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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그녀에게 거세된 단어, 남자
붉은 노을이 지는 배경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은색 스틸 빌딩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염없어 서 있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서히 짙어지는 어둠 속에 여자의 가냘픈 어깨가 마냥 힘겨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태서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담배를 진하게 빨아들였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의 불티를 날렸다.
이제 슬슬 들어가서 취조를 해야 할 시간이다. 경찰서 마당 한쪽 편에서 담배를 피운 태서는 팔을 털어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다섯 시가 되려면 멀었다.
피해 학생의 보호자가 오기로 한 시간은 저녁 다섯 시였다.
태서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여자가 아직 가질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변색한 낙엽을 밟으며 털썩, 벤치에 앉았다.
태서는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자를 샅샅이 훑었다. 뒷모습만 봐서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평범한 점퍼와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어떻게 보면 대학생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육감은 그렇게 어리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가 뿜어대는 분위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일까.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던 아련한 뒷모습이 고스란히 심장을 파고드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시끄러운 차량 소리와 온갖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잔잔한 바람과도 같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넋을 놓고 있던 태서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 형사님,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김지희 검사였다. 불협화음과도 같은 모난 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태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중저음의 음성이 짙은 먹색처럼 낮게 깔렸다. 지희는 그런 그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호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요즘 너무 춥죠?”
들뜬 음성.
어디 나무랄 곳 하나 없는 반듯한 모습의 그녀는 언제부턴가 끊임없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을 만큼 은근하고 집요한 추파.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에 태서의 마음 한켠에서는 거부감이 일었다.
“…….”
그가 보내는 냉담한 시선에도 태연하다. 조금도 위축됨 없이 당당하고 도도한 그녀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도 일하는 것과 비슷했다.
자신만만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 담배?”
탁.
불티를 날린 태서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야죠.”
“오늘 당직이세요?”
“네.”
무뚝뚝하리만치 짧은 대답에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외면하며 돌아섰다.
지금쯤 통화가 끝났을까.
태서는 조금 전까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놔주질 않던 여자를 찾아 주위를 쓱 훑었다. 어딜 간 걸까. 그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누굴 찾으세요?”
눈치가 빠른 김 검사가 물어왔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태서는 지희를 뒤로한 채 서로 향했다.
그런 그를 뒤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지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밀어낼지 내심 궁금했다.
그가 가진 오만하고도 강렬한 분위기에 저절로 위축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탐이 나는 남자였다. 지금도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위험하다고 경종이 울어댔지만 그를 향한 갈증은 쉬이 식질 않았다. 언젠가는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봐 줄 것이라 믿으며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을 살포시 접었다.
서로 들어온 태서는 가죽 재킷을 벗어 의자에 던져놓으며 책상 위에 놓인 식어 빠진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하 형사, 채하늘 보호자는 어떻게 됐어.”
태서는 옆에 앉은 동기에게 물었다.
“방금 왔어.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 저기 있네.”
태서는 하 형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한차례 일렁였다.
경찰서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가 분명했다. 가버린 줄 알았더니, 이곳에서, 이렇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태서는 천천히 커피 잔을 비우며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구석진 자리에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녀는 이쪽 사람들과 전혀 무관한 세상에 있는 듯했다.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에서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뺨과 목덜미에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려 보이지?”
하 형사가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
태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몇 살에 결혼한 거야? 기껏 해봤자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초등학교 오 학년 학부모란 게 말이 돼?”
말, ……안 된다.
“가해 학생 진술서 어딨어?”
“여기 있어.”
태서는 가해 학생의 진술서를 읽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피해 학생 진술을 받아야 한다. 아이는 어쩌고 혼자 온 걸까.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채하늘 학생 보호자 되십니까.”
자그마한 손은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기까지 했다.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꼼지락대던 여자는 차분한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네. 제가 하늘이 엄마입니다.”
회색 의자에서 몸을 떼어내며 일어났다. 자그마한 그녀는 그의 어깨밖에 오질 않았다. 180cm가 넘는 그를 마주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새하얀 목덜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태서의 두 눈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연약한 여자의 표본처럼 입김만으로도 휘청하고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은 남자의 잔인한 정복욕을 부추겼다.
가냘픈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고 싶은 난폭한 욕망이 가슴 깊숙이 차올랐다.
그런 그의 마음을 마치 읽기라도 하듯 그녀의 시리도록 맑은 눈망울이 반짝 빛을 내며 그를 직시했다. 그 순간, 그녀는 순진한 소녀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남자의 심장을 뒤흔드는 요부처럼 변해버린다.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아찔할 만큼 자극적인 감각은 불순한 상상을 최고치까지 끌어올렸다.
알몸으로 뒤엉켜 진득한 정사를 나누는 자신과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율배반적인 얼굴. 저 얼굴 때문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입천장이 마르는 갈증에 마른침을 삼켰다.
“……왜 그러시죠?”
꿈결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무례할 만큼 빤히 쳐다보는 그를 나무라는 그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엄격하게 변해있었다.
“……따라오시죠.”
못마땅하게도 음성이 탁하게 갈라졌다. 거칠어진 숨결을 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여자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태서는 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여자는 말없이 자리에 앉으며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심연처럼 아득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 이 자리가 뭐하는 자리인지 분명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자는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쏟아내려 했다. 그때 태서가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채하늘 학생은 입원했습니까.”
“네. 지금 같이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는 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낮았다. 태서는 노트북을 앞에 놓고 화면에 창을 띄웠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됩니다. 이름.”
“채수정입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태서의 손이 멈추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여자를 쳐다봤다. 보통 친모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미혼모이거나 이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입양이든지. 하지만 미혼 여성이 아이를 입양하기에는 현행법상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태서는 곧고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이.”
“서른둘입니다.”
그의 짙은 눈썹 한쪽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이를 스무 살에 낳은 것이 된다. 그녀가 친모라는 가정하에서는.
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대여섯 살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애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태서는 서늘한 웃음을 머금으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더욱 낮게 가라앉은 태서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집요했다. 지금 자신이 던진 질문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알면서도 멈추질 않았다.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은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치부를 남김없이 파헤치기로 작정한 놈처럼.
1. 그녀에게 거세된 단어, 남자
붉은 노을이 지는 배경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은색 스틸 빌딩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염없어 서 있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서히 짙어지는 어둠 속에 여자의 가냘픈 어깨가 마냥 힘겨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태서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담배를 진하게 빨아들였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의 불티를 날렸다.
이제 슬슬 들어가서 취조를 해야 할 시간이다. 경찰서 마당 한쪽 편에서 담배를 피운 태서는 팔을 털어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다섯 시가 되려면 멀었다.
피해 학생의 보호자가 오기로 한 시간은 저녁 다섯 시였다.
태서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여자가 아직 가질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변색한 낙엽을 밟으며 털썩, 벤치에 앉았다.
태서는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자를 샅샅이 훑었다. 뒷모습만 봐서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평범한 점퍼와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어떻게 보면 대학생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육감은 그렇게 어리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가 뿜어대는 분위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일까.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던 아련한 뒷모습이 고스란히 심장을 파고드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시끄러운 차량 소리와 온갖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잔잔한 바람과도 같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넋을 놓고 있던 태서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 형사님,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김지희 검사였다. 불협화음과도 같은 모난 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태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중저음의 음성이 짙은 먹색처럼 낮게 깔렸다. 지희는 그런 그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호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요즘 너무 춥죠?”
들뜬 음성.
어디 나무랄 곳 하나 없는 반듯한 모습의 그녀는 언제부턴가 끊임없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을 만큼 은근하고 집요한 추파.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에 태서의 마음 한켠에서는 거부감이 일었다.
“…….”
그가 보내는 냉담한 시선에도 태연하다. 조금도 위축됨 없이 당당하고 도도한 그녀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도 일하는 것과 비슷했다.
자신만만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 담배?”
탁.
불티를 날린 태서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야죠.”
“오늘 당직이세요?”
“네.”
무뚝뚝하리만치 짧은 대답에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외면하며 돌아섰다.
지금쯤 통화가 끝났을까.
태서는 조금 전까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놔주질 않던 여자를 찾아 주위를 쓱 훑었다. 어딜 간 걸까. 그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누굴 찾으세요?”
눈치가 빠른 김 검사가 물어왔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태서는 지희를 뒤로한 채 서로 향했다.
그런 그를 뒤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지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밀어낼지 내심 궁금했다.
그가 가진 오만하고도 강렬한 분위기에 저절로 위축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탐이 나는 남자였다. 지금도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위험하다고 경종이 울어댔지만 그를 향한 갈증은 쉬이 식질 않았다. 언젠가는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봐 줄 것이라 믿으며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을 살포시 접었다.
서로 들어온 태서는 가죽 재킷을 벗어 의자에 던져놓으며 책상 위에 놓인 식어 빠진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하 형사, 채하늘 보호자는 어떻게 됐어.”
태서는 옆에 앉은 동기에게 물었다.
“방금 왔어.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 저기 있네.”
태서는 하 형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한차례 일렁였다.
경찰서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가 분명했다. 가버린 줄 알았더니, 이곳에서, 이렇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태서는 천천히 커피 잔을 비우며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구석진 자리에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녀는 이쪽 사람들과 전혀 무관한 세상에 있는 듯했다.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에서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뺨과 목덜미에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려 보이지?”
하 형사가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
태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몇 살에 결혼한 거야? 기껏 해봤자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초등학교 오 학년 학부모란 게 말이 돼?”
말, ……안 된다.
“가해 학생 진술서 어딨어?”
“여기 있어.”
태서는 가해 학생의 진술서를 읽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피해 학생 진술을 받아야 한다. 아이는 어쩌고 혼자 온 걸까.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채하늘 학생 보호자 되십니까.”
자그마한 손은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기까지 했다.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꼼지락대던 여자는 차분한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네. 제가 하늘이 엄마입니다.”
회색 의자에서 몸을 떼어내며 일어났다. 자그마한 그녀는 그의 어깨밖에 오질 않았다. 180cm가 넘는 그를 마주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새하얀 목덜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태서의 두 눈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연약한 여자의 표본처럼 입김만으로도 휘청하고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은 남자의 잔인한 정복욕을 부추겼다.
가냘픈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고 싶은 난폭한 욕망이 가슴 깊숙이 차올랐다.
그런 그의 마음을 마치 읽기라도 하듯 그녀의 시리도록 맑은 눈망울이 반짝 빛을 내며 그를 직시했다. 그 순간, 그녀는 순진한 소녀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남자의 심장을 뒤흔드는 요부처럼 변해버린다.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아찔할 만큼 자극적인 감각은 불순한 상상을 최고치까지 끌어올렸다.
알몸으로 뒤엉켜 진득한 정사를 나누는 자신과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율배반적인 얼굴. 저 얼굴 때문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입천장이 마르는 갈증에 마른침을 삼켰다.
“……왜 그러시죠?”
꿈결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무례할 만큼 빤히 쳐다보는 그를 나무라는 그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엄격하게 변해있었다.
“……따라오시죠.”
못마땅하게도 음성이 탁하게 갈라졌다. 거칠어진 숨결을 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여자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태서는 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여자는 말없이 자리에 앉으며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심연처럼 아득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 이 자리가 뭐하는 자리인지 분명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자는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쏟아내려 했다. 그때 태서가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채하늘 학생은 입원했습니까.”
“네. 지금 같이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는 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낮았다. 태서는 노트북을 앞에 놓고 화면에 창을 띄웠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됩니다. 이름.”
“채수정입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태서의 손이 멈추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여자를 쳐다봤다. 보통 친모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미혼모이거나 이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입양이든지. 하지만 미혼 여성이 아이를 입양하기에는 현행법상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태서는 곧고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이.”
“서른둘입니다.”
그의 짙은 눈썹 한쪽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이를 스무 살에 낳은 것이 된다. 그녀가 친모라는 가정하에서는.
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대여섯 살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애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태서는 서늘한 웃음을 머금으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더욱 낮게 가라앉은 태서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집요했다. 지금 자신이 던진 질문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알면서도 멈추질 않았다. 형사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은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치부를 남김없이 파헤치기로 작정한 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