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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 4장 간격
“한아.”
임시 정부가 귀환 길에 오르고, 그간 수림의 자리를 대신하던 유한이 돌아왔다. 성정 공장에서 보았던 소년 같은 얼굴의 사내도 함께였다. 윤과 수림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간만에 만난 수림과 유한은 포옹으로 긴 말들을 대신했다.
집에서 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네 사람은 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예상은 했지만 갑자기 경성으로 가겠다고 해서 놀라긴 했죠.”
“그땐 미안했다. 너무 급했어.”
유한의 투덜거림에 수림이 웃으며 답했다.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겠지. 다른 사람이 연화 채 갈까 봐. 그치?”
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윤이 너는 은근슬쩍 말을 놓는다.”
“뭐 아직도 수장 대우 해 주길 바라나.”
“놓을 거면 윤이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놓아야지.”
유한의 말에 수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너희보다 연장자야.”
나무라는 어투였으나, 수림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자기 부인한테는 깍듯하게 존대하면서.”
“그거랑은 다르지.”
“이참에 다 같이 말 놓을까요?”
소년 같은 사내가 웃으며 물었다.
“넌 조용히 해. 한참 어린 게.”
수림은 오랜만에 동지들을 만난 게 기뻤는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했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연화는 그런 수림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낯설기도 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도 잘 웃긴 하지만, 저렇게 풀어진 모습은 흔치 않아 더욱 그랬다. 오래 함께한 사람들이다 보니 격 없이 편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연화는 일찍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수림이 재빨리 연화의 팔을 붙잡았다.
“다 드셨어요?”
“응. 얘기 더 나눠요.”
수림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연화는 식당을 벗어나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 내리쬐는 햇볕이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햇빛과 함께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찾아들었고, 정원에 널린 흰 이불이 너울거리며 좋은 향기를 풍겼다.
날씨가 좋아 어제 널은 빨래가 벌써 다 말라 있었다. 연화는 다가서서 바짝 마른 빨래를 걷었다.
식당 창문을 열어 놓아서인지, 연화가 서 있는 정원까지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선지 연화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즐거워 보이는 수림의 모습이 좋긴 한데, 가슴이 조금 아릿했다.
수림과 친밀해 보이는 저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을 수림과 함께하며, 그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연화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림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무리 그를 깊이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생각을 밀어내려 애쓰며 빨래 걷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군지 알면서도 연화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돌아본 곳에는 그녀보다 더 놀란 얼굴의 수림이 서 있었다.
“미안합니다. 놀랐어요?”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셨던 겁니까. 뒤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빨래 걷느라 그랬던 거죠 뭐…….”
연화는 돌아서서 다시 빨래를 걷었다. 수림은 옆으로 다가와 빨래 걷는 일을 도우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 얘기 나누지 왜 나왔어요?”
“두 사람 다 먼 길을 왔으니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손님방에서 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불보 이걸로 갈아 주고 와야겠네요.”
수림은 돌아서려는 연화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이미 잠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새 이불이 좋을 텐데…….”
“이따 제가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럼 덮는 것만 옆에 두고 올게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빠르게 답하는 수림을 보며 연화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멀어지는 수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빨래를 걷었다. 빨래를 다 걷고, 종류별로 차곡차곡 접고 있을 때 그가 돌아와 연화의 일을 도왔다.
“유한이란 사람은 언제 알게 된 거예요?”
연화는 사소한 말을 하듯 태연히 물었다. 수림은 물끄러미 연화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양아버지를 따라 항일 운동 단체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저보다 더 일찍 구국 운동을 했던 친구죠.”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그때부터 상회 일도 같이 했던 거예요?”
“네. 양아버지가 그러길 원하셨거든요.”
“그럼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함께했던…….”
수림이 갑자기 손을 잡고 돌려세운 탓에 연화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연화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그녀를 바라보는 수림의 얼굴은 어째선지 자못 심각했다.
“안 됩니다.”
“뭐가요?”
“관심 가지지 말아요.”
“관심이요?”
연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뜻인지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는 아직까지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연화는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관심 가지신 거 아닙니까.”
“당신은 우리가 부부인 걸 가끔 까먹나 봐. 관심은 무슨 관심이에요.”
“이불도 가져다준다고 하고, 식사도 신경 쓰셨잖아요. 친절하게 대하고…….”
“당신이랑 친한 사람이니까 친절하게 대한 거죠.”
“계속 한이에 대해 질문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궁금했던 거지, 그 사람이 궁금해서 그런 거겠어요.”
“그럼 아까는 무슨 생각 하고 계셨던 겁니까.”
잘 나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연화가 시선을 외면하자 그는 수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봐, 이상하다니까.”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얼른 이거 정리하고 들어가요.”
연화는 분주히 정리를 했다. 수림이 석연치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연화는 모른 척 애써 외면했다.
* * *
이른 아침, 연화는 식당에서 물을 마시던 유한과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화는 침묵이 민망하여 먼저 말을 걸었다.
“잠자리는 괜찮았어요?”
“아,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연화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녀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유한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화가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유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 예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들고 유한을 바라보았다.
“제가 오해를 했었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유한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예전에 연화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당시의 연화는 누군가에게 경계받는 삶이 익숙했기 때문에 유한의 경멸 어린 시선에도 무덤덤했다. 게다가 그는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이고, 연화는 친일 집안의 딸이었으니 유한의 경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연화는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유한은 아니었나 보다.
“다 지난 일을 왜 신경 써요. 그렇게 따지자면 그땐 나도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걸.”
“제가 먼저 무례하게 대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사실 지금도 당신이 좀 미우니까.”
“예?”
“남편이랑 너무 친해 보여서요.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일에 다 질투가 난다니까.”
가벼운 농담조에 유한이 웃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것 같아서 그녀도 엷게 미소 지었다.
“뭐 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수림이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불만이 가득한 물음에 답해 주지 않은 채 연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림을 지나쳤다. 뒤에서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 * *
수림은 그 뒤로도 유한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물었지만, 연화는 자신의 입으로 유한을 질투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고 민망하여 계속 둘러댔다.
그런데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그는 연화에게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이상한 오해로 그를 서운하게 만들 수는 없어 오늘은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는 수림이 없었다.
늘 반겨 주던 이가 없으니 적적했다. 말도 없이 어딜 나갔는지 의문이었다. 혹시 서운함 때문에 집을 나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연화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수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어두워진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내리는 비를 보며 수림이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슬비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비를 맞다가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연화는 우산 하나를 들고 대문 앞으로 나섰다. 집 밖으로 나가자니 엇갈릴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몇 분 뒤, 멀리서 종이봉투를 안고 걸어오는 수림이 보였다. 연화는 급히 다가가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갑자기 나타난 연화를 보고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 계세요?”
“당신 기다렸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
“윤이한테 말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그랬어요?”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해서 윤이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실수였던 것 같다. 수림은 연화가 들고 있는 우산을 받아 들더니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집이 답답해서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이거 좋아하시잖아요.”
종이봉투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이 들어 있었다. 연화와 수림이 함께 시장에 갈 때 한 번씩 사 먹었던 빵이었다. 서운해서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집이 답답해 시장에 다녀온 모양이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연화의 말에 수림은 맑게 미소 지었다.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요.”
그가 비를 맞아 젖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연화는 그의 팔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수림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싼 채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걷고 있는데, 우산이 연화의 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당신 비 맞잖아요.”
“이미 젖어서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얼른 들어가죠. 날이 쌀쌀하네요.”
수림은 웃으며 연화를 이끌었다. 고집을 꺾기는 어려울 것 같아 연화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우산이라도 사서 쓰고 오지 그랬어요.”
씻고 나온 수림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그는 얌전히 침대에 앉아 연화의 손길을 받았다.
“비가 얼마 안 와서 괜찮았어요.”
“감기 들면 어쩌려고. 가만 보면 바보 같다니까…….”
바보라고 하는데도 뭐가 좋은지 그는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 감기에라도 들까 걱정되어 열심히 머리를 말려 주는데, 연화의 허리에 수림의 팔이 감겼다.
“부인.”
“왜요?”
“한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우리 빵 먹을까요?”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부끄러웠다. 연화가 말을 돌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그가 연화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수림은 자신의 두 다리 위에 연화를 앉히고는, 그녀의 턱선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에 연화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허리를 감은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밖에 손님들 많아요.”
“아무도 들어올 생각은 안 할 겁니다.”
“아니, 잠깐만.”
연화가 만류하기도 전에, 수림의 입술이 셔츠 옷깃 사이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와 그녀의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었다. 연화는 깜짝 놀라서 황급히 그의 양 뺨을 잡고 밀어 냈다.
“왜 그래요?”
연화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림은 어쩐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네. 당신이 걱정하는 일 없었어요.”
“오해하는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래요?”
“그냥…….”
“그냥 뭐요.”
“……한이가 예전부터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말에 연화가 웃음을 터트리자, 수림의 귓바퀴가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마음이라도 줄까 봐 불안했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냥 좀 그랬습니다.”
얼버무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훨씬 잘났어요.”
연화의 말에도 그는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냥 두면 며칠을 혼자 고민할 것 같아서 연화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질투가 난다고 했었어요.”
수림은 의아한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당신이랑 그 사람이 너무 친하잖아요. 나는 당신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이랑 얘기 나누는 거 보니까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것 같고…….”
“그래서 서운하셨어요?”
수림은 놀라서 물었다.
“서운했던 것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랑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게 좀 부럽기도 하고……. 웃지 마요.”
연화는 웃음을 참고 있는 수림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이 고와서 수림은 그녀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가장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당신인데.”
가까운 거리에서 연화를 응시하는 수림의 시선은 한없이 자상했다.
“가장 알고 싶고, 가장 궁금합니다.”
다정한 말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질투심이 녹아내렸다. 연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수림은 호선을 그리는 연화의 입매와 볼우물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부인.”
“왜요?”
“문 잠글까요.”
“……왜요? 뭐 하려고?”
“그냥 갑자기 잠그고 싶어서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림은 예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연화는 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수림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웃고 있는 연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뜨거운 손길이 연화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연화는 그를 밀어 내는 건 포기하고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창밖으론 여전히 안개 같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긴 밤이 될지도 모르겠다.
제 4장 간격
“한아.”
임시 정부가 귀환 길에 오르고, 그간 수림의 자리를 대신하던 유한이 돌아왔다. 성정 공장에서 보았던 소년 같은 얼굴의 사내도 함께였다. 윤과 수림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간만에 만난 수림과 유한은 포옹으로 긴 말들을 대신했다.
집에서 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네 사람은 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예상은 했지만 갑자기 경성으로 가겠다고 해서 놀라긴 했죠.”
“그땐 미안했다. 너무 급했어.”
유한의 투덜거림에 수림이 웃으며 답했다.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겠지. 다른 사람이 연화 채 갈까 봐. 그치?”
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윤이 너는 은근슬쩍 말을 놓는다.”
“뭐 아직도 수장 대우 해 주길 바라나.”
“놓을 거면 윤이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놓아야지.”
유한의 말에 수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너희보다 연장자야.”
나무라는 어투였으나, 수림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자기 부인한테는 깍듯하게 존대하면서.”
“그거랑은 다르지.”
“이참에 다 같이 말 놓을까요?”
소년 같은 사내가 웃으며 물었다.
“넌 조용히 해. 한참 어린 게.”
수림은 오랜만에 동지들을 만난 게 기뻤는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했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연화는 그런 수림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낯설기도 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도 잘 웃긴 하지만, 저렇게 풀어진 모습은 흔치 않아 더욱 그랬다. 오래 함께한 사람들이다 보니 격 없이 편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연화는 일찍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수림이 재빨리 연화의 팔을 붙잡았다.
“다 드셨어요?”
“응. 얘기 더 나눠요.”
수림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연화는 식당을 벗어나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 내리쬐는 햇볕이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햇빛과 함께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찾아들었고, 정원에 널린 흰 이불이 너울거리며 좋은 향기를 풍겼다.
날씨가 좋아 어제 널은 빨래가 벌써 다 말라 있었다. 연화는 다가서서 바짝 마른 빨래를 걷었다.
식당 창문을 열어 놓아서인지, 연화가 서 있는 정원까지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선지 연화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즐거워 보이는 수림의 모습이 좋긴 한데, 가슴이 조금 아릿했다.
수림과 친밀해 보이는 저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을 수림과 함께하며, 그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연화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림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무리 그를 깊이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생각을 밀어내려 애쓰며 빨래 걷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군지 알면서도 연화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돌아본 곳에는 그녀보다 더 놀란 얼굴의 수림이 서 있었다.
“미안합니다. 놀랐어요?”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셨던 겁니까. 뒤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빨래 걷느라 그랬던 거죠 뭐…….”
연화는 돌아서서 다시 빨래를 걷었다. 수림은 옆으로 다가와 빨래 걷는 일을 도우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 얘기 나누지 왜 나왔어요?”
“두 사람 다 먼 길을 왔으니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손님방에서 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불보 이걸로 갈아 주고 와야겠네요.”
수림은 돌아서려는 연화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이미 잠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새 이불이 좋을 텐데…….”
“이따 제가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럼 덮는 것만 옆에 두고 올게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빠르게 답하는 수림을 보며 연화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멀어지는 수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빨래를 걷었다. 빨래를 다 걷고, 종류별로 차곡차곡 접고 있을 때 그가 돌아와 연화의 일을 도왔다.
“유한이란 사람은 언제 알게 된 거예요?”
연화는 사소한 말을 하듯 태연히 물었다. 수림은 물끄러미 연화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양아버지를 따라 항일 운동 단체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저보다 더 일찍 구국 운동을 했던 친구죠.”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그때부터 상회 일도 같이 했던 거예요?”
“네. 양아버지가 그러길 원하셨거든요.”
“그럼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함께했던…….”
수림이 갑자기 손을 잡고 돌려세운 탓에 연화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연화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그녀를 바라보는 수림의 얼굴은 어째선지 자못 심각했다.
“안 됩니다.”
“뭐가요?”
“관심 가지지 말아요.”
“관심이요?”
연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수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뜻인지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는 아직까지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연화는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관심 가지신 거 아닙니까.”
“당신은 우리가 부부인 걸 가끔 까먹나 봐. 관심은 무슨 관심이에요.”
“이불도 가져다준다고 하고, 식사도 신경 쓰셨잖아요. 친절하게 대하고…….”
“당신이랑 친한 사람이니까 친절하게 대한 거죠.”
“계속 한이에 대해 질문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궁금했던 거지, 그 사람이 궁금해서 그런 거겠어요.”
“그럼 아까는 무슨 생각 하고 계셨던 겁니까.”
잘 나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연화가 시선을 외면하자 그는 수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봐, 이상하다니까.”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얼른 이거 정리하고 들어가요.”
연화는 분주히 정리를 했다. 수림이 석연치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연화는 모른 척 애써 외면했다.
* * *
이른 아침, 연화는 식당에서 물을 마시던 유한과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화는 침묵이 민망하여 먼저 말을 걸었다.
“잠자리는 괜찮았어요?”
“아,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연화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녀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유한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화가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유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 예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들고 유한을 바라보았다.
“제가 오해를 했었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유한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예전에 연화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당시의 연화는 누군가에게 경계받는 삶이 익숙했기 때문에 유한의 경멸 어린 시선에도 무덤덤했다. 게다가 그는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이고, 연화는 친일 집안의 딸이었으니 유한의 경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연화는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유한은 아니었나 보다.
“다 지난 일을 왜 신경 써요. 그렇게 따지자면 그땐 나도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걸.”
“제가 먼저 무례하게 대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사실 지금도 당신이 좀 미우니까.”
“예?”
“남편이랑 너무 친해 보여서요.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일에 다 질투가 난다니까.”
가벼운 농담조에 유한이 웃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것 같아서 그녀도 엷게 미소 지었다.
“뭐 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수림이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불만이 가득한 물음에 답해 주지 않은 채 연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림을 지나쳤다. 뒤에서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 * *
수림은 그 뒤로도 유한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물었지만, 연화는 자신의 입으로 유한을 질투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고 민망하여 계속 둘러댔다.
그런데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그는 연화에게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이상한 오해로 그를 서운하게 만들 수는 없어 오늘은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는 수림이 없었다.
늘 반겨 주던 이가 없으니 적적했다. 말도 없이 어딜 나갔는지 의문이었다. 혹시 서운함 때문에 집을 나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연화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수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어두워진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내리는 비를 보며 수림이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슬비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비를 맞다가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연화는 우산 하나를 들고 대문 앞으로 나섰다. 집 밖으로 나가자니 엇갈릴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몇 분 뒤, 멀리서 종이봉투를 안고 걸어오는 수림이 보였다. 연화는 급히 다가가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갑자기 나타난 연화를 보고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 계세요?”
“당신 기다렸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
“윤이한테 말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그랬어요?”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해서 윤이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실수였던 것 같다. 수림은 연화가 들고 있는 우산을 받아 들더니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집이 답답해서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이거 좋아하시잖아요.”
종이봉투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이 들어 있었다. 연화와 수림이 함께 시장에 갈 때 한 번씩 사 먹었던 빵이었다. 서운해서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집이 답답해 시장에 다녀온 모양이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연화의 말에 수림은 맑게 미소 지었다.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요.”
그가 비를 맞아 젖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연화는 그의 팔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수림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싼 채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걷고 있는데, 우산이 연화의 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당신 비 맞잖아요.”
“이미 젖어서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얼른 들어가죠. 날이 쌀쌀하네요.”
수림은 웃으며 연화를 이끌었다. 고집을 꺾기는 어려울 것 같아 연화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우산이라도 사서 쓰고 오지 그랬어요.”
씻고 나온 수림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그는 얌전히 침대에 앉아 연화의 손길을 받았다.
“비가 얼마 안 와서 괜찮았어요.”
“감기 들면 어쩌려고. 가만 보면 바보 같다니까…….”
바보라고 하는데도 뭐가 좋은지 그는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 감기에라도 들까 걱정되어 열심히 머리를 말려 주는데, 연화의 허리에 수림의 팔이 감겼다.
“부인.”
“왜요?”
“한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우리 빵 먹을까요?”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부끄러웠다. 연화가 말을 돌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그가 연화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수림은 자신의 두 다리 위에 연화를 앉히고는, 그녀의 턱선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에 연화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허리를 감은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밖에 손님들 많아요.”
“아무도 들어올 생각은 안 할 겁니다.”
“아니, 잠깐만.”
연화가 만류하기도 전에, 수림의 입술이 셔츠 옷깃 사이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와 그녀의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었다. 연화는 깜짝 놀라서 황급히 그의 양 뺨을 잡고 밀어 냈다.
“왜 그래요?”
연화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림은 어쩐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네. 당신이 걱정하는 일 없었어요.”
“오해하는 거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래요?”
“그냥…….”
“그냥 뭐요.”
“……한이가 예전부터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말에 연화가 웃음을 터트리자, 수림의 귓바퀴가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마음이라도 줄까 봐 불안했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냥 좀 그랬습니다.”
얼버무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훨씬 잘났어요.”
연화의 말에도 그는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냥 두면 며칠을 혼자 고민할 것 같아서 연화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질투가 난다고 했었어요.”
수림은 의아한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당신이랑 그 사람이 너무 친하잖아요. 나는 당신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이랑 얘기 나누는 거 보니까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것 같고…….”
“그래서 서운하셨어요?”
수림은 놀라서 물었다.
“서운했던 것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랑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게 좀 부럽기도 하고……. 웃지 마요.”
연화는 웃음을 참고 있는 수림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이 고와서 수림은 그녀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가장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당신인데.”
가까운 거리에서 연화를 응시하는 수림의 시선은 한없이 자상했다.
“가장 알고 싶고, 가장 궁금합니다.”
다정한 말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질투심이 녹아내렸다. 연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수림은 호선을 그리는 연화의 입매와 볼우물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부인.”
“왜요?”
“문 잠글까요.”
“……왜요? 뭐 하려고?”
“그냥 갑자기 잠그고 싶어서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림은 예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연화는 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수림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웃고 있는 연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뜨거운 손길이 연화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연화는 그를 밀어 내는 건 포기하고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창밖으론 여전히 안개 같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긴 밤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