달 만에 비단옷과 기름진 고기가 익숙해졌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상하게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날들이 더 안온하며 행복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한참 말없이 복도를 걷던 호수스는 뒤늦게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조르쥬 공작을 의식했다. 난처한 심정이었으나 입을 여는 호수스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영애가 퍽 상심했다지. 귀히 여겼던 것이 새장 밖으로 도망갔다고.”
공작은 왕의 의중을 짚어 보려 고심했으나 별달리 건진 것은 없었다. 그저 한담을 나누고자 하시나. 그 정도의 깊이로 대답했다.
“아이가 어려 철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금방 잊겠지요.”
“몬테 백작과 낯까지 붉히며 데려왔다 들었는데 안타까운 일이군.”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공백이 문장 사이에 있었다. 호수스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새장 문을 좀 더 단단히 잠갔어야지.”
그 말은 평소 눈치가 부족하다는 평이 자자한 조르쥬 공작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공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피온 님은…….”
왕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런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겨우 이름 두 자에 흔들리는 왕이라니.
‘형님을 욕할 게 못 되는군.’
호수스는 공작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히 돌아섰다.
“부디 내 선물이 영애가 상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왕은 선물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공작은 그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차고 넘칩니다. 폐하.”
“그리고 피온은…….”
호수스는 마른 눈가를 쓸었다.
온갖 부귀영화도,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도 마다하고 떠난 자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쥐여 주어도 잡지 못할 여자.
그녀가 떠난 3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했다.
그러나 잊지 못했다.
결국은, 버리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나 쉽게 그를 버렸던 것과는 달리.
“꽤 긴 요양이었지.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군.”
그런 이를 사랑해서, 호수스는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다.
✡ ✡ ✡
시 피나하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설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하늘과 색색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난 들판을 보았다. 그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 바람에서 비에 젖은 잎사귀 냄새가 났다.
꿈이라는 사실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시 피나하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하니까. 요정계의 문은 영영 닫혀 버렸으므로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나는 눈을 떴다. 온갖 종류의 말린 잎 따위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방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꿈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이것 때문이었군.’
마나는 긴 한숨을 쉬며 등을 세웠다. 악몽이 아닌 꿈은 오랜만이었다. 딱히 좋은 꿈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오히려 이런 꿈이 더 악질적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니까.
‘그보다 정말 푹 자 버렸나 보네.’
제 마력에 홀린 여자의 품에서 잠이 들다니. 도대체 스스로가 어디까지 부주의할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갇혀 지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해도 최소한의 자기 보호 본능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나는 찡그린 미간을 손가락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어디 갔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나의 마력에 홀린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마나가 벗어나면 큰 불안증을 느꼈다. 그래서 보통 혼자 있을 때의 마나는 신체 어딘가가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구속구를 찾아 봐도 발견한 거라곤 손과 발에 감겨진 붕대 정도였다. 어찌나 말끔하게 묶어 놨는지 눈으로 보고서야 붕대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준이다.
‘이게 구속구는 아닐 테고.’
의구심을 뒤로한 채 마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마른 잎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는 아주 가볍게 돌아갔다. 그 사실에 마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게 얼마만이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나는 괜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굳이 힘들여 찾을 필요 없이, 여자는 소파에 앉아 약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이미 마나를 발견한 듯싶었다.
“일어났네요. 좀 더 자도 됐는데.”
예상과 다른 태연한 태도에 마나는 당황했다.
“난…….”
“잠깐 앉아 있어요. 차 좀 줄게요. 쓴 거 별로죠?”
“……아마도.”
얼떨결에 대답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탕을 좀 넣을게요. 세 스푼 정도면 되려나.”
거실에서 부엌이 바로 보이는 구조라서 마나는 여자의 행동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날갯죽지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동여매는 모습이나 찬장에서 설탕이 든 유리병을 꺼내는 모습, 주전자를 부드럽게 기울여 차를 따르는 모습 따위를.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보는 기분이 들어 마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빈 허공으로 돌렸다.
여자는 금방 김이 나는 찻잔을 건넸다.
“마셔요.”
“내가 왜? 뭐가 들었는지 알고.”
제가 위축됐다는 사실을 감추고자 마나가 부러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나다잎을 달인 거예요. 살을 빨리 아물게 하고 흉이 지지 않게 해 주죠. 좀 쓰긴 하지만 설탕을 넣었으니까 걱정 마요.”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열 살배기 꼬맹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쓴 게 싫다고 투정 부릴 나이는 옛적에 지났다.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받아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옛적에 알았고.’
호의적인 행동이 사실은 호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마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따뜻한 품을 가진 아주머니가 내민 사탕을 먹고 눈을 떴을 때 마나는 그 집 창고에 갇혀 있었다.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가 마나의 목에 목줄을 채웠고, 사랑을 속삭이던 소녀가 그를 새장에 가뒀다.
그러니 그에게 홀린 여자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세어 보라고 한다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마나는 건조하게 웃었다.
“네가 먼저 먹어.”
여자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역시 뭔가 탔나.’
긴장한 마나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여자는 찻숟가락을 찻잔에 담갔다. 적당히 붉은 입술이 찻숟가락을 빨았다. 마침내 여자가 마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하나도 안 써요.”
그리고 약간 인상을 썼다.
“오히려 다네요. 나는 단건 별로라서…….”
단걸 싫어해서 마나의 말에 당황한 듯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마나는 여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결국 찻잔을 받았다.
꿀꺽.
마나는 깨끗하게 비운 잔을 도로 건넸다. 여자는 처음으로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노려봐도 꿈쩍도 않더니…….’
참 이상한 곳에서 긴장한다고 생각하며, 마나는 혀에 남은 설탕 알갱이들을 녹였다.
달았다.
마나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그제야 안도한 듯 평소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마나는 제멋대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내 집이요.”
그걸 물은 게 아닐 텐데? 라는 듯한 마나의 시선에 여자가 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여긴 맬킨 산맥 부근이에요.”
“뭐?”
맬킨이라면 그가 추적자들에게 잡혔던 산이었다. 마나가 다급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왜 여기 있어? 그놈들 금방 추적해 올 거야. 사람 찾는 데 이골 난 놈들이라고.”
“괜찮아요. 이쪽은 지형이 험해서 사람이 오기 힘들거든요. 마물도 있고.”
“아니, 넌 대체 왜 그렇게 태평……. 잠깐, 뭐라고? 마물?”
“네. 꽤 귀여워요.”
태평한 소리를 하며 여자가 자기 몫의 차를 가지고 마나의 옆에 앉았다. 마나가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리든 말든 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나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며 말했다.
“마물이 나오는데 여기 산다는 거야? 너 머리가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바람 빠진 풍선마냥 푸스스 가볍게 웃었다.
“왜, 왜 웃는 거야?”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냐?’
남들과 다른 행동 패턴은 원래 미쳐 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제 마력에 홀려 미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원래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을 홀린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행동이 예상 밖인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여자는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누가 걱정해 준 건 오랜만이라서.”
‘미친 게 확실하군.’
정신 나갔냐는 말의 어디가 걱정이란 말인가. 마나는 여자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너 말이야. 이런 산골에 처박혀 있지 말고 바깥 생활도 좀 하는 게 어때? 그리고 대체 뭘 먹는 거야? 끔찍한 냄새가 나.”
마나는 여자가 들고 있는 찻잔을 노려보았다.
“아. 잠을 못 자서요. 정말 오랫동안……. 당신도 일어났으니 이제 실례 좀 할게요.”
“뭐?”
여자는 대답 대신 그 ‘끔찍한’ 냄새가 나는 차를 들이켰다. 지독한 맛일 게 분명한데도 표정은 덤덤하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켜보던 마나가 덜 익은 사과를 깨문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설탕을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늘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여자가 주저 없이 옆에 몸을 누였다. 바로 옆에 마나가 앉아 있는데도!
“……!”
여자의 머리카락이 맨팔에 닿는 감촉에 마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이 닿았던 부분이 새털이 스친 양 간지러웠다. 마나가 팔을 북북 긁는 사이 여자는 완전히 몸을 편하게 펴고 눈마저 감았다.
“나는 좀 잘 테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사용해요.”
……정말 자겠다고? 지금? 이렇게 갑자기?
혼란스러운 마나의 얼굴을 여자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뜨는 것도 귀찮다는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는 피, 아니, 평화예요. 주평화. 그냥 평화라고 부르면 돼요. 당신은 뭐라고 부르죠?”
아마 그녀가 그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녀가 잠든다면, 마나는 바로 이곳을 뛰쳐나갈 테니까.
그러나 마나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마나.”
“마나? 와……. 재밌네요. 그 이름으로 불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리고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죽은 것처럼 기척 하나 없이 잠들어 있는 여자를 마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솜 인형처럼 늘어진 여자는 놀랍도록 무해하게 보였지만 이 세상에 무해한 인간 따윈 없다. 적어도 마나에게는.
마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달아날 수 있을 때 달아나야지. 언제까지,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마나는 둥글게 깎아 놓은 나무 문고리를 꽉 잡았다. 문은 역시 쉽게 열렸다. 열린 틈으로 낮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마나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안 돼요.”
쾅.
거짓말처럼 문이 닫혔다. 마나는 굳은 얼굴로 뒤돌았다. 여전히 부드럽게 늘어진 여자가 눈을 반쯤 뜬 채 마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저렇게나 무방비한 자세인데 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철벽……보다는 좀 더 유동적이고 위협적인 생물체 같다. 예컨대 방금 배를 채운 맹수라든지.
‘등을 돌리면 죽고 말 거야.’
목 뒤가 서늘해졌다.
무표정하게 마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절대로…… 나가면…… 안 돼요.”
그리고 어느 순간 감긴 눈이 뜨이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탁 끊어지듯 긴장이 풀렸다. 마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도대체…… 뭐였지?’
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가면 어쩌나 싶을 만큼 거세게 뛰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찌나 긴장했었는지 어깨에 약간의 근육통까지 느껴졌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마나는 얼빠진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