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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연서 씨?”

고개를 틀고 인하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연서는 현종이 제 눈치를 살피자 서둘러 시선을 바로 잡았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연서 씨하고 나 통하는 게 의외로 많을 것 같다구요.”

“아,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선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면서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는 관계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연서 씨 오늘 보니 첫인상이 제 마음에 들어서.”

“아, 네.”

연서는 별다른 말없이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대화는 주로 현종이 이끌었다. 그가 질문을 하면 연서가 대답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은근 취조당하는 기분도 들어 이따금 빈정 상했다. 첫인상에서 받았던 호감의 이미지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어느새 따분함으로 변모해갔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현종은 말이 많았다.

주로 자신의 유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잘 나가는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테마는 한결 같았다. ‘나.는.잘.났.다.’ 성적 자랑과 인맥자랑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털털하고 인간적인 성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호감을 샀었는지 강조하는 대목에선 하품이 나올 뻔했다.

한참 동안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던 현종은 어느 순간 머쓱해져선 연서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그럼 자리를 옮겨서 술이라도 한 잔 마실까요? 어때요? 연서 씨?”

드디어 기나긴 맞선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전 호텔 일로 다른 약속이 또 잡혀 있어요.”

“아, 이런. 그럼 언제 우리 다시 만나죠?”

“글쎄요. 이번 주 안으로 시간을 내볼게요.”

“꼭 연락주세요. 전 연서 씨와 계속 만나보고 싶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 일관하는 게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서도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슬쩍 뒤를 돌아본 연서의 눈빛이 당황했다. 인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반쯤 남긴 커피 잔만 테이블에 남겨져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서면서 인하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던 연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인하라면, 분명히 시동을 걸고 차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짐작은 정확하게 맞았다. 인하의 차는 시동이 걸린 채였고 그는 운전석에 앉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쯤 멋쩍어진 연서는 머뭇거리며 조수석에 올랐다. 인하의 검정색 세단 내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조용했다.

“가죠, 이제.”

벨트를 맨 연서는 정면만 고집하고 있는 인하를 슬쩍 쳐다봤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로 앞만 보고 있던 그의 입술이 잠시 후 움직였다.

“연애하고 싶은 거라면 나하고 해.”

연서의 어깨가 절로 움칫했다.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끈적끈적한 대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인하의 목소리였고 이내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연인들이 하는 모든 걸 나하고 해.”

“이봐요. 서 팀장님!”

“잘 못 들으셨나? 무조건 나하고 해. 연애든, 섹스든. 그러니까 맞선 따위, 이제 그만두라는 말이지.”

순간적으로 찾아온 당황스러움이 말문을 막았고, 온 신경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연서는 눈만 껌뻑거린 채 인하를 마주보고 있었다.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이 방금 그가 내뱉은 단어들로 일렁거렸다. 그러기를 몇 번.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서 연서는 잇새로 실소를 흘렸다.

그와의 사이에 내내 흐르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의 정체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동안 서인하라는 남자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그 실체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했다. 연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뺨이라도 올려다 붙여야 했지만 손바닥에 힘을 줄 생각마저 희미했다.

공기조차 집어삼킨 긴 침묵 끝에 연서가 입을 열었다. 씩씩대는 호흡이 그대로 묻어난 목소리였다.

“대표이사에 대한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개자식인줄은 몰랐네요. 그 와중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긴 나 역시도 서 팀장의 수작에 휘말린 건지 모르겠지만…… 대체 언제부터 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하고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흐음. 오래전부터?”

조금은 자조적인 음성이었다. 하지만 연서가 주목한 건 그의 말이었다. 오래전부터라니. 그와 만난 건 고작해야 1년 전인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어느 날, 다른 어느 순간이 있었던가. 연서는 천천히 제 눈을 헤집어오는 남자와 깊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2.



10년 전.

담록재(譚綠齎)의 처마 아래로 굵게 떨어지던 빗줄기가 차츰 잦아들었다. 방울방울 맺힌 물기가 투명한 그림자를 남기고 뚝뚝 떨어진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계절은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아직 한낮엔 후텁지근했다. 미약하게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도 덥고 습한 기분을 치워주진 못했다. 인하는 바깥에 꽂혀 있던 시선을 옮겨 다시 철진을 쳐다봤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화선지와 벼루, 연적이 놓인 책상에 말없이 앉은 지 한 시간 째. 철진은 여전히 먹을 갈고만 있었다.

평소 집에 있을 때 즐겨 입는 모시 한복은 다림질로 정갈해보였고, 먹을 가는 자세 또한 올곧기 그지없었다. 철진은 인하가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한 후부터 맺게 된 인연이다. 후원할 학생을 찾고 있던 철진에게 인하의 주변 조건은 꽤 적합했을 것이다.

천애고아에다 선생님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품성, 그리고 좋은 두뇌와 훌륭한 성적까지. 인하를 후원하기로 한 건 물론 카라얀 호텔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한 사업 중 하나긴 했지만, 딸 하나만 있는 철진 자신의 만족도를 위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들이 없는 탓에 여러 후원하는 남학생들로 대리만족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하는 그런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6년을 겪어온 바로는, 철진은 적어도 자신이 보기엔 그런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욕심과 야망보다는 철저하게 주변을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분이었다. 매년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숙박이벤트를 개최했으며, 독거노인들을 위해선 무료 식사 행사를 자주 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직원들과 가족을 끔찍하게도 챙겨, 사회적인 덕망을 한꺼번에 얻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인하가 여기기엔 철진은 늘 어딘가 공허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과 말투에서 항상 고독함이 보였다.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스물 셋인가.”

“네.”

“그래. 한창 꽃 피울 나이군. 비행기 시간이 몇 시라고?”

먹을 내려놓은 철진이 이번엔 붓을 들었다. 다른 손으로 저고리의 소매를 간단히 걷은 후 숱이 많은 붓을 벼루에 슥슥 비벼대었다. 인하가 대답했다.

“저녁 6십니다.”

“보기가 좋구나. 네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유학까지 갈 시기가 됐는지. 너 열일곱에 처음 봤으니 이제 6년이 됐나.”

“네. 모두 사장님 덕분입니다. 공부하고 돌아와서 반드시 호텔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인하 널 후원한 건 내 욕심을 차리고자 한 게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그렇게 하는 게 나한테나 다른 사람들한테 보기가 좋아.”

인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온화하게 미소 짓는 철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더 깊은 시름을 앓는 사람처럼, 철진의 얼굴에선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화선지에 슥슥 써내려가는 한자는 ‘진광불휘(眞光不輝)’. 진실한 광채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하는 철진의 일필휘지를 보면서 마음을 잡았다. 철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인하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너무 잘 알았다. 철진의 후원,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 그리고 평소에 보였던 인심 등이 없었다면, 어쩌면 일찍부터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인하에게 있어 철진은 평생의 은인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존재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지금껏 그가 공부를 해 온 것에 대한 보람일 것이다.

“자,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가져가서 방의 벽에 붙여 놓고 늘 읽으면서 마음을 다져. 유학생활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니까 자신을 붙들 수 있는 한 가지는 꼭 있어야 해. 액자로 만들어주고 싶었다만 언제 어디서든 소지하고 다니기 편하게 그냥 주는 거야.”

인하는 철진이 건네는 화선지를 두 손을 공손하게 받았다. 아직 덜 마른 먹물이 손가락 끝에 묻어났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을 유학생활 동안, 자신을 붙들어줄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에 그저 안도하고 기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잘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내 딸도 인하 자네처럼 믿음직스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느닷없는 철진의 말에 인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었지만 공부 잘하는 수재로 소문 난 딸을, 정작 철진은 아쉬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