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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두 사람은 서양식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한 사람은 수림과 연화뿐이었다. 수림은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연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연화는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귀여워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실 화가 난 게 아니라 수림의 반응이 귀여워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수림은 연화를 달래려 제 몫의 음식을 그녀의 그릇 위로 덜어 주었다.
“화나셨습니까.”
연화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께 화났던 게 아닙니다. 그 사람한테 화가 났던 거지 부인께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수림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으나, 연화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식사도 하지 않고 빤히 연화만 바라보았다.
“됐으니까 밥 먹어요.”
“당신 화나게 만들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겠어요.”
수림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제 몫까지 드세요. 전 안 먹겠습니다.”
투정 같은 행동이 귀여워 연화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에 메마른 사막 같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화가 웃자 수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화 풀리신 겁니까.”
“아뇨?”
“웃었잖아요.”
“그냥 웃은 거지 화가 풀린 건 아니에요.”
“……화 푸세요. 제가 미안합니다.”
좀 더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기운 없는 얼굴을 보니 더 놀릴 수가 없었다.
“당신이 밥 다 먹으면 생각해 볼게요.”
연화의 말에 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고 또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다 먹으라니까요?”
“화 푸시는 것보다는 많이 드시는 게 더 좋아서요.”
연화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그런 연화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렇게 인사 안 받으시면 안 됩니까.”
“왜요?”
연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물었다.
“질투 납니다.”
수림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모른 척했던 것인데, 예상외로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거, 저는 싫습니다. 다른 사내가 당신이랑 접촉하는 것도 싫고.”
솔직한 말에 연화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수림은 멍하니 있는 연화에게 음식을 건네주었다.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자 그는 다정히 웃었다.
“알았어요. 앞으로 그렇게 인사 안 받을게요.”
“정말?”
“응, 원래 받을 생각도 없었어요. 내가 팔을 치우기도 전에 당신이 그 사람 팔 잡은 거예요. 옆에 남편을 두고 그런 걸 허락하겠어요, 내가.”
수림은 그제야 환히 웃었다. 별것도 아닌 말에 환히 웃는 그가 귀여워 연화도 마주 웃어 주었다.
“있잖아요,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연화의 질문에 수림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화는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뭔가 해 주고 싶어서요.”
“…….”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요.”
수림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 끝에 심각해진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약속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의 태도는 자못 비장했다. 연화는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모아 놓은 재산을 되짚어 보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림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는…….”
“…….”
“그 팔찌, 갖고 싶습니다.”
“이거요?”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바라보는 시선과 덤덤한 말에 맥이 빠졌다.
“이건 당신이 준 거잖아요.”
“뭐든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싫어요.”
“약속 지키셔야죠.”
수림은 손을 내밀었다. 기가 막혀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의 태도는 완고했다.
“주세요.”
3년간 한시도 빠짐없이 차고 다녀 이제는 연화의 분신 같은 팔찌였다. 내어 주기 아쉬웠지만, 그는 제 뜻을 정정할 생각이 없는지 단호한 얼굴이었다.
연화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그가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냈다.
“다 낡은 팔찌를 가져가서 뭐 하려구요.”
수림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다른 거 필요 없어요? 이런 거 말고 좀 물질적인 거 있잖아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사 달라고 해도 돼요. 나도 뭔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쉬움이 담긴 연화의 말에 수림은 고민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중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이요?”
“생각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연화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림은 아이처럼 맑게 웃는 연화가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하면 쑥스러워할 것 같아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밝아진 분위기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수림은 연화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계속 그녀를 챙겨 주었다.
“저 남자, 수배범이랑 닮지 않았어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부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수림 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연화가 그 사람들을 보며 표정을 굳히자, 수림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 화가 나기보단 연화가 상처를 받을까 신경이 쓰였다.
“어쩌자고 죄수들을 다 풀어 준 걸까요? 살인을 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나라가 어찌 되려고.”
여자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연화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말아 쥔 손끝이 잘게 떨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를 정하는 기준도 다르다. 누군가는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또 어떤 누군가는 윤리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의 다양성만큼이나 가치를 두는 기준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기에, 손에 피를 묻히며 항일 운동을 했던 수림이 좋은 얘기만 듣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인다는 윤리나 따지고 있기에는 그 사람들의 죄가 너무 큽니다.’
하지만 수림은 약자를 귀하게 여겼다. 나라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피해 볼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용납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윤리를 깨부수고 나라를 망가트린 이들을 상대로 윤리가 무슨 소용인지 의문이었다.
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여자는 약자들의 고통을 한 번도 감내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제에 붙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다 해방이 되어서도 아무 죄책감 없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연화는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수림이 겪은 고통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느냐고. 하지만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연화를 위해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구태여 소란을 만들어 그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연화는 수림의 손을 잡고 곧장 식당을 빠져나왔다.
다시 돌아온 호텔 방 안에는 불안정한 침묵이 흘렀다. 연화는 벽면에 기대어 숨을 내쉬었다. 고르게 호흡을 내쉬려 애썼으나, 흐트러진 호흡만 빠져나왔다.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고 슬픔과 화를 삭였다. 그러나 너무 화가 나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고작 이것이었다. 무지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이 그가 나라를 위해 싸운 대가였다.
수림은 연화의 팔을 잡아 내리고,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안타까움으로 깊이 가라앉은 눈이 연화를 응시했다. 그는 연화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입술을 훑었다.
“깨물지 말아요.”
“당신은 화도 안 나요?”
“부인께서 제 편을 들어 주시는데 화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기쁘지.”
그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더 화가 나고 슬펐다. 수림에겐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화는 손을 들어 수림의 팔을 쓸어내렸다. 얇은 옷감 아래로 거친 흉터 자국이 느껴졌다. 더없이 참담한 기분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
“지금 저만큼 행복한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을 거예요.”
수림의 말에도 연화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숙여 연화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고운 눈망울에 아직도 슬픔이 고여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에 입을 맞추자 긴 속눈썹이 짧게 진동했다. 그는 연화를 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괜찮대도.”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따스한 품 안에서 연화는 슬픔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한참 뒤에야 수림은 품에서 그녀를 떨어트리고,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까 제 부탁 다 들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부탁 지금 쓰겠습니다.”
“……뭔데요?”
“그만 슬퍼하세요.”
“그런 사소한 부탁 들어주려고 말한 게 아니에요.”
연화는 기대감을 잃고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수림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사소하지 않은데요. 급합니다.”
진지하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한 음성에 연화가 피식 웃자 수림은 안도했다.
“안 슬퍼할 테니까, 그거는 부탁으로 쓰지 말아요.”
“아직 슬퍼 보이시는데요.”
“안 슬퍼요. 봐요.”
연화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수림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웃음이 고여 있는 연화의 입꼬리에 입을 맞추고는,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지금의 행복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 말처럼 그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연화는 안도하며 맑게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예뻐서, 수림은 연화의 뺨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뺨에 있던 입술은 이마와 코끝, 눈가에 차근히 내려앉았다.
그는 자연스레 연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연화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수림의 목을 껴안으며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그는 느릿하게 연화의 입술 틈을 파고들었다.
입맞춤은 차츰 깊숙해졌고, 호흡은 서서히 급박해졌다. 맞닿은 체온이 너무도 따스해서 두 사람의 마음은 크게 일렁였다.
수림은 간신히 입술을 떼고 짙어진 눈으로 연화를 응시했다. 맑은 눈동자 안에서는 끊임없이 감정의 파문이 일고 있었다. 시선이 얽히자 서로를 향한 감정도 뒤엉키는 듯했다.
수림은 자신의 목에 감겨 있는 연화의 팔을 풀어내고는,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 아래에서 그녀의 맥박은 제 감정을 드러내며 빠르게 요동쳤다.
“오늘은…….”
그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늦게까지 같이 있어요.”
그가 시선을 들어 연화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처럼 짙은 눈동자는 흐트러짐 없이 집요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마음을 뒤흔들 만큼 유혹적인 시선이었다.
연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수림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손등 위로 지그시 입을 맞추었다.
그는 연화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연화는 결코 모를 집착적인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등 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연화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하나씩 줄여 나가는 중이었다. 수림과 너무 오래 시간을 보낸 탓에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버렸다.
피로감이 몰려들어 연화는 안경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계속 같은 자세로 글씨를 들여다본 탓에 눈도 시리고 허리도 아팠다.
다시 일을 하려는데, 갑자기 테라스 쪽에서 부스럭,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밤중에 들릴 만한 소리가 아니었기에 연화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히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사람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빠르게 다가온 인영이 손바닥으로 연화의 입을 막았다. 무섭게 나타난 것치고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접니다, 저예요. 놀라지 말아요.”
수림의 목소리였다. 연화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연화의 입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뭐예요! 왜 여기에 있어요? 놀랐잖아요!”
수림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귓바퀴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이 안 와서…….”
“그런 변명할 거면 그냥 하지 마요.”
“진짭니다.”
“…….”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왔어요.”
조심스러운 말에 연화는 놀랐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왜 문 놔두고 여기로 몰래 들어와요? 도둑인 줄 알았잖아요.”
“이 시간에 오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렇게 몰래 들어오는 건 예의예요?”
수림은 민망한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잖아요. 떨어지면 어쩌려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거든요.”
“말이나 못 하면…… 그래도 다음부터는 문으로 와요. 놀랐잖아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수림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는 연화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요?”
“들어가면 돌아가기 싫을 것 같아서요. 사실 드릴 게 있어서 온 겁니다.”
연화는 의아한 눈으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연화의 손목에 그것을 채워 주었다. 붉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얇은 은팔찌였다.
“다 낡은 팔찌가 당신 손에 걸려 있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연화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낡은 팔찌를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 팔찌는 제가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거 보면서, 당신이 기다려 주었던 시간들을 생각할게요.”
팔찌를 다 채워 준 수림은 고개를 들어 다정한 시선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요?”
연화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런 거 고르는 안목은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예쁩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낮에 팔찌를 가져간 모양이다. 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받기만 했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난 준 것도 없는데…….”
“아닙니다. 저도 많이 받았습니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그가 심적으로 무언가를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연화는 자신도 알 수 있는 것을 그에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나도 알 수 있는 걸 당신한테 해 주고 싶단 말이에요.”
연화는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수림은 생각에 잠긴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낮에 부탁 들어주시겠다고 한 거, 지금 들어주세요.”
“뭔데요?”
수림은 한참 동안 대답 없이 연화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새벽의 달빛이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오랜 시간 연화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선을 떠나면, 한집에서 살아요. 식구들이랑 다 같이.”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같은 방도 써 주세요.”
“그것도 당연해요.”
“매일 밥도 같이 먹고.”
“그것도.”
“하루에 한 번씩 손잡고 같이 걸어요.”
그의 목소리는 새벽처럼 조용하고 담담했다.
“대화도 많이 하고, 웃는 얼굴도 매일 보여 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 주고.”
“…….”
“매일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연화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수림의 눈이 엷게 젖어 든 탓이다. 그동안 평범한 일상마저도 욕심으로 치부하며 외면했을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알았어요. 부탁 꼭 들어줄게요.”
“정말?”
“응, 정말. 평생 해 줄게요.”
수림은 엷게 젖은 눈을 하고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연화는 팔을 뻗어 그를 안아 주었다.
“다시 와 줘서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는 힘주어 연화를 꼭 끌어안았다. 따스한 품이 벅차도록 좋아서 그녀는 수림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너무도 따스하고 행복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림은 연화가 약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늦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을 다독이듯 감싸 안았다. 평화롭고 온화한 계절이었다.
두 사람은 서양식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한 사람은 수림과 연화뿐이었다. 수림은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연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연화는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귀여워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실 화가 난 게 아니라 수림의 반응이 귀여워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수림은 연화를 달래려 제 몫의 음식을 그녀의 그릇 위로 덜어 주었다.
“화나셨습니까.”
연화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께 화났던 게 아닙니다. 그 사람한테 화가 났던 거지 부인께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수림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으나, 연화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식사도 하지 않고 빤히 연화만 바라보았다.
“됐으니까 밥 먹어요.”
“당신 화나게 만들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겠어요.”
수림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제 몫까지 드세요. 전 안 먹겠습니다.”
투정 같은 행동이 귀여워 연화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에 메마른 사막 같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화가 웃자 수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화 풀리신 겁니까.”
“아뇨?”
“웃었잖아요.”
“그냥 웃은 거지 화가 풀린 건 아니에요.”
“……화 푸세요. 제가 미안합니다.”
좀 더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기운 없는 얼굴을 보니 더 놀릴 수가 없었다.
“당신이 밥 다 먹으면 생각해 볼게요.”
연화의 말에 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고 또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다 먹으라니까요?”
“화 푸시는 것보다는 많이 드시는 게 더 좋아서요.”
연화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그런 연화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렇게 인사 안 받으시면 안 됩니까.”
“왜요?”
연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물었다.
“질투 납니다.”
수림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모른 척했던 것인데, 예상외로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거, 저는 싫습니다. 다른 사내가 당신이랑 접촉하는 것도 싫고.”
솔직한 말에 연화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수림은 멍하니 있는 연화에게 음식을 건네주었다.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자 그는 다정히 웃었다.
“알았어요. 앞으로 그렇게 인사 안 받을게요.”
“정말?”
“응, 원래 받을 생각도 없었어요. 내가 팔을 치우기도 전에 당신이 그 사람 팔 잡은 거예요. 옆에 남편을 두고 그런 걸 허락하겠어요, 내가.”
수림은 그제야 환히 웃었다. 별것도 아닌 말에 환히 웃는 그가 귀여워 연화도 마주 웃어 주었다.
“있잖아요,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연화의 질문에 수림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화는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뭔가 해 주고 싶어서요.”
“…….”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요.”
수림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 끝에 심각해진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약속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의 태도는 자못 비장했다. 연화는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모아 놓은 재산을 되짚어 보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림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는…….”
“…….”
“그 팔찌, 갖고 싶습니다.”
“이거요?”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바라보는 시선과 덤덤한 말에 맥이 빠졌다.
“이건 당신이 준 거잖아요.”
“뭐든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싫어요.”
“약속 지키셔야죠.”
수림은 손을 내밀었다. 기가 막혀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의 태도는 완고했다.
“주세요.”
3년간 한시도 빠짐없이 차고 다녀 이제는 연화의 분신 같은 팔찌였다. 내어 주기 아쉬웠지만, 그는 제 뜻을 정정할 생각이 없는지 단호한 얼굴이었다.
연화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그가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냈다.
“다 낡은 팔찌를 가져가서 뭐 하려구요.”
수림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다른 거 필요 없어요? 이런 거 말고 좀 물질적인 거 있잖아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사 달라고 해도 돼요. 나도 뭔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쉬움이 담긴 연화의 말에 수림은 고민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중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이요?”
“생각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연화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림은 아이처럼 맑게 웃는 연화가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하면 쑥스러워할 것 같아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밝아진 분위기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수림은 연화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계속 그녀를 챙겨 주었다.
“저 남자, 수배범이랑 닮지 않았어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부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수림 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연화가 그 사람들을 보며 표정을 굳히자, 수림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 화가 나기보단 연화가 상처를 받을까 신경이 쓰였다.
“어쩌자고 죄수들을 다 풀어 준 걸까요? 살인을 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나라가 어찌 되려고.”
여자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연화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말아 쥔 손끝이 잘게 떨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를 정하는 기준도 다르다. 누군가는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또 어떤 누군가는 윤리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의 다양성만큼이나 가치를 두는 기준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기에, 손에 피를 묻히며 항일 운동을 했던 수림이 좋은 얘기만 듣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인다는 윤리나 따지고 있기에는 그 사람들의 죄가 너무 큽니다.’
하지만 수림은 약자를 귀하게 여겼다. 나라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피해 볼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용납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윤리를 깨부수고 나라를 망가트린 이들을 상대로 윤리가 무슨 소용인지 의문이었다.
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여자는 약자들의 고통을 한 번도 감내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제에 붙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다 해방이 되어서도 아무 죄책감 없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연화는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수림이 겪은 고통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느냐고. 하지만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연화를 위해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구태여 소란을 만들어 그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연화는 수림의 손을 잡고 곧장 식당을 빠져나왔다.
다시 돌아온 호텔 방 안에는 불안정한 침묵이 흘렀다. 연화는 벽면에 기대어 숨을 내쉬었다. 고르게 호흡을 내쉬려 애썼으나, 흐트러진 호흡만 빠져나왔다.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고 슬픔과 화를 삭였다. 그러나 너무 화가 나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고작 이것이었다. 무지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이 그가 나라를 위해 싸운 대가였다.
수림은 연화의 팔을 잡아 내리고,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안타까움으로 깊이 가라앉은 눈이 연화를 응시했다. 그는 연화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입술을 훑었다.
“깨물지 말아요.”
“당신은 화도 안 나요?”
“부인께서 제 편을 들어 주시는데 화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기쁘지.”
그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더 화가 나고 슬펐다. 수림에겐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화는 손을 들어 수림의 팔을 쓸어내렸다. 얇은 옷감 아래로 거친 흉터 자국이 느껴졌다. 더없이 참담한 기분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
“지금 저만큼 행복한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을 거예요.”
수림의 말에도 연화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숙여 연화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고운 눈망울에 아직도 슬픔이 고여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에 입을 맞추자 긴 속눈썹이 짧게 진동했다. 그는 연화를 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괜찮대도.”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따스한 품 안에서 연화는 슬픔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한참 뒤에야 수림은 품에서 그녀를 떨어트리고,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까 제 부탁 다 들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부탁 지금 쓰겠습니다.”
“……뭔데요?”
“그만 슬퍼하세요.”
“그런 사소한 부탁 들어주려고 말한 게 아니에요.”
연화는 기대감을 잃고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수림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사소하지 않은데요. 급합니다.”
진지하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한 음성에 연화가 피식 웃자 수림은 안도했다.
“안 슬퍼할 테니까, 그거는 부탁으로 쓰지 말아요.”
“아직 슬퍼 보이시는데요.”
“안 슬퍼요. 봐요.”
연화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수림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웃음이 고여 있는 연화의 입꼬리에 입을 맞추고는,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지금의 행복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 말처럼 그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연화는 안도하며 맑게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예뻐서, 수림은 연화의 뺨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뺨에 있던 입술은 이마와 코끝, 눈가에 차근히 내려앉았다.
그는 자연스레 연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연화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수림의 목을 껴안으며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그는 느릿하게 연화의 입술 틈을 파고들었다.
입맞춤은 차츰 깊숙해졌고, 호흡은 서서히 급박해졌다. 맞닿은 체온이 너무도 따스해서 두 사람의 마음은 크게 일렁였다.
수림은 간신히 입술을 떼고 짙어진 눈으로 연화를 응시했다. 맑은 눈동자 안에서는 끊임없이 감정의 파문이 일고 있었다. 시선이 얽히자 서로를 향한 감정도 뒤엉키는 듯했다.
수림은 자신의 목에 감겨 있는 연화의 팔을 풀어내고는,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 아래에서 그녀의 맥박은 제 감정을 드러내며 빠르게 요동쳤다.
“오늘은…….”
그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늦게까지 같이 있어요.”
그가 시선을 들어 연화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처럼 짙은 눈동자는 흐트러짐 없이 집요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마음을 뒤흔들 만큼 유혹적인 시선이었다.
연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수림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손등 위로 지그시 입을 맞추었다.
그는 연화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연화는 결코 모를 집착적인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등 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연화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하나씩 줄여 나가는 중이었다. 수림과 너무 오래 시간을 보낸 탓에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버렸다.
피로감이 몰려들어 연화는 안경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계속 같은 자세로 글씨를 들여다본 탓에 눈도 시리고 허리도 아팠다.
다시 일을 하려는데, 갑자기 테라스 쪽에서 부스럭,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밤중에 들릴 만한 소리가 아니었기에 연화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히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사람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빠르게 다가온 인영이 손바닥으로 연화의 입을 막았다. 무섭게 나타난 것치고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접니다, 저예요. 놀라지 말아요.”
수림의 목소리였다. 연화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연화의 입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뭐예요! 왜 여기에 있어요? 놀랐잖아요!”
수림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귓바퀴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이 안 와서…….”
“그런 변명할 거면 그냥 하지 마요.”
“진짭니다.”
“…….”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왔어요.”
조심스러운 말에 연화는 놀랐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왜 문 놔두고 여기로 몰래 들어와요? 도둑인 줄 알았잖아요.”
“이 시간에 오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렇게 몰래 들어오는 건 예의예요?”
수림은 민망한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잖아요. 떨어지면 어쩌려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거든요.”
“말이나 못 하면…… 그래도 다음부터는 문으로 와요. 놀랐잖아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수림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는 연화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요?”
“들어가면 돌아가기 싫을 것 같아서요. 사실 드릴 게 있어서 온 겁니다.”
연화는 의아한 눈으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연화의 손목에 그것을 채워 주었다. 붉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얇은 은팔찌였다.
“다 낡은 팔찌가 당신 손에 걸려 있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연화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낡은 팔찌를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 팔찌는 제가 잘 간직하겠습니다. 그거 보면서, 당신이 기다려 주었던 시간들을 생각할게요.”
팔찌를 다 채워 준 수림은 고개를 들어 다정한 시선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요?”
연화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런 거 고르는 안목은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예쁩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낮에 팔찌를 가져간 모양이다. 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받기만 했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난 준 것도 없는데…….”
“아닙니다. 저도 많이 받았습니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그가 심적으로 무언가를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연화는 자신도 알 수 있는 것을 그에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나도 알 수 있는 걸 당신한테 해 주고 싶단 말이에요.”
연화는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수림은 생각에 잠긴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낮에 부탁 들어주시겠다고 한 거, 지금 들어주세요.”
“뭔데요?”
수림은 한참 동안 대답 없이 연화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새벽의 달빛이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오랜 시간 연화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선을 떠나면, 한집에서 살아요. 식구들이랑 다 같이.”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같은 방도 써 주세요.”
“그것도 당연해요.”
“매일 밥도 같이 먹고.”
“그것도.”
“하루에 한 번씩 손잡고 같이 걸어요.”
그의 목소리는 새벽처럼 조용하고 담담했다.
“대화도 많이 하고, 웃는 얼굴도 매일 보여 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 주고.”
“…….”
“매일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연화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수림의 눈이 엷게 젖어 든 탓이다. 그동안 평범한 일상마저도 욕심으로 치부하며 외면했을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알았어요. 부탁 꼭 들어줄게요.”
“정말?”
“응, 정말. 평생 해 줄게요.”
수림은 엷게 젖은 눈을 하고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연화는 팔을 뻗어 그를 안아 주었다.
“다시 와 줘서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는 힘주어 연화를 꼭 끌어안았다. 따스한 품이 벅차도록 좋아서 그녀는 수림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너무도 따스하고 행복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림은 연화가 약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늦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을 다독이듯 감싸 안았다. 평화롭고 온화한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