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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루 1권1화
서장
“정녕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청색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다.
이 중년인은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으나 일대종사의 기품이 흘러넘쳤다.
중년인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이 대답하였다.
“예.”
그는 검은색 무복에 평범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은 미남형이었다. 이 청년은 왠지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매가 중년인과 닮아 있었다.
청년의 말을 들은 중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는 의자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낮은 한숨.
“후, 그래 그럼 무엇을 하고 싶으냐?”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청년의 말에 곳곳에서 의외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허허.”
“흠…….”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이곳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 가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 나머지는 전부 서 있다는 것.
“돈을 벌고 싶은 게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더냐?”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굴 찾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느냐?”
“…….”
부리부리한 눈매의 잘생긴 청년은 뭔가 망설이는 듯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중년인이 다시 물었다.
“말하기 싫으냐?”
“아닙니다, 교주님.”
“그럼 말해 보거라.”
“한 여인과 남자들입니다.”
“흠,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잠시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든 청년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한 여자라 함은 제가 평생 사랑할 부인입니다.”
웅성웅성.
약간 소란스러워진 대전 안, 아무런 표정 없던 중년인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이윽고 중년인이 손을 살짝 들자 소란스러움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호오,그래? 여자라…… 그동안 보아온 규수들이 마음에 안 들더냐?”
“그런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사랑할 만한 여자는 없었습니다.”
중년인은 청년의 말에 동의를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후후후, 좋다. 그리고 또 없느냐?”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입니다. 마음 놓고 제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들을 찾을 겁니다.”
“……!”
대전 안의 모든 시선이 다음 대답을 기다리며 중년인의 등으로 쏠렸다.
“훗, 푸핫핫핫핫핫핫!”
중년인은 몸을 돌리며 대전 안이 뒤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소리가 얼마나 큰지 대전 안의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들끓는 기를 제어하기 바빴다. 반면 청년은 범상치 않는 무위를 가진 듯 평온한 신색이었다.
그렇게 한참 웃던 중년인은 손가락으로 청년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을 하였다.
“좋다! 너를 막지 않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청년은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교주!”
“교주님!”
여태 잠자코 있던 대전 안의 사람들이 중년인을 말리려는 듯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안 됩니다!”
“교주님 다시 한 번 고려하심이…….”
손을 들어 좌중의 입을 막는 중년인.
“나 육대 천마 천운학이 말한다.”
처처처처척.
“받듭니다!”
중년인을 제외한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태성이를 막지 마라!”
“존명!”
“아핫핫핫핫핫!”
중년인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었다.
“그래 어떤 장사를 할 것이냐? 상단?”
“객잔을 차릴 겁니다.”
“객잔이라고?”
“네.”
“들러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가 보거라.”
“부디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가끔 들러서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예, 제가 최고의 술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기다리마.”
육대 천마 천운학, 그의 이런 말들을 다른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이구동성으로 외쳤을 것이다.
사기 치지 말라고.
천마가 자리한 이곳은 마도인들의 성지 마교 군림전이었다.
사방이 확 트인 노송 아래 그리고 큰바위.
쪼르르륵.
한 손은 술병을 쥐고 술을 따르며 한 손은 잔을 쥐고 술을 받는다. 각기 손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그들은 현 무림의 최강자 중 두 사람이었다.
검성 영호춘.
천마 천운학.
정파의 정신적 지주 검성, 뿐만 아니라 정파 제일고수이기도 한 그가 마교의 교주인 천마와 술을 마신다는 것은 현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성은 허옇게 된 백발에 비녀를 단정히 꼽고 백염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반면 천마는 흑발에 수염은 있었으나 그닥 길지 않았다.
검성은 술 한 잔 받고 병을 건네받아 천마에게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이놈 천가야, 이번에 네 자식놈이 가출을 했다던데?”
검성의 물음에 천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교주 안 한다더냐?”
“이 자리가 싫은가 보더구나.”
“어이쿠, 누가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어찌 저리 똑같누. 네놈도 태성이 나이 때쯤 교주 안 한다고 뛰쳐나갔었잖느냐.”
단아한 풍모와 더불어 검성이라는 위명이 어울리지 않게 영호춘의 말투는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말투였다.
“후후, 그랬지.”
꿀꺽.
천마는 옛 추억이 떠오르자 술맛이 좋은지 한잔을 그새 비웠다. 그러자 검성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탁.
빈 잔은 채워야 하는 법.
쪼르르르륵.
검성은 자신의 잔에 술이 따라지는 것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말이야, 뭐 하러 간다더냐?”
“장사하고 싶다나.”
“장사? 돈?”
“그래, 한데 돈이 목적이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사람들을 구한다나 뭐 한다나…….”
“어떤 사람들?”
“자신의 등을 맡길 친구, 그리고 이거.”
그러면서 천마는 검성에게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오호, 목숨을 내어줄 만한 친구와 더불어 아리따운 여인네를 찾아 나서시겠다?”
끄덕끄덕.
“캬∼ 태성이 녀석 멋진데. 나도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건데 강호에 나와 검 한 자루로 이 자리에 올랐건만 마음은 허전하더라. 그나마 다행인 게 요렇게 술 마실 친구 하나 건졌다는 거지.”
검성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마는 요즘 유행하는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익.
“허어, 이 천마가 검성에게 그 정도까지 가치 있는 줄 몰랐는걸, 이거 황공한데?”
“그것보다 이 홀아비로 있는 친구가 불쌍하지 않느냐? 어디 다리 좀 놔보거라.”
“허허. 낼모레면 무덤에 들어가실 분이 여자가 그렇게 그리운 게요?”
천마는 검성을 놀리려는 듯 말투를 높였다.
“이놈아, 늙으면 사내도 아니냐? 늙어도 남자는 남자다.”
“뭐 하러 나한테 부탁하느냐, 네 밑에 애들 풀면 되잖느냐.”
“그래도 검성인데 쪽팔리잖느냐.”
“어이구, 그래도 쪽팔림은 아시는 게요?”
검성은 약간 민망한지 화재를 돌려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너는 태성이 나이 때쯤 나가서 금방 잡혀 들어갔잖느냐.”
“그랬던가…….”
“그랬었다. 노교주가 봉공들 풀어서 한 열흘 만인가 잡혔잖느냐. 너도 그때처럼 봉공들 보낼 거냐?”
“아니.”
“왜?”
“너도 말했잖느냐, 강호에 나와 영웅이 되면 뭐 하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할 거 같더구나.”
검성은 천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놈아, 우리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자꾸 헛소릴 하는 게.”
“죽을 때는……. 후후, 한 오십 년은 너끈히 살 거 같은데.”
“그렇겠지.”
그들은 임독이맥과 생사현관이 뚫린 절대고수들이었다. 아마도 족히 백 년은 더 살리라.
검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그래 언제 소개 시켜 줄 거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소개 시켜줄까?”
갑자기 반색하며 자세가 공격적으로 변하는 검성.
“진짜? 누구? 누구?”
“남해 검각주…….”
“소령령? 걔는 좀 나이 차이가 많은데.”
“아니, 전대 각주.”
“검나찰?”
“어.”
“…….”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
휘이이이잉.
도대체 검나찰이 누구길래 검성의 표정이 저리도 구겨진단 말인가.
第一章 주방의 황태자(1)
가정제(嘉靖帝) 삼십육년 황궁.
탁탁탁탁.
츄아아아아.
음식 써는 소리가 장단에 맞춰 경쾌하게 들리며 기름이 끓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이곳은 황궁의 주방, 녹로관이다.
천하의 이름난 요리 장인이 모이는 녹로관은 등급에 따라 세 곳으로 구분된다. 제일 높은 등급은 상로관이라 하여 황제와 함께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게 된다.
다음 등급인 중로관은 황궁 안의 여러 대신들의 식사를 대접하고, 제일 낮은 등급인 하로관은 병사와 궁녀 등의 식사를 담당한다.
각기 일하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요리사의 벼슬도 달라지며 당연히 상로관에 제일 높은 벼슬이 주어진다. 또한 이곳의 모든 재료는 까다로운 검열을 거치게 된다.
그중 하로관의 주방 한켠.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요리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주방과 어울리지 않는 자주색 비단옷에 곱디고운 피부색, 딱 보니 귀티 줄줄 흘러내리는 귀공자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쭉 뻗은 눈썹, 왼쪽 눈 아래 찍힌 점 하나 그리고 붉디붉은 입술, 황궁의 궁녀들에게 한마디만 던지면 대번에 옷고름을 풀리라.
그런데 이 청년은 뭐가 불만인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 넣은 채 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양쪽 소매를 둥둥 걷어 올려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런 이 청년 앞에 뚱뚱한 요리사 하나가 기름에 야채를 튀기고 있었다.
츄아아아아.
솥과 국자를 쥐고 부드럽게 휘돌리던 요리사가 돌아보지 않고 말을 하였다.
“오황자님, 제발 돌아가십시오. 자칫 기름이라도 튀면 옷 다 버립니다.”
“아, 왜 안 되는데. 오숙수 제발 부탁인데 요리하게 해줘.”
오황자라고 불리운 이 미청년은 몸을 배배 흔들며 투정부리듯 대답했다. 다 큰 청년이 이러한 동작을 하면 이상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 서 있던 경호병 두 명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안 됩니다!”
“아 씨, 하게 해줘.”
그렇게 얼마간 밀고 당기던 실랑이는 미청년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우, 저 황소고집.’
오숙수라 불리는 요리사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정말?”
“단!”
오숙수는 갑자기 휙 돌아서며 검지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러자 미청년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
“지금은 안 됩니다. 이따가 업무가 끝나고 유시(17~19시)에 오십시오.”
“알았어, 오숙수. 그럼 나중에 봐, 수고해.”
“예, 오황자님 이따 뵙지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다는 오황자 주동동.
그가 이 주방에 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숙수는 그냥 대충 요리 한번 하게 해주면 되는데 왜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막는 것일까.
이유는 이러했다.
사 년 전, 오황자는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수많은 학문, 무공, 예절, 심지어 악기 다루는 법까지 빈틈없이 받다보니 자유시간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중에 유일하게 찾아온 흥밋거리, 그것은 요리였다.
황궁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요리 책을 보다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동동은 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위에서 황족이 무슨 요리냐 하면서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우연을 가장해서 녹로관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상로관이나 중로관은 까칠한 경비병들 때문에 드나들기가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은 하로관.
이곳에서 요리사들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밤에 몰래 잠입, 자기 혼자 요리를 하려다 그만 오숙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전후사정을 들은 오숙수는 별다른 뜻 없이 오황자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오숙수는 황자가 금방 싫증 나서 그만둔다는 가정하에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러나 웬걸 오황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요리 기술을 막힘 없이 배워 나갔다. 그러한 황자의 열정에 감복한 오숙수는 처음 가졌던 마음을 접고 성심성의껏 기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거의 다 배웠을 무렵 그만 태황후에게 들키고 말았다.
궁녀들의 쑥덕거림이 흘러흘러 황후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워낙 온화한 성격을 가진 태황후라 오숙수에게 별다른 처벌은 하지 않았지만 쓴소리와 더불어 주의를 주었다. 때문에 오숙수는 오황자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기름을 튀기던 오숙수는 불만인 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요리 하는 게 그렇게 천한가? 젠장!”
서장
“정녕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청색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다.
이 중년인은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으나 일대종사의 기품이 흘러넘쳤다.
중년인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이 대답하였다.
“예.”
그는 검은색 무복에 평범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은 미남형이었다. 이 청년은 왠지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매가 중년인과 닮아 있었다.
청년의 말을 들은 중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는 의자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낮은 한숨.
“후, 그래 그럼 무엇을 하고 싶으냐?”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청년의 말에 곳곳에서 의외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허허.”
“흠…….”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이곳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 가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 나머지는 전부 서 있다는 것.
“돈을 벌고 싶은 게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더냐?”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굴 찾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느냐?”
“…….”
부리부리한 눈매의 잘생긴 청년은 뭔가 망설이는 듯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중년인이 다시 물었다.
“말하기 싫으냐?”
“아닙니다, 교주님.”
“그럼 말해 보거라.”
“한 여인과 남자들입니다.”
“흠,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잠시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든 청년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한 여자라 함은 제가 평생 사랑할 부인입니다.”
웅성웅성.
약간 소란스러워진 대전 안, 아무런 표정 없던 중년인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이윽고 중년인이 손을 살짝 들자 소란스러움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호오,그래? 여자라…… 그동안 보아온 규수들이 마음에 안 들더냐?”
“그런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사랑할 만한 여자는 없었습니다.”
중년인은 청년의 말에 동의를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후후후, 좋다. 그리고 또 없느냐?”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입니다. 마음 놓고 제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들을 찾을 겁니다.”
“……!”
대전 안의 모든 시선이 다음 대답을 기다리며 중년인의 등으로 쏠렸다.
“훗, 푸핫핫핫핫핫핫!”
중년인은 몸을 돌리며 대전 안이 뒤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소리가 얼마나 큰지 대전 안의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들끓는 기를 제어하기 바빴다. 반면 청년은 범상치 않는 무위를 가진 듯 평온한 신색이었다.
그렇게 한참 웃던 중년인은 손가락으로 청년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을 하였다.
“좋다! 너를 막지 않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청년은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교주!”
“교주님!”
여태 잠자코 있던 대전 안의 사람들이 중년인을 말리려는 듯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안 됩니다!”
“교주님 다시 한 번 고려하심이…….”
손을 들어 좌중의 입을 막는 중년인.
“나 육대 천마 천운학이 말한다.”
처처처처척.
“받듭니다!”
중년인을 제외한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태성이를 막지 마라!”
“존명!”
“아핫핫핫핫핫!”
중년인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었다.
“그래 어떤 장사를 할 것이냐? 상단?”
“객잔을 차릴 겁니다.”
“객잔이라고?”
“네.”
“들러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가 보거라.”
“부디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가끔 들러서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예, 제가 최고의 술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기다리마.”
육대 천마 천운학, 그의 이런 말들을 다른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이구동성으로 외쳤을 것이다.
사기 치지 말라고.
천마가 자리한 이곳은 마도인들의 성지 마교 군림전이었다.
사방이 확 트인 노송 아래 그리고 큰바위.
쪼르르륵.
한 손은 술병을 쥐고 술을 따르며 한 손은 잔을 쥐고 술을 받는다. 각기 손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그들은 현 무림의 최강자 중 두 사람이었다.
검성 영호춘.
천마 천운학.
정파의 정신적 지주 검성, 뿐만 아니라 정파 제일고수이기도 한 그가 마교의 교주인 천마와 술을 마신다는 것은 현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성은 허옇게 된 백발에 비녀를 단정히 꼽고 백염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반면 천마는 흑발에 수염은 있었으나 그닥 길지 않았다.
검성은 술 한 잔 받고 병을 건네받아 천마에게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이놈 천가야, 이번에 네 자식놈이 가출을 했다던데?”
검성의 물음에 천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교주 안 한다더냐?”
“이 자리가 싫은가 보더구나.”
“어이쿠, 누가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어찌 저리 똑같누. 네놈도 태성이 나이 때쯤 교주 안 한다고 뛰쳐나갔었잖느냐.”
단아한 풍모와 더불어 검성이라는 위명이 어울리지 않게 영호춘의 말투는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말투였다.
“후후, 그랬지.”
꿀꺽.
천마는 옛 추억이 떠오르자 술맛이 좋은지 한잔을 그새 비웠다. 그러자 검성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탁.
빈 잔은 채워야 하는 법.
쪼르르르륵.
검성은 자신의 잔에 술이 따라지는 것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말이야, 뭐 하러 간다더냐?”
“장사하고 싶다나.”
“장사? 돈?”
“그래, 한데 돈이 목적이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사람들을 구한다나 뭐 한다나…….”
“어떤 사람들?”
“자신의 등을 맡길 친구, 그리고 이거.”
그러면서 천마는 검성에게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오호, 목숨을 내어줄 만한 친구와 더불어 아리따운 여인네를 찾아 나서시겠다?”
끄덕끄덕.
“캬∼ 태성이 녀석 멋진데. 나도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건데 강호에 나와 검 한 자루로 이 자리에 올랐건만 마음은 허전하더라. 그나마 다행인 게 요렇게 술 마실 친구 하나 건졌다는 거지.”
검성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마는 요즘 유행하는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익.
“허어, 이 천마가 검성에게 그 정도까지 가치 있는 줄 몰랐는걸, 이거 황공한데?”
“그것보다 이 홀아비로 있는 친구가 불쌍하지 않느냐? 어디 다리 좀 놔보거라.”
“허허. 낼모레면 무덤에 들어가실 분이 여자가 그렇게 그리운 게요?”
천마는 검성을 놀리려는 듯 말투를 높였다.
“이놈아, 늙으면 사내도 아니냐? 늙어도 남자는 남자다.”
“뭐 하러 나한테 부탁하느냐, 네 밑에 애들 풀면 되잖느냐.”
“그래도 검성인데 쪽팔리잖느냐.”
“어이구, 그래도 쪽팔림은 아시는 게요?”
검성은 약간 민망한지 화재를 돌려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너는 태성이 나이 때쯤 나가서 금방 잡혀 들어갔잖느냐.”
“그랬던가…….”
“그랬었다. 노교주가 봉공들 풀어서 한 열흘 만인가 잡혔잖느냐. 너도 그때처럼 봉공들 보낼 거냐?”
“아니.”
“왜?”
“너도 말했잖느냐, 강호에 나와 영웅이 되면 뭐 하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가장 행복할 거 같더구나.”
검성은 천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놈아, 우리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자꾸 헛소릴 하는 게.”
“죽을 때는……. 후후, 한 오십 년은 너끈히 살 거 같은데.”
“그렇겠지.”
그들은 임독이맥과 생사현관이 뚫린 절대고수들이었다. 아마도 족히 백 년은 더 살리라.
검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그래 언제 소개 시켜 줄 거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소개 시켜줄까?”
갑자기 반색하며 자세가 공격적으로 변하는 검성.
“진짜? 누구? 누구?”
“남해 검각주…….”
“소령령? 걔는 좀 나이 차이가 많은데.”
“아니, 전대 각주.”
“검나찰?”
“어.”
“…….”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
휘이이이잉.
도대체 검나찰이 누구길래 검성의 표정이 저리도 구겨진단 말인가.
第一章 주방의 황태자(1)
가정제(嘉靖帝) 삼십육년 황궁.
탁탁탁탁.
츄아아아아.
음식 써는 소리가 장단에 맞춰 경쾌하게 들리며 기름이 끓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이곳은 황궁의 주방, 녹로관이다.
천하의 이름난 요리 장인이 모이는 녹로관은 등급에 따라 세 곳으로 구분된다. 제일 높은 등급은 상로관이라 하여 황제와 함께 황족들의 식사를 담당하게 된다.
다음 등급인 중로관은 황궁 안의 여러 대신들의 식사를 대접하고, 제일 낮은 등급인 하로관은 병사와 궁녀 등의 식사를 담당한다.
각기 일하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요리사의 벼슬도 달라지며 당연히 상로관에 제일 높은 벼슬이 주어진다. 또한 이곳의 모든 재료는 까다로운 검열을 거치게 된다.
그중 하로관의 주방 한켠.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요리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주방과 어울리지 않는 자주색 비단옷에 곱디고운 피부색, 딱 보니 귀티 줄줄 흘러내리는 귀공자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쭉 뻗은 눈썹, 왼쪽 눈 아래 찍힌 점 하나 그리고 붉디붉은 입술, 황궁의 궁녀들에게 한마디만 던지면 대번에 옷고름을 풀리라.
그런데 이 청년은 뭐가 불만인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 넣은 채 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양쪽 소매를 둥둥 걷어 올려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런 이 청년 앞에 뚱뚱한 요리사 하나가 기름에 야채를 튀기고 있었다.
츄아아아아.
솥과 국자를 쥐고 부드럽게 휘돌리던 요리사가 돌아보지 않고 말을 하였다.
“오황자님, 제발 돌아가십시오. 자칫 기름이라도 튀면 옷 다 버립니다.”
“아, 왜 안 되는데. 오숙수 제발 부탁인데 요리하게 해줘.”
오황자라고 불리운 이 미청년은 몸을 배배 흔들며 투정부리듯 대답했다. 다 큰 청년이 이러한 동작을 하면 이상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 서 있던 경호병 두 명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안 됩니다!”
“아 씨, 하게 해줘.”
그렇게 얼마간 밀고 당기던 실랑이는 미청년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우, 저 황소고집.’
오숙수라 불리는 요리사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정말?”
“단!”
오숙수는 갑자기 휙 돌아서며 검지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러자 미청년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
“지금은 안 됩니다. 이따가 업무가 끝나고 유시(17~19시)에 오십시오.”
“알았어, 오숙수. 그럼 나중에 봐, 수고해.”
“예, 오황자님 이따 뵙지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다는 오황자 주동동.
그가 이 주방에 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숙수는 그냥 대충 요리 한번 하게 해주면 되는데 왜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막는 것일까.
이유는 이러했다.
사 년 전, 오황자는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수많은 학문, 무공, 예절, 심지어 악기 다루는 법까지 빈틈없이 받다보니 자유시간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중에 유일하게 찾아온 흥밋거리, 그것은 요리였다.
황궁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요리 책을 보다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동동은 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위에서 황족이 무슨 요리냐 하면서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우연을 가장해서 녹로관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상로관이나 중로관은 까칠한 경비병들 때문에 드나들기가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은 하로관.
이곳에서 요리사들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밤에 몰래 잠입, 자기 혼자 요리를 하려다 그만 오숙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전후사정을 들은 오숙수는 별다른 뜻 없이 오황자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오숙수는 황자가 금방 싫증 나서 그만둔다는 가정하에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러나 웬걸 오황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요리 기술을 막힘 없이 배워 나갔다. 그러한 황자의 열정에 감복한 오숙수는 처음 가졌던 마음을 접고 성심성의껏 기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거의 다 배웠을 무렵 그만 태황후에게 들키고 말았다.
궁녀들의 쑥덕거림이 흘러흘러 황후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워낙 온화한 성격을 가진 태황후라 오숙수에게 별다른 처벌은 하지 않았지만 쓴소리와 더불어 주의를 주었다. 때문에 오숙수는 오황자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기름을 튀기던 오숙수는 불만인 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요리 하는 게 그렇게 천한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