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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신우가 다녀간 흔적으로 마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명함을 수연은 집어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무심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다 그마저도 멈춘 듯했다. 까만 테두리가 그려진 명함이 마치 매직아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머릿속은 지우개로 깨끗하게 문질러 놓은 듯 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아마도 ‘윤신우’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비록 이렇게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지만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윤신우. 가끔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신우란 이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췄을 정도로 익숙한 이름이었으니까.
목이 마르다던 신우는 물을 겨우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얼음이 반쯤 녹아 버린 컵을 치우려고 집어 들던 손이 컵을 놓쳐 버렸다. 넘어진 컵에 담겨 있던 물이 마루 위로 쏟아졌다. 동시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물처럼 쏟아졌다.
“아….”
무릎에 힘이 빠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얼굴로 마룻바닥으로 번지는 물을 보고만 있었다. 윤신우. 왜 하필이면 너한테 이런 모습을 들켰어야 할까. 왜 하필이면.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새까맣게 잊어버렸냐고 묻던 신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잊어버린다는 건 기억을 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기억은커녕 제대로 된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잊어버린다는 말은 사치라는 사실을 넌 모르겠지.
며칠 전에 만난 얼굴을 왜 모르느냐고 묻겠지만 조금 전에 만난 사람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겐 너무도 버거운 문제라는 걸 너는 모르겠지.
수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쓰러진 잔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햇살이 눈이 부셨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연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지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예전 기억들이 솟구쳤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과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나란히 공존하는 그 시절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오후.
외부에서 약속이 있어 다녀오던 신우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말고 급하게 방향등을 켜고 직진 도로로 합류했다. 그냥 무심결에 나온 행동이었다.
한참을 달려 차가 멈춰 선 곳은 지난번 차를 세웠던 공터였다. 딱히 이곳에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이다.
이곳을 다녀간 지 벌써 며칠이 흘러 있었다. 연락을 바라는 마음으로 명함을 놓고 왔건만 수연은 무소식이다.
기다렸다는 듯 연락을 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꾸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러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후두둑.
멀쩡했던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인 모양이다.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하려는데 골목을 달려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비를 피해 팔로 머리를 가린 채 뛰고 있는 사람이 수연인가 싶어 신우는 앞 유리 쪽으로 바싹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수연이 아니었다.
순간 빗소리만 가득하던 차 안에 벨 소리가 들린다. 어딘지를 묻는 김 비서다.
“금방 들어가.”
차를 출발시키며 신우는 한동안 골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무섭게 퍼붓는 소나기 사이로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누가 많이 마시나 경쟁하는 것처럼 술을 마셨고 예쁜 여자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대체로 그런 편이었지만 신우가 참석하는 날엔 특히나 더했다.
술값이 얼마가 되었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다들 죽자고 마셨다. 시간이 자정을 향해 갈 무렵 테이블 위엔 빈 술병이 늘어났고 하나둘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쪼르륵.
비어 있던 잔을 채우는 신우는 제법 말짱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주량을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정도로 괜찮은 상태였다.
방금 채운 술잔을 비워 내고 안주 대신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자 머리가 핑 돌았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먹지 않은 빈속이었다. 그러고도 나가떨어지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흐릿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벌써 며칠째 툭하면 떠오르는 얼굴.
“빌어먹을….”
신우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한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었다.
어제는 사람을 보내 회사 차원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필요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놈의 망할 고집은 여전했다. 이렇게라도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죄책감을 털어 내려던 그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수연이 이젠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요즘 한창 유행하는 노래를 연달아 부르던 여자의 노래가 끝이 나고 반주가 새로 시작되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멜로디에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화면을 바라보는 신우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눈부시게 빛나는….”
마치 뭘 알고 일부러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작된 노래는 가뜩이나 날카롭던 신우의 신경을 완전히 긁어 놓았다. 하필 불러도 이 노래를.
더 듣고 싶지 않아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르자 이내 룸은 조용해졌다.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던 진호는 갑작스러운 중단에 휙 돌아섰다. 방해를 받은 것이 영 못마땅한 얼굴이다.
“뭐야, 매너 없게.”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앉아 술이나 마셔.”
“…윤신우, 너 무슨 일 있냐? 왜 오늘따라 사람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얼굴이야?”
진호의 진지한 물음에 신우는 픽 웃어 버렸다. 그러게 오늘은 어쩐지 신이 나지 않았다.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으니 술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난생처음 드는 날이었다.
“무슨 고민 있어? 말해 봐, 이 형님이 다 해 줄 테니까.”
“그런 거 없어.”
“없기는. 얼굴에 나 고민 있어요, 하고 써져 있구만.”
신우는 손을 들어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질렀다. 이어 머리를 헝클며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툭 물었다.
“혹시 너 조수연이라고 기억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여자를 지분거리던 진호가 갸우뚱했다. 녀석의 손은 여자의 가슴을 옷 위로 더듬고 있었다.
“조수연?”
“응.”
“글쎄, 이름은 낯익은 것 같은데 모르겠네.”
“잘 생각해 봐.”
“근데 그 여자를 내가 꼭 알아야 해?”
“고3 때 우리 반이었었는데 기억 안 나?”
신우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이자 진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제야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고3? 조수연이라…. 아아! 공부 잘한다고 선생이 엄청 예뻐하던 걔?”
마침내 수연을 기억해 낸 진호가 들떠 소리치자 술에 취해 자는 줄 알았던 진교가 테이블에서 벌떡 상체를 들더니 웅얼거렸다.
“조수연이. 사람 말 무시하기로 유명하고, 참 재수 없었지.”
“맞다. 무슨 말을 하면 개무시를 했었지. 근데 갑자기 조수연은 왜?”
수연을 만나고 온 이후로 그게 궁금했었다. 녀석들은 수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수연은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던 고등학교 친구 녀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뜻밖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게 잘한 일인가 싶었지만.
“얼굴이 예쁘장하긴 했는데 성격 참 재수 없었어. 반에 제대로 된 친구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친구는 무슨. 걔 날마다 혼자만 다녔던 거 몰라? 시내에서 선생 만났을 때도 알은체 안 했다고 소문이 파다했었잖아.”
맞다. 그랬었다. 수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그런 안 좋은 것들이었다. 수연이 자퇴를 하고 사라지기 전까지 몇 달을 한 반에서 지내는 동안 녀석들이 기억하는 건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처럼 수연이 웃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뜬금없이 조수연은 왜 물어봐?”
“그냥.”
“그냥? 그냥 궁금해서?”
“됐으니까 술이나 더 마셔.”
“미친놈. 싱겁기는.”
중단되었던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고 술잔은 다시 채워졌지만 신우는 여전히 흥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마찬가지일 거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술집을 나온 신우는 오피스텔로 갈까 하다가 집으로 향했다. 문득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우는 씻을 기운도 없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털썩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그대로 잠을 좀 잘까 싶어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누운 채로 넥타이를 풀어 침대 한쪽에 던져 놓은 다음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던 신우의 감긴 눈이 서서히 떠졌다.
“맞다. 앨범.”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탁했다.
천장을 향해 있던 흐릿한 눈동자가 방 한쪽을 차지한 책상으로 느리게 향했다. 흐릿한 시선은 크기가 제법 되는 미니어처 건물이 늘어선 책상을 지나 잘 정돈된 책장을 따라 이동했다.
어디 있더라.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추를 마저 풀어 벗은 셔츠를 바닥에 던져두고 바지만 입은 채 책장으로 향했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그가 찾는 졸업 앨범은 하필이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책장 맨 아래 칸에 있었다. 앨범을 뽑아 든 신우는 그대로 벽면에 기대어 앉았다. 맨살의 등 뒤로 서늘한 벽의 기운이 느껴졌다.
11년 전 찍은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펼쳐 들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그 안에 있다.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건가.
3학년 4반을 펼치자 단체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앳되고 조금은 촌스럽다. 그 사진 속에서 자신을 찾아낸 신우의 눈길이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새침한 표정의 여자아이에게 고정되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가 찾고 있던 사진이 있었다. 풋풋하던 열아홉 살의 수연이 말이다.
“아무래도 내 20대는 실패로 끝난 모양이야.”
사진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동시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후볐다.
“빌어먹을.”
졸업 사진을 찍었던 그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을 때 그는 그 당시 단짝이었던 세진과 하영의 잘못을 그대로 눈감아 줌으로써 수연이 자퇴를 하는 일에 일조를 하고 말았다.
수연에게 자존심이 상했던 일에 대한 약간의 보복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복심은 수연이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후회로 변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동조자였으니까. 인정을 하는 순간 죄인이 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전부 잊고 살았었다. 수연에 관한 모든 것들, 조수연이란 이름까지도 잊고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수연을 닮은 사람을 지나칠 때면 그녀가 떠올랐고, 몇 번은 미친 듯이 쫓아간 적도 있었다. 모두가 허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렀고 희미했던 감정이나 죄책감도 다 사라진 줄만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풋내 나던 감정은 전부 사라졌을지 몰라도 죄책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낡은 집과 연락도 되지 않는 집주인이 어쩐지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그때…. 조금만 솔직하게 굴었더라면, 세진의 잘못을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수연이 지금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한참 앨범을 들여다보던 그는 나지막하게 수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조수연.”
희미하게 웃고 있는 수연의 사진이 손끝에서 매끄럽게 느껴졌다.
“…….”
졸업식에 올 수 없었던 수연이 앨범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수연을 만나야겠다. 할 수만 있다면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라도 빌어야겠다. 평생 이런 마음을 가진 채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책상에 앨범을 올려 두고 신우는 한참을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마음이 어지럽다. 취기 때문인지 수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03
온 세상에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음악 몇 곡을 연달아 올려놓고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며 수연은 창가에 선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파트를 빙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내리는 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아마 나무들은 좀 더 자라지 싶었다.
풍경을 바라보던 그때 아파트 사이 인도 위로 서둘러 뛰어가는 여자가 보였다. 집으로 향하는 그녀를 마중 나온 건지 한 남자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가 씌워 준다. 그 다정한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가 낮은 한숨과 함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집을 옮길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 집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탓이다.
계약할 때 적어 주었던 집주인의 주소지로 가 보니 얼마 전 이사를 하고 주민등록을 이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번호도 전부 바뀌어 있었고,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경찰서에선 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자꾸 찾아오는 자신이 귀찮았는지 돈 문제에 얽힌 일은 민사로 해결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해 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수연은 어느새 노래가 마지막 곡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볼륨을 줄이고 마이크를 켰다. 곧이어 차분한 수연의 음색이 마이크로 스며들었다.
“제가 있는 서울엔 지금 비가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비님이 아닌가 싶어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그곳에도 비가 오나요? 지금 어떤 곳에 계시나요? 혹 길을 걷고 계시다면 우산 없이 뛰는 사람의 머리 위로 살짝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은 어떠세요? 누군가에게 우산이 된다는 것. 꽤 낭만적인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비와 관련된 노래 몇 곡 띄워 드립니다. 윤하의 빗소리, 럼블피쉬의 비와 당신이 이어집니다. 잠시 후 사연과 함께 돌아올게요.”
마이크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연이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에서 컴퓨터를 켜 둔 채 아이를 재우고 있던 서림이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음악의 효과음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신우가 다녀간 흔적으로 마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명함을 수연은 집어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무심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다 그마저도 멈춘 듯했다. 까만 테두리가 그려진 명함이 마치 매직아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머릿속은 지우개로 깨끗하게 문질러 놓은 듯 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아마도 ‘윤신우’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비록 이렇게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지만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윤신우. 가끔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신우란 이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췄을 정도로 익숙한 이름이었으니까.
목이 마르다던 신우는 물을 겨우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얼음이 반쯤 녹아 버린 컵을 치우려고 집어 들던 손이 컵을 놓쳐 버렸다. 넘어진 컵에 담겨 있던 물이 마루 위로 쏟아졌다. 동시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물처럼 쏟아졌다.
“아….”
무릎에 힘이 빠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얼굴로 마룻바닥으로 번지는 물을 보고만 있었다. 윤신우. 왜 하필이면 너한테 이런 모습을 들켰어야 할까. 왜 하필이면.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새까맣게 잊어버렸냐고 묻던 신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잊어버린다는 건 기억을 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기억은커녕 제대로 된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잊어버린다는 말은 사치라는 사실을 넌 모르겠지.
며칠 전에 만난 얼굴을 왜 모르느냐고 묻겠지만 조금 전에 만난 사람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겐 너무도 버거운 문제라는 걸 너는 모르겠지.
수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쓰러진 잔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햇살이 눈이 부셨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연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지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예전 기억들이 솟구쳤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과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나란히 공존하는 그 시절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오후.
외부에서 약속이 있어 다녀오던 신우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말고 급하게 방향등을 켜고 직진 도로로 합류했다. 그냥 무심결에 나온 행동이었다.
한참을 달려 차가 멈춰 선 곳은 지난번 차를 세웠던 공터였다. 딱히 이곳에 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이다.
이곳을 다녀간 지 벌써 며칠이 흘러 있었다. 연락을 바라는 마음으로 명함을 놓고 왔건만 수연은 무소식이다.
기다렸다는 듯 연락을 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꾸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러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후두둑.
멀쩡했던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인 모양이다.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하려는데 골목을 달려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비를 피해 팔로 머리를 가린 채 뛰고 있는 사람이 수연인가 싶어 신우는 앞 유리 쪽으로 바싹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수연이 아니었다.
순간 빗소리만 가득하던 차 안에 벨 소리가 들린다. 어딘지를 묻는 김 비서다.
“금방 들어가.”
차를 출발시키며 신우는 한동안 골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무섭게 퍼붓는 소나기 사이로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누가 많이 마시나 경쟁하는 것처럼 술을 마셨고 예쁜 여자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대체로 그런 편이었지만 신우가 참석하는 날엔 특히나 더했다.
술값이 얼마가 되었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다들 죽자고 마셨다. 시간이 자정을 향해 갈 무렵 테이블 위엔 빈 술병이 늘어났고 하나둘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쪼르륵.
비어 있던 잔을 채우는 신우는 제법 말짱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주량을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정도로 괜찮은 상태였다.
방금 채운 술잔을 비워 내고 안주 대신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자 머리가 핑 돌았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먹지 않은 빈속이었다. 그러고도 나가떨어지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흐릿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벌써 며칠째 툭하면 떠오르는 얼굴.
“빌어먹을….”
신우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한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었다.
어제는 사람을 보내 회사 차원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필요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놈의 망할 고집은 여전했다. 이렇게라도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죄책감을 털어 내려던 그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수연이 이젠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요즘 한창 유행하는 노래를 연달아 부르던 여자의 노래가 끝이 나고 반주가 새로 시작되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멜로디에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화면을 바라보는 신우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눈부시게 빛나는….”
마치 뭘 알고 일부러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작된 노래는 가뜩이나 날카롭던 신우의 신경을 완전히 긁어 놓았다. 하필 불러도 이 노래를.
더 듣고 싶지 않아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르자 이내 룸은 조용해졌다.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던 진호는 갑작스러운 중단에 휙 돌아섰다. 방해를 받은 것이 영 못마땅한 얼굴이다.
“뭐야, 매너 없게.”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앉아 술이나 마셔.”
“…윤신우, 너 무슨 일 있냐? 왜 오늘따라 사람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얼굴이야?”
진호의 진지한 물음에 신우는 픽 웃어 버렸다. 그러게 오늘은 어쩐지 신이 나지 않았다.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으니 술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난생처음 드는 날이었다.
“무슨 고민 있어? 말해 봐, 이 형님이 다 해 줄 테니까.”
“그런 거 없어.”
“없기는. 얼굴에 나 고민 있어요, 하고 써져 있구만.”
신우는 손을 들어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질렀다. 이어 머리를 헝클며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툭 물었다.
“혹시 너 조수연이라고 기억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여자를 지분거리던 진호가 갸우뚱했다. 녀석의 손은 여자의 가슴을 옷 위로 더듬고 있었다.
“조수연?”
“응.”
“글쎄, 이름은 낯익은 것 같은데 모르겠네.”
“잘 생각해 봐.”
“근데 그 여자를 내가 꼭 알아야 해?”
“고3 때 우리 반이었었는데 기억 안 나?”
신우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이자 진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제야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고3? 조수연이라…. 아아! 공부 잘한다고 선생이 엄청 예뻐하던 걔?”
마침내 수연을 기억해 낸 진호가 들떠 소리치자 술에 취해 자는 줄 알았던 진교가 테이블에서 벌떡 상체를 들더니 웅얼거렸다.
“조수연이. 사람 말 무시하기로 유명하고, 참 재수 없었지.”
“맞다. 무슨 말을 하면 개무시를 했었지. 근데 갑자기 조수연은 왜?”
수연을 만나고 온 이후로 그게 궁금했었다. 녀석들은 수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수연은 어떤 사람일까.
그래서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던 고등학교 친구 녀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뜻밖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게 잘한 일인가 싶었지만.
“얼굴이 예쁘장하긴 했는데 성격 참 재수 없었어. 반에 제대로 된 친구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친구는 무슨. 걔 날마다 혼자만 다녔던 거 몰라? 시내에서 선생 만났을 때도 알은체 안 했다고 소문이 파다했었잖아.”
맞다. 그랬었다. 수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이 그런 안 좋은 것들이었다. 수연이 자퇴를 하고 사라지기 전까지 몇 달을 한 반에서 지내는 동안 녀석들이 기억하는 건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처럼 수연이 웃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뜬금없이 조수연은 왜 물어봐?”
“그냥.”
“그냥? 그냥 궁금해서?”
“됐으니까 술이나 더 마셔.”
“미친놈. 싱겁기는.”
중단되었던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고 술잔은 다시 채워졌지만 신우는 여전히 흥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마찬가지일 거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술집을 나온 신우는 오피스텔로 갈까 하다가 집으로 향했다. 문득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우는 씻을 기운도 없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털썩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그대로 잠을 좀 잘까 싶어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누운 채로 넥타이를 풀어 침대 한쪽에 던져 놓은 다음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던 신우의 감긴 눈이 서서히 떠졌다.
“맞다. 앨범.”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탁했다.
천장을 향해 있던 흐릿한 눈동자가 방 한쪽을 차지한 책상으로 느리게 향했다. 흐릿한 시선은 크기가 제법 되는 미니어처 건물이 늘어선 책상을 지나 잘 정돈된 책장을 따라 이동했다.
어디 있더라.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추를 마저 풀어 벗은 셔츠를 바닥에 던져두고 바지만 입은 채 책장으로 향했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그가 찾는 졸업 앨범은 하필이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책장 맨 아래 칸에 있었다. 앨범을 뽑아 든 신우는 그대로 벽면에 기대어 앉았다. 맨살의 등 뒤로 서늘한 벽의 기운이 느껴졌다.
11년 전 찍은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펼쳐 들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그 안에 있다.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건가.
3학년 4반을 펼치자 단체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앳되고 조금은 촌스럽다. 그 사진 속에서 자신을 찾아낸 신우의 눈길이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새침한 표정의 여자아이에게 고정되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가 찾고 있던 사진이 있었다. 풋풋하던 열아홉 살의 수연이 말이다.
“아무래도 내 20대는 실패로 끝난 모양이야.”
사진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동시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후볐다.
“빌어먹을.”
졸업 사진을 찍었던 그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을 때 그는 그 당시 단짝이었던 세진과 하영의 잘못을 그대로 눈감아 줌으로써 수연이 자퇴를 하는 일에 일조를 하고 말았다.
수연에게 자존심이 상했던 일에 대한 약간의 보복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복심은 수연이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후회로 변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동조자였으니까. 인정을 하는 순간 죄인이 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전부 잊고 살았었다. 수연에 관한 모든 것들, 조수연이란 이름까지도 잊고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수연을 닮은 사람을 지나칠 때면 그녀가 떠올랐고, 몇 번은 미친 듯이 쫓아간 적도 있었다. 모두가 허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렀고 희미했던 감정이나 죄책감도 다 사라진 줄만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풋내 나던 감정은 전부 사라졌을지 몰라도 죄책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낡은 집과 연락도 되지 않는 집주인이 어쩐지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그때…. 조금만 솔직하게 굴었더라면, 세진의 잘못을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수연이 지금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한참 앨범을 들여다보던 그는 나지막하게 수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조수연.”
희미하게 웃고 있는 수연의 사진이 손끝에서 매끄럽게 느껴졌다.
“…….”
졸업식에 올 수 없었던 수연이 앨범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수연을 만나야겠다. 할 수만 있다면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라도 빌어야겠다. 평생 이런 마음을 가진 채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책상에 앨범을 올려 두고 신우는 한참을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마음이 어지럽다. 취기 때문인지 수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03
온 세상에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음악 몇 곡을 연달아 올려놓고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며 수연은 창가에 선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파트를 빙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내리는 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아마 나무들은 좀 더 자라지 싶었다.
풍경을 바라보던 그때 아파트 사이 인도 위로 서둘러 뛰어가는 여자가 보였다. 집으로 향하는 그녀를 마중 나온 건지 한 남자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가 씌워 준다. 그 다정한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가 낮은 한숨과 함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집을 옮길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 집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탓이다.
계약할 때 적어 주었던 집주인의 주소지로 가 보니 얼마 전 이사를 하고 주민등록을 이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번호도 전부 바뀌어 있었고,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경찰서에선 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자꾸 찾아오는 자신이 귀찮았는지 돈 문제에 얽힌 일은 민사로 해결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해 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수연은 어느새 노래가 마지막 곡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볼륨을 줄이고 마이크를 켰다. 곧이어 차분한 수연의 음색이 마이크로 스며들었다.
“제가 있는 서울엔 지금 비가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비님이 아닌가 싶어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그곳에도 비가 오나요? 지금 어떤 곳에 계시나요? 혹 길을 걷고 계시다면 우산 없이 뛰는 사람의 머리 위로 살짝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은 어떠세요? 누군가에게 우산이 된다는 것. 꽤 낭만적인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비와 관련된 노래 몇 곡 띄워 드립니다. 윤하의 빗소리, 럼블피쉬의 비와 당신이 이어집니다. 잠시 후 사연과 함께 돌아올게요.”
마이크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연이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에서 컴퓨터를 켜 둔 채 아이를 재우고 있던 서림이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음악의 효과음처럼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