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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CHAPTER 1. 도망자들 (1)





아이를 밀치고 대신 버스에 치이는 순간에도 평화는 후회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했다. 그 정도의 짧은 감상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사실에 별다른 충족감이나 기쁨 따위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렇게 평온에 가까운 무덤덤함으로 제 죽음을 받아들였다.

……고 생각했다.

“여긴 어디지?”

눈을 떴을 때 평화는 완전히 낯선 세계에 있었다.



✡ ✡ ✡



그만하고 싶다.

마나는 숨을 헐떡였다. 폐가 찢어진 듯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거친 산길을 달리며 생긴 생채기들도, 감각이 미비한 두 다리도, 가까운 곳에서 추적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희망이 없다는 것.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 결국 추적자들은 그를 찾아낼 것이다. 어린 육체로 성인 남자의 힘을 당해 낼 방도가 만무하니 무력하게 끌려가겠지. 굳이 셈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꼴을 당하려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황금 새장에 갇히는 건 차라리 양반이었다.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전류가 흐르는 목줄을 찬 채, 창 하나 없는 탑에 갇힌다면 이번에야말로 두 눈을 파낼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죽어 버릴 거야.’

이를 악물며 결심하는 찰나, 쇠 그물이 마나를 덮쳤다.

“악!”

흙바닥을 나뒹구는 마나의 몸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찾았다!”

그물을 던진 남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덥수룩이 턱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내가 잡았어. 내가 잡았다고!”

“에이씨. 거의 다 잡았었는데.”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하는 남자의 주변으로 다른 추적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물 속에서 발버둥 치는 마나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얼굴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자네 완전 복권 맞았네. 이제 용병 일은 때려치워도 되겠어.”

“당연하지. 돈 받으면 센텀에 작은 빵집 하나 차릴 거야. 아이도 있으니 이젠 안정적인 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실로 가정적인 남편 그 자체였다. 바로 밑에서 피투성이 손으로 그물을 쥐어뜯고 있는 마나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그럴듯한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아쉬운 눈빛으로 마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또 다른 남자가 심술궂게 그물을 잡아당겼다. 마나는 그물이 끌려가는 대로 형편없이 굴러갔다.

“도대체 이 녀석이 뭐기에 그 조르쥬 공작이 천한 용병한테 일을 다 맡긴 거야?”

“어허. 제드! 손대지 마. 이건 내 거야.”

“쪼잔하게 굴지 마. 잠깐 얼굴만 보겠다는 건데.”

“왜 이래, 선수끼리.”

“지금 자네 나 의심하는 건가?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이거 영 안될 사람이네.”

부스럭.

그들의 투덕거림이 멎은 것은 순전히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 때문이었다. 바람 따위가 아니었다. 용병 일을 하며 쌓아 온 경험으로 알았다.

가까운 곳에 무언가가 있다.

다섯 명의 추적자가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워낙 깊고 험한 산이라 맹수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쩌면 미처 마계로 따라가지 못한 마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왕왕 발생하고는 했으므로 괜한 걱정은 아니었다.

바스락바스락.

점점 크고 선명해지던 소리가 마침내 멎었다.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건 웬 젊은 여자였다.

작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꽤 예쁘장한 여자였다. 길게 찢어진 눈이 날카로운 느낌을 줄 법도 한데, 만사가 귀찮다는 듯 피로한 표정 탓에 나른한 인상이 강했다.

한 팔에는 풀 무더기가 쌓여 있는 바구니를 끼고 나머지 한 팔로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보아 근방의 약초꾼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자신에게로 꽂힌 날 선 시선이 의아한지 고개를 기울였다. 그전에 흘렀던 긴장감이 무색할 만큼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별일 아니니 그냥 가던 길 가시오.”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덩치 큰 남자 다섯이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상황에 처했는데도, 여자는 위협은커녕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태평함에 남자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마침내 그물에 갇힌 마나를 발견한 여자의 눈매가 일순 딱딱해졌다.

“저 애는…….”

“가던 길 가라고 말했을 텐데.”

일부러 위협적으로 말해 보았으나, 여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여자는 오히려 보란 듯 마나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혹시 곤란한 상황이에요?”

추적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에게 의뢰를 맡긴 윗분은 이 일이 조용히 처리되길 원했다. 젊은 여자를 죽이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원래 인생이란 게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게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추적자들이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여자를 외면해 버렸다. 그 매몰찬 거절에 여자보다 추적자들이 더 당황했다.

“거, 거봐.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꺼져.”

이유야 뭐든 귀찮은 상황을 피하게 됐으니 달가운 일이었다. 여자는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끼어들 명분을 찾지 못했는지 곧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여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추적자들은 무기에서 손을 뗐다.

“저 여자, 운이 좋군.”

“이 녀석이 영리하게 군 덕분이지.”

남자가 마나의 머리칼을 잡아채 저를 보도록 잡아당겼다. 아까 제드라 불렸던 남자였다.

“윽.”

강제로 고개를 잡힌 마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제드가 비웃듯 말했다.

“계속 그렇게 구는 게 좋을 거다. 꼬마야.”

그 순간 제드와 마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젠장.’

제드의 눈이 순식간에 짙게 물드는 것을 본 마나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드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을 눈치챈 건 오직 마나뿐이었다. 나머지 추적자들은 마나를 잡은 남자에게, 받게 될 골드의 일부를 배분해 달라고 요구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이 이변을 눈치챈 건 제드가 그물째로 마나를 어깨에 짊어진 채 달아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 어어? 제드 저 자식 뭐 하는 거야?”

“뭘 멍청히 보고 있어? 빨리 잡아!”

제드는 그 큰 덩치가 무색할 만큼 재빠르게 달렸다. 덕분에 마나는 날뛰는 야생마 등에 앉은 것 마냥 지독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뒤따라오는 추적자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에는 제드도 잔뜩 지쳐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꼴을 봤을 땐 당장 쉬지 않으면 얼마 안 가 탈진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드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마나를 데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망친다.

“아저씨. 그만 뛰어. 어차피 잡힐 거야.”

“헉헉.”

“지금 잡히지 않더라도 결국엔 뺏길 거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귀족 나리도 결국은 그렇게 됐어. 이 병신 같은 놀음에 끼어들지 마. 당신 같은 쫄따구는 금방 죽어 버릴 거라고.”

“헉헉.”

“……멍청하긴.”

마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자신의 마력에 홀린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불길에 무작정 뛰어드는 나방을 보는 것처럼 안타깝다든가 불쌍하다든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스운 일이다. 도대체 누가 누굴 동정한단 말인가.

이 비극의 시작점에 마나 자신이 있는데.

‘역시 세계수와 함께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마나는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마그누스 왕이 신성한 나무를 뿌리째 들어냈을 때, 시 피나하의 모든 요정이 죽었다. 살아남은 요정은 없었다.

정확히는, ‘완전한’ 요정은 없었다.

마나는 인간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반半요정이었다.

반요정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주신 이오타가 세계의 정중앙에 아기 나무를 심었을 때부터 정해진 규율이었다.

하지만 마나는 태어났다. 인간의 몸에 요정의 마력이 담긴 기이한 형태로. 그리고 세계의 규율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첫 울음을 뱉자마자 시 피나하에서 지상으로 버려졌다.

결국은, 그래서 살아남았다.

이것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면.

마나는 마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인간의 몸에 담긴 유례없이 강대한 마력은 마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지상으로 내쫓긴 반요정이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했다. 통제되지 못한 마력은 구멍 뚫린 둑의 물처럼 흘러 나가 인간들을 홀렸다.

요정의 마력에는 감정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었다. 보통은 가벼운 미소를 지을 일에 배를 잡고 폭소를 하게 만든다거나, 눈시울을 붉힐 일에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게 하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마나의 경우는 달랐다. 다른 요정들의 수배가 넘는 마력량 탓일까. 아니면 규율에서 어긋난 존재이기 때문일까.

마나의 마력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배가 가득 부른 사람도 마나를 보면 수년을 굶은 것과 같은 광적인 허기를 느꼈다. 가슴에 검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마나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충족되지 못하는 결핍을 앓게 되었다.

덕분에 마나는 지상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늘 누군가의 소유가 되었다. 마나를 원하는 사람은 보다 더 원하는 사람에게 그를 빼앗겼다.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게 먹히고, 큰 물고기가 더 큰 물고기에게 먹히는 것처럼 욕망이 욕망을 잡아먹는 형태였다.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마나는 갓난애만큼 무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진 권력이 클수록, 돈이 많을수록 그랬다. 어떤 이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애틋해 보이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마나의 마력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현상금을 내건 헬레나 조르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는 심장이라도 빼어 줄 듯 마나에게 달콤하게 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껍데기를 벗겨 보면 지독히 파괴적인 소유욕만이 벌겋게 드러났다.

“헉헉…….”

제드는 이제 거의 죽을 것처럼 보였다. 마나를 내려놓으면 조금은 괜찮을 텐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목줄에 매인 개처럼 헐떡거리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드!”

그 순간 앞이 가로막혔다. 추적자들을 따돌린 게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 더 빠른 길로 돌아 먼저 내려왔던 것이다. 추적자들은 곧바로 원형으로 모여 제드와 마나를 둘러쌌다.

“그 녀석 내려놔. 그럼 잠깐 미쳤었다고 생각하고 봐줄 테니까.”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제드는 한 손으로 눈가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도대체 뭐가 문제야? 배당금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그럼 조금 더 쳐줄 테니까 이제 그만둬.”

“이건…… 내 거야.”

제드는 그제야 마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누군가 마나를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 눈빛이었지만 행동은 명확했다. 품에서 꺼낸 단검은 잘 관리했는지 날이 예리하게 서 있었다.

추적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마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소요는 익숙했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 낼 수 있을 만큼.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긴 자가 자신을 갖게 될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마나가 예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

오직 그 정도의 소리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