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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잠깐만. 연서야.”
“왜.”
“오늘 저녁 7시에 호텔 옆에 있는 레스토랑 있지? 거기 3층으로 잡아놨어. 다른 약속 하지 말고 나가 봐.”
강숙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에 조그만 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검은색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다. 벌써 다섯 번째 맞선이었다. 연서로 하여금 맞선을 보게 하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강숙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연서는 털썩 의자에 도로 앉았다.
“엄마.”
“네가 바쁠 것 같아서 우리 호텔 커피숍으로 잡으려다가 그래도 네가 호텔 대푠데, 직원들 보는 눈도 있을 거고 해서. 지난달에 닥터 김이랑 만났던 그 레스토랑이야.”
“아예 그 레스토랑을 전세 내지 그래요? 내 맞선 장소로?”
“그럴까 생각 중이야. 이번엔 앞서 만났던 녀석들이랑은 달라. 대경식품 부사장 장남인데 금수저들 답지 않게 아주 겸손하고 배려심도 있다더라구. 공부 때문에 맨해튼에서 5년 살다가 올 봄에 귀국에서 지금은 대경식품 본사 기획총괄본부장이야. 유능하고 머리가 좋아서 젊은 나이인데도 그 자리를 꿰찼다는구나. 아마 머지않아 더 높은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지.”
강숙이 침을 튀겨가며 칭찬을 해댔다. 강숙은 이렇듯 강력한 배경을 갖춘 상대를 선호했다.
“게다가 골프나 수영, 테니스, 사격. 못 하는 운동이 없대.”
강숙은 운동을 잘하는 상대도 좋아한다.
“맞선 자리가 줄을 잇는다는데 엄마가 힘들게 한 자리 얻은 거야. 솔직히 너도 부족한 건 없잖아. 꼭 나가 봐.”
하지만 연서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 진저리가 나고 있는 중이었다. 빈번한 맞선 강요는 아버지의 부재가 강숙에게 미친 악영향 중 하나였다. 맞선을 보게 해서라도 얼른 연서를 결혼시켜, 온전한 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싶어 하는 강숙의 심경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유독 외로움을 잘 타는 강숙의 성정 때문에, 연서도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강숙이 정말로 연서의 맞선과 결혼에 목매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왜 부족한 게 없어?”
연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늘한 그녀의 표정에 강숙도 당황했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뭐?”
“한참 부족하지. 엄마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난 입양된 몸인데. 안 그래? 이 얘기를, 그 사람한테 했어? 못했지? 그렇다면 난 한참 부족한 게 맞아.”
강숙이 완벽한 사위를 얻어 더 완벽한 가족을 만들기를 원하는 건, 바로 강숙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서를 통해 그 시간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연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창백한 낯빛을 굳히고 있는 강숙을 두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주차시켜 둔 차의 운전석에 오른 그녀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후우…….”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강숙이 성급하게 허둥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증이 솟구쳐 올라 힘겨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이젠 유일하게 강숙과 연서만이 알고 있는, 그 무섭고도 커다란 비밀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건 두 사람 사이의 일종의 불문율이었건만, 그걸 깨뜨린 대가는 참혹했다. 호텔로 향하는 내내 강숙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올라 운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또 맞선을 보게 되겠지.”
강숙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연서는 오늘도 제 한 몸 바쳐 맞선의 현장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호텔에 도착해서도 굳어진 낯빛이 풀어지지 않았다. 도어맨에게 주차를 맡긴 후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제게 인사를 해오는 몇몇 직원들을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띠운 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리고, 그 안에 발을 들인 연서는 얼마쯤 어깨가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느리게 끌었다. 먼저 타고 있는 이는 법무팀장 서인하. 그가 미소를 문 채 고개를 까딱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 오고 있었다. 경직됐던 어깨를 풀고 태연하게 벽에 등을 대고 선 연서 역시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그와의 인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사님. 출근하셨습니까.’ 내지는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유일한 부하 직원이었다. 대신에 그는 ‘잘 지냈어요?’ 나 ‘흐음. 이건 어때요? 난 좋은데.’ 같이 반말과 존대를 적절하게 섞었다. 단, 둘만 있을 때만 말이다.
연서는 엘리베이터 출입문에 비친 그를 훔치듯 쳐다봤다. 오늘 그의 드레스코드는 잿빛. 차콜 색 슈트에 금빛으로 윤이 나는 그레이 타이를 맸다. 차가운 인상을 주는 각이 잡힌 외모와는 달리 눈웃음과 입가에 오묘하게 떠다니는 미소가 일품이었다. 때문에 호텔 내 여직원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다. 그 눈웃음과 미소는 물론 연서에게도 간간이 날아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둘만 있을 때에 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연서는 어설픈 접근 따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단단히 응집시켜 허공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무척 부자연스럽게 보였나 보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허둥대요?”
“내가요?”
“버튼도 안 누르고.”
인하는 연서에게 시선을 둔 채 팔을 뻗어 10층을 눌렀다. 연서의 이사실이 있는 층이다. 연서는 인하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침부터 강숙에게 모진 말로 상처준 일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늘 긴장시키는 서인하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니, 버튼이 아니라 이사실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조차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연서는 도무지 그와의 사이에 매번 흐르는 이런 긴장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너와 부하직원의 관계 같지 않은 저 말투도 불쾌했다.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것만 같은 남자다. 자신을 우습게 여기거나, 아니면 가정교육이 허술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연서는 아예 인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 팀장님. 난 이 호텔의 대표이사예요. 말투를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근무한 지 1년이나 됐으면 그 따위 말투,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나름 위엄과 따끔한 책망을 동시에 갖춘 목소리라 여겼는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 인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1년이나 됐으면 이 따위 말투에 적응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요, 이사님.”
“적응하는 것과 위계질서는 또 다른 문제예요. 그동안 파라다이스 호텔 인수문제로 수고가 많으셨다는 건 알아요. 그 노고를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능력이 있으시다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깍듯하게 대해드리는데 뭐가 문젭니까.”
이 남자가 보내오는 저 눈빛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 둘이 있을 때마다 넌지시 건너오는 기묘한 분위기의 정체도 모르겠다. 느물거린다 싶다가도 지나치게 깊어 자칫 빠져버리고 말 것 같은, 무슨 의미인지 헤집어버리고만 싶은.
생각해보면 1년 전 신임 대표이사와 신임 법무팀장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저런 눈빛을 보내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말이다. 생각에 잠겼던 연서는 인하가 덧붙인 말에 내심 기겁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도 다른 이유를 듣고 싶으시다면,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거칠게 다루는 편이라서.”
“아침부터 분위기가 참…… 화기애애하네요. 장난과 농담이 흐르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그래도 기분전환은 됐어요. 회의 때 다시 봐요, 서 팀장님.”
“넵.”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도망치듯 내리는 연서를, 인하의 시선이 뒤쫓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까지 연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인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자세를 바로 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도 연서는 자신의 눈빛과 말투를 걸고넘어지며 그의 접근을 온몸으로 막았다.
누구의 입장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철옹성이었지만, 인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씩 자신으로 인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감정을 숨기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들키지 않고 연서를 향한 마음을 간직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뻐근해지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하는 단단히 발기해 있는 제 몸을 달래기 위해 깊은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했다.
아무래도 제 몸은 그녀의 더 뜨거운 것을, 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넌 몰라.”
인하는 흐린 미소를 문 채 중얼거렸다.
넌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린 날에, 널 처음 봤던 내 눈빛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는 걸.
너를 ‘호텔 카라얀’의 대표이사가 아니라 ‘여자 강연서’로만 대하고 싶은 나의 진심을.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하고, 인하는 법무팀 사무실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같은 팀원인 도현과 은미, 경재가 먼저 출근해 있었다. 모두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도현과 은미는 규모가 큰 로펌에서 근무하다 작년에 입사했으며, 경재는 검사로 재직하다 몇 년 전 변호사로 궤도를 틀었다.
“잠깐만. 연서야.”
“왜.”
“오늘 저녁 7시에 호텔 옆에 있는 레스토랑 있지? 거기 3층으로 잡아놨어. 다른 약속 하지 말고 나가 봐.”
강숙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에 조그만 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검은색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다. 벌써 다섯 번째 맞선이었다. 연서로 하여금 맞선을 보게 하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강숙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연서는 털썩 의자에 도로 앉았다.
“엄마.”
“네가 바쁠 것 같아서 우리 호텔 커피숍으로 잡으려다가 그래도 네가 호텔 대푠데, 직원들 보는 눈도 있을 거고 해서. 지난달에 닥터 김이랑 만났던 그 레스토랑이야.”
“아예 그 레스토랑을 전세 내지 그래요? 내 맞선 장소로?”
“그럴까 생각 중이야. 이번엔 앞서 만났던 녀석들이랑은 달라. 대경식품 부사장 장남인데 금수저들 답지 않게 아주 겸손하고 배려심도 있다더라구. 공부 때문에 맨해튼에서 5년 살다가 올 봄에 귀국에서 지금은 대경식품 본사 기획총괄본부장이야. 유능하고 머리가 좋아서 젊은 나이인데도 그 자리를 꿰찼다는구나. 아마 머지않아 더 높은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지.”
강숙이 침을 튀겨가며 칭찬을 해댔다. 강숙은 이렇듯 강력한 배경을 갖춘 상대를 선호했다.
“게다가 골프나 수영, 테니스, 사격. 못 하는 운동이 없대.”
강숙은 운동을 잘하는 상대도 좋아한다.
“맞선 자리가 줄을 잇는다는데 엄마가 힘들게 한 자리 얻은 거야. 솔직히 너도 부족한 건 없잖아. 꼭 나가 봐.”
하지만 연서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 진저리가 나고 있는 중이었다. 빈번한 맞선 강요는 아버지의 부재가 강숙에게 미친 악영향 중 하나였다. 맞선을 보게 해서라도 얼른 연서를 결혼시켜, 온전한 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싶어 하는 강숙의 심경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유독 외로움을 잘 타는 강숙의 성정 때문에, 연서도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강숙이 정말로 연서의 맞선과 결혼에 목매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왜 부족한 게 없어?”
연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늘한 그녀의 표정에 강숙도 당황했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뭐?”
“한참 부족하지. 엄마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난 입양된 몸인데. 안 그래? 이 얘기를, 그 사람한테 했어? 못했지? 그렇다면 난 한참 부족한 게 맞아.”
강숙이 완벽한 사위를 얻어 더 완벽한 가족을 만들기를 원하는 건, 바로 강숙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서를 통해 그 시간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연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창백한 낯빛을 굳히고 있는 강숙을 두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주차시켜 둔 차의 운전석에 오른 그녀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후우…….”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강숙이 성급하게 허둥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증이 솟구쳐 올라 힘겨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이젠 유일하게 강숙과 연서만이 알고 있는, 그 무섭고도 커다란 비밀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건 두 사람 사이의 일종의 불문율이었건만, 그걸 깨뜨린 대가는 참혹했다. 호텔로 향하는 내내 강숙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올라 운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또 맞선을 보게 되겠지.”
강숙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연서는 오늘도 제 한 몸 바쳐 맞선의 현장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호텔에 도착해서도 굳어진 낯빛이 풀어지지 않았다. 도어맨에게 주차를 맡긴 후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제게 인사를 해오는 몇몇 직원들을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띠운 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리고, 그 안에 발을 들인 연서는 얼마쯤 어깨가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느리게 끌었다. 먼저 타고 있는 이는 법무팀장 서인하. 그가 미소를 문 채 고개를 까딱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 오고 있었다. 경직됐던 어깨를 풀고 태연하게 벽에 등을 대고 선 연서 역시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그와의 인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사님. 출근하셨습니까.’ 내지는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유일한 부하 직원이었다. 대신에 그는 ‘잘 지냈어요?’ 나 ‘흐음. 이건 어때요? 난 좋은데.’ 같이 반말과 존대를 적절하게 섞었다. 단, 둘만 있을 때만 말이다.
연서는 엘리베이터 출입문에 비친 그를 훔치듯 쳐다봤다. 오늘 그의 드레스코드는 잿빛. 차콜 색 슈트에 금빛으로 윤이 나는 그레이 타이를 맸다. 차가운 인상을 주는 각이 잡힌 외모와는 달리 눈웃음과 입가에 오묘하게 떠다니는 미소가 일품이었다. 때문에 호텔 내 여직원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다. 그 눈웃음과 미소는 물론 연서에게도 간간이 날아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둘만 있을 때에 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연서는 어설픈 접근 따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단단히 응집시켜 허공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무척 부자연스럽게 보였나 보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허둥대요?”
“내가요?”
“버튼도 안 누르고.”
인하는 연서에게 시선을 둔 채 팔을 뻗어 10층을 눌렀다. 연서의 이사실이 있는 층이다. 연서는 인하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침부터 강숙에게 모진 말로 상처준 일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늘 긴장시키는 서인하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니, 버튼이 아니라 이사실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조차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연서는 도무지 그와의 사이에 매번 흐르는 이런 긴장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너와 부하직원의 관계 같지 않은 저 말투도 불쾌했다.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것만 같은 남자다. 자신을 우습게 여기거나, 아니면 가정교육이 허술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연서는 아예 인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 팀장님. 난 이 호텔의 대표이사예요. 말투를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근무한 지 1년이나 됐으면 그 따위 말투,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나름 위엄과 따끔한 책망을 동시에 갖춘 목소리라 여겼는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 인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1년이나 됐으면 이 따위 말투에 적응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요, 이사님.”
“적응하는 것과 위계질서는 또 다른 문제예요. 그동안 파라다이스 호텔 인수문제로 수고가 많으셨다는 건 알아요. 그 노고를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능력이 있으시다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깍듯하게 대해드리는데 뭐가 문젭니까.”
이 남자가 보내오는 저 눈빛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 둘이 있을 때마다 넌지시 건너오는 기묘한 분위기의 정체도 모르겠다. 느물거린다 싶다가도 지나치게 깊어 자칫 빠져버리고 말 것 같은, 무슨 의미인지 헤집어버리고만 싶은.
생각해보면 1년 전 신임 대표이사와 신임 법무팀장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저런 눈빛을 보내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말이다. 생각에 잠겼던 연서는 인하가 덧붙인 말에 내심 기겁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도 다른 이유를 듣고 싶으시다면,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거칠게 다루는 편이라서.”
“아침부터 분위기가 참…… 화기애애하네요. 장난과 농담이 흐르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그래도 기분전환은 됐어요. 회의 때 다시 봐요, 서 팀장님.”
“넵.”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도망치듯 내리는 연서를, 인하의 시선이 뒤쫓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까지 연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인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자세를 바로 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도 연서는 자신의 눈빛과 말투를 걸고넘어지며 그의 접근을 온몸으로 막았다.
누구의 입장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철옹성이었지만, 인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씩 자신으로 인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감정을 숨기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들키지 않고 연서를 향한 마음을 간직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뻐근해지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하는 단단히 발기해 있는 제 몸을 달래기 위해 깊은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했다.
아무래도 제 몸은 그녀의 더 뜨거운 것을, 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넌 몰라.”
인하는 흐린 미소를 문 채 중얼거렸다.
넌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린 날에, 널 처음 봤던 내 눈빛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는 걸.
너를 ‘호텔 카라얀’의 대표이사가 아니라 ‘여자 강연서’로만 대하고 싶은 나의 진심을.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하고, 인하는 법무팀 사무실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같은 팀원인 도현과 은미, 경재가 먼저 출근해 있었다. 모두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도현과 은미는 규모가 큰 로펌에서 근무하다 작년에 입사했으며, 경재는 검사로 재직하다 몇 년 전 변호사로 궤도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