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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영의 개수가 건 마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풀려 갔고 나를 마중할 차가 올 거라는 날에 나는 계약을 파기하고 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열두 번째로 고민하고 있었다. 주식회사 청룡을 몇 번 검색해 봐도 내가 취업한 그곳으로 보이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고 계약서에 있던 연락처는 내 면접관이 받았다. 그러나 계약금은 착실하게 들어왔고 나는 엄마에게 ‘혹시 오늘 저녁에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경찰에게 이 계약서의 전화번호를 주고 신고하라’는 비장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트렁크를 든 손은 무거웠다.
약속 장소인 공원 앞 길가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 면접관은 평범한 4인승 자동차 옆에 서서 기다리다가 내 얼굴이 보이자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은 지금 봐도 역시 위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나는 왠지 안도했다.
그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면접관 옆에는 대충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겠다 싶은 미소년이 있었는데 그도 역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트렁크 바퀴 소리를 쿠가가강 내며 다가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김연지 씨.”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 이 친구는 유별입니다. 지금부터 연지 씨를 이 친구가 사택까지 모셔다드릴 거예요.”
학생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그 별이라는 소년은 더 곱고 사랑스럽우며 피부에 티 하나 없었다.
“차로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사실 계약 후에 이 장소와 시간을 받았을 때에도 그래서 정확히 뭘 타고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 차 트렁크에 태울 거라는 말만 하지 마라. 내가 불안과 긴장을 감추며 천연덕스럽게 묻자 면접관은 하하 웃었다.
“비슷한데 차는 아니고요. 이 친구가 운전면허가 없거든요.”
그럼 뭔데. 별은 초롱초롱 맑고 속눈썹이 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내게 머뭇거리며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그 미모에 어쩐지 또 바보처럼 경계심이 없어졌다.
“그래요? 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다 방법이 있죠.”
그리고 저 차는 그럼 뭔가요. 면접관은 공원의 다리 쪽을 가리켰다.
“짐은 다 가져오셨죠? 저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가 가리킨 다리는 우리 공원을 지나는 강 위로 놓아 보행자가 다닐 수 있게 한 것으로 날이 괜찮을 때는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지금은 이른 새벽이라 너무 추워서 아무도 없었지만.
“저 너머요?”
고속버스라도 다니나?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없는데. 별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면접관은 내 옆을 걸으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저 친구가 길을 잘 가르쳐 드릴 테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리는데, 멀미하실 수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아, 혹시 멀미하는 편이세요?”
“안 해요.”
“잘됐네요. 어젯밤엔 잘 주무셨어요?”
걱정돼서 솔직히 약간 악몽은 꿨다. 내가 용궁에 납치당하는 토끼가 되어서 내 간……! 내 간은 놓고 왔다고……! 하고 외치니까 새디스트 용왕이 채찍으로 날 때리면서 그런 말에는 이제 속지 않아! 네 선배들이 다 하고 갔다고! 하지만 그들 중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하고 소리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을 채찍으로 때릴 기운이 있으면 용왕은 토끼 간이 없어도 괜찮은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꿈에 대해 앞으로 같은 회사 소속으로 근무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약간 얼고 굳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네. 잘 잤어요. 이 근처 사세요?”
“네, 저는 근처 살아요. 저 친구 데려다주러 왔지요.”
왜?
“친하세요?”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른 나이에 사고 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나이 차가 나 보인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은 좀 같이 하는 편이죠.”
“이런 일이요?”
“아, 다 왔네요.”
면접관은 내 말을 막듯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아직 다리 한가운데인데 무슨 소리지, 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제 보니 우리 앞을 걷던 별도 멈춰서 다리 난간 아래를 보고 있었다.
이해하기도 전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다음 순간 면접관과 별은 동시에 나를 붙잡고 난간 너머로 던져 버렸다.
하늘이 아득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고 오랫동안 추락을 느끼지 못했다. 정수리가 실로 당겨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 이후.
……나는 물에 빠졌다.
실제로 다리에서 강에 빠지면 물에 풍덩 하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것마냥 으깨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는데, 꼭 수영장에 천천히 입수할 때처럼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충격이랄 만한 것은 없었고, 오히려 시야만이 홀로그램 영상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녹색으로 가렸다. 나는 한참 후에야 숨을 들이켰다.
한 박자 뒤에 질겁했지만 물은 밀려들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 위에 있을 때보다도 부드러운 공기가 폐를 시원하게 씻었다. 면접관은 내가 무심코 꽉 잡은 트렁크를 친절하게도 나와 함께 통째로 들어 던져 준 참이었다. 나는 내가 뭔가 넓은 곳에 실려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트렁크를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내 등 아래에 있는 것을 물 아래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보았다.
거대한 자라 한 마리가 나를 업고 미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어?”
놀랍게도 숨은 비명을 지른 후에도 계속 쉴 수 있었고 자라를 보기 위해 몸을 더 일으켰는데도 튕겨 떨어져 나가거나 하지 않았다. 안전벨트 같은 것 없이 느슨하게 그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내가 지른 비명에 자라가 목을 길게 뽑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자라가 목을 길게 뽑는 것을 수산 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정도 되는 스케일은 처음이라 숨을 또 들이켰다.
자라의 눈은 맑고 아름다웠다. 자라가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용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주 대담한 사기 계약에 걸렸거나. 계약서 어디에도 내 간이 요리 재료라는 말은 없었다.
이동은 정말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라는 빠르게 헤엄쳤고 물속의 온갖 쓰레기와 찌꺼기와 물고기 따위는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슥슥 내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여긴 분명히 바다겠구나 싶은 깊고 넓은 물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점차 햇빛과 멀어져 시커멓고 물고기도 적었던 물의 저 먼 아래에 밝고 아름다운 빛이 있는 궁전이 보였다.
그래, 진짜다. 나는 이대로 간을 뽑히는 거야. 알량한 계약금에 속아서 정말로 장기밀매를 당할 줄이야. 나는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아 오히려 현실적인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헤엄치던 자라가 내게 말했다.
“거의 다 왔으니 멀미가 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계속 머무르면 춥습니다.”
멀미가 문제냐? 나는 자라가 아주 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기를 믿은 토끼를 교활하게 속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 자라가 그 자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육지 사람에게 부를 약속하더니 용궁으로 납치하는 작태는 똑같잖아.
계속 헤엄쳐 오다 보니 나는 자세를 좀 편안하게 바꾸고 있었는데 자라의 등은 내 방 정도는 될 정도로 넓었고 그 위에 트렁크를 놓아도 미끄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그의 등 위에서 나와 트렁크가 모두 전혀 젖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묻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휴대폰과 노트북이 모두 걱정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내 꿈인지 아닌지 아직 구별이 되지 않는 해저 궁전은 맑고 매끄러운 도자기로 기와를 해서 얹고 추녀 끄트머리에는 반짝이는 산호와 긴 술을 늘어뜨려 장식한 근사한 곳이었고 그 담과 전각이 가까워질수록 대단히 넓게 펼쳐졌다. 다른 광원이 없어서인지 그 궁전의 담장에는 빛나는 구슬이 등불처럼 박혀 있었고 환상적인 빛으로 반짝이는 해파리 떼가 한가로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 종이 식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순수하게 그 안에서 나오는 푸르고 노란 빛에 감탄했다.
“예쁘다.”
자라는 대답하지 않고 궁전 입구를 향해 열심히 헤엄쳤다. 나는 궁전의 대문이 광화문의 다섯 배 정도 크기는 될 정도로 거대한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큰 물고기를 너무 많이 봤다. 대문의 자개로 된 현판에는 내가 모르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대충 갑골 문자 시절의 상형 문자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모양이었다.
대문 앞의 거대한 길에는 희고 가는 모래가 깔려 있었고 양쪽에 해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과연 그것이 식용일지 습관적으로 고민하는 내 옆에서 자라가 아름다운 소년으로 변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까의 자라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지요, 김연지 씨. 어라하와 어륙께서 기다리십니다.”
혹시 그게 용왕과 어의라는 뜻은 아니지? 나는 마른 바닥을 밟으며 의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지요?”
그런 악몽도 있다. 내가 꿈을 꾸는 거냐고 물어보면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그래, 꿈이다!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악몽. 나는 이미 추락의 충격에서 돌아와 정신이 충분히 맑은 것 같았지만 내 이성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다. 별은 사랑스러운 얼굴로 수줍게 웃었다. 그의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윤기가 아름다웠다.
“꿈이 아니에요. 들어가셔서 식사하시면서 말씀하세요. 환영 연회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이거 너무 전설대로잖아. 나는 아무래도 내가 취업이 너무 안 되어서 정신이 정말로 나간 게 아닌지, 혹은 아주 깊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하며 또 물었다.
“혹시 들어가면 제 간으로 용왕님의 병을 치료한다든가…….”
별은 또 수줍게 웃었다. 그 얼굴은 어느 잡지 광고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예뻤다. 그는 겨우 큰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라하는 건강하세요. 그 전설은 사실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하는 토끼가 어디 있어요.”
지금 내 눈앞에 용궁하고 말하는 자라하고 자라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일이 나타났는데 말하는 토끼가 왜 없어! 나는 끝내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약간 울상을 지었다. 별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했다.
“계약하신 대로 요리를 해 주시면 돼요. 계신 동안 최대한의 편의를 돌봐 드리고 손님으로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자, 들어가요.”
토끼도 파티 중반까지는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내가 뭐 간을 육지에 놓고 왔다고 해서 돌려보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이 바다에서 나가기는커녕 꿈에서 깨어날 방법도 지금은 없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별의 뒤를 따라갔다. 별은 내 트렁크를 나 대신 끌고 갔다.
거대하고 활짝 열린 성문 앞에 도달하자 성문 옆에 차려져 있던 작은 초소에서 긴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 관모를 쓴 여자가 나와 물었다.
“별 주부님. 이분이 말씀하셨던 손님이십니까?”
“네.”
유별 씨의 정체는 진짜 별 주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웃지 않았다. 관모를 쓴 여자는 허리를 예쁜 금속 허리띠로 여미고 있었는데 허리띠 아래로 늘어뜨린 긴 패는 아무래도 옥으로 만든 것 같았고 저 현판에 있는 것과 같은 상형 문자가 새겨진 것이었다. 별은 자기 주머니에서도 옥패를 꺼내서 그 여자에게 보여 주었고 여자는 내게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올 생각은 없었지만 반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떨해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별 주부님, 어서 들어가세요. 어라하와 어륙이 김연지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은 내 트렁크를 끌고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를 따라서 용궁 안에 발을 들였다.
두꺼운 문 너머의 밝은 곳으로 끝없는 용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명백하게 보행자를 위한 높이에 붙은 조명이 유백색의 불투명하고 거대한 구슬인데 이제 보니 전선 같은 것이 연결된 흔적이 없어 약간 놀랐다. 거대한 대문은 약 스무 걸음 정도를 걸어야 반대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천장에든 벽에든 화려한 오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문을 빠져나오니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금속 벨트나 긴 천으로 묶은 긴 여밈옷을 입고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 아래로 나온 머리칼을 보니 다들 머리카락 자체는 길게 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색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천으로 된 옷에 장신구를 늘어뜨렸고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짧아 무릎 위로 올라가는 여밈옷 아래로 바지를 입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진짜 전래 동화에 나오는 용궁 같다. 나는 별의 뒤를 따라가며 사람들과 건물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사람들은 처음 볼 때는 다 평범한 사람 같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새우처럼 앞으로 뻗은 수염을 가진 키 작은 할머니도 있었고 목 양쪽으로 작은 지느러미가 나와 팔랑이는 소년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점이 있었던 어떤 아주머니는 어느 순간 다시 보니 점이 아니라 심해어의 불빛을 그 자리에 붙여서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별은 정말로 보통 사람과 똑같은데. 나는 가다 말고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해 별에게 물었다. 이게 꿈이든 아니든 일단 물어는 봐야겠다.
“저기,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저처럼 밖에서 오신 사람이신지…….”
물론 아닌 건 안다. 별은 계속 걸으며 내게 조용히 대답했다. 스스럼은 없는 태도였다.
“김연지 씨처럼 밖에서 오신 분은 지금은 없어요. 다 저처럼 둔갑한 용궁 백성들이지만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둔갑이라니. 고등학생 때 고전 문학을 공부한 이후로 처음 듣는 단어다. 나는 노파심에 물었다.
“제가 그럼 따로 조심해야 하는 건…….”
평소에는 성질을 잘도 부리면서 자꾸 말끝을 흐리는 것은 여전히 너무 당황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별은 작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육지에서처럼 행동하시면 돼요. 숨 쉬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시지요?”
물에 빠질 때부터 그랬지.
그러니까 만약 지금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물 아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깊은 바닷속이다. 토끼 간을 빼 드시려고 했던 줄로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사실 말하는 토끼란 없으므로 누명을 쓴 것이셨다는 용왕님이 계신 용궁에 계약직 직원으로서.
영의 개수가 건 마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풀려 갔고 나를 마중할 차가 올 거라는 날에 나는 계약을 파기하고 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열두 번째로 고민하고 있었다. 주식회사 청룡을 몇 번 검색해 봐도 내가 취업한 그곳으로 보이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고 계약서에 있던 연락처는 내 면접관이 받았다. 그러나 계약금은 착실하게 들어왔고 나는 엄마에게 ‘혹시 오늘 저녁에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경찰에게 이 계약서의 전화번호를 주고 신고하라’는 비장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트렁크를 든 손은 무거웠다.
약속 장소인 공원 앞 길가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 면접관은 평범한 4인승 자동차 옆에 서서 기다리다가 내 얼굴이 보이자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은 지금 봐도 역시 위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나는 왠지 안도했다.
그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면접관 옆에는 대충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겠다 싶은 미소년이 있었는데 그도 역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트렁크 바퀴 소리를 쿠가가강 내며 다가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김연지 씨.”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 이 친구는 유별입니다. 지금부터 연지 씨를 이 친구가 사택까지 모셔다드릴 거예요.”
학생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그 별이라는 소년은 더 곱고 사랑스럽우며 피부에 티 하나 없었다.
“차로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사실 계약 후에 이 장소와 시간을 받았을 때에도 그래서 정확히 뭘 타고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 차 트렁크에 태울 거라는 말만 하지 마라. 내가 불안과 긴장을 감추며 천연덕스럽게 묻자 면접관은 하하 웃었다.
“비슷한데 차는 아니고요. 이 친구가 운전면허가 없거든요.”
그럼 뭔데. 별은 초롱초롱 맑고 속눈썹이 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내게 머뭇거리며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그 미모에 어쩐지 또 바보처럼 경계심이 없어졌다.
“그래요? 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다 방법이 있죠.”
그리고 저 차는 그럼 뭔가요. 면접관은 공원의 다리 쪽을 가리켰다.
“짐은 다 가져오셨죠? 저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가 가리킨 다리는 우리 공원을 지나는 강 위로 놓아 보행자가 다닐 수 있게 한 것으로 날이 괜찮을 때는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지금은 이른 새벽이라 너무 추워서 아무도 없었지만.
“저 너머요?”
고속버스라도 다니나?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없는데. 별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면접관은 내 옆을 걸으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저 친구가 길을 잘 가르쳐 드릴 테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리는데, 멀미하실 수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아, 혹시 멀미하는 편이세요?”
“안 해요.”
“잘됐네요. 어젯밤엔 잘 주무셨어요?”
걱정돼서 솔직히 약간 악몽은 꿨다. 내가 용궁에 납치당하는 토끼가 되어서 내 간……! 내 간은 놓고 왔다고……! 하고 외치니까 새디스트 용왕이 채찍으로 날 때리면서 그런 말에는 이제 속지 않아! 네 선배들이 다 하고 갔다고! 하지만 그들 중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하고 소리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을 채찍으로 때릴 기운이 있으면 용왕은 토끼 간이 없어도 괜찮은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꿈에 대해 앞으로 같은 회사 소속으로 근무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약간 얼고 굳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네. 잘 잤어요. 이 근처 사세요?”
“네, 저는 근처 살아요. 저 친구 데려다주러 왔지요.”
왜?
“친하세요?”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른 나이에 사고 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나이 차가 나 보인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은 좀 같이 하는 편이죠.”
“이런 일이요?”
“아, 다 왔네요.”
면접관은 내 말을 막듯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아직 다리 한가운데인데 무슨 소리지, 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제 보니 우리 앞을 걷던 별도 멈춰서 다리 난간 아래를 보고 있었다.
이해하기도 전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다음 순간 면접관과 별은 동시에 나를 붙잡고 난간 너머로 던져 버렸다.
하늘이 아득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고 오랫동안 추락을 느끼지 못했다. 정수리가 실로 당겨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 이후.
……나는 물에 빠졌다.
실제로 다리에서 강에 빠지면 물에 풍덩 하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것마냥 으깨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는데, 꼭 수영장에 천천히 입수할 때처럼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충격이랄 만한 것은 없었고, 오히려 시야만이 홀로그램 영상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녹색으로 가렸다. 나는 한참 후에야 숨을 들이켰다.
한 박자 뒤에 질겁했지만 물은 밀려들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 위에 있을 때보다도 부드러운 공기가 폐를 시원하게 씻었다. 면접관은 내가 무심코 꽉 잡은 트렁크를 친절하게도 나와 함께 통째로 들어 던져 준 참이었다. 나는 내가 뭔가 넓은 곳에 실려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트렁크를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내 등 아래에 있는 것을 물 아래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보았다.
거대한 자라 한 마리가 나를 업고 미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어?”
놀랍게도 숨은 비명을 지른 후에도 계속 쉴 수 있었고 자라를 보기 위해 몸을 더 일으켰는데도 튕겨 떨어져 나가거나 하지 않았다. 안전벨트 같은 것 없이 느슨하게 그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내가 지른 비명에 자라가 목을 길게 뽑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자라가 목을 길게 뽑는 것을 수산 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정도 되는 스케일은 처음이라 숨을 또 들이켰다.
자라의 눈은 맑고 아름다웠다. 자라가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용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주 대담한 사기 계약에 걸렸거나. 계약서 어디에도 내 간이 요리 재료라는 말은 없었다.
이동은 정말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라는 빠르게 헤엄쳤고 물속의 온갖 쓰레기와 찌꺼기와 물고기 따위는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슥슥 내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여긴 분명히 바다겠구나 싶은 깊고 넓은 물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점차 햇빛과 멀어져 시커멓고 물고기도 적었던 물의 저 먼 아래에 밝고 아름다운 빛이 있는 궁전이 보였다.
그래, 진짜다. 나는 이대로 간을 뽑히는 거야. 알량한 계약금에 속아서 정말로 장기밀매를 당할 줄이야. 나는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아 오히려 현실적인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헤엄치던 자라가 내게 말했다.
“거의 다 왔으니 멀미가 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계속 머무르면 춥습니다.”
멀미가 문제냐? 나는 자라가 아주 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기를 믿은 토끼를 교활하게 속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 자라가 그 자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육지 사람에게 부를 약속하더니 용궁으로 납치하는 작태는 똑같잖아.
계속 헤엄쳐 오다 보니 나는 자세를 좀 편안하게 바꾸고 있었는데 자라의 등은 내 방 정도는 될 정도로 넓었고 그 위에 트렁크를 놓아도 미끄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그의 등 위에서 나와 트렁크가 모두 전혀 젖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묻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휴대폰과 노트북이 모두 걱정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내 꿈인지 아닌지 아직 구별이 되지 않는 해저 궁전은 맑고 매끄러운 도자기로 기와를 해서 얹고 추녀 끄트머리에는 반짝이는 산호와 긴 술을 늘어뜨려 장식한 근사한 곳이었고 그 담과 전각이 가까워질수록 대단히 넓게 펼쳐졌다. 다른 광원이 없어서인지 그 궁전의 담장에는 빛나는 구슬이 등불처럼 박혀 있었고 환상적인 빛으로 반짝이는 해파리 떼가 한가로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 종이 식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순수하게 그 안에서 나오는 푸르고 노란 빛에 감탄했다.
“예쁘다.”
자라는 대답하지 않고 궁전 입구를 향해 열심히 헤엄쳤다. 나는 궁전의 대문이 광화문의 다섯 배 정도 크기는 될 정도로 거대한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큰 물고기를 너무 많이 봤다. 대문의 자개로 된 현판에는 내가 모르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대충 갑골 문자 시절의 상형 문자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모양이었다.
대문 앞의 거대한 길에는 희고 가는 모래가 깔려 있었고 양쪽에 해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과연 그것이 식용일지 습관적으로 고민하는 내 옆에서 자라가 아름다운 소년으로 변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까의 자라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지요, 김연지 씨. 어라하와 어륙께서 기다리십니다.”
혹시 그게 용왕과 어의라는 뜻은 아니지? 나는 마른 바닥을 밟으며 의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지요?”
그런 악몽도 있다. 내가 꿈을 꾸는 거냐고 물어보면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그래, 꿈이다! 하면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악몽. 나는 이미 추락의 충격에서 돌아와 정신이 충분히 맑은 것 같았지만 내 이성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다. 별은 사랑스러운 얼굴로 수줍게 웃었다. 그의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윤기가 아름다웠다.
“꿈이 아니에요. 들어가셔서 식사하시면서 말씀하세요. 환영 연회가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이거 너무 전설대로잖아. 나는 아무래도 내가 취업이 너무 안 되어서 정신이 정말로 나간 게 아닌지, 혹은 아주 깊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하며 또 물었다.
“혹시 들어가면 제 간으로 용왕님의 병을 치료한다든가…….”
별은 또 수줍게 웃었다. 그 얼굴은 어느 잡지 광고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예뻤다. 그는 겨우 큰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라하는 건강하세요. 그 전설은 사실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하는 토끼가 어디 있어요.”
지금 내 눈앞에 용궁하고 말하는 자라하고 자라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일이 나타났는데 말하는 토끼가 왜 없어! 나는 끝내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약간 울상을 지었다. 별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했다.
“계약하신 대로 요리를 해 주시면 돼요. 계신 동안 최대한의 편의를 돌봐 드리고 손님으로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자, 들어가요.”
토끼도 파티 중반까지는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내가 뭐 간을 육지에 놓고 왔다고 해서 돌려보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이 바다에서 나가기는커녕 꿈에서 깨어날 방법도 지금은 없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별의 뒤를 따라갔다. 별은 내 트렁크를 나 대신 끌고 갔다.
거대하고 활짝 열린 성문 앞에 도달하자 성문 옆에 차려져 있던 작은 초소에서 긴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 관모를 쓴 여자가 나와 물었다.
“별 주부님. 이분이 말씀하셨던 손님이십니까?”
“네.”
유별 씨의 정체는 진짜 별 주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웃지 않았다. 관모를 쓴 여자는 허리를 예쁜 금속 허리띠로 여미고 있었는데 허리띠 아래로 늘어뜨린 긴 패는 아무래도 옥으로 만든 것 같았고 저 현판에 있는 것과 같은 상형 문자가 새겨진 것이었다. 별은 자기 주머니에서도 옥패를 꺼내서 그 여자에게 보여 주었고 여자는 내게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올 생각은 없었지만 반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떨해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별 주부님, 어서 들어가세요. 어라하와 어륙이 김연지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은 내 트렁크를 끌고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를 따라서 용궁 안에 발을 들였다.
두꺼운 문 너머의 밝은 곳으로 끝없는 용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명백하게 보행자를 위한 높이에 붙은 조명이 유백색의 불투명하고 거대한 구슬인데 이제 보니 전선 같은 것이 연결된 흔적이 없어 약간 놀랐다. 거대한 대문은 약 스무 걸음 정도를 걸어야 반대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천장에든 벽에든 화려한 오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대문을 빠져나오니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금속 벨트나 긴 천으로 묶은 긴 여밈옷을 입고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 아래로 나온 머리칼을 보니 다들 머리카락 자체는 길게 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색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천으로 된 옷에 장신구를 늘어뜨렸고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짧아 무릎 위로 올라가는 여밈옷 아래로 바지를 입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진짜 전래 동화에 나오는 용궁 같다. 나는 별의 뒤를 따라가며 사람들과 건물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사람들은 처음 볼 때는 다 평범한 사람 같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새우처럼 앞으로 뻗은 수염을 가진 키 작은 할머니도 있었고 목 양쪽으로 작은 지느러미가 나와 팔랑이는 소년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점이 있었던 어떤 아주머니는 어느 순간 다시 보니 점이 아니라 심해어의 불빛을 그 자리에 붙여서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별은 정말로 보통 사람과 똑같은데. 나는 가다 말고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해 별에게 물었다. 이게 꿈이든 아니든 일단 물어는 봐야겠다.
“저기,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저처럼 밖에서 오신 사람이신지…….”
물론 아닌 건 안다. 별은 계속 걸으며 내게 조용히 대답했다. 스스럼은 없는 태도였다.
“김연지 씨처럼 밖에서 오신 분은 지금은 없어요. 다 저처럼 둔갑한 용궁 백성들이지만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둔갑이라니. 고등학생 때 고전 문학을 공부한 이후로 처음 듣는 단어다. 나는 노파심에 물었다.
“제가 그럼 따로 조심해야 하는 건…….”
평소에는 성질을 잘도 부리면서 자꾸 말끝을 흐리는 것은 여전히 너무 당황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별은 작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육지에서처럼 행동하시면 돼요. 숨 쉬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시지요?”
물에 빠질 때부터 그랬지.
그러니까 만약 지금 이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물 아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깊은 바닷속이다. 토끼 간을 빼 드시려고 했던 줄로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사실 말하는 토끼란 없으므로 누명을 쓴 것이셨다는 용왕님이 계신 용궁에 계약직 직원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