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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화사한 색의 원피스를 차려 입은 은미가 마침 커피를 따라 놓은 머그 잔을 인하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다.
“드세요, 팀장님.”
“고마워요.”
“오늘 그야말로 천고마비 아니었어요? 출근하는데 하늘을 보니 너무 파래서 눈이 부실 것 같더라니까요. 아, 이런 가을엔 늑대 한 마리 옆에 끼고 분위기나 잡아야 하는데 말이죠.”
은미가 책상 위에 놀랍도록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하는 미소로 일관했고 도현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은미 씨는 그래도 한가한가 봐? 여자들은 다 그런가? 우리 마누라도 단풍놀이 가자고 졸라대는데 난 가을이고 뭐고 잠이나 실컷 잤으면 싶어.”
“그러게요. 전 그래서 아예 다음 달에 휴가를 내려구요.”
경재까지 앓는 소릴 해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동안 끌어온 ‘파라다이스 호텔’ 인수합병이 지난주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강철진 사장이 추진하던 것으로, 회생절차를 밟고 있었던 파라다이스 호텔을 인수하는 업무였다. 철진이 죽고 잠시 멈추어졌다가 연서가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업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결정들 하세요. 회식입니까, 아니면 휴가입니까.”
인하가 등받이에 몸을 묻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도현과 경재, 은미의 시선이 한꺼번에 인하에게로 쏠렸다. 은미가 기대감에 찬 어조로 물어왔다.
“꼭 둘 중에 결정해야 돼요, 팀장님? 둘 다 하면 안 되나요? 우리 몇 달 동안 고생했는데.”
“뭐, 좋습니다. 휴가는 각자 재량껏, 회식은 제가 내죠.”
“이야!”
“그럼 회식은 언제로 잡을까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하면 안 돼요? 저 오늘 취하고 싶단 말이에요.”
은미가 어깨까지 흔들어대며 콧소리로 애교를 떨었으나 경재가 대뜸 태클을 걸었다.
“으음. 오늘은 아마 안 될 걸요. 팀장님! 파라다이스 호텔 대표가 오늘 저녁 약속을 잡았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회식날짜는 여러분들이 한 번 잡아보세요. 전 이사실에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인하는 회식날짜 잡는 일을 세 명에게 일임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서를 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회식 날짜 잡는 일로 날려버릴 순 없다. 3대의 엘리베이터가 모두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바쁜 듯하여, 인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이사실 앞에 도착하자 비서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인하는 손가락으로 이사실 문짝을 가리키며 물었다.
“안에 계시죠?”
“네. 팀장님.”
비서의 안내를 받고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책상 위 서류에 몰두해 있던 연서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지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이루어진 그와의 대면에, 연서는 얼마쯤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정말이지 저 남자의 뻔뻔함은 어디까지인지.
“무슨 일이죠, 서 팀장님?”
“파라다이스 대표와 저녁에 만나야 할 것 같은데요.”
인하는 말을 느리게 끌면서 소파에 앉았다. 앉으라는 연서의 지시 없이 행한 독단적인 행동에, 그녀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 건은 이미 다 끝났는데 왜죠?”
“그 늙은이한테 소송 건이 여러 개 걸려 있으니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면서 조언을 얻고 싶은 거겠죠.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압도적으로 이번 건을 해결했으니 그 능력을 훔치고 싶기도 할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파라다이스 호텔의 채권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현장경험을 쌓은 이력을 바탕으로, 카라얀 호텔에 유리한 합의를 몇 번이나 이끌어냈다. 하지만 법무팀을 이끌고 있는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뿐, 연서는 결코 공치사를 남발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저녁은…….
“그런 거라면 서 팀장님 혼자 가도 되지 않나요?”
강숙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맞선을 떠올리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묻자, 그가 되물었다.
“바빠요?”
“저녁에 선약이 있어요.”
“무슨? 어떤?”
왜 자꾸 묻는 건데?
“개인적인 거예요. 맞선을 볼 거거든요.”
구체적인 계획까지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선’카드를 꺼내어야만 이 남자가 얌전히 후퇴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을 읽고 싶지 않아 시선을 외면해버린 연서는, 침묵이 지나가고 문득 날아든 질문에 다시 그를 쳐다봤다.
“오래 걸려요? 그 맞선?”
“그건 왜 묻죠?”
“한 시간이면 되나? 얌전히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용무 끝내고 와요. 난 이사님과 반드시 동행해야겠으니까.”
“서 팀장님.”
맞선을 ‘용무’라고 표현하는 그의 저의를 모르겠다. 감히 대표이사를 상대로 이토록 무례하게 굴고 있는 이 남자의 뻔뻔함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인하를 향한 질책의 이면에, 다행히 맞선이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스치기도 했다. 연서에겐 지금 그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퇴근 시간에 뵙죠. 제 차로 태워드리겠습니다.”
인하는 가볍게 일별한 후 이사실을 나왔다. ‘차를 준비했는데.’라며 얼버무리는 비서를 두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인하는 타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는 곧 다시 닫혔고 버튼을 누른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에 다다랐다.
느린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며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연서를 만나기 위해 내려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속도와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겼다. 벌써 다섯 번째다. 연서의 맞선이 생각보다 잦아지고 있었다. 연서의 나이 올해 스물아홉. 강철진 사장이 일찍 작고하지 않으셨다면 그녀는 아직도 기획부서 어딘가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을 시기였다.
인하는 계단과 계단을 잇는 작은 공간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했다. 시푸른 가을하늘 아래 빽빽한 빌딩숲이 선명한 사진처럼 서 있었다. 노란 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가로수 길을 만들고 있고, 그 아래 언저리에 후둑후둑 떨어진 노란 잎이 회색빛 도로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고 보니, 연서를 처음 만났던 날이나 두 번째로 만났던 날도 모두 가을이었다. 적당하게 바람이 불던, 적당하게 선선하던, 적당하게 들떠 있던. 열아홉 고등학생의 그녀, 그리고 작년 가을 스물여덟의 호텔 대표 후계자였던 그녀. 10년을 아우른 시간 동안 제 가슴 한편 어딘가에 묵묵히, 말없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짙은 침묵을 지키며 접착해 있었던 그녀.
“후…… 적당히 하자, 서연아.”
아직은 호텔 대표라는 자리에 익숙해져야 할 시기라 옆에서 지켜보려고만 했는데, 상황은 점차 생각지도 못한 코너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극약처방이 필요한 듯했다.
*
“정현종입니다. 이야아, 이거 사진보다 훨씬 더 미인이신데요?”
저녁 7시 정각. 연서는 결국 강숙이 알려준 대로 호텔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퇴근하기 직전, 강숙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급한 대로 얌전해 보이는 원피스라도 한 벌 사서 입고 나가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인하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탓이다. 연서는 이사실을 나가자마자 인하에 의해 꼼짝없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정현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진 속 그대로였다. 검은 뿔테 안경이 답답하고 고지식해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어깨가 넓었고 웃을 때마다 붉어지는 귓바퀴가 귀엽다. 하지만 현종의 그 모든 면모들은 지금의 연서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은 뒤쪽의 테이블에, 그것도 자신과 등을 맞댄 채 앉아 있는 인하에게 쏠려 있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다더니, 그가 말한 근처라는 게 바로 등 뒤였을 줄이야.
“반갑습니다. 강연서라고 해요.”
“연서 씨 얘긴 부모님한테서 대충 듣고 나왔어요. 나이도 저보다 어리신데 호텔을 이끌어 가신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부담스러워요. 뭐가 뭔지 헷갈리는 것들도 많구요. 배워가면서 하고 있어요.”
“겸손도 하시지.”
“그런 정현종 씨야말로 겸손이시죠. 기획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서 올라오셨다던데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하하. 그건 제 성격 탓이 큽니다. 아버지도 워낙 ‘밑에서부터’를 외치시는 분이라서요.”
연서는 현종을 향해 잘 조련된 미소를 짓다가 커피 잔이 든 쟁반을 들고 직원이 뒤쪽 테이블로 가는 것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현종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연서의 두 귀엔 ‘고마워요.’ 라는 등 뒤의 인하의 말이 더 크게 들려왔다.
화사한 색의 원피스를 차려 입은 은미가 마침 커피를 따라 놓은 머그 잔을 인하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다.
“드세요, 팀장님.”
“고마워요.”
“오늘 그야말로 천고마비 아니었어요? 출근하는데 하늘을 보니 너무 파래서 눈이 부실 것 같더라니까요. 아, 이런 가을엔 늑대 한 마리 옆에 끼고 분위기나 잡아야 하는데 말이죠.”
은미가 책상 위에 놀랍도록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하는 미소로 일관했고 도현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은미 씨는 그래도 한가한가 봐? 여자들은 다 그런가? 우리 마누라도 단풍놀이 가자고 졸라대는데 난 가을이고 뭐고 잠이나 실컷 잤으면 싶어.”
“그러게요. 전 그래서 아예 다음 달에 휴가를 내려구요.”
경재까지 앓는 소릴 해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동안 끌어온 ‘파라다이스 호텔’ 인수합병이 지난주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강철진 사장이 추진하던 것으로, 회생절차를 밟고 있었던 파라다이스 호텔을 인수하는 업무였다. 철진이 죽고 잠시 멈추어졌다가 연서가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업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결정들 하세요. 회식입니까, 아니면 휴가입니까.”
인하가 등받이에 몸을 묻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도현과 경재, 은미의 시선이 한꺼번에 인하에게로 쏠렸다. 은미가 기대감에 찬 어조로 물어왔다.
“꼭 둘 중에 결정해야 돼요, 팀장님? 둘 다 하면 안 되나요? 우리 몇 달 동안 고생했는데.”
“뭐, 좋습니다. 휴가는 각자 재량껏, 회식은 제가 내죠.”
“이야!”
“그럼 회식은 언제로 잡을까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하면 안 돼요? 저 오늘 취하고 싶단 말이에요.”
은미가 어깨까지 흔들어대며 콧소리로 애교를 떨었으나 경재가 대뜸 태클을 걸었다.
“으음. 오늘은 아마 안 될 걸요. 팀장님! 파라다이스 호텔 대표가 오늘 저녁 약속을 잡았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회식날짜는 여러분들이 한 번 잡아보세요. 전 이사실에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인하는 회식날짜 잡는 일을 세 명에게 일임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서를 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회식 날짜 잡는 일로 날려버릴 순 없다. 3대의 엘리베이터가 모두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바쁜 듯하여, 인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이사실 앞에 도착하자 비서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인하는 손가락으로 이사실 문짝을 가리키며 물었다.
“안에 계시죠?”
“네. 팀장님.”
비서의 안내를 받고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책상 위 서류에 몰두해 있던 연서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지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이루어진 그와의 대면에, 연서는 얼마쯤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정말이지 저 남자의 뻔뻔함은 어디까지인지.
“무슨 일이죠, 서 팀장님?”
“파라다이스 대표와 저녁에 만나야 할 것 같은데요.”
인하는 말을 느리게 끌면서 소파에 앉았다. 앉으라는 연서의 지시 없이 행한 독단적인 행동에, 그녀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 건은 이미 다 끝났는데 왜죠?”
“그 늙은이한테 소송 건이 여러 개 걸려 있으니 우리한테 밥이라도 사면서 조언을 얻고 싶은 거겠죠.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압도적으로 이번 건을 해결했으니 그 능력을 훔치고 싶기도 할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파라다이스 호텔의 채권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현장경험을 쌓은 이력을 바탕으로, 카라얀 호텔에 유리한 합의를 몇 번이나 이끌어냈다. 하지만 법무팀을 이끌고 있는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뿐, 연서는 결코 공치사를 남발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저녁은…….
“그런 거라면 서 팀장님 혼자 가도 되지 않나요?”
강숙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맞선을 떠올리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묻자, 그가 되물었다.
“바빠요?”
“저녁에 선약이 있어요.”
“무슨? 어떤?”
왜 자꾸 묻는 건데?
“개인적인 거예요. 맞선을 볼 거거든요.”
구체적인 계획까지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선’카드를 꺼내어야만 이 남자가 얌전히 후퇴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을 읽고 싶지 않아 시선을 외면해버린 연서는, 침묵이 지나가고 문득 날아든 질문에 다시 그를 쳐다봤다.
“오래 걸려요? 그 맞선?”
“그건 왜 묻죠?”
“한 시간이면 되나? 얌전히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용무 끝내고 와요. 난 이사님과 반드시 동행해야겠으니까.”
“서 팀장님.”
맞선을 ‘용무’라고 표현하는 그의 저의를 모르겠다. 감히 대표이사를 상대로 이토록 무례하게 굴고 있는 이 남자의 뻔뻔함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인하를 향한 질책의 이면에, 다행히 맞선이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스치기도 했다. 연서에겐 지금 그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퇴근 시간에 뵙죠. 제 차로 태워드리겠습니다.”
인하는 가볍게 일별한 후 이사실을 나왔다. ‘차를 준비했는데.’라며 얼버무리는 비서를 두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인하는 타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는 곧 다시 닫혔고 버튼을 누른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에 다다랐다.
느린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며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연서를 만나기 위해 내려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속도와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겼다. 벌써 다섯 번째다. 연서의 맞선이 생각보다 잦아지고 있었다. 연서의 나이 올해 스물아홉. 강철진 사장이 일찍 작고하지 않으셨다면 그녀는 아직도 기획부서 어딘가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을 시기였다.
인하는 계단과 계단을 잇는 작은 공간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했다. 시푸른 가을하늘 아래 빽빽한 빌딩숲이 선명한 사진처럼 서 있었다. 노란 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가로수 길을 만들고 있고, 그 아래 언저리에 후둑후둑 떨어진 노란 잎이 회색빛 도로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고 보니, 연서를 처음 만났던 날이나 두 번째로 만났던 날도 모두 가을이었다. 적당하게 바람이 불던, 적당하게 선선하던, 적당하게 들떠 있던. 열아홉 고등학생의 그녀, 그리고 작년 가을 스물여덟의 호텔 대표 후계자였던 그녀. 10년을 아우른 시간 동안 제 가슴 한편 어딘가에 묵묵히, 말없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짙은 침묵을 지키며 접착해 있었던 그녀.
“후…… 적당히 하자, 서연아.”
아직은 호텔 대표라는 자리에 익숙해져야 할 시기라 옆에서 지켜보려고만 했는데, 상황은 점차 생각지도 못한 코너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극약처방이 필요한 듯했다.
*
“정현종입니다. 이야아, 이거 사진보다 훨씬 더 미인이신데요?”
저녁 7시 정각. 연서는 결국 강숙이 알려준 대로 호텔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퇴근하기 직전, 강숙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급한 대로 얌전해 보이는 원피스라도 한 벌 사서 입고 나가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인하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탓이다. 연서는 이사실을 나가자마자 인하에 의해 꼼짝없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정현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진 속 그대로였다. 검은 뿔테 안경이 답답하고 고지식해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어깨가 넓었고 웃을 때마다 붉어지는 귓바퀴가 귀엽다. 하지만 현종의 그 모든 면모들은 지금의 연서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은 뒤쪽의 테이블에, 그것도 자신과 등을 맞댄 채 앉아 있는 인하에게 쏠려 있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다더니, 그가 말한 근처라는 게 바로 등 뒤였을 줄이야.
“반갑습니다. 강연서라고 해요.”
“연서 씨 얘긴 부모님한테서 대충 듣고 나왔어요. 나이도 저보다 어리신데 호텔을 이끌어 가신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부담스러워요. 뭐가 뭔지 헷갈리는 것들도 많구요. 배워가면서 하고 있어요.”
“겸손도 하시지.”
“그런 정현종 씨야말로 겸손이시죠. 기획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서 올라오셨다던데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하하. 그건 제 성격 탓이 큽니다. 아버지도 워낙 ‘밑에서부터’를 외치시는 분이라서요.”
연서는 현종을 향해 잘 조련된 미소를 짓다가 커피 잔이 든 쟁반을 들고 직원이 뒤쪽 테이블로 가는 것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현종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연서의 두 귀엔 ‘고마워요.’ 라는 등 뒤의 인하의 말이 더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