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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두 분께서는 아드님을 너무 아끼면서 키우셨어요.”
내가 왜 이 나이에 스무 살 과외 교사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도 있다. 정말 빨리 결혼해서 애가 있는 케이스도 있다. 내가 교육업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없는 이상, 이 나이 먹어서 다른 집 부모에게 좀 더 자식에게 엄해져야 할 필요성을 논할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계약을 잘못 맺은 것이다. 나는 계약서에 사인하면서도 했던 생각을 벌써 몇만 번째인지도 모르게 반복했다. 더 잘 물어보고 할걸. 업무 내용과 환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을 맺는 것은 금전 연대 보증 계약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참견하지 마.”
만약 내가 과외 교사였다면 학생의 입장이었을 그는 툴툴거렸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은 아직 줄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 음식의 맛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훌륭하다는 평가로는 모자랄 정도였다.
열다섯 살, 아무래도 나는 요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짜로 나온 음식에 불평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학생’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겉모습만으로는 백 퍼센트 인간이니 똑같이 싫어해도 될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았다. 매일 가지고 노는 게 스마트폰 정도인 연약한 도련님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밥 안 먹을 거면 치울 거예요.”
“……안 먹어.”
이 요리를 한 장본인인 인상 좋은 주방장은 아주 우울한 얼굴을 뒤늦게 감췄다. 나는 주방장의 얼굴을 한 번 힐끔 본 뒤 ‘그’에게 말했다.
“잘됐네요. 해 놓은 음식을 식을 때까지 두는 건 음식을 모욕하는 거고, 그런 사람한테는 밥을 줄 필요가 없어요. 음식에게 세 번 절하고 먹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굶으세요.”
솔직히 아무리 계약직이라지만 첫 출근 날에 고용주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질대로 말한 것은 이 계약을 은근슬쩍 파기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차이는 건 익숙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기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복잡한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결론은 내 탓이다.
제1장 사기 계약
요리는 사랑이 담길수록 맛있어진다.
거짓말이다.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엄마의 음식이 맛있었던 적도 없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맞벌이 가정이었던 우리 집에서는 내 밥을 내가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나를 향한 사랑은 주로 내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형태로 발현되었고 나는 처음 알바비를 받은 그날 머리카락을 뎅겅 잘라 버렸다. 솔직히 엄마가 울면 어떡하나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요리는 기술이다.
사실이다. 기술이 좋을수록 요리가 맛있어진다. 사랑이 없는 요리는 뭐가 빠졌다고 우기는 인간들은 절대로 외식을 해서는 안 된다. 비싼 밥 먹고 뭔가 빠졌다는 기분을 느끼는 본인들도 불행할 테지만 요리사에 대한 그런 끔찍한 모욕을 나 또한 한 사람의 요리인으로서 견딜 수 없으니까.
요리란 그대로는 먹을 수 없는 식재료 또는 그대로도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맛있고 영양 성분이 흡수되기 좋은 형태로 만드는 것이며 그 행위에는 지식과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재료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이 재료와 저 재료의 궁합은 어떤지, 어떤 재료는 어떤 방식으로 조리해야 먹는 사람이 소화하기 좋고 입에서 즐거운지, 어떤 재료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빈도가 높아 반드시 요리 전 먹을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하는지 등.
그리고 나는 그런 기술을 익히고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전공은 양식으로 했지만 동남아니 일본 요리 따위를 공부하러 다녀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나 자신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대강 세계 요리의 백과사전 1권 같은 몸의 기초를 완성해 가면서 얻은 건 인맥 없고 나이 들고 경력 없는 요리 전공자 백수라는 이름이었다.
대학 친구들의 대부분은 이미 대학 졸업 전에 인맥이 있었으므로 유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업계 쪽에 발을 담그고 있었거나 졸업 후 바로 일을 하다 온 친구들은 벌써 사회인이나 다름없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여러 방면으로 장점을 발굴하며 제 갈 길을 찾았다. 다양한 문화권의 요리에 대해 모두 아는 사람을 굳이 원하는 식당은 많지 않았고 그런 곳 중 대학 졸업자 및 유학 출신자를 원할 만한 곳은 인맥이 필요했다. 내 동기들은 내가 대학원에 갈 거라고 생각했고 교수님들은 내가 추천 인터뷰를 일곱 번째 망치고 들어오자 결국은 포기했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것 또한 고백해야 할 사실이다.
그런 내게 그 계약서가 찾아온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봄날이었다.
― 김연지 씨 되시지요?
여러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보내 놓고 있었으므로 이런 전화는 익숙했다. 나는 휴대폰 너머로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김연지인데요.”
― 네, xx 사이트에서 이력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아자. 솔직히 저 말처럼 구직자에게 감사한 말도 없을 것이다. 일단 내 스펙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니까.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네.”
― 실례지만 자격증은 이력서에 기재하신 게 전부인가요?
“아, 네.”
― 유학 다녀오신 곳이 많네요. 수료증이 다양하세요.
전화한 사람은 젊은 남자였는데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웠다. 나는 괜히 두근거리며 또 맞장구를 쳤다. 물론 남자라 두근거린 것은 아니었다.
“네. 제가 퓨전 요리를 좋아해서요.”
그런데 전화하신 분은 그래서 어디서 전화하시는 건가요. 그걸 알아야 나를 어필하는 말을 할 수 있다. 전화 너머의 남자는 그러나 자기가 어떤 일을 담당할 누굴 찾는지는커녕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내 스펙만 확인하고 면접 약속을 잡았다.
나는 약간 찝찝했지만 이미 여러 차례의 면접에 떨어진 후였기 때문에 순순히 그 약속 장소에 나갔다.
“영양가 있고 창의적인 식단을 짜 주실 수 있는 분을 찾고 있는데 김연지 씨가 적격일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실제로 만나 본 그 남자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아주 믿음이 가게 생기고 젠틀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그 말에 더 설렜다. ‘면접을 보러 가게나 회사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카페에서 보자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저쪽이 찾고 있는 인재가.
“매니저를 원하시는 건가요?”
물론 적성으로는 나였지만 나는 경력 없는 백수였다. 물론 아예 업장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것이야 아니었지만, 매니저급을 맡으려면 오랫동안 일해 온 경력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식단만 짤 거라면 영양사를 찾았을 테고. 내 물음에 남자는 빙긋 웃었다. 어떤 여자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법한 착실한 미소였다. 게다가 검은 정장은 아주 깨끗하다.
“아뇨. 매니저는 아니고요.”
“그러면요?”
“아, 시원시원하시네요.”
이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기가 세서 못 다룰 것 같다고 면접에서 탈락한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약간 찔끔하면서 웃었다.
“기분 상하셨어요?”
“아뇨. 씩씩하게 일해 주실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데요.”
그러면서 남자는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나는 당연히 그의 회사를 소개하는 카탈로그나 무슨 홈페이지 소개 페이지 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그가 내 앞에 민 것은 깨끗한 세 장짜리 계약서였다.
아직 설명을 듣지 않은 것이 많은데 벌써 계약서라니. 혹시 나 장기 밀매 당하나요. 나는 웃으면서도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남자를 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계약서로 눈을 내리깔았다.
“계약서를 보면서 업무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드릴게요. 우선 입주로 일을 해 주셔야 해요.”
더 수상하잖아. 설마 배에 탄다든가……? 나는 갑자기 약간 이 일을 무조건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예의 바르게 설명을 들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검은 정장은 어쩐지 인신매매 전문 브로커의 표식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숙식 다 무료 제공이고요. 저희 사장님 사택에서 일하시게 될 거예요. 사택에 요리해 주는 분이 많은데 김연지 씨는 그분들하고는 대우가 다를 거예요. 아무래도 좋은 대학 졸업하셨고 유학도 다녀오셨고.”
사택? 요리하는 사람이 많다고? 구내식당? 아니면 전속 요리사? 업무 내용이 여전히 짐작이 안 간다. 나는 계약서의 한 조항을 보았다.
“1년 계약이에요?”
“네. 계약이 끝나기 한 달 전까지 합의에 의해 연장하실 수 있어요. 원하시면 정규직 채용도 고려하고 있고요.”
“네에…….”
나는 슬쩍 계약서를 끌어당겨 읽기 시작했다. 일단 계약 상대방의 정체는 알게 되었다. 주식회사 청룡이란다. 을에는 내 이름을 쓸 수 있도록 괄호가 있었고.
“근무 시간은 짧아요. 김연지 씨가 하실 일이 창의성은 요구되지만 양은 많지 않거든요.”
요리사에게 일하는 시간이 짧다고 하면 얼마나 열받는지 아냐. 물론 진짜 짧으면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준비 시간을 다 무시하고 당장 불 앞에 서서 마무리하는 시간만 생각한다고! 나는 남자가 회사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비꼬아 듣기 시작했다. 세끼 밥 차리는 게 뭐가 힘들어. 그냥 있는 거 내오면 되는데. 그래! 그 있는 걸 만드는 데 시간이 든다는 생각은! 안 해 봤지! 오픈 키친 피자집의 그 피자 도우를 반죽하느라고 막내들이 새벽부터 얼마나 죽어 가는지 아냐! 절대 순식간에 피자 한 판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자유 시간은 정말 자유롭게 쓰시면 되고요. 사택이 좀 멀긴 한데 한 달에 한 번씩은 집까지 다녀오시는 비용을 지원해 드리고요. 사장님 직속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말에는 갑자기 이 일의 이미지가 다시 약간 좋아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이 요리를 하세요?”
“아니요. 그냥 경영자세요.”
남자는 약간 웃었다.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그는 계약서를 아주 살짝 정중하게 끌어당기더니 두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구체적인 계약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휴가는 법정 휴가 다 드리고 공휴일 쉬고 보건휴가 유급으로 나가고요, 급여랑 퇴직금은 여기 제13조에…….”
슬슬 어떻게 해야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집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기회는 초등학생 때 하는 망상 속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제 말이 끝난 뒤에 내가 지은 표정을 보고 즐거운 듯 눈웃음을 지었다.
“급여는 계약 기간 끝나고 연장하실 때 협의해서 오를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내가 들은 금액이 맞나 해서 약간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때문에 남자가 내게 볼펜을 은근슬쩍 쥐여 주었을 때 꼭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인했다.
“할게요. 감사합니다.”
프롤로그
“두 분께서는 아드님을 너무 아끼면서 키우셨어요.”
내가 왜 이 나이에 스무 살 과외 교사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도 있다. 정말 빨리 결혼해서 애가 있는 케이스도 있다. 내가 교육업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없는 이상, 이 나이 먹어서 다른 집 부모에게 좀 더 자식에게 엄해져야 할 필요성을 논할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계약을 잘못 맺은 것이다. 나는 계약서에 사인하면서도 했던 생각을 벌써 몇만 번째인지도 모르게 반복했다. 더 잘 물어보고 할걸. 업무 내용과 환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계약을 맺는 것은 금전 연대 보증 계약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참견하지 마.”
만약 내가 과외 교사였다면 학생의 입장이었을 그는 툴툴거렸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은 아직 줄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 음식의 맛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훌륭하다는 평가로는 모자랄 정도였다.
열다섯 살, 아무래도 나는 요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짜로 나온 음식에 불평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학생’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겉모습만으로는 백 퍼센트 인간이니 똑같이 싫어해도 될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았다. 매일 가지고 노는 게 스마트폰 정도인 연약한 도련님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밥 안 먹을 거면 치울 거예요.”
“……안 먹어.”
이 요리를 한 장본인인 인상 좋은 주방장은 아주 우울한 얼굴을 뒤늦게 감췄다. 나는 주방장의 얼굴을 한 번 힐끔 본 뒤 ‘그’에게 말했다.
“잘됐네요. 해 놓은 음식을 식을 때까지 두는 건 음식을 모욕하는 거고, 그런 사람한테는 밥을 줄 필요가 없어요. 음식에게 세 번 절하고 먹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굶으세요.”
솔직히 아무리 계약직이라지만 첫 출근 날에 고용주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질대로 말한 것은 이 계약을 은근슬쩍 파기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차이는 건 익숙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기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복잡한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결론은 내 탓이다.
제1장 사기 계약
요리는 사랑이 담길수록 맛있어진다.
거짓말이다.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엄마의 음식이 맛있었던 적도 없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맞벌이 가정이었던 우리 집에서는 내 밥을 내가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나를 향한 사랑은 주로 내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형태로 발현되었고 나는 처음 알바비를 받은 그날 머리카락을 뎅겅 잘라 버렸다. 솔직히 엄마가 울면 어떡하나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요리는 기술이다.
사실이다. 기술이 좋을수록 요리가 맛있어진다. 사랑이 없는 요리는 뭐가 빠졌다고 우기는 인간들은 절대로 외식을 해서는 안 된다. 비싼 밥 먹고 뭔가 빠졌다는 기분을 느끼는 본인들도 불행할 테지만 요리사에 대한 그런 끔찍한 모욕을 나 또한 한 사람의 요리인으로서 견딜 수 없으니까.
요리란 그대로는 먹을 수 없는 식재료 또는 그대로도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맛있고 영양 성분이 흡수되기 좋은 형태로 만드는 것이며 그 행위에는 지식과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재료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이 재료와 저 재료의 궁합은 어떤지, 어떤 재료는 어떤 방식으로 조리해야 먹는 사람이 소화하기 좋고 입에서 즐거운지, 어떤 재료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빈도가 높아 반드시 요리 전 먹을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하는지 등.
그리고 나는 그런 기술을 익히고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전공은 양식으로 했지만 동남아니 일본 요리 따위를 공부하러 다녀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나 자신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대강 세계 요리의 백과사전 1권 같은 몸의 기초를 완성해 가면서 얻은 건 인맥 없고 나이 들고 경력 없는 요리 전공자 백수라는 이름이었다.
대학 친구들의 대부분은 이미 대학 졸업 전에 인맥이 있었으므로 유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업계 쪽에 발을 담그고 있었거나 졸업 후 바로 일을 하다 온 친구들은 벌써 사회인이나 다름없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여러 방면으로 장점을 발굴하며 제 갈 길을 찾았다. 다양한 문화권의 요리에 대해 모두 아는 사람을 굳이 원하는 식당은 많지 않았고 그런 곳 중 대학 졸업자 및 유학 출신자를 원할 만한 곳은 인맥이 필요했다. 내 동기들은 내가 대학원에 갈 거라고 생각했고 교수님들은 내가 추천 인터뷰를 일곱 번째 망치고 들어오자 결국은 포기했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것 또한 고백해야 할 사실이다.
그런 내게 그 계약서가 찾아온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봄날이었다.
― 김연지 씨 되시지요?
여러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보내 놓고 있었으므로 이런 전화는 익숙했다. 나는 휴대폰 너머로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김연지인데요.”
― 네, xx 사이트에서 이력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아자. 솔직히 저 말처럼 구직자에게 감사한 말도 없을 것이다. 일단 내 스펙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니까.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네.”
― 실례지만 자격증은 이력서에 기재하신 게 전부인가요?
“아, 네.”
― 유학 다녀오신 곳이 많네요. 수료증이 다양하세요.
전화한 사람은 젊은 남자였는데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웠다. 나는 괜히 두근거리며 또 맞장구를 쳤다. 물론 남자라 두근거린 것은 아니었다.
“네. 제가 퓨전 요리를 좋아해서요.”
그런데 전화하신 분은 그래서 어디서 전화하시는 건가요. 그걸 알아야 나를 어필하는 말을 할 수 있다. 전화 너머의 남자는 그러나 자기가 어떤 일을 담당할 누굴 찾는지는커녕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내 스펙만 확인하고 면접 약속을 잡았다.
나는 약간 찝찝했지만 이미 여러 차례의 면접에 떨어진 후였기 때문에 순순히 그 약속 장소에 나갔다.
“영양가 있고 창의적인 식단을 짜 주실 수 있는 분을 찾고 있는데 김연지 씨가 적격일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실제로 만나 본 그 남자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아주 믿음이 가게 생기고 젠틀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그 말에 더 설렜다. ‘면접을 보러 가게나 회사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카페에서 보자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저쪽이 찾고 있는 인재가.
“매니저를 원하시는 건가요?”
물론 적성으로는 나였지만 나는 경력 없는 백수였다. 물론 아예 업장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것이야 아니었지만, 매니저급을 맡으려면 오랫동안 일해 온 경력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식단만 짤 거라면 영양사를 찾았을 테고. 내 물음에 남자는 빙긋 웃었다. 어떤 여자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법한 착실한 미소였다. 게다가 검은 정장은 아주 깨끗하다.
“아뇨. 매니저는 아니고요.”
“그러면요?”
“아, 시원시원하시네요.”
이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기가 세서 못 다룰 것 같다고 면접에서 탈락한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약간 찔끔하면서 웃었다.
“기분 상하셨어요?”
“아뇨. 씩씩하게 일해 주실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데요.”
그러면서 남자는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나는 당연히 그의 회사를 소개하는 카탈로그나 무슨 홈페이지 소개 페이지 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그가 내 앞에 민 것은 깨끗한 세 장짜리 계약서였다.
아직 설명을 듣지 않은 것이 많은데 벌써 계약서라니. 혹시 나 장기 밀매 당하나요. 나는 웃으면서도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남자를 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계약서로 눈을 내리깔았다.
“계약서를 보면서 업무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드릴게요. 우선 입주로 일을 해 주셔야 해요.”
더 수상하잖아. 설마 배에 탄다든가……? 나는 갑자기 약간 이 일을 무조건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예의 바르게 설명을 들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검은 정장은 어쩐지 인신매매 전문 브로커의 표식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숙식 다 무료 제공이고요. 저희 사장님 사택에서 일하시게 될 거예요. 사택에 요리해 주는 분이 많은데 김연지 씨는 그분들하고는 대우가 다를 거예요. 아무래도 좋은 대학 졸업하셨고 유학도 다녀오셨고.”
사택? 요리하는 사람이 많다고? 구내식당? 아니면 전속 요리사? 업무 내용이 여전히 짐작이 안 간다. 나는 계약서의 한 조항을 보았다.
“1년 계약이에요?”
“네. 계약이 끝나기 한 달 전까지 합의에 의해 연장하실 수 있어요. 원하시면 정규직 채용도 고려하고 있고요.”
“네에…….”
나는 슬쩍 계약서를 끌어당겨 읽기 시작했다. 일단 계약 상대방의 정체는 알게 되었다. 주식회사 청룡이란다. 을에는 내 이름을 쓸 수 있도록 괄호가 있었고.
“근무 시간은 짧아요. 김연지 씨가 하실 일이 창의성은 요구되지만 양은 많지 않거든요.”
요리사에게 일하는 시간이 짧다고 하면 얼마나 열받는지 아냐. 물론 진짜 짧으면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준비 시간을 다 무시하고 당장 불 앞에 서서 마무리하는 시간만 생각한다고! 나는 남자가 회사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비꼬아 듣기 시작했다. 세끼 밥 차리는 게 뭐가 힘들어. 그냥 있는 거 내오면 되는데. 그래! 그 있는 걸 만드는 데 시간이 든다는 생각은! 안 해 봤지! 오픈 키친 피자집의 그 피자 도우를 반죽하느라고 막내들이 새벽부터 얼마나 죽어 가는지 아냐! 절대 순식간에 피자 한 판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자유 시간은 정말 자유롭게 쓰시면 되고요. 사택이 좀 멀긴 한데 한 달에 한 번씩은 집까지 다녀오시는 비용을 지원해 드리고요. 사장님 직속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말에는 갑자기 이 일의 이미지가 다시 약간 좋아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이 요리를 하세요?”
“아니요. 그냥 경영자세요.”
남자는 약간 웃었다.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그는 계약서를 아주 살짝 정중하게 끌어당기더니 두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구체적인 계약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휴가는 법정 휴가 다 드리고 공휴일 쉬고 보건휴가 유급으로 나가고요, 급여랑 퇴직금은 여기 제13조에…….”
슬슬 어떻게 해야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집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기회는 초등학생 때 하는 망상 속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제 말이 끝난 뒤에 내가 지은 표정을 보고 즐거운 듯 눈웃음을 지었다.
“급여는 계약 기간 끝나고 연장하실 때 협의해서 오를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내가 들은 금액이 맞나 해서 약간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때문에 남자가 내게 볼펜을 은근슬쩍 쥐여 주었을 때 꼭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인했다.
“할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