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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01
분명 아직은 봄이라 했다.
계절 감각을 잃은 날씨 때문에 바깥 기온은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였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한겨울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그게 다 아까부터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대형 쇼핑몰이 들어설 부지의 매입 현황을 살피고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류를 노려보는 윤신우 상무의 표정으로 보아 이 보고서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안겨 줄지 뻔했다.
저 표정이 얼마나 안 좋은 징조인지를 알고 있는 맞은편 남자는 좌불안석이다. 원래의 일정대로였다면 지금쯤 매입이 끝나고 남아 있던 건물들 철거를 시작했어야 정상이었는데 해결하지 못한 땅이 아직 8%나 남아 있다는 비극적인 사실. 딱딱 맞아떨어지는 계획만을 요구하던 윤신우에게 법무팀은 눈엣가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눈살을 찌푸린 채 살펴보고 있던 서류를 툭 던지자 책상 끝에 걸린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매달렸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던 연배가 지긋한 법무팀장의 고개가 신우의 날카로운 기세에 더욱 수그러들었다.
“이미 기한은 충분히 드린 걸로 압니다.”
“…면목 없습니다.”
면목 없다는 말에 신우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지금 그런 말 듣자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실 텐데요.”
“…….”
“이번 주 안으로 해결 못 하실 것 같으면 지금 사표 쓰십시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습니다. 회사에 계속 몸담고 싶으시다면 적어도 제 몫은 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경곱니다. 지금부터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감봉 1개월입니다.”
“…….”
인정사정없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법무팀장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신우는 손을 들어 매고 있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사표를 받아 내고 싶었지만, 그는 아버지가 처음 건설업을 시작했던 때부터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동안의 노력을 실수 한 번으로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이다.
“기한은 딱 일주일입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사무실 안에 싸늘한 신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죄인처럼 서 있던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일주일은 무리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우의 기세에 눌려 앞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저번처럼 기한은 반으로 줄어들 테니까.
“그때도 이딴 보고서나 들고 들어오실 거면… 한 손엔 사직서를 들고 계셔야 할 겁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슬아슬하게 책상 끝에 매달려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주일 뒤 자신의 목이 저렇게 툭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득 안은 채로 남자가 사무실을 나가자 신우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비서실로 연결되는 벨을 눌렀다. 이내 김 비서의 음성이 들려온다.
“오늘부터 법무팀 사람들 얼마나 현장에 나가는지 감시해서 보고해. 특히 팀장 행동 철저히 확인하고.”
- 알겠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신우는 의자에 푹 몸을 묻은 채 창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창밖으로 세진 건설에서 짓고 있는 빌딩이 보였다. 넓고 넓은 땅 중에서도 하필이면 보란 듯이 눈앞에서 빌딩을 짓고 있었다.
30층짜리라고 했던가. 저 기세라면 올해 안에 완공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응시하고 있던 신우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망할 새끼. 또 얼마나 거들먹거릴까.”
작년에 나란히 입찰에 참가했던 빌딩 수주 건에서 세진 건설에게 밀리고 말았다. 세진이 그걸 따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다들 탐내던 공사였던 탓에 뒷말도 많았다. 들리는 소문에 어마어마한 로비가 있었다고도 했고, 현직 장관으로 있는 세진의 외할아버지가 힘을 썼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문들을 뒤로하고 신우가 세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뒤로 빼돌려 데리고 간 일이었다.
입찰에서 밀린 건 둘째 치고 암만 생각해 봐도 전략팀의 양 부장을 세진으로 데려간 것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망할 고세진 같으니라고!
그렇게 고세진에게 밀리고 있다가 이번에 세진의 기를 충분히 죽일 만한 대단지 쇼핑몰을 짓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법무팀에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점점 진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땅조차도 매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진이 그 자식은 분명히 좋아 죽을 거였다.
반쯤 타다 남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끈 신우는 법무팀장이 놓고 간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적절한 보상을 제시한 회사 측과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하고 있는 주민들 간의 분쟁이 쉽게 끝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고세진. 이렇게 앉아서 네놈이 웃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암. 그럴 순 없어.”
부드득 이를 갈며 서류를 덮고 일어선 신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김 비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나가십니까?”
“늦을지도 모르니까 시간 되면 기다리지 말고 퇴근해.”
신우는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속 태우며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그게 윤신우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차가 우회전 길로 돌아서자 골목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 좁아졌다. 일방통행 길이 아닌 탓에 다른 차와 맞닥뜨린다면 영락없이 큰길까지 후진을 해야 할 판이었다.
반대편으로 돌아갈 걸 잘못했나. 신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다행히 신우의 차가 무사히 골목 안까지 들어가도록 마주 오는 차량은 없었다.
이름만 거창할 뿐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태양 마트를 지나 공터에 차를 세운 신우는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고는 인적이 없는 동네를 휘둘러보았다.
딱 보기에도 허름한 이쪽 지역에서만도 아직 도장을 찍지 않고 남아 있는 집은 열 가구가 넘었다.
그들이 왜 버티고 있는지는 뻔했다. 집값을 시세로 쳐주고 이사 비용과 보상금까지 주겠다고 하는데도 떠나지 않고 버티는 걸로 보아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심산일 것이다.
특히나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들어와 있다면 일 처리는 아주 골치가 아플 터였다.
창문 너머로 유심히 건물들을 살피던 그가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어느 정도 힘겨루기를 하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는 방법이 최선일 테지. 심각한 얼굴로 파일을 들여다보고 있던 신우는 창밖에서 아른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수석 유리창에 조그만 꼬마 아이가 찰싹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녀석은 얼마나 바짝 붙었는지 유리창에 코가 눌려 돼지 코가 되어 있었다.
“…너 뭐야?”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리자 놀란 녀석이 꺄악 비명을 지르더니 줄행랑을 쳤다. 후다닥 도망가는 녀석은 금세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별 웃기는 녀석 다 보겠네.”
허름한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차에 코를 갖다 대고 벌름거릴 건 뭐람.
신우는 꼬마가 창에 남기고 간 흔적에 혀를 찼다. 흙먼지까지 잔뜩 뒤집어쓴 상태인 데다 콧구멍 자국이 선명했다.
서류와 지번이 나온 지도를 들여다보며 남아 있는 집의 위치를 대강 파악하고 차에서 내린 신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철거될 집을 구분해 놓느라 그려 놓은 빨간색 X 표시가 된 빈집들은 흉물스러워 보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집들이 사라진 자리엔 공사가 시작될 테고 멋진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다. 지역의 명소로 떠오르기만 한다면 신우 건설의 명성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밤잠을 줄여 가며 공을 들인 보람은 금전적인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 뻔했다.
건물이 들어설 위치를 대충 그려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신우는 낡은 간판이 달린 구멍가게로 향했다.
출입구에 놓인 화장지와 비뚤어진 글씨로 ‘영업합니다’라고 쓴 나무 간판으로 보아 일단 영업을 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 집도 아직 버티고 있는 집이랬지? 다시 한 번 서류를 확인하며 입구로 들어선 신우는 위생 상태도 엉망이고 파는 물건도 몇 가지 되지 않는 좁은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안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한참 만에 문이 열리더니 적어도 여든은 되었을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가 통할 만한 젊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신우를 향해 대뜸 묻는다.
“담배 사러 왔어?”
“담배 사러 온 것 아닙니다. 신우 건설에서 나왔어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는 신우에게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담배 없어. 이놈들이 이제 우리 집엔 물건 안 준다네. 이제 장사도 접어야 할 모양이야.”
“할머니, 전 담배를 사러 온 게 아니라 신우 건설에서 나왔다고요.”
“뭐? 누구라고?”
아무래도 귀가 어두운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린 신우가 혹 다른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는 듯했다. 노인을 붙들고 이야기해 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라는 판단이 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왜, 그냥 가게?”
“나중에 다시 올게요.”
되돌아 나오는 신우의 표정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이후 찾아가는 집마다 허탕이다. 낮이라 그런지 대부분 집은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헛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집만 더 들러 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가 잔뜩 녹슨 초록색 대문 앞에 섰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대문 한쪽은 쥐가 갉아 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고 문도 아귀가 맞지 않아 잠기지 않은 채였다.
쿵쿵쿵.
벨을 누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대문이 열리고 한 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공터에서 자신의 차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 꼬마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를 향해 신우는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너, 아까 내 차 훔쳐봤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이의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아니긴, 내가 다 봤는데. 됐고. 엄마 있어?”
아이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럼 아빠는 있어?”
아빠가 있냐는 질문에 마치 생소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꼬마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이의 반응에 살짝 짜증이 난 신우가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꼬마가 앞을 막아섰다.
“얘가 왜 이래. 비켜 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엄마 없어요!”
아이의 앙칼진 목소리에 신우가 움찔했다.
“엄마 없어? 그럼 언제 들어와?”
“몰라요! 얼른 나가요!”
“…….”
“얼른 나가라니까요!”
맹랑하게 외치며 신우를 문밖으로 잡아끌던 꼬마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신우를 붙잡은 손을 팽개치듯 놓고는 저만치 뛰어갔다.
“수연이 누나!”
반갑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으로 뛰어가는 녀석을 따라 신우의 시선이 움직였다. 동네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이주가 끝났다면 아마도 남아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듯하여 신우의 눈초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동하야, 왜 나와 있어?”
달려드는 아이를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하는 여자는 젊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호리호리한 몸. 꽤 예쁘장한 여자는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엄마는 일 나가셨니?”
“응.”
“동하 아직 아픈 거 다 안 나은 거야? 유치원도 못 갔어?”
“엄마가 이제 한 밤만 자면 가도 된댔어.”
곁에 서 있는 자신은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꼬마와 여자를 지켜보던 신우가 흠, 헛기침을 하자 여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이었을까. 와 닿는 여자의 시선이 불투명한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나쁜 아저씨.”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쁜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 신경이 쓰이는 건 꼬마가 아니라 여자였다.
“신우 건설에서 나왔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네는 신우를 여자가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이를 대할 때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건설 회사 사람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 모양이었다.
“집 문제라면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동하야, 누나 갈게. 너도 얼른 집에 들어가. 문 잘 잠그고.”
“이봐요. 이봐요.”
그녀는 명함도 받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쳐 골목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 버렸다. 생각지 못했던 냉담한 반응에 여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고 있던 신우는 명함을 쥐고 있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낯이 익었다.
그러는 사이 눈치를 살피던 꼬마가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하자 신우는 재빨리 문틈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지 않자 꼬마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낑낑거렸다.
“꼬마야, 잠깐만 형이랑 얘기 좀 하자.”
“형 아니고 아저씨거든요? 그리고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면 안 된댔어요.”
자식. 아까는 문도 열어 준 주제에.
“그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저 누나 이름이 뭐랬지? 수연이?”
문을 닫으려 애를 쓰던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가 수연이 누나 알아요?”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무슨 수연이야?”
“조수연이요. 누나 되게 예쁘죠?”
‘조수연’이란 이름에 신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같은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낯이 익다.
방금 전 그 여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조수연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우는 여자가 사라진 골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사이 꼬마는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신우는 멍한 얼굴로 낮게 뇌까렸다.
“설마, 그 조수연은 아니겠지.”
#01
분명 아직은 봄이라 했다.
계절 감각을 잃은 날씨 때문에 바깥 기온은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였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한겨울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그게 다 아까부터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대형 쇼핑몰이 들어설 부지의 매입 현황을 살피고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류를 노려보는 윤신우 상무의 표정으로 보아 이 보고서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안겨 줄지 뻔했다.
저 표정이 얼마나 안 좋은 징조인지를 알고 있는 맞은편 남자는 좌불안석이다. 원래의 일정대로였다면 지금쯤 매입이 끝나고 남아 있던 건물들 철거를 시작했어야 정상이었는데 해결하지 못한 땅이 아직 8%나 남아 있다는 비극적인 사실. 딱딱 맞아떨어지는 계획만을 요구하던 윤신우에게 법무팀은 눈엣가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눈살을 찌푸린 채 살펴보고 있던 서류를 툭 던지자 책상 끝에 걸린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매달렸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던 연배가 지긋한 법무팀장의 고개가 신우의 날카로운 기세에 더욱 수그러들었다.
“이미 기한은 충분히 드린 걸로 압니다.”
“…면목 없습니다.”
면목 없다는 말에 신우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지금 그런 말 듣자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실 텐데요.”
“…….”
“이번 주 안으로 해결 못 하실 것 같으면 지금 사표 쓰십시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습니다. 회사에 계속 몸담고 싶으시다면 적어도 제 몫은 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경곱니다. 지금부터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감봉 1개월입니다.”
“…….”
인정사정없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법무팀장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신우는 손을 들어 매고 있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사표를 받아 내고 싶었지만, 그는 아버지가 처음 건설업을 시작했던 때부터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동안의 노력을 실수 한 번으로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이다.
“기한은 딱 일주일입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사무실 안에 싸늘한 신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죄인처럼 서 있던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일주일은 무리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우의 기세에 눌려 앞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저번처럼 기한은 반으로 줄어들 테니까.
“그때도 이딴 보고서나 들고 들어오실 거면… 한 손엔 사직서를 들고 계셔야 할 겁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슬아슬하게 책상 끝에 매달려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주일 뒤 자신의 목이 저렇게 툭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득 안은 채로 남자가 사무실을 나가자 신우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비서실로 연결되는 벨을 눌렀다. 이내 김 비서의 음성이 들려온다.
“오늘부터 법무팀 사람들 얼마나 현장에 나가는지 감시해서 보고해. 특히 팀장 행동 철저히 확인하고.”
- 알겠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신우는 의자에 푹 몸을 묻은 채 창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창밖으로 세진 건설에서 짓고 있는 빌딩이 보였다. 넓고 넓은 땅 중에서도 하필이면 보란 듯이 눈앞에서 빌딩을 짓고 있었다.
30층짜리라고 했던가. 저 기세라면 올해 안에 완공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응시하고 있던 신우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망할 새끼. 또 얼마나 거들먹거릴까.”
작년에 나란히 입찰에 참가했던 빌딩 수주 건에서 세진 건설에게 밀리고 말았다. 세진이 그걸 따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다들 탐내던 공사였던 탓에 뒷말도 많았다. 들리는 소문에 어마어마한 로비가 있었다고도 했고, 현직 장관으로 있는 세진의 외할아버지가 힘을 썼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문들을 뒤로하고 신우가 세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뒤로 빼돌려 데리고 간 일이었다.
입찰에서 밀린 건 둘째 치고 암만 생각해 봐도 전략팀의 양 부장을 세진으로 데려간 것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망할 고세진 같으니라고!
그렇게 고세진에게 밀리고 있다가 이번에 세진의 기를 충분히 죽일 만한 대단지 쇼핑몰을 짓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법무팀에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점점 진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땅조차도 매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진이 그 자식은 분명히 좋아 죽을 거였다.
반쯤 타다 남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끈 신우는 법무팀장이 놓고 간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적절한 보상을 제시한 회사 측과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하고 있는 주민들 간의 분쟁이 쉽게 끝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고세진. 이렇게 앉아서 네놈이 웃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암. 그럴 순 없어.”
부드득 이를 갈며 서류를 덮고 일어선 신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김 비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나가십니까?”
“늦을지도 모르니까 시간 되면 기다리지 말고 퇴근해.”
신우는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속 태우며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그게 윤신우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차가 우회전 길로 돌아서자 골목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 좁아졌다. 일방통행 길이 아닌 탓에 다른 차와 맞닥뜨린다면 영락없이 큰길까지 후진을 해야 할 판이었다.
반대편으로 돌아갈 걸 잘못했나. 신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다행히 신우의 차가 무사히 골목 안까지 들어가도록 마주 오는 차량은 없었다.
이름만 거창할 뿐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태양 마트를 지나 공터에 차를 세운 신우는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고는 인적이 없는 동네를 휘둘러보았다.
딱 보기에도 허름한 이쪽 지역에서만도 아직 도장을 찍지 않고 남아 있는 집은 열 가구가 넘었다.
그들이 왜 버티고 있는지는 뻔했다. 집값을 시세로 쳐주고 이사 비용과 보상금까지 주겠다고 하는데도 떠나지 않고 버티는 걸로 보아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심산일 것이다.
특히나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들어와 있다면 일 처리는 아주 골치가 아플 터였다.
창문 너머로 유심히 건물들을 살피던 그가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어느 정도 힘겨루기를 하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는 방법이 최선일 테지. 심각한 얼굴로 파일을 들여다보고 있던 신우는 창밖에서 아른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수석 유리창에 조그만 꼬마 아이가 찰싹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녀석은 얼마나 바짝 붙었는지 유리창에 코가 눌려 돼지 코가 되어 있었다.
“…너 뭐야?”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리자 놀란 녀석이 꺄악 비명을 지르더니 줄행랑을 쳤다. 후다닥 도망가는 녀석은 금세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별 웃기는 녀석 다 보겠네.”
허름한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차에 코를 갖다 대고 벌름거릴 건 뭐람.
신우는 꼬마가 창에 남기고 간 흔적에 혀를 찼다. 흙먼지까지 잔뜩 뒤집어쓴 상태인 데다 콧구멍 자국이 선명했다.
서류와 지번이 나온 지도를 들여다보며 남아 있는 집의 위치를 대강 파악하고 차에서 내린 신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철거될 집을 구분해 놓느라 그려 놓은 빨간색 X 표시가 된 빈집들은 흉물스러워 보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집들이 사라진 자리엔 공사가 시작될 테고 멋진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다. 지역의 명소로 떠오르기만 한다면 신우 건설의 명성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밤잠을 줄여 가며 공을 들인 보람은 금전적인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 뻔했다.
건물이 들어설 위치를 대충 그려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신우는 낡은 간판이 달린 구멍가게로 향했다.
출입구에 놓인 화장지와 비뚤어진 글씨로 ‘영업합니다’라고 쓴 나무 간판으로 보아 일단 영업을 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 집도 아직 버티고 있는 집이랬지? 다시 한 번 서류를 확인하며 입구로 들어선 신우는 위생 상태도 엉망이고 파는 물건도 몇 가지 되지 않는 좁은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안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한참 만에 문이 열리더니 적어도 여든은 되었을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가 통할 만한 젊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신우를 향해 대뜸 묻는다.
“담배 사러 왔어?”
“담배 사러 온 것 아닙니다. 신우 건설에서 나왔어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는 신우에게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담배 없어. 이놈들이 이제 우리 집엔 물건 안 준다네. 이제 장사도 접어야 할 모양이야.”
“할머니, 전 담배를 사러 온 게 아니라 신우 건설에서 나왔다고요.”
“뭐? 누구라고?”
아무래도 귀가 어두운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린 신우가 혹 다른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는 듯했다. 노인을 붙들고 이야기해 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라는 판단이 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왜, 그냥 가게?”
“나중에 다시 올게요.”
되돌아 나오는 신우의 표정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이후 찾아가는 집마다 허탕이다. 낮이라 그런지 대부분 집은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헛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집만 더 들러 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가 잔뜩 녹슨 초록색 대문 앞에 섰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대문 한쪽은 쥐가 갉아 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고 문도 아귀가 맞지 않아 잠기지 않은 채였다.
쿵쿵쿵.
벨을 누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대문이 열리고 한 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공터에서 자신의 차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 꼬마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를 향해 신우는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너, 아까 내 차 훔쳐봤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이의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아니긴, 내가 다 봤는데. 됐고. 엄마 있어?”
아이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럼 아빠는 있어?”
아빠가 있냐는 질문에 마치 생소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꼬마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이의 반응에 살짝 짜증이 난 신우가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꼬마가 앞을 막아섰다.
“얘가 왜 이래. 비켜 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엄마 없어요!”
아이의 앙칼진 목소리에 신우가 움찔했다.
“엄마 없어? 그럼 언제 들어와?”
“몰라요! 얼른 나가요!”
“…….”
“얼른 나가라니까요!”
맹랑하게 외치며 신우를 문밖으로 잡아끌던 꼬마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신우를 붙잡은 손을 팽개치듯 놓고는 저만치 뛰어갔다.
“수연이 누나!”
반갑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으로 뛰어가는 녀석을 따라 신우의 시선이 움직였다. 동네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이주가 끝났다면 아마도 남아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듯하여 신우의 눈초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동하야, 왜 나와 있어?”
달려드는 아이를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하는 여자는 젊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호리호리한 몸. 꽤 예쁘장한 여자는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엄마는 일 나가셨니?”
“응.”
“동하 아직 아픈 거 다 안 나은 거야? 유치원도 못 갔어?”
“엄마가 이제 한 밤만 자면 가도 된댔어.”
곁에 서 있는 자신은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꼬마와 여자를 지켜보던 신우가 흠, 헛기침을 하자 여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이었을까. 와 닿는 여자의 시선이 불투명한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나쁜 아저씨.”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쁜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 신경이 쓰이는 건 꼬마가 아니라 여자였다.
“신우 건설에서 나왔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네는 신우를 여자가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이를 대할 때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건설 회사 사람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 모양이었다.
“집 문제라면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동하야, 누나 갈게. 너도 얼른 집에 들어가. 문 잘 잠그고.”
“이봐요. 이봐요.”
그녀는 명함도 받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쳐 골목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 버렸다. 생각지 못했던 냉담한 반응에 여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고 있던 신우는 명함을 쥐고 있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낯이 익었다.
그러는 사이 눈치를 살피던 꼬마가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하자 신우는 재빨리 문틈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지 않자 꼬마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낑낑거렸다.
“꼬마야, 잠깐만 형이랑 얘기 좀 하자.”
“형 아니고 아저씨거든요? 그리고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면 안 된댔어요.”
자식. 아까는 문도 열어 준 주제에.
“그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저 누나 이름이 뭐랬지? 수연이?”
문을 닫으려 애를 쓰던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가 수연이 누나 알아요?”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무슨 수연이야?”
“조수연이요. 누나 되게 예쁘죠?”
‘조수연’이란 이름에 신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같은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낯이 익다.
방금 전 그 여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조수연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우는 여자가 사라진 골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사이 꼬마는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신우는 멍한 얼굴로 낮게 뇌까렸다.
“설마, 그 조수연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