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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CHAPTER 1. 도망자들 (2)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나는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쓰러져 있는 추적자들을 보았다.

‘죽은 건가?’

당황한 와중에도 마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미약하게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명의 남자가 동시에 정신을 잃을 이유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야말로 마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시 피나하가 닫히며 마법 또한 함께 사라졌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다.

‘단체로 기면증이라도 앓는 건가.’

마법보다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추측을 떠올릴 때쯤 마나는 새로운 인물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멀뚱하게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날 꼬박 밤을 샌 듯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익숙했다.

방금 전에 만난 약초꾼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귀신처럼 기척이 희미한 여자였다. 풀을 밟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왜 여기에 있지?’

의문은 금방 휘발됐다. 시선을 느꼈는지 약초꾼이 곧바로 마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마나는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마나는 여자가 그냥 지나쳐 가길 바랐다. 그녀는 아직 마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니 아직 희망이 있었다. 계속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그러나 그 바람과는 정반대로 약초꾼은 서슴없이 마나에게로 다가왔다.

‘오지 마.’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마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당연히 약초꾼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어떤 장애물도 없이 그녀는 마나의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마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마나를 스쳐 지나 그물을 쥐었다. 부러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나는 여자가 쇠 그물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뜯어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는 여자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 그 시선이 어떤 감정을 띠고 있는지까지는 읽어 낼 수 없었다.

사실 이때 고개를 들어 약초꾼을 보았다고 해도 그는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녀가 지극히 담담하며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실제로도 별달리 특별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물을 걷어 내며 약초꾼이 말했다.

“왜 도와 달라고 안 했어요?”

딱히 탓하거나 으스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 점심은 구운 계란이 좋겠지요, 하고 묻는 듯 태연하고 일상적이었다. 그 평범한 말투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마나 앞에 선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도와준다고 끼어들었다가 다치면 귀찮아지니까. 눈이라도 마주쳐서 나를 원하게 되면 더 귀찮아지니까. 누군가의 삶을 망치는 건 이제 지겨울 정도로 충분하니까.

무엇보다도,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마나는 그런 대답 대신 되물었다.

“……도와 달라고 안 했는데 왜 돌아왔어?”

그러자 약초꾼은 아주 이상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의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할 무언가를 내려놓는 듯 태연한 대꾸였다. 자부심도, 망설임도, 심지어 일말의 호의조차 없었다. 누군가를 도울 때 기반하는 감정들이 전무했다.

그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마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것은 순전히 그 탓이었다.

또 한번의 부주의.

젠장. 그는 정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제 처지를 자각하기도 전에 눈이 마주쳤다.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나른하게 가라앉은 눈이 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

마나는 저도 모르게 침음했다.

그 순간의 죄악감은 감히 말로 표현할 것이 못 됐다. 그렇게나 주의하자 다짐했으면서도 또 찰나의 방심으로 한 명의 인생을 망쳐 버렸다.

처참하게 무너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마나는 고개를 숙였다. 약초꾼의 시선이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에 홀린 이상 그녀는 이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마나를 향해 선의를 베푼 것뿐이었는데, 마나는 배은망덕하게도 그녀의 삶을 망쳐 버렸다.

끔찍한 죄책감이 마나를 덮쳤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처럼 인간을 향한 원망이 되었다.

‘어째서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의 욕망에 잡아먹히고 마는 거야. 만약 인간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욕심 따위 부리지 않고 선량했더라면 나도…….’

마나가 핏물이 새어나는 입술을 다시 한번 짓씹었다. 약초꾼은 얼른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마나는 거세게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찰싹!

매서운 소리가 났다. 그러나 마나는 그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약초꾼을 노려보았다.

“함부로 만지지 마.”

여자는 멀뚱히 마나를 바라보았다. 마나의 마력에 홀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욕망을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에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마나에게 홀리지 않은 것처럼…….

‘혹시?’

마나의 마음속에서 작은 희망이 움틀 때였다.

“내 집에 갈래요?”

유혹치고는 담백한 어조였지만, 말의 의미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품게 되는 건 그가 어리석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못 일어나잖아요.”

약초꾼의 말대로였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다리는 완전히 힘이 빠져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약초꾼이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다.

“이 산은 맹수가 많이 나와요. 마물도 있고요. 어린아이 혼자서 있기는 위험해요.”

“난 아이가 아냐.”

마나는 불퉁하게 말했다. 열 살 이상으로 보기 힘든 외관을 하고서는 영 설득력 없는 변명인 걸 알았다. 그러나 무력한 아이 취급은 진저리가 났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약초꾼은 쉽게 납득했다.

“실례했어요. 무척 동안이시네요.”

“……뭐?”

“어쨌든 여긴 다친 사람이 있긴 위험해요. 산짐승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거든요. 곧 저 사람들도 정신을 차릴 것 같고.”

마나는 그제야 다시 한번 상황을 파악했다. 추적자들이 정신을 잃은 이유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지만, 약하게 잠꼬대를 하는 꼴이 약초꾼의 말대로 금방 정신을 차릴 모양새였다.

영 찝찝했지만 변태 귀족이나 용병보다 이 피곤한 얼굴의 약초꾼이 훨씬 나은 선택임은 분명했다. 사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언제나 그 정도였기 때문에 특별히 회의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적어도 사방이 막힌 탑에 갇히진 않겠지. 기회를 봐서 탈출하면 돼.’

마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좋아. 너희 집에 가자.”

여자가 미소 지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어?”

여자는 마나에게 약초 바구니를 쥐여 주고는 그의 등과 허벅지에 손을 넣어 단번에 안아 올렸다. 일반적으로 동화책에서 기사가 공주님을 안아 올릴 때 그려지는 이상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다행히 마나는 동화책 따위는 조금도 읽지 못한 불우한 반요정이었으므로, ‘이 자세 편하네.’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선이 가는 몸과 다르게 제법 힘이 좋은 모양인지 마나를 안아 든 약초꾼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힘이 달려서 수시로 자세를 고치거나, 과하게 힘을 주거나 덜지도 않아서 움직이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문득, 정말 터무니없지만…… 그녀가 추적자들을 제압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졌던 탓이었다. 도대체 어느 약초의 향이기에 낯선 이의 품에서 이렇게 긴장이 풀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저히 경계할 기분이 들지 않아 마나는 그저 길게 하품을 했다.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일주일, 어쩌면 한 달은 되었나.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래전, 마을을 떠나던 그날부터…….

느리게 껌뻑거리던 마나의 눈이 스르르 소리 없이 감겼다.

잠든 마나의 손에서 약초 바구니가 툭 떨어졌다.

“앗.”

약초꾼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애써 캐 온 약초가 흙바닥을 구르는 일은 없었다.

약초 바구니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걸음을 늦춰 걷기 시작한 약초꾼 뒤로, 바구니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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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마그누스의 황금 궁전에서 오랜만에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위대한 황제이자 제국의 영웅, 호수스 마그누스의 탄신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마계가 닫히고 처음 열리는 대규모의 궁중 연회에 사람들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왕 발터무드의 과한 사치로 국고가 파탄 난 탓에 연회를 자제하라는 명이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네들을 흥분하게 한 부분은 황제가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나이가 벌써 스물셋. 혼기가 찬 제국 일등 신랑감의 등장은 마음속에 봄바람이 부는 영애들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부모까지 설레발을 치게 만들었다. 정작 황제는 여자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철옹성 같은 남자였지만 말이다.

젊고 재능 넘치며 심지어 뛰어난 외모를 지닌, 신들의 총아라 불리는 황제가 어째서 그의 명성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는가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이야기였으나 누구도 진짜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기야 그 호수스 마그누스가 지독한 짝사랑을 앓고 있음을 상상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임이 분명했다.

어찌 됐건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인공은, 조르쥬 공작이 선물한 아름다운 은색 활을 능숙한 자세로 쥐고 살피는 중이었다.

과연 훌륭한 활이었는데 활등의 세공이 특히 흥미로웠다. 백금으로 도금된 활등에는 호수스와 마룡 우루사의 결전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관을 쓴 남자가 양날의 검으로 마룡의 목을 베어 내는 장면은 몹시 생생하여 당장 그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호수스는 웃음을 흘렸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퍽 실소에 가까웠으나 알아본 자는 없었다. 애초에 황제란 쓸데없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이골 난 작자인 법이니까.

시종에게 활을 넘긴 뒤, 호수스는 다정한 눈빛으로 조르쥬 공작을 칭찬했다.

“역시나 마그누스의 오른 날개다운 훌륭한 안목이오. 감사히 받지.”

“저의 큰 영광입니다. 폐하.”

조르쥬 공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과연 과거 기사단장직을 맡았던 이답게 칼 같은 자세였다. 황제는 다정한 눈으로 자신의 오른쪽 날개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