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역시 사기 계약이다. 계약서상의 조건이 다 맞다고 해도 사람이 바다 밑에서 근무해야 한다면 그건 좀 특기해 줘야 하는 사항 아닌가. 게다가 용왕님이 건강하시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럼 바닷속에서 내가 해야 하는 요리는 무엇이며 요리 재료는 뭐란 말인가. 뭐 마장동에서 돼지고기를 납품받고 있지는 않을 텐데.
저 하늘처럼 보이는 위의 어딘가는 분명히 물일 텐데도 물과 물이 아닌 곳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닥은 말라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니 휴대폰도 젖은 기색 없이 멀쩡하다.
별은 나와 함께 전각과 전각 사이를 복잡하게 빠져나가고 여러 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용궁의 담은 대부분 나보다 키가 컸지만 그럭저럭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의 크기였지 대문처럼 아주 크지는 않은 정도였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곳이나 무척 높아 육지에서나 볼 것 같은 첨탑도 있었는데 다른 전각이 대부분 단층이거나 2층, 높아 봐야 3층 정도라는 점을 고려할 때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는 햇빛도 없는데 어떻게 자라는 것인지 모를 식물이 아름답게 자란 정원이 시야에 들어오는 어떤 전각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전각은 높지 않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대문이 열려서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용왕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또 어륙인지 하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기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별은 막 그 전각에서 나온 예쁜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김연지 씨를 모셔 왔습니다.”
그 아가씨는 한창 청소를 하던 중인 듯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꼭 해초로 만든 것 같았다. 그녀는 금세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고개 숙였다.
“어서 오세요. 마침 쓰실 방의 정리가 다 되었답니다.”
아, 하긴 트렁크를 들고 바로 가는 것은 좀 그렇다. 그 아가씨 말고도 여러 사람이 또 대문을 건너 드나들었지만 아가씨는 빗자루를 대문 옆에 내려놓고 별에게서 트렁크를 받아 들었다. 별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세요. 아침 식사 아직 안 하셨지요? 어라하와 어륙이 함께 식사하시고자 하십니다.”
나는 죽어도 세끼 먹어야 하고 잘하면 네 끼 다섯 끼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물론 먹고 왔고 트렁크 안에 간식도 있었지만 조찬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네, 하고 정신없이 대답하고 예쁜 아가씨의 뒤를 따라갔다.
예쁜 아가씨는 이제 보니 목에 작고 투명한 지느러미가 있었고 아가미가 가끔 열렸다. 그러나 그 얼굴이나 몸집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머리칼도 잘 손질한 티가 났다. 그녀는 나와 함께 전각 안으로 들어가며 붙임성 좋게 종알거렸다.
“지상에서 손님이 오신 건 참 오랜만이어요. 용궁까지 오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방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어륙께서도 몹시 즐거워하시며 방을 꾸미셨답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봐서 그 어륙이라는 분은 높은 분 같은데 내 방을 꾸며 주셨다고? 이 무슨 회사 사장님이 신입 사원 책상 꾸며 주는 부담스러움인가. 집에 당장 가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계약서를 여러 번 읽어 봤고 위약금이 세 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희도 사가에서는 지상의 의복을 흉내 내어 입기도 하는데, 이렇게 진짜 지상 분이 오셨으니 많이 배우고 싶어요. 한 해 동안 계신다고요?”
위약금. 위약금이 세 배. 나는 ‘아뇨, 지금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싶었지만 일단 붙임성 좋게 행동하기로 했다.
전각은 주춧돌이 뭔지 모를 녹색의 맑고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되어 있었고 기둥은 대리석이었다. 그리고 섬돌은 내 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비취 같았다.
섬돌에 자연스레 그 아가씨가 벗어 놓은 신은 재질이 뭔지 모르지만 아주 예쁜 분홍색이었다. 나는 내가 신고 온 구두를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마루는 일단 나무로 되어 있었고 시원하며 깨끗했다.
“저기.”
“네?”
예쁜 아가씨는 내가 겨우 말을 걸자 기쁘다는 듯 대답하며 트렁크를 마루에 올렸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나무 바닥인가요?”
“네. 어머나, 혹시 나무 바닥을 싫어하셔요? 지상 분이시라 편하실 줄 알았는데. 바꿀까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나무가 좋은데, 용궁에 나무가 있는 게 신기해서요.”
“아, 그러셨어요. 나무는 지상에서 주문해 들여온답니다.”
어떻게! 바닷속까지 배달이 돼?
아가씨는 생긋 웃으며 나와 함께 전각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걱정했는데 실내는 바닥이 원목이었고 안이 꽤 평범하게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각 크기부터가 작았는데 일단 창호지가 붙은 꽃살문 하나와 불발기 하나를 열고 들어가니 방은 신기할 정도로 깊고 넓었다. 섬세한 무늬가 들어간 창은 잠금 고리가 은색의 무언가―차라리 은이면 나을 것이고, 백금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였고 충분히 컸으며 옷장, 책장, 테이블 따위의 가구는 호텔처럼 잘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방의 가장 동쪽에는 크고 조각이 붙은 킹사이즈 베드가 있었다.
방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아가씨와 장을 닦던 아가씨는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셔요. 어서 오세요.”
너무 환영받는다. 나는 최대한 밝게 인사하며 그들의 입가의 물고기 수염이나 손에 달린 물갈퀴 따위를 못 본 척했다. 그들은 내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편히 쉬실 수 있는 방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따위를 종알거리다가 자기들끼리 핫 하고 놀랐다.
“어머나, 어라하와 어륙께서 기다리시겠어.”
“별 주부님이 밖에서 기다리신대.”
“별 주부님? 나 보러 갈래!”
“일해, 일.”
“내가 모시고 나갈 거야!”
별 주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확 밝아진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을 진지하게 을렀다. 뭘 누굴 뭐? 나는 그제야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어, 어라하와 어륙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 말에 아가씨들의 수다가 잠시 멎었다. 그녀들이 입은 옷은 소매가 많이 넓은 편이었고 허리띠는 세 명 모두 무늬 없는 천이었는데 치마는 입은 사람도 있고 바지를 대신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녀들 중 나를 이 안으로 데려오지도 않고 별 주부라는 말에 눈을 빛내지도 않은 마지막 사람이 내게 친절하게 말했다.
“어머나, 지상 분이셔서 모르시는구나. 용왕님과 용궁부인님을 용궁 백성들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많이 기다리셨으니 어서 가셔서 조찬을 함께하셔요.”
아. 그러니까 나는 계약직이지만 용궁에서 입주로 일하기로 한 거고 사택이란 용궁을 말하는 것이었고 지금부터 용왕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구나. 그래, 거기까진 짐작하고 있었어.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기로 했다.
“그, 어라하께선 건강하시지요?”
간이 필요한 동물은 정말로 없는 거겠지. 세 명의 아가씨는 깔깔 웃었다. 그녀들은 내가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그런 걸 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별이 나를 데려간 건물은 용궁에서 첨탑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고 그 어느 건물보다도 호화로워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의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었다. 그는 내가 머물기로 한 전각에서 그곳까지 가는 지름길을 세세하게 알려 주며 그 큰 건물의 이름이 월수궁이라고 했다.
월수궁은 다른 곳보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장식도 화려했다. 정교하게 뻗은 청자 수막새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었고 추녀마다 드리운 장식은 이제 보니 옥과 산호로 만든 풍경이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스치며 풍경이 내는 맑고 웅웅거리는 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전각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녹색 맑은 옥으로 된 계단을 올랐는데 그 계단의 난간은 돋을새김 장식이 화려한 수정이었다.
신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오갔다. 그중 한 청년이 나와 별 주부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라하와 어륙, 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용자? 나는 별에게 속삭여 물었다.
“저, 용자님이라는 분은 혹시.”
“어라하와 어륙의 아드님이십니다.”
별이 내게 속삭여 대답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줍음을 탔던 모양으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게 반응하고 대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세상에, 용왕의 왕자도 있구나. 용왕의 아들에 대해 수업 시간에 배우긴 했던 것 같은데. 다리가 네 개라고 노래했던 그 용 아닌가. 아닌가?
고민해 봐야 중등 교육 과정은 내게서 너무 먼 과거였다. 나는 청년이 이끄는 대로 별과 함께 월수궁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월수궁 실내는 아주 모던한 퓨전 호텔처럼 붓글씨니 심플한 열매, 또 비단에 그린 그림 따위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촌스러운 구석이 없고 우아했다.
몇 개인가의 문을 지나 음식 냄새가 나는 곳 앞에 서자 나는 드디어 내가 예의 장소에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긴장했다. 어딘가에서 팬 치는 소리와 국자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주방도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이 내가 일할 곳일까. 이렇게 넓은 궁에 설마 주방이 한 군데야 아닐 테지만…….
화려한 옷의 청년은 닫혀 있는 문의 앞에 서서 고상하게 말했다.
“어라하, 어륙, 용자님. 기다리시던 손님이 왔습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의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돌아온 목소리는 의외로 젊게 느껴지는 남녀의 것이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라.”
“알겠느니.”
별은 그대로 말없이 물러났고 청년은 문을 열었다. 내가 불안하게 별을 시선으로 좇자 그는 내게 미소 짓고 그대로 가 버렸다. 그는 아침 식사에 초대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우면서도 무거운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까 어라하와 어륙이라고 청년이 불렀을 때 대답한 목소리 중 하나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식당 안을 보았다.
나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검푸른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잘 다듬은 상아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에 깊고 긴 눈을 가진 그는 새까만 눈으로 나를 나른하게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잠시 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계속해서 보았다. 나는 그의 무뚝뚝한 표정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가 어딘가 기분이 상해 있는 상태라는 것도 파악했다. 저 붉은 입술은 고집스럽게도 생겼다. 길(吉) 자로 장식한 나무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 자세는 그리고…….
어쩐지 울렁거리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이 아주 많이 뛰고 입에 침이 고였다. 방 안에 있는 세 명은 모두 식탁 앞에 앉아서 식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식탁 의자에 바르지 못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을 싫어했다. 얼마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저쪽이 먼저 눈을 떼자 나는 그 남자의 건너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마도 저 삐딱이가 용자일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연지입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기다리지 않았어요.”
용궁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용왕 부부는 저 청년의 부모라고 생각하기에는 약간 너무 젊다 싶을 정도로 동안이었는데, 아들을 포함한 가족이 모두 대단히 아름다웠으며 눈썹은 끝으로 갈수록 짙고 약간 길었다. 나는 용왕과 용궁부인의 인상이 아주 마음에 들어 일단 안심했다. 청년이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식탁은 원형이었고 내가 앉은 곳은 용왕과 용자의 사이이자 용궁부인과 마주하는 자리였다. 나는 식탁에 앉을 때까지는 어색했지만 일단 앉은 뒤로는 직업적 호기심으로 음식을 흘끔흘끔 보았다. 나를 안내한 청년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내게도 그릇과 수저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용자에게도 시선을 가끔 주었는데 그는 내게 여전히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용궁에 불러서 많이 놀랐지요? 설명은 들었나요?”
용궁부인이 먼저 붙임성 좋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주름이 없었지만 눈이 깊었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연륜이 묻어났다.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조금 놀랐습니다. 설명은…… 저, 식단을 짜는 일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런데 제가 용궁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서 먼저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해.
둥근 식탁 가운데에는 온갖 음식이 각자의 그릇에 보기 좋게 담겨 쌓여 있었고 그걸 개인 그릇에 먹고 싶은 만큼 담아서 먹는 방식인 모양이었는데, 아침 식사라서인지 아니면 그게 용궁식인지 죽 같은 것과 부드러운 채소 요리 따위가 많았다. 놀랍게도 지금 있는 요리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재료로 만든 것이 절반 이상이었다.
용왕도 친절하게 말했다.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인 아들과 달리 두 사람은 내게 계속 웃었고 예의 발랐다.
“괜찮아요. 용궁에서만 먹는 음식은 우리 수라간에서도 할 수 있어요.”
“김연지 씨라고 했지요? 연지 씨는 지상의 음식을 다양하게 잘 아니 지상 음식을 해 주길 바라서 초대한 거예요.”
“……저, 이 식탁에도 지상에서 먹는 음식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잘못 안 건가요?”
나는 생선구이와 당근볶음, 돼지고기조림 따위를 흘깃 보며 물었다.
용왕 부부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잠깐, 그보다 용궁인데 왜 생선구이야. 그거 백성을 먹는 거 아니야?
역시 사기 계약이다. 계약서상의 조건이 다 맞다고 해도 사람이 바다 밑에서 근무해야 한다면 그건 좀 특기해 줘야 하는 사항 아닌가. 게다가 용왕님이 건강하시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럼 바닷속에서 내가 해야 하는 요리는 무엇이며 요리 재료는 뭐란 말인가. 뭐 마장동에서 돼지고기를 납품받고 있지는 않을 텐데.
저 하늘처럼 보이는 위의 어딘가는 분명히 물일 텐데도 물과 물이 아닌 곳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닥은 말라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니 휴대폰도 젖은 기색 없이 멀쩡하다.
별은 나와 함께 전각과 전각 사이를 복잡하게 빠져나가고 여러 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용궁의 담은 대부분 나보다 키가 컸지만 그럭저럭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의 크기였지 대문처럼 아주 크지는 않은 정도였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곳이나 무척 높아 육지에서나 볼 것 같은 첨탑도 있었는데 다른 전각이 대부분 단층이거나 2층, 높아 봐야 3층 정도라는 점을 고려할 때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는 햇빛도 없는데 어떻게 자라는 것인지 모를 식물이 아름답게 자란 정원이 시야에 들어오는 어떤 전각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전각은 높지 않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대문이 열려서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용왕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또 어륙인지 하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기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별은 막 그 전각에서 나온 예쁜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김연지 씨를 모셔 왔습니다.”
그 아가씨는 한창 청소를 하던 중인 듯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꼭 해초로 만든 것 같았다. 그녀는 금세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고개 숙였다.
“어서 오세요. 마침 쓰실 방의 정리가 다 되었답니다.”
아, 하긴 트렁크를 들고 바로 가는 것은 좀 그렇다. 그 아가씨 말고도 여러 사람이 또 대문을 건너 드나들었지만 아가씨는 빗자루를 대문 옆에 내려놓고 별에게서 트렁크를 받아 들었다. 별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세요. 아침 식사 아직 안 하셨지요? 어라하와 어륙이 함께 식사하시고자 하십니다.”
나는 죽어도 세끼 먹어야 하고 잘하면 네 끼 다섯 끼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물론 먹고 왔고 트렁크 안에 간식도 있었지만 조찬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네, 하고 정신없이 대답하고 예쁜 아가씨의 뒤를 따라갔다.
예쁜 아가씨는 이제 보니 목에 작고 투명한 지느러미가 있었고 아가미가 가끔 열렸다. 그러나 그 얼굴이나 몸집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머리칼도 잘 손질한 티가 났다. 그녀는 나와 함께 전각 안으로 들어가며 붙임성 좋게 종알거렸다.
“지상에서 손님이 오신 건 참 오랜만이어요. 용궁까지 오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방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어륙께서도 몹시 즐거워하시며 방을 꾸미셨답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봐서 그 어륙이라는 분은 높은 분 같은데 내 방을 꾸며 주셨다고? 이 무슨 회사 사장님이 신입 사원 책상 꾸며 주는 부담스러움인가. 집에 당장 가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계약서를 여러 번 읽어 봤고 위약금이 세 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희도 사가에서는 지상의 의복을 흉내 내어 입기도 하는데, 이렇게 진짜 지상 분이 오셨으니 많이 배우고 싶어요. 한 해 동안 계신다고요?”
위약금. 위약금이 세 배. 나는 ‘아뇨, 지금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싶었지만 일단 붙임성 좋게 행동하기로 했다.
전각은 주춧돌이 뭔지 모를 녹색의 맑고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되어 있었고 기둥은 대리석이었다. 그리고 섬돌은 내 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비취 같았다.
섬돌에 자연스레 그 아가씨가 벗어 놓은 신은 재질이 뭔지 모르지만 아주 예쁜 분홍색이었다. 나는 내가 신고 온 구두를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마루는 일단 나무로 되어 있었고 시원하며 깨끗했다.
“저기.”
“네?”
예쁜 아가씨는 내가 겨우 말을 걸자 기쁘다는 듯 대답하며 트렁크를 마루에 올렸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나무 바닥인가요?”
“네. 어머나, 혹시 나무 바닥을 싫어하셔요? 지상 분이시라 편하실 줄 알았는데. 바꿀까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나무가 좋은데, 용궁에 나무가 있는 게 신기해서요.”
“아, 그러셨어요. 나무는 지상에서 주문해 들여온답니다.”
어떻게! 바닷속까지 배달이 돼?
아가씨는 생긋 웃으며 나와 함께 전각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걱정했는데 실내는 바닥이 원목이었고 안이 꽤 평범하게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각 크기부터가 작았는데 일단 창호지가 붙은 꽃살문 하나와 불발기 하나를 열고 들어가니 방은 신기할 정도로 깊고 넓었다. 섬세한 무늬가 들어간 창은 잠금 고리가 은색의 무언가―차라리 은이면 나을 것이고, 백금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였고 충분히 컸으며 옷장, 책장, 테이블 따위의 가구는 호텔처럼 잘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방의 가장 동쪽에는 크고 조각이 붙은 킹사이즈 베드가 있었다.
방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아가씨와 장을 닦던 아가씨는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셔요. 어서 오세요.”
너무 환영받는다. 나는 최대한 밝게 인사하며 그들의 입가의 물고기 수염이나 손에 달린 물갈퀴 따위를 못 본 척했다. 그들은 내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편히 쉬실 수 있는 방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따위를 종알거리다가 자기들끼리 핫 하고 놀랐다.
“어머나, 어라하와 어륙께서 기다리시겠어.”
“별 주부님이 밖에서 기다리신대.”
“별 주부님? 나 보러 갈래!”
“일해, 일.”
“내가 모시고 나갈 거야!”
별 주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확 밝아진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을 진지하게 을렀다. 뭘 누굴 뭐? 나는 그제야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어, 어라하와 어륙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 말에 아가씨들의 수다가 잠시 멎었다. 그녀들이 입은 옷은 소매가 많이 넓은 편이었고 허리띠는 세 명 모두 무늬 없는 천이었는데 치마는 입은 사람도 있고 바지를 대신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녀들 중 나를 이 안으로 데려오지도 않고 별 주부라는 말에 눈을 빛내지도 않은 마지막 사람이 내게 친절하게 말했다.
“어머나, 지상 분이셔서 모르시는구나. 용왕님과 용궁부인님을 용궁 백성들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많이 기다리셨으니 어서 가셔서 조찬을 함께하셔요.”
아. 그러니까 나는 계약직이지만 용궁에서 입주로 일하기로 한 거고 사택이란 용궁을 말하는 것이었고 지금부터 용왕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구나. 그래, 거기까진 짐작하고 있었어.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기로 했다.
“그, 어라하께선 건강하시지요?”
간이 필요한 동물은 정말로 없는 거겠지. 세 명의 아가씨는 깔깔 웃었다. 그녀들은 내가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그런 걸 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별이 나를 데려간 건물은 용궁에서 첨탑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고 그 어느 건물보다도 호화로워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의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었다. 그는 내가 머물기로 한 전각에서 그곳까지 가는 지름길을 세세하게 알려 주며 그 큰 건물의 이름이 월수궁이라고 했다.
월수궁은 다른 곳보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장식도 화려했다. 정교하게 뻗은 청자 수막새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었고 추녀마다 드리운 장식은 이제 보니 옥과 산호로 만든 풍경이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스치며 풍경이 내는 맑고 웅웅거리는 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전각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녹색 맑은 옥으로 된 계단을 올랐는데 그 계단의 난간은 돋을새김 장식이 화려한 수정이었다.
신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오갔다. 그중 한 청년이 나와 별 주부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라하와 어륙, 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용자? 나는 별에게 속삭여 물었다.
“저, 용자님이라는 분은 혹시.”
“어라하와 어륙의 아드님이십니다.”
별이 내게 속삭여 대답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줍음을 탔던 모양으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게 반응하고 대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세상에, 용왕의 왕자도 있구나. 용왕의 아들에 대해 수업 시간에 배우긴 했던 것 같은데. 다리가 네 개라고 노래했던 그 용 아닌가. 아닌가?
고민해 봐야 중등 교육 과정은 내게서 너무 먼 과거였다. 나는 청년이 이끄는 대로 별과 함께 월수궁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월수궁 실내는 아주 모던한 퓨전 호텔처럼 붓글씨니 심플한 열매, 또 비단에 그린 그림 따위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촌스러운 구석이 없고 우아했다.
몇 개인가의 문을 지나 음식 냄새가 나는 곳 앞에 서자 나는 드디어 내가 예의 장소에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긴장했다. 어딘가에서 팬 치는 소리와 국자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주방도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이 내가 일할 곳일까. 이렇게 넓은 궁에 설마 주방이 한 군데야 아닐 테지만…….
화려한 옷의 청년은 닫혀 있는 문의 앞에 서서 고상하게 말했다.
“어라하, 어륙, 용자님. 기다리시던 손님이 왔습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의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돌아온 목소리는 의외로 젊게 느껴지는 남녀의 것이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라.”
“알겠느니.”
별은 그대로 말없이 물러났고 청년은 문을 열었다. 내가 불안하게 별을 시선으로 좇자 그는 내게 미소 짓고 그대로 가 버렸다. 그는 아침 식사에 초대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우면서도 무거운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까 어라하와 어륙이라고 청년이 불렀을 때 대답한 목소리 중 하나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식당 안을 보았다.
나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검푸른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잘 다듬은 상아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에 깊고 긴 눈을 가진 그는 새까만 눈으로 나를 나른하게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잠시 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계속해서 보았다. 나는 그의 무뚝뚝한 표정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가 어딘가 기분이 상해 있는 상태라는 것도 파악했다. 저 붉은 입술은 고집스럽게도 생겼다. 길(吉) 자로 장식한 나무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 자세는 그리고…….
어쩐지 울렁거리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이 아주 많이 뛰고 입에 침이 고였다. 방 안에 있는 세 명은 모두 식탁 앞에 앉아서 식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식탁 의자에 바르지 못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을 싫어했다. 얼마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저쪽이 먼저 눈을 떼자 나는 그 남자의 건너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마도 저 삐딱이가 용자일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연지입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기다리지 않았어요.”
용궁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용왕 부부는 저 청년의 부모라고 생각하기에는 약간 너무 젊다 싶을 정도로 동안이었는데, 아들을 포함한 가족이 모두 대단히 아름다웠으며 눈썹은 끝으로 갈수록 짙고 약간 길었다. 나는 용왕과 용궁부인의 인상이 아주 마음에 들어 일단 안심했다. 청년이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식탁은 원형이었고 내가 앉은 곳은 용왕과 용자의 사이이자 용궁부인과 마주하는 자리였다. 나는 식탁에 앉을 때까지는 어색했지만 일단 앉은 뒤로는 직업적 호기심으로 음식을 흘끔흘끔 보았다. 나를 안내한 청년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내게도 그릇과 수저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용자에게도 시선을 가끔 주었는데 그는 내게 여전히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용궁에 불러서 많이 놀랐지요? 설명은 들었나요?”
용궁부인이 먼저 붙임성 좋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주름이 없었지만 눈이 깊었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연륜이 묻어났다.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조금 놀랐습니다. 설명은…… 저, 식단을 짜는 일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런데 제가 용궁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서 먼저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해.
둥근 식탁 가운데에는 온갖 음식이 각자의 그릇에 보기 좋게 담겨 쌓여 있었고 그걸 개인 그릇에 먹고 싶은 만큼 담아서 먹는 방식인 모양이었는데, 아침 식사라서인지 아니면 그게 용궁식인지 죽 같은 것과 부드러운 채소 요리 따위가 많았다. 놀랍게도 지금 있는 요리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재료로 만든 것이 절반 이상이었다.
용왕도 친절하게 말했다.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인 아들과 달리 두 사람은 내게 계속 웃었고 예의 발랐다.
“괜찮아요. 용궁에서만 먹는 음식은 우리 수라간에서도 할 수 있어요.”
“김연지 씨라고 했지요? 연지 씨는 지상의 음식을 다양하게 잘 아니 지상 음식을 해 주길 바라서 초대한 거예요.”
“……저, 이 식탁에도 지상에서 먹는 음식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잘못 안 건가요?”
나는 생선구이와 당근볶음, 돼지고기조림 따위를 흘깃 보며 물었다.
용왕 부부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잠깐, 그보다 용궁인데 왜 생선구이야. 그거 백성을 먹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