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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입양은 아닐 테고.”
어떤 놈이든 남자 새끼랑 그 짓을 하고 애를 가졌을 거 아니겠는가.
저 작고 붉은 입술로 사랑을 속삭이고, 입을 맞추며, 더한 짓도 했겠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정사 장면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수치심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창백할 만큼 새하얀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의 상상을 확신시켜주기라도 하듯 보이는 반응에 태서의 기다란 눈매가 가늘어졌다. 섬뜩하게 요동치는 눈동자는 그녀를 헤집을 것처럼 내리꽂혔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여자는 뾰족한 턱을 들어 올리며 당돌하게 내뱉었다.
그래, 말할 이유 없다. 전혀. 하지만…… 어쩌면 이유가 생길 것도 같다.
태서는 자세를 고치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저 가냘픈 목덜미가 문제일까. 아니면 힘주어 안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몸이 문제인 걸까. 그의 가학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자 때문에 머릿속이 어찌 될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 저 낡은 점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가 힘없고 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설명되질 않는 뭔가가 있었다. 그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무엇이.
태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 속에 넣어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대 태우겠습니다.”
여자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서늘할 만큼 이지적인 눈동자는 뜻밖에 위엄과 기품을 품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
책상 위에 올려진 그녀의 깍지 낀 손은 뼈가 앙상할 만큼 말랐다. 푸른 정맥이 고스란히 드러난 손목으로 시선을 옮긴 태서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이가 혼자 있어요. 빨리 끝냈으면 합니다.”
여자는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업.”
“작은 서점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 혼자 먹고살려면 제대로 된 직장이나 밥벌이 수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점에서 번 돈으로 먹고살기에는 빠듯할 텐데. 그래서 고발한 걸까.
“학생들끼리 사소한 다툼인데 굳이 고발해야 했습니까.”
가해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였고, 그녀는 자기 말마따나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서민이었다.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긴 하지만, 미성년자들 사이에 있던 일이고, 조용히 치료비와 위자료를 받고 끝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가 행여나 더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니까.
그가 먼저 읽었던 가해자들의 진술서를 보면 채하늘 학생이 평소 태도도 불량하고 교우들과 사이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아이를 때리고, 협박하고, 모욕을 주며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참다못한 아들이 맞고만 있을 수 없어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 결과 제 아들이 죽지 않을 만큼 맞았습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사소한 다툼이었다고. 사소한 다툼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광대뼈에 금이 가나요.”
태서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여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는 억울함과 서러움,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상대방도 진단서를 넣었습니다.”
전치 2주 진단서를 끊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결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군요.”
체념한 여자의 목소리가 심장을 쿡 찔러왔다. 아릿한 통증에 태서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이런 진술 따위는 필요도 없는 거겠군요. 형사님 아시는 대로 적당히 쓰세요. 여기 하늘이 진단서입니다. 이것만 첨부해도 될 것 같네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십시오.”
태서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지포 라이터 부싯돌을 돌려 불을 붙였다. 볼이 홀쭉하도록 깊숙이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이런 여자는 적어도 합의금을 높이기 위해 고발하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아이도 낳지 않았을 테지.
그의 말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입니다. 똑같이 해주면 되겠습니까.”
태서의 무심한 듯 보이는 눈동자엔 난폭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의 상심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억눌러 둔 본성이 튀어 올랐다.
“그러려면 가서 직접 봐야겠죠. 채하늘 학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갑시다.”
놀란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것을.
하지만 저 여자를 위해서라면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할 수 있다. 지금 심정으로는.
수정은 마주 오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선이 굵은 남자다운 얼굴은 짙은 음영을 드리운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앞만을 응시한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경찰이 그러하듯 그도 그런 줄 알았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는 내내 고압적인 태도였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체념했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사실 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입니다. 똑같이 해주면 되겠습니까.’
전혀 예상 밖의 말에 놀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눈빛은 거짓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그였지만, 그 말에 그녀의 언 가슴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위로였다. 같은 심정이 되어 화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병실에 들어서자 그는 말없이 하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멍이 군데군데 들어 보기 흉했다. 간신히 잠재워 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잔인하고 가차없는 주먹질을 견뎌냈을 하늘이 눈에 선했다.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당당해야 한다고 무수히 타이르고 다독였던 지난 시간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자식새끼가 이렇게 두들겨 맞고 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무능한 엄마였다.
“채수정 씨. 끝까지 갑시다.”
“네에?”
“각박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아직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정의……라뇨.”
다 부질없는데. 무슨 정의.
“내 정의는 주먹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들 상대로 그럴 순 없으니, 그 부모를 상대로 휘둘러야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눈부시도록 환하게.
두근. 두근. 심장의 두근거림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 남……자…….
그녀에게 거세된 단어. 그 남자란 단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2. 어지러운 밤
학교 측에서는 예상한 대로 조속한 합의를 종용했다.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 학생에 대한 구제는 뒷전이었다. 가해 학생의 학부모 중 한 명이 학부모회장이었다. 그러니 이 게임은 보나 마나였다.
그렇게 암담하고 억울할 때, 태서가 말없이 나서서 그녀를 도왔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가 열리고, 그 위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태서는 해당 관계자에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는 등 공정한 심사가 되도록 애를 썼다.
가해 학생이 위원회에 참석해서 늘어놓는 말을 듣던 태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장난이었다니까 하는 말인데, 장난으로 당신 아들이 이 지경이 되면 참을 수 있겠습니까.”
태서가 던진 하늘의 사진을 본 가해 학생의 학부모는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내 동생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난 이런 위원회의 처벌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봤을 겁니다. 내 자식이라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교내봉사 따위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라면 어디 해보십시오.”
태서의 의견에 전문가들도 동조했고, 그가 내민 자료는 명백했다.
“입양은 아닐 테고.”
어떤 놈이든 남자 새끼랑 그 짓을 하고 애를 가졌을 거 아니겠는가.
저 작고 붉은 입술로 사랑을 속삭이고, 입을 맞추며, 더한 짓도 했겠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정사 장면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수치심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창백할 만큼 새하얀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의 상상을 확신시켜주기라도 하듯 보이는 반응에 태서의 기다란 눈매가 가늘어졌다. 섬뜩하게 요동치는 눈동자는 그녀를 헤집을 것처럼 내리꽂혔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여자는 뾰족한 턱을 들어 올리며 당돌하게 내뱉었다.
그래, 말할 이유 없다. 전혀. 하지만…… 어쩌면 이유가 생길 것도 같다.
태서는 자세를 고치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저 가냘픈 목덜미가 문제일까. 아니면 힘주어 안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몸이 문제인 걸까. 그의 가학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자 때문에 머릿속이 어찌 될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 저 낡은 점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가 힘없고 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설명되질 않는 뭔가가 있었다. 그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무엇이.
태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 속에 넣어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대 태우겠습니다.”
여자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서늘할 만큼 이지적인 눈동자는 뜻밖에 위엄과 기품을 품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
책상 위에 올려진 그녀의 깍지 낀 손은 뼈가 앙상할 만큼 말랐다. 푸른 정맥이 고스란히 드러난 손목으로 시선을 옮긴 태서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이가 혼자 있어요. 빨리 끝냈으면 합니다.”
여자는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업.”
“작은 서점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 혼자 먹고살려면 제대로 된 직장이나 밥벌이 수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점에서 번 돈으로 먹고살기에는 빠듯할 텐데. 그래서 고발한 걸까.
“학생들끼리 사소한 다툼인데 굳이 고발해야 했습니까.”
가해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였고, 그녀는 자기 말마따나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서민이었다.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긴 하지만, 미성년자들 사이에 있던 일이고, 조용히 치료비와 위자료를 받고 끝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가 행여나 더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니까.
그가 먼저 읽었던 가해자들의 진술서를 보면 채하늘 학생이 평소 태도도 불량하고 교우들과 사이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아이를 때리고, 협박하고, 모욕을 주며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참다못한 아들이 맞고만 있을 수 없어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 결과 제 아들이 죽지 않을 만큼 맞았습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사소한 다툼이었다고. 사소한 다툼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광대뼈에 금이 가나요.”
태서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여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는 억울함과 서러움,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상대방도 진단서를 넣었습니다.”
전치 2주 진단서를 끊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결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군요.”
체념한 여자의 목소리가 심장을 쿡 찔러왔다. 아릿한 통증에 태서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이런 진술 따위는 필요도 없는 거겠군요. 형사님 아시는 대로 적당히 쓰세요. 여기 하늘이 진단서입니다. 이것만 첨부해도 될 것 같네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십시오.”
태서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지포 라이터 부싯돌을 돌려 불을 붙였다. 볼이 홀쭉하도록 깊숙이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이런 여자는 적어도 합의금을 높이기 위해 고발하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아이도 낳지 않았을 테지.
그의 말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입니다. 똑같이 해주면 되겠습니까.”
태서의 무심한 듯 보이는 눈동자엔 난폭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의 상심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억눌러 둔 본성이 튀어 올랐다.
“그러려면 가서 직접 봐야겠죠. 채하늘 학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갑시다.”
놀란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것을.
하지만 저 여자를 위해서라면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할 수 있다. 지금 심정으로는.
수정은 마주 오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선이 굵은 남자다운 얼굴은 짙은 음영을 드리운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앞만을 응시한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경찰이 그러하듯 그도 그런 줄 알았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는 내내 고압적인 태도였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체념했었다.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사실 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입니다. 똑같이 해주면 되겠습니까.’
전혀 예상 밖의 말에 놀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눈빛은 거짓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그였지만, 그 말에 그녀의 언 가슴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위로였다. 같은 심정이 되어 화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병실에 들어서자 그는 말없이 하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멍이 군데군데 들어 보기 흉했다. 간신히 잠재워 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잔인하고 가차없는 주먹질을 견뎌냈을 하늘이 눈에 선했다.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당당해야 한다고 무수히 타이르고 다독였던 지난 시간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자식새끼가 이렇게 두들겨 맞고 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무능한 엄마였다.
“채수정 씨. 끝까지 갑시다.”
“네에?”
“각박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아직 정의는 살아있습니다.”
“정의……라뇨.”
다 부질없는데. 무슨 정의.
“내 정의는 주먹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들 상대로 그럴 순 없으니, 그 부모를 상대로 휘둘러야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눈부시도록 환하게.
두근. 두근. 심장의 두근거림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 남……자…….
그녀에게 거세된 단어. 그 남자란 단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2. 어지러운 밤
학교 측에서는 예상한 대로 조속한 합의를 종용했다.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 학생에 대한 구제는 뒷전이었다. 가해 학생의 학부모 중 한 명이 학부모회장이었다. 그러니 이 게임은 보나 마나였다.
그렇게 암담하고 억울할 때, 태서가 말없이 나서서 그녀를 도왔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가 열리고, 그 위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태서는 해당 관계자에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는 등 공정한 심사가 되도록 애를 썼다.
가해 학생이 위원회에 참석해서 늘어놓는 말을 듣던 태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장난이었다니까 하는 말인데, 장난으로 당신 아들이 이 지경이 되면 참을 수 있겠습니까.”
태서가 던진 하늘의 사진을 본 가해 학생의 학부모는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내 동생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난 이런 위원회의 처벌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봤을 겁니다. 내 자식이라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교내봉사 따위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라면 어디 해보십시오.”
태서의 의견에 전문가들도 동조했고, 그가 내민 자료는 명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