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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제 3장 편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수림의 얼굴을 마주하면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늘 홀로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익숙했기 때문인지, 고요히 잠든 그의 모습이 마치 환영처럼 느껴지곤 했다.
손을 뻗어 수림의 뺨을 감싸자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 맞닿았다. 연화의 손길을 느낀 수림의 속눈썹이 진동하더니 그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해서 황급히 손을 떼려 했으나, 그전에 수림이 연화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잘 잤어요?”
그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막 일어난 탓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잘 잤어요. 당신은요?”
“저도 잘 잤습니다.”
헝클어진 머리가 귀여워 연화는 배시시 웃었다. 수림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고여 있었다.
“더 자요. 깨워서 미안해요.”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수림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더 자라니깐.”
수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었지만, 연화의 기상 시간에 맞추어 늘 함께 일어나곤 했다. 연화의 출근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수림은 연화에게 출퇴근길에 함께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연화는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며 그를 만류했다. 아쉬운 마음에 그는 집 앞까지라도 꼬박꼬박 연화를 배웅하기로 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연화가 출근 준비를 다 하고 나면 수림은 대문까지 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늘 비슷한 당부를 했다.
“무슨 일 생기면 꼭 집으로 연락하셔야 됩니다.”
“알았어요.”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수림의 당부에 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입을 맞추고 출근을 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늘 결여되었던,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연화가 출근을 하고 나서도 수림은 딱히 쉬거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진주의 공부를 돕기도 했고, 집 안의 망가진 물건들을 고치기도 했으며, 식구들을 도와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수림의 일이었다. 언젠가 정원에 핀 꽃을 솎아 탁자의 화병에 꽂아 두었더니, 연화가 무척 좋아해서 그 뒤로 정원 관리는 수림의 일이 되었다.
진주와 함께 장에 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는 간혹 이상한 물건을 사 와서 연화에게 전해 주곤 했다.
‘이건 왜 사 왔어요?’
어느 날 수림이 정체불명의 장식품을 사다 주어 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무역업을 시작한 뒤로 연화는 각 나라의 문화가 담긴 특이한 물건들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속사정을 몰랐던 수림은 연화가 그저 특이한 물건을 좋아한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연화는 수림의 성의를 생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척을 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어쨌든 연화는 그의 삶이 변한 것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밀랍인형 같을 만큼 서늘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소매에 피를 묻히고 오기도 하고, 크게 다쳐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 겪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정원의 풀 냄새와 꽃향기를 묻히고 다니고,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장을 보러 다닌다. 연화는 그가 평범한 삶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았다.
감사하게도 평범한 일상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간 수림은 정원에 핀 소국을 연화에게 선물했고, 망가진 서랍장 하나를 고쳤으며, 진주와 함께 장에 가서 이상한 모양의 시계를 하나 사 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연화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행복에 겨워하느라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음을 알아챘다. 수림과 재회한 뒤로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혹 자신이 출근했을 때 글을 쓰는 건 아닌지 집안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식구들 역시 수림이 글을 쓰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수림이 글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예전에 그가 쓴 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전보다는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고, 이젠 일에 치이는 상황도 아닌데 왜 그토록 좋아하던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냥, 잘 못 쓰게 되었습니다.’
연화는 예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의 수림이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연화는 수림이 아직까지 혼란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얼마 전에 그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그가 달가워할 만한 내용이 아님은 분명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도 잠시, 이 나라에 찾아온 것은 더 큰 혼란이었다. 38선을 경계로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들어서 신탁 통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를 둘러싼 반탁 운동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물가는 치솟고, 실직자들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식량은 부족해졌다. 하다못해 전염병마저 도는 상황이었다.
현 시대는 그가 글을 쓰면서 희망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연화는 걱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에는 글 안 써요?”
퇴근하고 돌아온 연화는 수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책상 위에 놓인 말린 소국을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글 쓰는 거 좋아했잖아요.”
“부인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싱그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연화는 제가 하려던 말을 잊어 버렸다. 수림이 저런 말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아 민망할 지경이었다.
수림은 쑥스러워하는 연화를 웃는 얼굴로 다정히 바라보다가 다시 꽃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수림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요.”
“네.”
“나랑 편지 주고받을래요?”
“편지요?”
뜬금없는 연화의 말에 수림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우리는 먼저 결혼부터 해서 연인 관계였던 적이 없다고.”
“그랬죠.”
“사실 예전에 꿈이었거든요. 자유연애 하면서 편지 주고받는 거.”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장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집안에서 자라면서 그런 것을 꿈꿔 봤을 리가 없다.
그저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수림이 다시 글을 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고, 혹 고민이 있다면 조금 더 쉽게 털어놓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편지를 쓰면 얼굴 보고는 하기 어려운 말도 쉽게 할 수 있잖아요. 고민 같은 거나…….”
“고민 있으세요?”
수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아니. 고민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예를 든 거예요.”
“…….”
“어때요? 나는 편지 주고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연화는 제 거짓말이 탄로 날까 노심초사하며 물었으나, 수림은 거짓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쑥스러워하는 연화가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그는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수림의 대답에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 * *
연화의 사무실로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편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문인 수림의 연애편지를 받는 사람이 저 혼자뿐이라 생각하니 무척 들뜨고 기뻤다.
편지를 펼치자 수림의 성품을 닮은 정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첫 문단부터 수림의 쑥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어 연화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글을 쓰는 일이 어느 때보다 어렵게 느껴지네요. 여태껏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내는 글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부인께 편지를 쓰며 마음을 전하는 글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글은 수림다웠다. 연화는 본래의 목적도 잊고 집중해서 그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어 내릴수록 그녀의 눈시울이 차츰 붉어졌다.
「영원을 바란 적도 있으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시적이네요. 제게 주어진 한 번의 생 동안 늘 당신의 행복을 고려하며 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지막 문단을 읽고 나서 연화는 코를 훌쩍였다. 사무실이 아니었더라면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담은 글이 이토록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수림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진심으로 대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연화의 마음은 뭉클해졌다. 그를 위해 편지를 주고받자고 한 것이었는데, 자신이 더 위로를 받아 버리고 말았다.
수림의 편지를 몇 차례나 다시 읽었다. 어쩐지 자신이 쓴 편지는 그의 편지에 비하면 너무도 부족하고 초라한 것 같았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 몇 번씩이나 고쳐 썼지만, 좀 더 열심히 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무래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연화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연화의 다급한 말을 들은 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안타깝게도 편지를 먼저 받은 사람은 수림이었다.
수림은 방으로 들어와 의아한 얼굴로 우편물을 바라보았다. 우편은 편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고 묵직한 서류 봉투였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책 한 권과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책을 꺼낸 수림은 책표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에 수려하게 적힌 글자는 예전에 그가 썼던 소설의 제목과 같았다.
책을 펼쳐 안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제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같았다. 10년도 더 전에 수림이 신문사를 통해 연재했던 그 소설이었다.
이것과 같은 내용의 책이 지금 단 한 권, 수림의 서재에 남아 있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으며 세간에는 미완의 작품으로 알려진 글이지만, 수림의 양아버지가 너무나 아까운 글이라며 완결을 받아 소량의 책으로 만들어 주셨다.
연화가 그 책을 가장 아껴 정성스럽게 보관을 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많이 낡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책은 완전히 새것이었다. 게다가 꽤나 공들여 만들어진 듯했다. 표지는 양장이었고, 내지는 좋은 종이를 썼는지 탄력 있고 부드러웠다. 또 이전의 책보다 글씨체와 문단이 잘 정돈되어 있어 읽기도 편했다.
수림은 연화가 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했는지 의아했다.
‘요즘에는 글 안 써요?’
문득 연화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글을 쓰지 않아 걱정했던 걸까. 수림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어릴 적에는 글을 참 열심히 썼다. 어둡고 좁은 방에서, 낡은 전등에 의지한 채 날이 밝아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글을 쓰곤 했다. 그때는 글로서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희망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으니까.
그러나 현실과 직면한 뒤 그는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단순히 글자를 나열하는 일만으로 변화를 소망하기엔 세상이 너무도 녹록치 않았다. 무언가 적을수록 짙어지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그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책을 내려 두고 함께 들어 있던 편지 봉투를 열었다. 성숙하고 미려한 필체가 편지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수림에게.」
몇 안 되는 단어만으로도 자신에게 이렇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연화뿐이리라. 그는 자신이 했던 고민을 모두 잊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들자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는 연화가 보였다.
“일찍 오셨…….”
“그거 아직 읽지 마요! 다시 쓸 거예요.”
수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화는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편지를 빼앗으려는 듯 팔을 들었다. 그는 편지를 든 팔을 높이 들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다시 씁니까.”
“다시 쓰고 싶으니까요. 이리 줘요.”
“저는 이 편지가 읽고 싶은데요.”
“일단 줘요! 더 잘 써 줄 테니까…….”
연화는 조급히 말하며 팔을 뻗었으나, 수림은 편지를 쉽게 내어 주지 않았다. 읽다 만 편지의 뒷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화는 편지를 잡으려는 듯 자꾸만 손을 뻗었다. 그는 여태껏 힘으로 연화를 대했던 적이 없었지만, 편지를 마저 읽고 싶어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버둥거리는 연화의 행동을 속박한 채 그녀의 어깨너머로 편지를 읽었다.
“이리 주라니까요!”
“다 읽고 드리겠습니다.”
수림은 연화를 달래듯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림의 눈동자는 여전히 편지지 위의 글자들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당신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까 걱정이 돼요. 이기적일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바깥세상에 대한 것보다는 당신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원하던 걸 되찾길 바라요.」
편지에는 연화의 걱정과 염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가 책을 선물한 건 수림이 외부 상황에 흔들리기보다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길 바랐기 때문이었나 보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내 곁으로 와 줘서 고마워요.」
연화는 자신의 편지를 잘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글을 쓴 사람의 감정이 온전히 느껴지는 글이야말로 그에겐 좋은 글이었다.
“부인께서는 글을 쓸 때 솔직해지시네요. 앞으로 자주 편지 주고받아야겠습니다.”
수림은 연화를 꼭 끌어안았다.
“선물 고맙습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연화를 안고 있기만 했다. 그녀에게 걱정을 시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감정이 교차했다.
“제가 글을 안 써서 걱정되셨어요?”
가만히 멈추어 있던 연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글을 쓰지 못하는 거예요?”
수림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연화가 수림의 품에서 벗어나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제가 가졌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
“아무것도 나아진 것 같지 않아요.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화는 조금 놀란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 부모님을 잃고, 함께하던 사람들도 떠나보내고. 그토록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을까요.”
“…….”
“당신을 괴롭게 만들면서까지 제가 얻으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래로 내려앉은 눈매엔 슬픔이 드리워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한없이 선하기 때문이리라.
연화는 손을 들어 수림의 뺨을 감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연화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네?”
연화의 말에 수림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당신의 신념이 나를 살리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거예요.”
“…….”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당장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한 일은 분명 누군가한테 도움이 됐을 거예요.”
“…….”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분명 더 나아질 거예요. 의미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화는 위로하듯 수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한테 당신은 자랑스럽고 멋진 사람이에요.”
수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화가 자신을 위해 주는 것만으로도 텅 비어 있던 가슴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금 연화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연화의 말을 무턱대고 믿고 싶었다. 연화가 자신의 편이 되어만 준다면 실제의 상황이 어떠하든, 자신이 어떻게 망가지든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연화의 존재는 수림에게 너무도 귀했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
제 3장 편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수림의 얼굴을 마주하면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늘 홀로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익숙했기 때문인지, 고요히 잠든 그의 모습이 마치 환영처럼 느껴지곤 했다.
손을 뻗어 수림의 뺨을 감싸자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 맞닿았다. 연화의 손길을 느낀 수림의 속눈썹이 진동하더니 그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해서 황급히 손을 떼려 했으나, 그전에 수림이 연화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잘 잤어요?”
그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막 일어난 탓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잘 잤어요. 당신은요?”
“저도 잘 잤습니다.”
헝클어진 머리가 귀여워 연화는 배시시 웃었다. 수림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고여 있었다.
“더 자요. 깨워서 미안해요.”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수림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더 자라니깐.”
수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었지만, 연화의 기상 시간에 맞추어 늘 함께 일어나곤 했다. 연화의 출근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수림은 연화에게 출퇴근길에 함께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연화는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며 그를 만류했다. 아쉬운 마음에 그는 집 앞까지라도 꼬박꼬박 연화를 배웅하기로 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연화가 출근 준비를 다 하고 나면 수림은 대문까지 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늘 비슷한 당부를 했다.
“무슨 일 생기면 꼭 집으로 연락하셔야 됩니다.”
“알았어요.”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수림의 당부에 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입을 맞추고 출근을 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늘 결여되었던,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연화가 출근을 하고 나서도 수림은 딱히 쉬거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진주의 공부를 돕기도 했고, 집 안의 망가진 물건들을 고치기도 했으며, 식구들을 도와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수림의 일이었다. 언젠가 정원에 핀 꽃을 솎아 탁자의 화병에 꽂아 두었더니, 연화가 무척 좋아해서 그 뒤로 정원 관리는 수림의 일이 되었다.
진주와 함께 장에 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는 간혹 이상한 물건을 사 와서 연화에게 전해 주곤 했다.
‘이건 왜 사 왔어요?’
어느 날 수림이 정체불명의 장식품을 사다 주어 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무역업을 시작한 뒤로 연화는 각 나라의 문화가 담긴 특이한 물건들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속사정을 몰랐던 수림은 연화가 그저 특이한 물건을 좋아한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연화는 수림의 성의를 생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척을 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어쨌든 연화는 그의 삶이 변한 것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밀랍인형 같을 만큼 서늘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소매에 피를 묻히고 오기도 하고, 크게 다쳐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 겪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정원의 풀 냄새와 꽃향기를 묻히고 다니고,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장을 보러 다닌다. 연화는 그가 평범한 삶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았다.
감사하게도 평범한 일상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간 수림은 정원에 핀 소국을 연화에게 선물했고, 망가진 서랍장 하나를 고쳤으며, 진주와 함께 장에 가서 이상한 모양의 시계를 하나 사 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연화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행복에 겨워하느라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음을 알아챘다. 수림과 재회한 뒤로 그가 글을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혹 자신이 출근했을 때 글을 쓰는 건 아닌지 집안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식구들 역시 수림이 글을 쓰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수림이 글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예전에 그가 쓴 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전보다는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고, 이젠 일에 치이는 상황도 아닌데 왜 그토록 좋아하던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냥, 잘 못 쓰게 되었습니다.’
연화는 예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의 수림이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연화는 수림이 아직까지 혼란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얼마 전에 그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그가 달가워할 만한 내용이 아님은 분명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도 잠시, 이 나라에 찾아온 것은 더 큰 혼란이었다. 38선을 경계로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들어서 신탁 통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를 둘러싼 반탁 운동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물가는 치솟고, 실직자들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식량은 부족해졌다. 하다못해 전염병마저 도는 상황이었다.
현 시대는 그가 글을 쓰면서 희망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연화는 걱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에는 글 안 써요?”
퇴근하고 돌아온 연화는 수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책상 위에 놓인 말린 소국을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글 쓰는 거 좋아했잖아요.”
“부인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싱그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연화는 제가 하려던 말을 잊어 버렸다. 수림이 저런 말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아 민망할 지경이었다.
수림은 쑥스러워하는 연화를 웃는 얼굴로 다정히 바라보다가 다시 꽃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수림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요.”
“네.”
“나랑 편지 주고받을래요?”
“편지요?”
뜬금없는 연화의 말에 수림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우리는 먼저 결혼부터 해서 연인 관계였던 적이 없다고.”
“그랬죠.”
“사실 예전에 꿈이었거든요. 자유연애 하면서 편지 주고받는 거.”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장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집안에서 자라면서 그런 것을 꿈꿔 봤을 리가 없다.
그저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수림이 다시 글을 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고, 혹 고민이 있다면 조금 더 쉽게 털어놓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편지를 쓰면 얼굴 보고는 하기 어려운 말도 쉽게 할 수 있잖아요. 고민 같은 거나…….”
“고민 있으세요?”
수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아니. 고민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예를 든 거예요.”
“…….”
“어때요? 나는 편지 주고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연화는 제 거짓말이 탄로 날까 노심초사하며 물었으나, 수림은 거짓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쑥스러워하는 연화가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그는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수림의 대답에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 * *
연화의 사무실로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편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문인 수림의 연애편지를 받는 사람이 저 혼자뿐이라 생각하니 무척 들뜨고 기뻤다.
편지를 펼치자 수림의 성품을 닮은 정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첫 문단부터 수림의 쑥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어 연화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글을 쓰는 일이 어느 때보다 어렵게 느껴지네요. 여태껏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내는 글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부인께 편지를 쓰며 마음을 전하는 글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글은 수림다웠다. 연화는 본래의 목적도 잊고 집중해서 그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어 내릴수록 그녀의 눈시울이 차츰 붉어졌다.
「영원을 바란 적도 있으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시적이네요. 제게 주어진 한 번의 생 동안 늘 당신의 행복을 고려하며 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지막 문단을 읽고 나서 연화는 코를 훌쩍였다. 사무실이 아니었더라면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담은 글이 이토록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수림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진심으로 대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연화의 마음은 뭉클해졌다. 그를 위해 편지를 주고받자고 한 것이었는데, 자신이 더 위로를 받아 버리고 말았다.
수림의 편지를 몇 차례나 다시 읽었다. 어쩐지 자신이 쓴 편지는 그의 편지에 비하면 너무도 부족하고 초라한 것 같았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 몇 번씩이나 고쳐 썼지만, 좀 더 열심히 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무래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연화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연화의 다급한 말을 들은 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안타깝게도 편지를 먼저 받은 사람은 수림이었다.
수림은 방으로 들어와 의아한 얼굴로 우편물을 바라보았다. 우편은 편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고 묵직한 서류 봉투였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책 한 권과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책을 꺼낸 수림은 책표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에 수려하게 적힌 글자는 예전에 그가 썼던 소설의 제목과 같았다.
책을 펼쳐 안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제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같았다. 10년도 더 전에 수림이 신문사를 통해 연재했던 그 소설이었다.
이것과 같은 내용의 책이 지금 단 한 권, 수림의 서재에 남아 있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으며 세간에는 미완의 작품으로 알려진 글이지만, 수림의 양아버지가 너무나 아까운 글이라며 완결을 받아 소량의 책으로 만들어 주셨다.
연화가 그 책을 가장 아껴 정성스럽게 보관을 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많이 낡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책은 완전히 새것이었다. 게다가 꽤나 공들여 만들어진 듯했다. 표지는 양장이었고, 내지는 좋은 종이를 썼는지 탄력 있고 부드러웠다. 또 이전의 책보다 글씨체와 문단이 잘 정돈되어 있어 읽기도 편했다.
수림은 연화가 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했는지 의아했다.
‘요즘에는 글 안 써요?’
문득 연화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글을 쓰지 않아 걱정했던 걸까. 수림은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어릴 적에는 글을 참 열심히 썼다. 어둡고 좁은 방에서, 낡은 전등에 의지한 채 날이 밝아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글을 쓰곤 했다. 그때는 글로서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희망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으니까.
그러나 현실과 직면한 뒤 그는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단순히 글자를 나열하는 일만으로 변화를 소망하기엔 세상이 너무도 녹록치 않았다. 무언가 적을수록 짙어지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그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책을 내려 두고 함께 들어 있던 편지 봉투를 열었다. 성숙하고 미려한 필체가 편지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수림에게.」
몇 안 되는 단어만으로도 자신에게 이렇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연화뿐이리라. 그는 자신이 했던 고민을 모두 잊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들자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는 연화가 보였다.
“일찍 오셨…….”
“그거 아직 읽지 마요! 다시 쓸 거예요.”
수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화는 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편지를 빼앗으려는 듯 팔을 들었다. 그는 편지를 든 팔을 높이 들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다시 씁니까.”
“다시 쓰고 싶으니까요. 이리 줘요.”
“저는 이 편지가 읽고 싶은데요.”
“일단 줘요! 더 잘 써 줄 테니까…….”
연화는 조급히 말하며 팔을 뻗었으나, 수림은 편지를 쉽게 내어 주지 않았다. 읽다 만 편지의 뒷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화는 편지를 잡으려는 듯 자꾸만 손을 뻗었다. 그는 여태껏 힘으로 연화를 대했던 적이 없었지만, 편지를 마저 읽고 싶어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버둥거리는 연화의 행동을 속박한 채 그녀의 어깨너머로 편지를 읽었다.
“이리 주라니까요!”
“다 읽고 드리겠습니다.”
수림은 연화를 달래듯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림의 눈동자는 여전히 편지지 위의 글자들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당신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까 걱정이 돼요. 이기적일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바깥세상에 대한 것보다는 당신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원하던 걸 되찾길 바라요.」
편지에는 연화의 걱정과 염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가 책을 선물한 건 수림이 외부 상황에 흔들리기보다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길 바랐기 때문이었나 보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내 곁으로 와 줘서 고마워요.」
연화는 자신의 편지를 잘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글을 쓴 사람의 감정이 온전히 느껴지는 글이야말로 그에겐 좋은 글이었다.
“부인께서는 글을 쓸 때 솔직해지시네요. 앞으로 자주 편지 주고받아야겠습니다.”
수림은 연화를 꼭 끌어안았다.
“선물 고맙습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연화를 안고 있기만 했다. 그녀에게 걱정을 시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감정이 교차했다.
“제가 글을 안 써서 걱정되셨어요?”
가만히 멈추어 있던 연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글을 쓰지 못하는 거예요?”
수림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연화가 수림의 품에서 벗어나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제가 가졌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
“아무것도 나아진 것 같지 않아요.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화는 조금 놀란 얼굴로 수림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 부모님을 잃고, 함께하던 사람들도 떠나보내고. 그토록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을까요.”
“…….”
“당신을 괴롭게 만들면서까지 제가 얻으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래로 내려앉은 눈매엔 슬픔이 드리워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한없이 선하기 때문이리라.
연화는 손을 들어 수림의 뺨을 감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연화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네?”
연화의 말에 수림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당신의 신념이 나를 살리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거예요.”
“…….”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당장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한 일은 분명 누군가한테 도움이 됐을 거예요.”
“…….”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분명 더 나아질 거예요. 의미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화는 위로하듯 수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한테 당신은 자랑스럽고 멋진 사람이에요.”
수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화가 자신을 위해 주는 것만으로도 텅 비어 있던 가슴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금 연화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연화의 말을 무턱대고 믿고 싶었다. 연화가 자신의 편이 되어만 준다면 실제의 상황이 어떠하든, 자신이 어떻게 망가지든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연화의 존재는 수림에게 너무도 귀했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