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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 1장 평범한 일상
폐허를 바라보는 수림의 눈에 비구름이 드리우듯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건물이 산산조각 나고 폐허가 되었다. 누군가의 실수인지, 모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독립 운동의 은거지였던 곳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부서진 시멘트 더미와 기둥, 불에 탄 나무 조각,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서들이 제 형태를 잃고 의미 없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건물의 잔해 위로 먼지 섞인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불길하고 괴괴했다. 연기와 잔해 사이를 헤집으며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단순히 장소를 상실한 것에 대한 좌절감이 아니었다. 타지에 세워졌던 은거지는 그들의 안식처이자 신념과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동지들을 짓누르고 있다.
“팔은 좀 괜찮아요?”
수림의 옆으로 유한이 다가왔다. 수림은 제 팔에 단단히 감긴 붕대를 보았다. 폭발에 휘말렸지만 화상으로 그쳤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이 아주 좋았다.
“괜찮아.”
“위로가 필요한 얼굴인데요.”
유한의 말에 수림은 힘없이 웃음 지었다.
“됐다.”
“지금이라도 가요.”
“어디를.”
“알잖아요. 지금 당장 조선으로 가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수림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으나, 유한은 그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때나 강직한 사람이지만 연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한없이 약해 보인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지만 스스로를 나무라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하여 더 쓸쓸하게 들렸다.
“내가 했던 일들이 죄가 되지 않으려면, 끝을 봐야 해.”
“…….”
“그래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동지들한테도, 그 사람한테도.”
많은 희생을 낳은 이 일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 싸움에서 꼭 이겨야만 했다.
“한아.”
“네.”
“나는 연해주로 가야겠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유한은 놀라지 않고 말없이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도움을 청해야겠어.”
“같이 가죠, 그럼.”
“너는 여기 남아서 내 자리를 대신해야지.”
수림은 가볍게 유한의 어깨를 두드리고 건물의 잔해 위로 올라섰다. 그들의 상징이었던 건물은 수림이 밟고 올라선 것만으로도 쉬이 바스러졌다. 그는 성치 않은 팔을 움직이며 묵묵히 일을 도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멘트 덩어리 위로 원형의 자국들이 산발적으로 늘어나더니, 금세 모든 것이 흠뻑 젖어들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는 차갑고 묵직했다. 수림은 빗물과 함께 자신을 적시는 지독한 절망감에 휩싸이지 않으려 애쓰며 잔해를 헤집는 일에 집중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드는 기억은 그를 쉬이 나약해지게 만들었다. 연화를 안아 따스했던 그 순간, 커다랗게 뭉쳐 있던 번뇌와 두려움이 모두 소멸되었던 그때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햇빛 아래에서 환한 웃음을 짓던 연화의 모습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흙바닥에 고인 빗물처럼 영역을 넓혀 가는 그리움을 그는 어찌 감당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뜨거운 무언가가 관자놀이 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에서 깨어난 수림은 젖은 눈가를 닦아 내고는 미동 없이 멈추어 있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자신이 바라던 장소가 아니라 절망과 그리움이 당연했던 곳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을까 두려웠다. 해방을 맞이하고 연화와 재회했던 기억이 꿈속의 일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득하기만 했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간신히 눈을 떴다. 환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결한 호텔 천장이었다. 다행히도 어제 잠들었던 장소였다. 연화의 곁에 돌아온 것은 정말 꿈이 아니었다. 그는 안도하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나운 꿈자리의 여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총기 정비를 시작했다. 어디에서든 총기를 정비하는 일은 오랜 시간 길들여진 그의 고루한 습관이었다. 탄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그는 총기 정리를 마무리했다.
씻고 나오자마자 수림은 호텔 테라스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소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오랜 시간 창밖을 내다보아도 의심받지 않을 핑계로 담배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으나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해방의 날 이후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독립을 위해 일했던 수림조차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 겪을 혼란은 당연했다.
한참 거리의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수림은 담뱃불을 끄고 조용히 거실로 나와 권총을 손에 쥐었다.
8월 16일을 기점으로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면서 수배자 신분이었던 수림도 자유로워졌으나, 마음 놓고 있기에는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문 옆에 섰다.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리고,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들겼다.
“아무도 없어요? 나예요!”
수림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여 손에서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연화였다. 그는 손에 쥔 총을 보며 잠시 방황했다.
방황하는 사이 다시금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총을 장롱에 던져 넣고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연화가 서 있었다. 고운 얼굴에는 어째선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 오후에 연화를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닌데,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각에 찾아와야 할 만큼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수림의 얼굴을 마주한 연화의 얼굴에 불안함 대신 부끄러움이 자리 잡았다. 양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연화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불안해서 일찍 왔어요. 당신이 없을까 봐…….”
수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으로 요동치던 가슴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반면 연화의 뺨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수림은 연화의 팔을 당겨 제 품에 가득 안았다. 뒷머리를 쓸어내려 주자 그녀는 수림의 어깨에 기대어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화의 불안을 아직까지도 해소해 줄 수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함께 지내기에는 자신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같이 살자는 연화의 말을 어렵게 거절했었는데, 그것이 못내 미안했다.
수림은 사죄하듯 연화의 뺨 위로 입을 맞추었다. 열기가 가라앉은 줄 알았던 연화의 뺨에 다시금 붉은 물이 들었다. 그는 웃으며 연화의 손을 잡고 문 안쪽으로 이끌었다.
“오는데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그가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았어요. 당신은 별일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편히 잘 있었어요.”
수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화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화가 표정을 굳혔다. 수림의 팔에 있는 흉터를 발견한 탓이다. 수림은 연화의 시선이 닿은 제 팔을 보며 낮게 탄식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던 겉옷을 걸쳐 입었다.
“미안합니다. 좀 흉하죠.”
“내가 흉해서 놀라는 게 아니잖아요.”
연화의 얼굴에는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예요? 아프진 않아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요? 옷 벗어 봐요. 상처 다시 보게.”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안 숨기기로 약속했잖아요.”
“숨기는 게 아니라 이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안온한 그의 말에도 연화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상처가 생겼을 때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도 속상하여 연화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수림은 상체를 숙여 연화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상한 시선이 연화를 응시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진짜 아픈 거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흉만 남은 겁니다. 아프지도 않고, 다 지나간 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흉이 남은 것이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을까. 고통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텐데. 연화는 심란했지만, 달래듯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때문에 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일찍 얼굴 뵈니 더 좋네요.”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그가 다정히 말했다. 연화는 그를 이기지 못하고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림은 연화의 마음을 눈치채고 미소 지었다.
그는 연화의 손을 잡고 거실 안쪽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어쩌죠. 드릴 게 물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곧 점심이니까, 이따 나가서 같이 밥 먹을까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맑게 웃었다.
“앉아 계세요.”
연화를 소파에 앉히고, 물을 가지러 가려던 수림은 다시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제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체를 숙여 연화의 입술 위로 가볍게 제 입술을 포개었다. 물러서려다 아쉬움이 남아 고개를 꺾고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다시 돌아서서 멀찍이 도망을 갔다.
연화는 붉게 달아오른 수림의 귓바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자신의 뺨도 붉어질 것 같아 손등으로 뺨의 열기를 식혔다. 그러나 수림이 다시 돌아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뺨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수림 역시 자신의 홧홧한 귓바퀴가 민망한지 빠르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신 겁니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윤이가 보냈어요. 내가 자꾸 창밖을 보는 게 신경 쓰였나 봐요.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라고 하더라구요.”
연화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수림은 다정한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일하는 거.”
“괜찮아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할 만해요. 재미있을 때도 있고.”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바람 한가운데의 촛불처럼 일렁이던 사람은 어느새 단단해진 듯 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뒤따랐으리라. 그는 연화가 힘든 시기를 견뎌 내는 동안 같이 있어 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했다.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수림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한 게 왜 이렇게 많을까요.”
연화는 물끄러미 수림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린 그의 눈매가 쓸쓸해 보였다.
“나한테 미안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오늘 당신이 밥 사 줘요. 그러면 용서해 줄게요.”
“……그런 걸로 다 용서하지 마세요.”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수림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이었다.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앞으로 다시 사라지지만 말아요. 그거면 돼.”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연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무슨 이유가 있든 계속 부인 곁에 있을 겁니다.”
“정말요?”
“약속하겠습니다.”
자상한 음성에 연화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수림도 연화를 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서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연화와 수림은 식당에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평일 오전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넓은 교차로 위의 전차 정거장을 통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인력거꾼이나 직접 발품을 파는 사람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라의 경사를 맞은 만큼,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몸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듯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 만연했던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제복을 입은 주재소 순사나 유카타를 입은 일본인들도 없었다. 대신 태극기를 들고 광복을 자축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상점은 확성기로 조선어 노래를 크게 틀어 놓기도 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당황스러운 듯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새로운 대한을 맞이한 기쁨에 밝은 얼굴이었다.
시가지 쪽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오전부터 문을 연 상점들도 많았고, 흰옷을 입은 노인들이나 아낙들, 사각모를 쓴 학생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상점가를 지나다녔다. 간혹 신식 옷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도 보였다.
수림은 그 틈에 연화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가 제 옆에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아직 그의 처지는 안정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평범한 길거리에 스며들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부드러운 손길이 수림의 손을 잡았다. 그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연화는 태연히 앞을 보며 걷고 있었으나, 머리를 넘겨 드러난 귓바퀴는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먼저 손을 잡아 주지 못해 그녀에게 미안했다.
이러려고 연화의 곁에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겁을 먹은 채 마음을 표현하는 일마저 주저하려고 어렵게 그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수림은 깊이 자책했다.
그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이 연화의 손을 꼭 붙잡고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서 걸었다.
“부인.”
수림은 나지막이 연화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연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예쁩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신의 눈에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여느 연인들처럼 거리에서 제 여인에게 애정 어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연화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크게 뜬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희미하게 붉었던 귓바퀴는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다.
수림은 다시 미소 짓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다시 길을 걸었다.
“아, 여기서 다 뵙는군요!”
그때 어떤 사내가 연화에게 다가와 갑자기 말을 걸었다. 회사 일 때문에 그녀와 몇 번 마주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화는 잡고 있던 수림의 손을 자연스레 놓았다.
사내는 반갑게 인사를 했고, 연화는 형식상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인사를 하는 와중에 수림의 시선을 느꼈지만, 사내에게 인사를 하느라 그 눈길을 받아 주지 못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사내가 연화의 손을 잡더니, 손등 위로 입을 맞추려는 듯 상체를 숙였다. 그녀가 만류하기도 전에 사내의 손이 수림에게 붙잡혔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수림의 손에 핏줄이 섰다.
“뭡니까.”
수림이 날카롭게 물었다. 사내는 붙잡힌 손이 아픈 듯 인상을 쓰며 당황한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고, 수림은 노골적으로 사내를 향한 적대를 드러냈다.
“잠깐만요, 놓아줘요. 회사 일로 아는 사람이에요.”
연화가 다급히 말했다. 시선을 옮겨 연화를 바라보던 수림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사내는 수림의 얼굴을 보고 그가 수배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어떠한 말도 없이 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수림은 굳은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누굽니까, 방금 그 남자.”
“말했잖아요. 그냥 일 때문에 아는 사람이에요.”
“왜 그냥 입을 맞추게 두신 겁니까.”
“입술이 닿진 않았어요. 그리고 그냥 인사잖아요.”
“인사요?”
순간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저게 어딜 봐서 인삽니까? 누가 봐도 의도적이잖아요.”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연화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수림은 아차 싶어 표정을 풀고 입을 다물었다. 연화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사내의 접촉에 화가 났던 것인데,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아닙니다. 화낸 거 아니에요.”
연화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다 그를 두고 앞서 걸었다. 그가 연화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여태껏 그렇게 인사 받으셨던 겁니까.”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빨리 돌아오지 그랬어요.”
차가운 말투였다. 수림의 가슴이 다시금 쿵 내려앉았다. 연화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실수투성이인 자신이 싫을 지경이었다. 그는 자책하며 기운 없는 얼굴로 연화의 뒤를 따랐다.
제 1장 평범한 일상
폐허를 바라보는 수림의 눈에 비구름이 드리우듯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건물이 산산조각 나고 폐허가 되었다. 누군가의 실수인지, 모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독립 운동의 은거지였던 곳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부서진 시멘트 더미와 기둥, 불에 탄 나무 조각,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서들이 제 형태를 잃고 의미 없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건물의 잔해 위로 먼지 섞인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불길하고 괴괴했다. 연기와 잔해 사이를 헤집으며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단순히 장소를 상실한 것에 대한 좌절감이 아니었다. 타지에 세워졌던 은거지는 그들의 안식처이자 신념과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동지들을 짓누르고 있다.
“팔은 좀 괜찮아요?”
수림의 옆으로 유한이 다가왔다. 수림은 제 팔에 단단히 감긴 붕대를 보았다. 폭발에 휘말렸지만 화상으로 그쳤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이 아주 좋았다.
“괜찮아.”
“위로가 필요한 얼굴인데요.”
유한의 말에 수림은 힘없이 웃음 지었다.
“됐다.”
“지금이라도 가요.”
“어디를.”
“알잖아요. 지금 당장 조선으로 가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수림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으나, 유한은 그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때나 강직한 사람이지만 연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한없이 약해 보인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지만 스스로를 나무라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하여 더 쓸쓸하게 들렸다.
“내가 했던 일들이 죄가 되지 않으려면, 끝을 봐야 해.”
“…….”
“그래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동지들한테도, 그 사람한테도.”
많은 희생을 낳은 이 일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 싸움에서 꼭 이겨야만 했다.
“한아.”
“네.”
“나는 연해주로 가야겠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유한은 놀라지 않고 말없이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도움을 청해야겠어.”
“같이 가죠, 그럼.”
“너는 여기 남아서 내 자리를 대신해야지.”
수림은 가볍게 유한의 어깨를 두드리고 건물의 잔해 위로 올라섰다. 그들의 상징이었던 건물은 수림이 밟고 올라선 것만으로도 쉬이 바스러졌다. 그는 성치 않은 팔을 움직이며 묵묵히 일을 도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멘트 덩어리 위로 원형의 자국들이 산발적으로 늘어나더니, 금세 모든 것이 흠뻑 젖어들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는 차갑고 묵직했다. 수림은 빗물과 함께 자신을 적시는 지독한 절망감에 휩싸이지 않으려 애쓰며 잔해를 헤집는 일에 집중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드는 기억은 그를 쉬이 나약해지게 만들었다. 연화를 안아 따스했던 그 순간, 커다랗게 뭉쳐 있던 번뇌와 두려움이 모두 소멸되었던 그때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햇빛 아래에서 환한 웃음을 짓던 연화의 모습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흙바닥에 고인 빗물처럼 영역을 넓혀 가는 그리움을 그는 어찌 감당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뜨거운 무언가가 관자놀이 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에서 깨어난 수림은 젖은 눈가를 닦아 내고는 미동 없이 멈추어 있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자신이 바라던 장소가 아니라 절망과 그리움이 당연했던 곳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을까 두려웠다. 해방을 맞이하고 연화와 재회했던 기억이 꿈속의 일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득하기만 했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간신히 눈을 떴다. 환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결한 호텔 천장이었다. 다행히도 어제 잠들었던 장소였다. 연화의 곁에 돌아온 것은 정말 꿈이 아니었다. 그는 안도하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나운 꿈자리의 여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총기 정비를 시작했다. 어디에서든 총기를 정비하는 일은 오랜 시간 길들여진 그의 고루한 습관이었다. 탄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그는 총기 정리를 마무리했다.
씻고 나오자마자 수림은 호텔 테라스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소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오랜 시간 창밖을 내다보아도 의심받지 않을 핑계로 담배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으나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해방의 날 이후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독립을 위해 일했던 수림조차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 겪을 혼란은 당연했다.
한참 거리의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수림은 담뱃불을 끄고 조용히 거실로 나와 권총을 손에 쥐었다.
8월 16일을 기점으로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면서 수배자 신분이었던 수림도 자유로워졌으나, 마음 놓고 있기에는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문 옆에 섰다.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리고,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들겼다.
“아무도 없어요? 나예요!”
수림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여 손에서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연화였다. 그는 손에 쥔 총을 보며 잠시 방황했다.
방황하는 사이 다시금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총을 장롱에 던져 넣고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연화가 서 있었다. 고운 얼굴에는 어째선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 오후에 연화를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닌데,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각에 찾아와야 할 만큼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수림의 얼굴을 마주한 연화의 얼굴에 불안함 대신 부끄러움이 자리 잡았다. 양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연화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불안해서 일찍 왔어요. 당신이 없을까 봐…….”
수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으로 요동치던 가슴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반면 연화의 뺨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수림은 연화의 팔을 당겨 제 품에 가득 안았다. 뒷머리를 쓸어내려 주자 그녀는 수림의 어깨에 기대어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화의 불안을 아직까지도 해소해 줄 수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함께 지내기에는 자신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같이 살자는 연화의 말을 어렵게 거절했었는데, 그것이 못내 미안했다.
수림은 사죄하듯 연화의 뺨 위로 입을 맞추었다. 열기가 가라앉은 줄 알았던 연화의 뺨에 다시금 붉은 물이 들었다. 그는 웃으며 연화의 손을 잡고 문 안쪽으로 이끌었다.
“오는데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그가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았어요. 당신은 별일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편히 잘 있었어요.”
수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화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화가 표정을 굳혔다. 수림의 팔에 있는 흉터를 발견한 탓이다. 수림은 연화의 시선이 닿은 제 팔을 보며 낮게 탄식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던 겉옷을 걸쳐 입었다.
“미안합니다. 좀 흉하죠.”
“내가 흉해서 놀라는 게 아니잖아요.”
연화의 얼굴에는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예요? 아프진 않아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요? 옷 벗어 봐요. 상처 다시 보게.”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안 숨기기로 약속했잖아요.”
“숨기는 게 아니라 이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안온한 그의 말에도 연화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상처가 생겼을 때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도 속상하여 연화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수림은 상체를 숙여 연화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상한 시선이 연화를 응시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진짜 아픈 거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흉만 남은 겁니다. 아프지도 않고, 다 지나간 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흉이 남은 것이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을까. 고통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텐데. 연화는 심란했지만, 달래듯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때문에 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일찍 얼굴 뵈니 더 좋네요.”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그가 다정히 말했다. 연화는 그를 이기지 못하고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림은 연화의 마음을 눈치채고 미소 지었다.
그는 연화의 손을 잡고 거실 안쪽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어쩌죠. 드릴 게 물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곧 점심이니까, 이따 나가서 같이 밥 먹을까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맑게 웃었다.
“앉아 계세요.”
연화를 소파에 앉히고, 물을 가지러 가려던 수림은 다시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제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체를 숙여 연화의 입술 위로 가볍게 제 입술을 포개었다. 물러서려다 아쉬움이 남아 고개를 꺾고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다시 돌아서서 멀찍이 도망을 갔다.
연화는 붉게 달아오른 수림의 귓바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자신의 뺨도 붉어질 것 같아 손등으로 뺨의 열기를 식혔다. 그러나 수림이 다시 돌아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뺨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수림 역시 자신의 홧홧한 귓바퀴가 민망한지 빠르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신 겁니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윤이가 보냈어요. 내가 자꾸 창밖을 보는 게 신경 쓰였나 봐요.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라고 하더라구요.”
연화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수림은 다정한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일하는 거.”
“괜찮아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할 만해요. 재미있을 때도 있고.”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바람 한가운데의 촛불처럼 일렁이던 사람은 어느새 단단해진 듯 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뒤따랐으리라. 그는 연화가 힘든 시기를 견뎌 내는 동안 같이 있어 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했다.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수림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한 게 왜 이렇게 많을까요.”
연화는 물끄러미 수림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린 그의 눈매가 쓸쓸해 보였다.
“나한테 미안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오늘 당신이 밥 사 줘요. 그러면 용서해 줄게요.”
“……그런 걸로 다 용서하지 마세요.”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수림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이었다.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앞으로 다시 사라지지만 말아요. 그거면 돼.”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연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무슨 이유가 있든 계속 부인 곁에 있을 겁니다.”
“정말요?”
“약속하겠습니다.”
자상한 음성에 연화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수림도 연화를 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서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연화와 수림은 식당에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평일 오전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넓은 교차로 위의 전차 정거장을 통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인력거꾼이나 직접 발품을 파는 사람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라의 경사를 맞은 만큼,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몸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듯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 만연했던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제복을 입은 주재소 순사나 유카타를 입은 일본인들도 없었다. 대신 태극기를 들고 광복을 자축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상점은 확성기로 조선어 노래를 크게 틀어 놓기도 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당황스러운 듯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새로운 대한을 맞이한 기쁨에 밝은 얼굴이었다.
시가지 쪽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오전부터 문을 연 상점들도 많았고, 흰옷을 입은 노인들이나 아낙들, 사각모를 쓴 학생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상점가를 지나다녔다. 간혹 신식 옷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도 보였다.
수림은 그 틈에 연화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가 제 옆에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아직 그의 처지는 안정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평범한 길거리에 스며들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부드러운 손길이 수림의 손을 잡았다. 그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연화는 태연히 앞을 보며 걷고 있었으나, 머리를 넘겨 드러난 귓바퀴는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먼저 손을 잡아 주지 못해 그녀에게 미안했다.
이러려고 연화의 곁에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겁을 먹은 채 마음을 표현하는 일마저 주저하려고 어렵게 그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수림은 깊이 자책했다.
그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이 연화의 손을 꼭 붙잡고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서 걸었다.
“부인.”
수림은 나지막이 연화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연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예쁩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신의 눈에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여느 연인들처럼 거리에서 제 여인에게 애정 어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연화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크게 뜬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희미하게 붉었던 귓바퀴는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다.
수림은 다시 미소 짓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다시 길을 걸었다.
“아, 여기서 다 뵙는군요!”
그때 어떤 사내가 연화에게 다가와 갑자기 말을 걸었다. 회사 일 때문에 그녀와 몇 번 마주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화는 잡고 있던 수림의 손을 자연스레 놓았다.
사내는 반갑게 인사를 했고, 연화는 형식상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인사를 하는 와중에 수림의 시선을 느꼈지만, 사내에게 인사를 하느라 그 눈길을 받아 주지 못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사내가 연화의 손을 잡더니, 손등 위로 입을 맞추려는 듯 상체를 숙였다. 그녀가 만류하기도 전에 사내의 손이 수림에게 붙잡혔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수림의 손에 핏줄이 섰다.
“뭡니까.”
수림이 날카롭게 물었다. 사내는 붙잡힌 손이 아픈 듯 인상을 쓰며 당황한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고, 수림은 노골적으로 사내를 향한 적대를 드러냈다.
“잠깐만요, 놓아줘요. 회사 일로 아는 사람이에요.”
연화가 다급히 말했다. 시선을 옮겨 연화를 바라보던 수림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사내는 수림의 얼굴을 보고 그가 수배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어떠한 말도 없이 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수림은 굳은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누굽니까, 방금 그 남자.”
“말했잖아요. 그냥 일 때문에 아는 사람이에요.”
“왜 그냥 입을 맞추게 두신 겁니까.”
“입술이 닿진 않았어요. 그리고 그냥 인사잖아요.”
“인사요?”
순간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저게 어딜 봐서 인삽니까? 누가 봐도 의도적이잖아요.”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연화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수림은 아차 싶어 표정을 풀고 입을 다물었다. 연화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사내의 접촉에 화가 났던 것인데,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아닙니다. 화낸 거 아니에요.”
연화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다 그를 두고 앞서 걸었다. 그가 연화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여태껏 그렇게 인사 받으셨던 겁니까.”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빨리 돌아오지 그랬어요.”
차가운 말투였다. 수림의 가슴이 다시금 쿵 내려앉았다. 연화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실수투성이인 자신이 싫을 지경이었다. 그는 자책하며 기운 없는 얼굴로 연화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