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그날 밤.
한밤중에 설핏 잠이 깼을 때 신우의 기분은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2시 36분.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던 신우는 한참을 뒤척이다 천천히 눈을 떴다.
“…….”
낮에 수연이란 여자를 만났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예전 꿈을 꾸었다. 이미 십여 년도 더 전의 일. 별로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신우는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어쩐 일인지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피곤했다.
뭔가 찜찜한 부분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버릇이 있는 신우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다.
다른 서류들을 제쳐 놓고 책상 한쪽에 쌓아진 서류를 뒤적여 아직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동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안에 인적 사항이 있을 터였다.
8시 30분. 항상 그 시간이면 출근하는 김 비서가 자신보다 먼저 와 있는 신우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가 즐겨 마시는 차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할 뿐이었다.
회의 시간 10분 전. 서류를 덮는 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아 있는 집주인 가운데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여자 명의로 된 건물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일까.
“분명히 조수연이 맞는데.”
신우가 피곤한 음성으로 뇌까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가끔 수연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가끔 우연히 한 번쯤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대학은 갔을까. 지금은 뭘 하고 지내는 걸까. 수연에 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면 우선은 수연이 사는 집부터 알아야 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담당자를 불러들인 신우는 골똘한 표정으로 여전히 공사 중인 세진 건설 빌딩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담당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신우의 말을 기다렸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간이 흘러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저기, 상무님….”
괜히 벌을 서는 기분에 조심스럽게 신우를 부르던 담당자는 신우가 불쑥 돌아서자 움찔했다.
“혹시 철거할 집 중에 조수연이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조수연이요?”
“서류상에는 조씨 성을 가진 사람 기록이 없던데 혹시 빠진 집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아닙니다. 서류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흠… 그래요?”
꼬마는 분명 여자를 알고 있었다. 그 위쪽 동네에서 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저, 상무님. 혹시 찾으시는 분이 계약된 집 중에 세 들어 사는 건 아닐까요? 그 서류에 이미 계약 만료된 세입자들은 빠져 있을 텐데요. 얼핏 듣기로 몇 집이 집주인과 정리가 되지 않아 아직 이사를 나가지 못했다고 들었거든요.”
“정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강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확인해 봐 드릴까요?”
“빠른 시간 안에 부탁합니다.”
담당자를 내보내고 책상에 걸터앉은 신우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를 차에 두고 왔는지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젠장.”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린 신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새벽까지 잠을 설친 까닭에 피곤함이 급격하게 밀려들었다. 신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넌 갑자기 툭 튀어나와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지금도 여전하구나.”
늦은 봄과 이른 여름이 맞닿았던 어느 날 수연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불쑥 앞에 나타났다. 잊고 있었던 예전의 기억들이 사무실 한쪽에 세워진 모형물처럼 선명한 형체가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동안 잘 지냈던 거냐?
내심 묻고 싶었던 말이 입술 안쪽을 배회했다.
#02
이틀 후.
신우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들고 같은 골목을 벌써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좁은 골목의 집들은 번지수도 제대로 적히지 않았을뿐더러 번호도 차례로 되어 있지 않고 엉망이었다.
빨간 지붕이라는 말에 쉽게 찾을 거라 예상했지만 대다수의 지붕의 파랑 아니면 빨강이었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빨간 페인트가 제일 쌌나…. 어떻게 죄다 빨개.”
수연이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번지수를 찾은 신우는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 흔한 문패 하나 달아 놓지 않았을까. 문패는커녕 번지수도 지워진 푸릇한 이끼가 낀 대문을 응시하며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잡아당겨 헐겁게 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노크를 하려던 순간 신우는 멈칫했다.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막상 수연과 마주하려 하자 좀 막막했다. 선뜻 알은체를 하기도,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좀 우스울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신우는 걸음을 움직여 담장 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담장은 높이가 낮은 탓에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활짝 열린 미닫이문 너머 마루에 수연이 있었다.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젓가락 같은 막대로 고정시키고 나풀거리는 치마는 중간을 질끈 묶은 채 엎드려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나 가만 보니 달라진 것도 별로 없다. 동그스름한 이마와 시원한 눈매, 작지만 오뚝한 콧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 저 너머에 있는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조수연이 분명했다. 늘 찬바람이 불던 조수연.
그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 마루를 말끔하게 닦은 수연은 걸레와 몇 개의 빨랫감을 들고 나오더니 수돗가에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빨기 시작했다.
아직 봄이 끝나지 않은 계절이었지만 이른 여름 날씨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수연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목덜미까지 흘러 내려왔다.
조금 헐렁하다 싶은 셔츠를 입고 쪼그려 앉은 탓에 목덜미와 쇄골도 모자라 가슴골이 살짝 드러났다.
여자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땀이 흐르는 맨살을 보니 괜히 갈증이 일었다. 햇빛도 쐬지 않나.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었다.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쳐 한참을 고개를 길게 뺀 채 골목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수연이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누구세요?”
꺅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다. 대체 여자가 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조수연.”
이름을 부르자 수연의 표정이 대번 굳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의 물기를 닦고는 가까이로 다가왔다. 낮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고작해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누구시죠?”
재차 누구냐고 묻는 수연의 음성엔 가시가 돋쳤다. 아무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남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던데 왜 넌 못 알아보는 것일까. 하긴, 10년 넘게 흘렀으니.
“나야. 윤신우.”
“윤신우?”
“설마 이름도 까먹은 거야?”
“…….”
“A고등학교 3학년 4반 윤신우. 기억 안 나?”
잘못 보았을까. 수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게 반응의 전부였다. 머쓱해진 신우는 헐렁해진 넥타이를 풀어내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오랜만인데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우리가 서로 반가워해야 하는 사이였었나? 난 잘 모르겠는데.”
수연의 차가운 반응에 신우는 아차 싶었다. 수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만나는 일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째야 좋을지 몰라 신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선 대문 좀 열면 안 될까?”
“…….”
“담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긴 좀 그렇잖아.”
수연이 마지못한 듯 문을 열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다시 수돗가에 주저앉는 수연의 곁으로 향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작은 화단을 만들면서 쌓아 둔 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볼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수연을 탐색하듯 살펴보았다.
10년 넘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은 변했다고 하나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수연의 목소리. 조금 낮은 톤에, 담백한 느낌이 드는 흔치 않은 목소리. 아마 저번에 만났을 때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목소리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수연의 질문에 생각에 잠겨 있던 신우는 ‘응?’ 하며 되물었다.
“우리 집 어떻게 알았냐고.”
“며칠 전에 저 앞 골목에서 우리 만났는데, 기억 안 나?”
물을 틀고 빨래를 헹구던 손길이 멈칫하더니 수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놀란 눈치다.
“그 사람이… 너였니?”
“좀 서운해지려고 한다. 난 너 한 번에 알아봤는데.”
“이런 곳에서 널 만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나도 좀 의외였어.”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한 물줄기가 대야로 쏟아졌다.
“건설사에서 왔댔지?”
“어.”
“할 말이 뭐야?”
여전히 딱딱하기만 한 목소리. 칼로 그은 듯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계에 신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참을 수연을 바라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급하기는. 아, 덥다. 여기 찾느라고 좀 헤맸더니 갈증 나네. 뭐, 시원한 것 좀 없어?”
“물밖에 없어.”
“이 날씨에 물이면 황송하지. 좀 부탁해도 돼?”
수연은 손을 꼼꼼히 닦고 일어서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려는데 마루 아래에 놓여 있는 신발이 보였다. 남자 신발이다. 그사이 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아버지가 집에 계셔.”
“아아.”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깥에 있기도 뭐한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신우는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문득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고 잠적했다는 보고가 떠오르자 신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지은 지 족히 30년은 넘었을 단층집은 좁고 허름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고 미닫이문 너머 주방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외관에 비해 집 안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성격이 곳곳에서 보인다.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성격. 그때도 그랬었다. 남들 다 조는 수업 시간에도 흐트러지는 법조차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수연은 언제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물을 가져온 수연이 두리번거리는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
잔을 건네는 팔이 몹시 희고 가늘다.
“고맙다.”
물컵을 받아 들고 나란히 앉아 잠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물을 뿌려 싱싱한 화초 이파리에 앉았다가 마당 한가운데로 옮겨 앉았다. 나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수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건설 회사 이름이 신우 건설이라고 해서 혹시나 했었어. 물론 네가 직접 이런 일을 하고 다닐지는 몰랐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말하자면 좀 길다.”
“그럼 다 알고 왔겠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
“지금 갈 만한 곳을 알아보고 있어. 물론 집주인도 찾아야 하고.”
“…….”
“그게 걱정돼서 온 거라면 공사 시작하기 전엔 나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빈손으로 쫓겨나게 생긴 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는 수연을 대신해 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있고?”
“지금 알아보고 있어.”
마음먹고 도망가 버린 사람을 수연이 무슨 재주로 찾을 수가 있을까. 달그락거리는 얼음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무릎을 모은 채 앉아 있는 수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옆모습도 여전히 선이 고왔다. 여전히 예뻤고 동시에 근접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해 보였다.
“넌, 하나도 안 변했다.”
“…….”
눈이 마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말을 내뱉는 신우의 음성이 어쩐지 씁쓸했다. 뚫어져라 제 얼굴을 바라보는 신우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수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넌 그때를 지금도 기억하니? 난 다 잊었어.”
“하긴, 좀 오래되긴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수연은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그 옅은 웃음에 신우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느 날 눈 떠 보니까 여기더라. 알다시피 우린 막다른 길에 내몰렸어.”
“…….”
“아무래도 내 20대는 실패로 끝난 모양이야. 이거면 대답은 충분한 것 같은데.”
수연의 말에 신우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실패한 20대가 너 때문이라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원망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집 비워 달라고 온 거면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돌아가.”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곧 나가 봐야 해. 이사 가려면 부지런히 집을 구해야 해서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 보낼 틈 없어.”
“아직 집을 못 구한 거라면 내가 도움을 좀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신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연이 끼어들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우습니?”
“그런 게 아니라.”
“값싼 동정 따위는 사양할게. 그만 가 줘.”
딱 자르는 수연의 말에 더 이상 말을 붙일 여지는 없었다. 오늘은 이렇게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신우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마루에 올려놓았다.
“이쪽 공사를 내가 총괄하고 있어.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수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우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갈게. 나중에 또 보자.”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햇살이 눈이 부셨다. 신우는 어쩐지 묘해지는 기분에 괜히 운전대를 꽉 움켜잡았다.
새침한 눈길로 자신을 지나치곤 했던 여자아이가 성숙한 여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시절이 새삼 어제처럼 떠올랐다.
동시에 얄팍한 자존심에 수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일이 꼬리표처럼 따라 떠올랐다. 실패한 20대를 운운하던 수연의 말이 뇌리에 콕 박혔는지 자꾸만 맴돌았다.
운전대를 잡은 신우의 손에 힘줄이 툭 불거질 정도로 힘이 실렸다.
“젠장.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괜히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밤.
한밤중에 설핏 잠이 깼을 때 신우의 기분은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2시 36분.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던 신우는 한참을 뒤척이다 천천히 눈을 떴다.
“…….”
낮에 수연이란 여자를 만났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예전 꿈을 꾸었다. 이미 십여 년도 더 전의 일. 별로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신우는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어쩐 일인지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피곤했다.
뭔가 찜찜한 부분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버릇이 있는 신우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다.
다른 서류들을 제쳐 놓고 책상 한쪽에 쌓아진 서류를 뒤적여 아직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동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안에 인적 사항이 있을 터였다.
8시 30분. 항상 그 시간이면 출근하는 김 비서가 자신보다 먼저 와 있는 신우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가 즐겨 마시는 차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할 뿐이었다.
회의 시간 10분 전. 서류를 덮는 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아 있는 집주인 가운데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여자 명의로 된 건물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일까.
“분명히 조수연이 맞는데.”
신우가 피곤한 음성으로 뇌까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가끔 수연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가끔 우연히 한 번쯤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대학은 갔을까. 지금은 뭘 하고 지내는 걸까. 수연에 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면 우선은 수연이 사는 집부터 알아야 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담당자를 불러들인 신우는 골똘한 표정으로 여전히 공사 중인 세진 건설 빌딩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담당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신우의 말을 기다렸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간이 흘러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저기, 상무님….”
괜히 벌을 서는 기분에 조심스럽게 신우를 부르던 담당자는 신우가 불쑥 돌아서자 움찔했다.
“혹시 철거할 집 중에 조수연이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조수연이요?”
“서류상에는 조씨 성을 가진 사람 기록이 없던데 혹시 빠진 집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아닙니다. 서류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흠… 그래요?”
꼬마는 분명 여자를 알고 있었다. 그 위쪽 동네에서 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저, 상무님. 혹시 찾으시는 분이 계약된 집 중에 세 들어 사는 건 아닐까요? 그 서류에 이미 계약 만료된 세입자들은 빠져 있을 텐데요. 얼핏 듣기로 몇 집이 집주인과 정리가 되지 않아 아직 이사를 나가지 못했다고 들었거든요.”
“정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강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확인해 봐 드릴까요?”
“빠른 시간 안에 부탁합니다.”
담당자를 내보내고 책상에 걸터앉은 신우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를 차에 두고 왔는지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젠장.”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린 신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새벽까지 잠을 설친 까닭에 피곤함이 급격하게 밀려들었다. 신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넌 갑자기 툭 튀어나와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지금도 여전하구나.”
늦은 봄과 이른 여름이 맞닿았던 어느 날 수연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불쑥 앞에 나타났다. 잊고 있었던 예전의 기억들이 사무실 한쪽에 세워진 모형물처럼 선명한 형체가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동안 잘 지냈던 거냐?
내심 묻고 싶었던 말이 입술 안쪽을 배회했다.
#02
이틀 후.
신우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들고 같은 골목을 벌써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좁은 골목의 집들은 번지수도 제대로 적히지 않았을뿐더러 번호도 차례로 되어 있지 않고 엉망이었다.
빨간 지붕이라는 말에 쉽게 찾을 거라 예상했지만 대다수의 지붕의 파랑 아니면 빨강이었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빨간 페인트가 제일 쌌나…. 어떻게 죄다 빨개.”
수연이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번지수를 찾은 신우는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 흔한 문패 하나 달아 놓지 않았을까. 문패는커녕 번지수도 지워진 푸릇한 이끼가 낀 대문을 응시하며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잡아당겨 헐겁게 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노크를 하려던 순간 신우는 멈칫했다.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막상 수연과 마주하려 하자 좀 막막했다. 선뜻 알은체를 하기도,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좀 우스울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신우는 걸음을 움직여 담장 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담장은 높이가 낮은 탓에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활짝 열린 미닫이문 너머 마루에 수연이 있었다.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젓가락 같은 막대로 고정시키고 나풀거리는 치마는 중간을 질끈 묶은 채 엎드려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나 가만 보니 달라진 것도 별로 없다. 동그스름한 이마와 시원한 눈매, 작지만 오뚝한 콧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 저 너머에 있는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조수연이 분명했다. 늘 찬바람이 불던 조수연.
그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 마루를 말끔하게 닦은 수연은 걸레와 몇 개의 빨랫감을 들고 나오더니 수돗가에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빨기 시작했다.
아직 봄이 끝나지 않은 계절이었지만 이른 여름 날씨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수연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목덜미까지 흘러 내려왔다.
조금 헐렁하다 싶은 셔츠를 입고 쪼그려 앉은 탓에 목덜미와 쇄골도 모자라 가슴골이 살짝 드러났다.
여자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땀이 흐르는 맨살을 보니 괜히 갈증이 일었다. 햇빛도 쐬지 않나.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었다.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쳐 한참을 고개를 길게 뺀 채 골목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수연이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누구세요?”
꺅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다. 대체 여자가 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조수연.”
이름을 부르자 수연의 표정이 대번 굳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의 물기를 닦고는 가까이로 다가왔다. 낮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고작해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누구시죠?”
재차 누구냐고 묻는 수연의 음성엔 가시가 돋쳤다. 아무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남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던데 왜 넌 못 알아보는 것일까. 하긴, 10년 넘게 흘렀으니.
“나야. 윤신우.”
“윤신우?”
“설마 이름도 까먹은 거야?”
“…….”
“A고등학교 3학년 4반 윤신우. 기억 안 나?”
잘못 보았을까. 수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게 반응의 전부였다. 머쓱해진 신우는 헐렁해진 넥타이를 풀어내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오랜만인데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우리가 서로 반가워해야 하는 사이였었나? 난 잘 모르겠는데.”
수연의 차가운 반응에 신우는 아차 싶었다. 수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만나는 일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째야 좋을지 몰라 신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선 대문 좀 열면 안 될까?”
“…….”
“담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긴 좀 그렇잖아.”
수연이 마지못한 듯 문을 열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다시 수돗가에 주저앉는 수연의 곁으로 향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작은 화단을 만들면서 쌓아 둔 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볼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수연을 탐색하듯 살펴보았다.
10년 넘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은 변했다고 하나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수연의 목소리. 조금 낮은 톤에, 담백한 느낌이 드는 흔치 않은 목소리. 아마 저번에 만났을 때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목소리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수연의 질문에 생각에 잠겨 있던 신우는 ‘응?’ 하며 되물었다.
“우리 집 어떻게 알았냐고.”
“며칠 전에 저 앞 골목에서 우리 만났는데, 기억 안 나?”
물을 틀고 빨래를 헹구던 손길이 멈칫하더니 수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놀란 눈치다.
“그 사람이… 너였니?”
“좀 서운해지려고 한다. 난 너 한 번에 알아봤는데.”
“이런 곳에서 널 만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나도 좀 의외였어.”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한 물줄기가 대야로 쏟아졌다.
“건설사에서 왔댔지?”
“어.”
“할 말이 뭐야?”
여전히 딱딱하기만 한 목소리. 칼로 그은 듯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계에 신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참을 수연을 바라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급하기는. 아, 덥다. 여기 찾느라고 좀 헤맸더니 갈증 나네. 뭐, 시원한 것 좀 없어?”
“물밖에 없어.”
“이 날씨에 물이면 황송하지. 좀 부탁해도 돼?”
수연은 손을 꼼꼼히 닦고 일어서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려는데 마루 아래에 놓여 있는 신발이 보였다. 남자 신발이다. 그사이 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아버지가 집에 계셔.”
“아아.”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깥에 있기도 뭐한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신우는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문득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고 잠적했다는 보고가 떠오르자 신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지은 지 족히 30년은 넘었을 단층집은 좁고 허름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고 미닫이문 너머 주방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외관에 비해 집 안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성격이 곳곳에서 보인다.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성격. 그때도 그랬었다. 남들 다 조는 수업 시간에도 흐트러지는 법조차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수연은 언제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물을 가져온 수연이 두리번거리는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기.”
잔을 건네는 팔이 몹시 희고 가늘다.
“고맙다.”
물컵을 받아 들고 나란히 앉아 잠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물을 뿌려 싱싱한 화초 이파리에 앉았다가 마당 한가운데로 옮겨 앉았다. 나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수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건설 회사 이름이 신우 건설이라고 해서 혹시나 했었어. 물론 네가 직접 이런 일을 하고 다닐지는 몰랐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말하자면 좀 길다.”
“그럼 다 알고 왔겠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
“지금 갈 만한 곳을 알아보고 있어. 물론 집주인도 찾아야 하고.”
“…….”
“그게 걱정돼서 온 거라면 공사 시작하기 전엔 나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빈손으로 쫓겨나게 생긴 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는 수연을 대신해 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있고?”
“지금 알아보고 있어.”
마음먹고 도망가 버린 사람을 수연이 무슨 재주로 찾을 수가 있을까. 달그락거리는 얼음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무릎을 모은 채 앉아 있는 수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옆모습도 여전히 선이 고왔다. 여전히 예뻤고 동시에 근접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해 보였다.
“넌, 하나도 안 변했다.”
“…….”
눈이 마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말을 내뱉는 신우의 음성이 어쩐지 씁쓸했다. 뚫어져라 제 얼굴을 바라보는 신우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수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넌 그때를 지금도 기억하니? 난 다 잊었어.”
“하긴, 좀 오래되긴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수연은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그 옅은 웃음에 신우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느 날 눈 떠 보니까 여기더라. 알다시피 우린 막다른 길에 내몰렸어.”
“…….”
“아무래도 내 20대는 실패로 끝난 모양이야. 이거면 대답은 충분한 것 같은데.”
수연의 말에 신우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실패한 20대가 너 때문이라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원망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집 비워 달라고 온 거면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돌아가.”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곧 나가 봐야 해. 이사 가려면 부지런히 집을 구해야 해서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 보낼 틈 없어.”
“아직 집을 못 구한 거라면 내가 도움을 좀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신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연이 끼어들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우습니?”
“그런 게 아니라.”
“값싼 동정 따위는 사양할게. 그만 가 줘.”
딱 자르는 수연의 말에 더 이상 말을 붙일 여지는 없었다. 오늘은 이렇게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신우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마루에 올려놓았다.
“이쪽 공사를 내가 총괄하고 있어.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수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우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갈게. 나중에 또 보자.”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햇살이 눈이 부셨다. 신우는 어쩐지 묘해지는 기분에 괜히 운전대를 꽉 움켜잡았다.
새침한 눈길로 자신을 지나치곤 했던 여자아이가 성숙한 여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시절이 새삼 어제처럼 떠올랐다.
동시에 얄팍한 자존심에 수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일이 꼬리표처럼 따라 떠올랐다. 실패한 20대를 운운하던 수연의 말이 뇌리에 콕 박혔는지 자꾸만 맴돌았다.
운전대를 잡은 신우의 손에 힘줄이 툭 불거질 정도로 힘이 실렸다.
“젠장.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괜히 마음이 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