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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 2장 두 사람





내리쬐는 햇볕에 아직 여름의 기미가 남아 있다. 추분(秋分)이 지나고, 10월을 맞이할 시기였으나 날은 아직 무더웠다.

수림과 연화는 늦더위를 피해 산중턱의 계곡에 왔다. 두 사람은 커다란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바위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넣고 더위를 식혔다.

흐르는 물이 발목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아 연화는 연신 물장구를 쳤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잎의 그림자와 햇빛의 얼룩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춤추듯 움직였다.

“떠나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연화는 고개를 돌려 수림을 향해 물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부인이 좋은 곳은 다 좋습니다.”

“당신도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요……. 사실 안정적인 곳이라면 다 좋을 거 같습니다.”

딱히 바라는 것 없이 안정적인 곳만을 원한다는 그의 대답이 안타까웠다. 연화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부러 더 밝게 말했다.

“나는 상해에도 가 보고 싶어요. 덕연이가 상해 얘기를 해 줬거든요. 조선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면서요?”

“그럼 상해에도 들를까요.”

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더 시간이 흐르면 구라파(歐羅巴, 지금의 유럽) 쪽을 여행해 보고 싶어요. 언어를 배우긴 해야겠지만……. 아니면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섬도 가 보고 싶어요. 책에서 봤는데, 어떤 섬은 바다 색깔이 비취색이래요.”

“예쁘겠네요.”

“응. 아니면, 사람이 드문 곳으로 가도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이나 나나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잖아요. 사람이 많은 곳 대신 여기처럼 계곡물도 있고, 나무도 많고 풀도 많은 곳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수림은 재잘대는 연화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연화는 조금 무안해졌다. 멋쩍게 웃자 수림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좋네요.”

“뭐가요?”

“그냥, 다.”

자상한 웃음에 연화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수림은 그런 그녀를 쫓아와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차가운 계곡물로 식혔던 열기가 다시금 올라오는 듯했다. 연화가 얼굴을 붉히자 수림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부인께서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는 것 같습니다.”

“아닌데요?”

“맞는 거 같은데.”

연화는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밀어 냈다. 연화의 핀잔 섞인 손길에도 그는 햇빛처럼 환하게 웃었다.

연화는 수림의 웃는 모습이 좋아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매일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러나 수림과 연화는 여전히 따로 지내는 중이었기에 온전히 하루를 함께 보낼 수는 없었다.

수림은 자신의 처지가 아직 불안정하다 생각했고, 나라를 떠나기 전까지는 연화와 따로 지내는 게 낫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그러나 떠나는 날짜 또한 정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림도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는 듯했고, 연화 역시 회사의 책임자로서 당장은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떠날 수 없는 처지였다.

떠나는 날짜가 기약 없이 뒤로 미뤄지자, 연화는 그와 따로 산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연화를 보며 수림이 물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 언제까지 따로 지내야 해요?”

“…….”

“같이 지내면 안 돼요?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계속 따로 살 수는 없잖아요. 식구들도 다 돌아왔는데…….”

수림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직은 안 될 거 같습니다.”

그는 평소 연화에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예외였다. 그의 적이었던 사람들이 아직도 버젓이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상황인 만큼, 자신과 함께할 연화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연화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괜히 계곡물만 휘저어 댔다.

수림은 연화의 팔을 그러쥐고 옷소매를 걷어 주었다. 소매 안에서 그가 선물해 준 붉은 팔찌가 반짝였다.

“당분간 부부 말고 연인 할까요.”

연화는 고개를 들고 수림을 바라보았다. 연화의 옷소매를 정돈한 수림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연화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인도 해 봐야죠, 우리.”

연인 사이로 지내 보기 위해 따로 살자는 뜻일까. 터무니없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화는 툴툴대며 고개를 돌렸다.

“말은 잘해.”

금세 따라붙은 수림은 연화의 뺨에 입을 맞춰 왔다. 연화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로 입막음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그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냥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 * *



연화는 초조한 얼굴로 수림이 묵고 있는 호텔 방 앞을 서성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연락이 닿았던 수림과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여러 군데에 연락해 수림의 행방을 찾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사라질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서 더욱 초조하고 불안했다. 거듭되는 불안감에 연화는 손톱으로 연신 입술을 뜯었다. 피가 날 지경이 되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연화는 힘없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울렁거려 속이 좋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 스스로를 달래었지만, 그의 상황이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너무도 불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수림이 곁에서 사라진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억지로라도 그를 곁에 두지 않았던 것이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한참 동안이나 불안에 떨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림이 서 있었다. 그는 급히 연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여기 계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입술은 왜…….”

수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긴장이 풀리며 가슴속을 어지럽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밀려들었다.

“어디 다녀온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말을 하면서 연화는 울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급히 호텔 방 안으로 이끌었다.

부축하듯 데려와 소파에 앉혀 주자 연화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수림은 연화의 앞에 앉아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너무도 미안하고 당황스러워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연화를 달래려 애썼으나, 연화는 쉬이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수림은 자책하며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곁을 지키고 달래 준 끝에, 연화는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 코를 훌쩍이며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있었던 거예요?”

수림은 손수건으로 연화의 뺨을 닦아 주고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걸 받으러 다녀오느라 늦었습니다. 급하게 연락을 받아서…….”

연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를 건네받았다. 펼쳐 본 종이에는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 위로 임시 정부를 돕기 위해 자금을 지원했던 기업이 나열되어 있었다. 연화의 회사도 있었고, 그녀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수림을 생각하며 연화는 지난 3년간 윤을 통해 주기적으로 구국 운동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었다. 수림은 그걸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일 집안의 자식이었으니 해방이 된 지금 연화의 처지도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서류는 연화와 그녀의 아버지의 사상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가 되어 줄 터였다.

연화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자신을 위해 나서 준 수림에게 고마웠으나, 제발 나보다는 본인을 신경 써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진정 연화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수림의 성의를 생각하여 그를 더 나무라지는 못했다.

“급하게 나가면서 호텔 직원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연락이 안 갔나 보네요. 제가 직접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수림은 가라앉은 얼굴로 연화의 눈 밑에 남아 있는 눈물을 손끝으로 거두었다.

“미안합니다.”

“됐어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연화의 눈가는 아직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얼마나 뜯었는지 피딱지가 앉았다. 수림은 자리에서 일어서 연화의 입술에 바를 만한 약을 가져왔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입술에 약을 발라 주었다.

“고운 입술을 이 지경으로 만드시면 어떡합니까.”

나무라는 어투였으나,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연화는 아직까지 큰 불안감을 안고 있는 듯 보였다. 3년 전에 그가 갑작스럽게 떠났던 일이 그녀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연화는 말없이 그의 손길을 받기만 했다. 그가 약을 다 발라 주고 난 후에야 조심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 알아요.”

“…….”

“근데 나도 당신이 걱정돼요.”

수림은 차분히 연화의 말을 경청했다. 연화의 눈은 짙은 슬픔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이 나를 떠났을 때, 당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내 원망을 더 많이 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약해서 당신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까, 하면서.”

“…….”

“근데 지금의 나는 아니에요. 나 스스로도 지킬 수 있고, 당신도 지켜 줄 수 있어요.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

“나는 당신이 나랑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수림은 따스한 손으로 연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직 울음의 여운이 남아 있는 눈동자가 흔들리며 수림을 응시했다.

“당신이 약해서 떠났던 게 아닙니다.”

“…….”

“지금도 당신이 강하지 않아서 떨어져 지내는 게 아니에요. 너무 아껴서 그러는 거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연화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수림은 안타까운 눈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화를 내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눈물을 보이니 더 가슴이 쓰렸다. 그간 연화를 위해 그녀와 떨어져 지내 왔으나, 그게 정말로 연화를 위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울지 마세요. 부인 뜻대로 하겠습니다.”

연화는 놀란 눈으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울려 놓고 어떻게 말을 안 듣겠어요.”

수림은 손끝으로 연화의 눈물을 거두었다. 연화는 그제야 환히 미소 지었다. 수림은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수림은 걸음을 멈춘 채 방 안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이전보다 더 커진 침대가 있었고, 그가 조선을 떠났을 때 두고 갔던 책이나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더 꾸미고 싶었는데, 여기엔 오래 못 있을 테니까 간단하게만 들여왔어요.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연화가 수림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충분해요.”

수림은 연화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이 한데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함께하게 됐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연화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딱히 한 일도 없어요.”

연화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데,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네.”

“나한테 말 낮춰도 괜찮아요. 내가 당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편하게 말해도 돼요.”

조용히 연화를 바라보던 수림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럴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당황한 연화가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수림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에요.”

“……좀 적응이 안 되긴 하는데 괜찮아요.”

“그냥 존댓말 쓰겠습니다.”

“왜요?”

“귀한 사람이니 귀하게 대하고 싶어서요.”

예상치 못한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수림은 한 걸음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 탓에 연화의 시선이 방황했다. 그녀는 수림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연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수림은 그녀를 제 품에 가득 안았다.

“부인.”

“왜요?”

“제 이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이름이요?”

“네.”

연화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수림아?”

어색한 말투에 수림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 같은 웃음이 연화의 어깨를 간질였다. 그는 자상한 손길로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옆에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

“고마워, 연화야.”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연화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존댓말 쓴다면서요.”

“방금은 예외예요.”

“왜 예외예요?”

“좋아서 죽을 거 같을 때는 예외예요.”

이상한 논리가 귀엽고 우스워서 연화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은 연화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말간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