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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여는 이야기
하늘이 푸르다. 바람이 나부낀다. 비단처럼 윤이 나는 들판, 지저귀는 산새소리, 투명한 산내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완벽한 곳에서 더러운 것은 기분뿐이다.
“썩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린 머리카락은 검다 못해 청빛이 흘렀다. 있는 힘껏 일그러뜨린 입술이 피처럼 붉었다. 선명한 대비가 그를 더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독처럼 시선을 파고들어 숨마저 가쁘게 하는 그런 미색이었다. 날카롭게 치솟은 눈매 안에 담긴 눈동자는 의도치 않은 요야함마저 풍겼다. 비록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살기가 색(色)을 가렸으나 마주쳐 매혹되는 것을 아주 막진 못할 것이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우물처럼 파인 쇄골을 가볍게 쓸어 내렸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제 더러운 성질을 억눌렀다. 허나 얼마 못 가 입에서 또 상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젠장!”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모든 것이 정지되는 신물(神物) 안에서 차라리 의식이 없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루하다 못해 처절한 기다림의 날들은 어긋남도 없이 차분히만 흘렀다. 빌어먹을 옥제(玉帝)가 내린 지독한 천형(天刑)답다. 유홀은 사납게 치켜뜬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러니까 죽여 버리자. 내 꼭 천계로 돌아가 놈을 죽이고 말겠다. 수만 번 반복했던 결심을 떠올리자 유홀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것은 끔찍하게 아름다운 동시에 삐딱했다. 그는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향해 짧게 혀를 찼다. 깨끗하기는 하나 대책 없이 빈곤한 모양새의 방은 겨우 찾은 계약이 가능한 인간의 것일 터, 도대체 이런 와중에 빌어먹을 고결한 뜻 어쩌고를 가진 인물을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첫 번째 계약자의 썩은 정신과 그보다 더 혐오스럽던 욕심을 떠올리며 유홀은 새빨간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낡고 몇 없는 물건으로 짐작해 보건데 이번 상대는 젊은…….
“거기다 계집이라.”
절망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귀찮고 번잡스럽고 성가신 존재와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왔다. 그에게 여인은 절 보고 도망치거나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남녀노소 불문 시선을 강탈하는 빼어난 미모를 소유한 주제에 이성에 관심은 일말도 없으니 그네들을 대하는 태도는 늘 차갑고 도도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더 위험스럽고 갖고 싶은 존재가 돼버린 것은 통 알 리 없었다.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해를 담았다. 절반은 어둠에 묻히고 나머지 반은 빛을 담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은 정교한 세공처럼 고혹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면경에 비친 제 모습을 퉁명스럽게 보던 유홀이 차가운 거울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고민은 찰나였다. 이용하기로, 무엇이든 계약을 맺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면 그리 하기로 했다.
양심, 그 따위 것을 무엇에 쓰려고. 유홀은 피식 웃으며 반질반질하게 닦인 바닥에 모로 누웠다. 보잘 것 없는 좁고 낡은 공간에서도 그의 아름다움은 악랄한 만큼 빛나고 있었다.
*
결코 느른해질 리 없는 신경이 이내 낯선 소음을 감지했다. 그럼에도 유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상대의 움직임을 관망할 뿐이었다. 일단 경계심만 풀리면 계약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시답지 않은 이 짓거리도 끝이다. 유홀은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를 또렷하게 인지했다.
그런데 이 계집, 무언가 좀 이상하다. 아무리 잠든 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 얼굴을 이렇게까지 빤히 보는 시선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손도 아닌 무슨 나무 막대기 같은 것으로 툭툭 가슴팍을 밀어대고 있었다. 짧은 경계, 수줍음, 호의. 그가 일반적으로 예상했던 태도가 아닌 적대감 거기에 더해 살기마저 느껴졌다.
“뭐하는 놈이냐?”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목덜미에서 전해졌다. 아무리 천신이라도 지상에 실체화 하여 나타난 것이니 신체의 고통은 당연했다. 유홀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윽!”
다시금 두꺼운 나무 방망이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유홀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방망이를 든 손목을 거머쥐려 했다. 상대는 그런 움직임을 간파한 듯 순식간에 옆으로 굴러 재차 그를 두들겨 팼다.
“이봐, 무슨 오해…….”
“다시 묻겠소. 뭐하는 짓거리지?”
여자는 독처럼 치명적인 그의 미색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로지 방망이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유홀은 있는 힘껏 공격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몸을 짓눌렀다.
“되는 대로 생각해. 무엇을 말해도 믿지 않으려 작정한 참이지 않느냐.”
“놔.”
“싫은데. 네 몽둥이질 꽤나 아팠거든.”
이죽거리는 유홀에게 상대가 정면으로 시선을 부딪쳐 왔다. 그 순간 유홀은 어이없게도 계집의 눈동자가 참말 맑다고 생각했다. 천계의 호수보다도 투명한 까만 눈동자라 어쩌면 제 영혼까지 비치지 않을까 싶었다.
상념은 통증과 함께 즉각 깨어졌다. 유홀은 제 손목 언저리를 있는 힘껏 깨문 여자와 제 머리통에 겨누어진 단도를 번갈아 보았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그건 칼이다. 내려놓아라. 뾰족해. 보다시피 위험한 것이야. 하아, 그러다 다친단 말이지.”
나 말고 너 말이다. 성질을 참아가며 아이 어르듯 말하던 유홀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볼을 스치듯 날아간 단도는 벽에 탁 소리를 내며 박혔다.
“다음번은 이마에 꽂겠소.”
높낮이 없이 차분한 말투였다. 그건 아까의 눈동자만큼이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유홀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흠, 죽기는 싫고 오해는 풀어야겠고…… 이거면 되겠느냐?”
유홀이 스스로 포박을 자처하자 단성은 지체 없이 그의 손과 발을 묶었다. 상대는 장신의 건장한 남자, 그럼에도 단성은 여전히 팽팽히 긴장한 채였다.
“치한이오?”
“그럴 리가. 나도 멀쩡한 눈이 있거늘.”
몰아붙이는 쪽이 무안할 정도로 빠르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단성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이상하게도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어차피 관아에 넘길 참이니 뭐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럼 그 빼어난 안목, 다음번에는 그른 일에 쓰지 마시오.”
정말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계집이 아닌가. 유홀은 지극히 고결하고도 품격 있는 표정으로 단성을 싸늘히 쳐다보았다. 냉소를 머금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 따위 목적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우습지만 여자가 아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단성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아니, 아주 미미하게 성가심과 피곤함이 스치고 갔지만 유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혹 실성해 사는 곳을 잊었소?”
“너…….”
유홀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고 섰다가 얼결에 제 앞에 디밀어진 잔을 받아들었다. 잔에는 따뜻하고 향긋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셔보시오. 실성한 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몸은 덥혀 줄 거요.”
“하아!”
요상한 계집, 아까는 죽을 듯이 칼을 겨누더니 지금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잔다. 결국 유홀은 허탈한 표정으로 묶인 손을 움직여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젠장, 향도 맛도 정말이지 좋다. 뭣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차는 이런 식으로 기막히게 내린다 이거지.
“이름은?”
“차나 한 잔 하라 했지 통성명 하자고 한 적은 없소.”
단성의 답은 여유롭고도 매몰찼다. 희고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유홀은 남은 차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허면 내 쪽부터 하지. 유홀, 천신이다. 계약자를 만나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대신에 난 빌어먹을 공덕을 세워 천계로 돌아가야 하지.”
“아.”
“그 말을 단번에 믿는다?”
“어차피 관심 밖이라서.”
단성의 담백한 말에 유홀은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만 들어 단성을 보았다. 선명한 붉은 입술에 맺힌 웃음기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허면 관아에서는 믿을까?”
“실성했다고 할 테지요.”
“그래, 네게 분명 그리 말하겠지.”
무슨 소리냐고 묻는 단성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유홀은 천천히 신력을 순회시켰다. 계약이 이루어지기 전이니 접촉조차 없이 본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기실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애써 그러모은 힘이 흩어지자 장신의 사내 대신 열 살가량의 눈매 사나운 남자 아이 하나가 남겨졌다.
“계약자가 없는 상태로 신력이 동이 나고 은둔할 신물마저 없는 상태가 되면 이 모습조차 유지하기 어렵지. 그러니까 네가 날 관아에 넘길 때쯤에는 혼자 걷지 못할 지경이 될 거다. 그런 존재가 아녀자가 사는 집에 무단으로 들이닥쳐 위협을 가했다 함은, 내가 천신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유홀은 헐거워진 포박을 빙빙 돌리며 단성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놀리듯 본모습과 아이의 모습으로 번갈아 변했다. 단성은 그것을 꼼짝 않고 지켜보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여전히 한 손에는 단도를 쥔 채였다. 복잡한 눈빛과 달리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정말로 천신이라…… 허면 그런 분께서 어찌 이곳에 나타나셨는지요? 제게는 천신의 힘으로 이루고픈 소원 같은 건 없는데 말입니다.”
고요하나 어딘가 모르게 슬픈 물음. 녹담에 퍼붓는 빗줄기가 그러할까. 작은 파문은 심장 바닥까지 번졌다.
부르지 않았어, 나를? 아니 이 힘을? 그런데 왜 네가 날……. 유홀은 스며들 듯 말갛고 까만 단성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 인연
가을도 이제 끝자락이다. 단성은 오들오들 떨리는 팔을 꼭 끌어안고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을 끌어안은 아침이 파랗게 열리고 있었다. 고적한 하늘을 돌아내린 바람은 시리게 찼다. 낡은 옷가지 속으로 야멸차게 들이닥치는 한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밤새 갈무리 한 일감이 든 보퉁이를 끌어안으면 한결 따뜻할 터였다. 허나 단성은 미련스럽게 보퉁이를 손에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행여 정성들여 마무리한 옷에 구김이라도 갈까 염려하는 때문이었다.
일감은 대개 옷에 꽃수를 드리는 것이었다. 수놓는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은 많이도 들었다. 색이며 문양을 아주 곱게 뽑는다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일감이 많지는 않았다. 밭을 일구고 약초를 캐는 사람이 대부분인 작은 마을에서 꽃수까지 드린 옷을 지어 입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니 이번에 부탁받은 다섯 벌은 꽤나 많은 축이었다.
일을 준 것은 이웃 마을 도화 상단의 단주로, 규모는 크지 않아도 역사가 오래되고 내실이 탄탄하다는 평을 받는 곳이었다. 그곳의 수장이 앓아누운 귀한 고명딸을 위해 급하게 주문하는 것이라는 모양이었다. 도성 혹은 이국에서 지은 옷만 입던 아씨의 취향을 꼭 맞추기는 쉽지 않겠으나, 한 땀 한 땀에 정성을 다한 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을 지나 개울 하나를 건너면 도화 상단이었다. 단성은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편치 않아 부러 더 걸음에 신중했다. 갑자기 나타난 유홀이라는 이름의 사내. 끔찍할 만큼 아름답지만 삐딱한 그는 정녕 천계에서 온 것일까?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닐 테지. 단성은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뭐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말 이상한 남자……. 한참이나 제 눈을 응시하던 그가 내뱉은 말이 또 생각나버렸다.
‘그래 좋아. 뭐 어찌되었든 넌 이 몸과 계약을 하게 될 거다.’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감탄스러웠지만 그때의 자신은 분명 소리 나게 한숨을 내뱉었었다. 그런데도 당장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어야 하는데, 그럴 작정이었는데 왜……. 옷깃을 조금 더 여민 단성은 동 터오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여는 이야기
하늘이 푸르다. 바람이 나부낀다. 비단처럼 윤이 나는 들판, 지저귀는 산새소리, 투명한 산내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완벽한 곳에서 더러운 것은 기분뿐이다.
“썩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린 머리카락은 검다 못해 청빛이 흘렀다. 있는 힘껏 일그러뜨린 입술이 피처럼 붉었다. 선명한 대비가 그를 더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독처럼 시선을 파고들어 숨마저 가쁘게 하는 그런 미색이었다. 날카롭게 치솟은 눈매 안에 담긴 눈동자는 의도치 않은 요야함마저 풍겼다. 비록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살기가 색(色)을 가렸으나 마주쳐 매혹되는 것을 아주 막진 못할 것이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우물처럼 파인 쇄골을 가볍게 쓸어 내렸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제 더러운 성질을 억눌렀다. 허나 얼마 못 가 입에서 또 상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젠장!”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모든 것이 정지되는 신물(神物) 안에서 차라리 의식이 없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루하다 못해 처절한 기다림의 날들은 어긋남도 없이 차분히만 흘렀다. 빌어먹을 옥제(玉帝)가 내린 지독한 천형(天刑)답다. 유홀은 사납게 치켜뜬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러니까 죽여 버리자. 내 꼭 천계로 돌아가 놈을 죽이고 말겠다. 수만 번 반복했던 결심을 떠올리자 유홀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것은 끔찍하게 아름다운 동시에 삐딱했다. 그는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향해 짧게 혀를 찼다. 깨끗하기는 하나 대책 없이 빈곤한 모양새의 방은 겨우 찾은 계약이 가능한 인간의 것일 터, 도대체 이런 와중에 빌어먹을 고결한 뜻 어쩌고를 가진 인물을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첫 번째 계약자의 썩은 정신과 그보다 더 혐오스럽던 욕심을 떠올리며 유홀은 새빨간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낡고 몇 없는 물건으로 짐작해 보건데 이번 상대는 젊은…….
“거기다 계집이라.”
절망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귀찮고 번잡스럽고 성가신 존재와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왔다. 그에게 여인은 절 보고 도망치거나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남녀노소 불문 시선을 강탈하는 빼어난 미모를 소유한 주제에 이성에 관심은 일말도 없으니 그네들을 대하는 태도는 늘 차갑고 도도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더 위험스럽고 갖고 싶은 존재가 돼버린 것은 통 알 리 없었다.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해를 담았다. 절반은 어둠에 묻히고 나머지 반은 빛을 담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은 정교한 세공처럼 고혹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면경에 비친 제 모습을 퉁명스럽게 보던 유홀이 차가운 거울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고민은 찰나였다. 이용하기로, 무엇이든 계약을 맺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면 그리 하기로 했다.
양심, 그 따위 것을 무엇에 쓰려고. 유홀은 피식 웃으며 반질반질하게 닦인 바닥에 모로 누웠다. 보잘 것 없는 좁고 낡은 공간에서도 그의 아름다움은 악랄한 만큼 빛나고 있었다.
*
결코 느른해질 리 없는 신경이 이내 낯선 소음을 감지했다. 그럼에도 유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상대의 움직임을 관망할 뿐이었다. 일단 경계심만 풀리면 계약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시답지 않은 이 짓거리도 끝이다. 유홀은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를 또렷하게 인지했다.
그런데 이 계집, 무언가 좀 이상하다. 아무리 잠든 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 얼굴을 이렇게까지 빤히 보는 시선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손도 아닌 무슨 나무 막대기 같은 것으로 툭툭 가슴팍을 밀어대고 있었다. 짧은 경계, 수줍음, 호의. 그가 일반적으로 예상했던 태도가 아닌 적대감 거기에 더해 살기마저 느껴졌다.
“뭐하는 놈이냐?”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목덜미에서 전해졌다. 아무리 천신이라도 지상에 실체화 하여 나타난 것이니 신체의 고통은 당연했다. 유홀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윽!”
다시금 두꺼운 나무 방망이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유홀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방망이를 든 손목을 거머쥐려 했다. 상대는 그런 움직임을 간파한 듯 순식간에 옆으로 굴러 재차 그를 두들겨 팼다.
“이봐, 무슨 오해…….”
“다시 묻겠소. 뭐하는 짓거리지?”
여자는 독처럼 치명적인 그의 미색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로지 방망이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유홀은 있는 힘껏 공격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몸을 짓눌렀다.
“되는 대로 생각해. 무엇을 말해도 믿지 않으려 작정한 참이지 않느냐.”
“놔.”
“싫은데. 네 몽둥이질 꽤나 아팠거든.”
이죽거리는 유홀에게 상대가 정면으로 시선을 부딪쳐 왔다. 그 순간 유홀은 어이없게도 계집의 눈동자가 참말 맑다고 생각했다. 천계의 호수보다도 투명한 까만 눈동자라 어쩌면 제 영혼까지 비치지 않을까 싶었다.
상념은 통증과 함께 즉각 깨어졌다. 유홀은 제 손목 언저리를 있는 힘껏 깨문 여자와 제 머리통에 겨누어진 단도를 번갈아 보았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그건 칼이다. 내려놓아라. 뾰족해. 보다시피 위험한 것이야. 하아, 그러다 다친단 말이지.”
나 말고 너 말이다. 성질을 참아가며 아이 어르듯 말하던 유홀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볼을 스치듯 날아간 단도는 벽에 탁 소리를 내며 박혔다.
“다음번은 이마에 꽂겠소.”
높낮이 없이 차분한 말투였다. 그건 아까의 눈동자만큼이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유홀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흠, 죽기는 싫고 오해는 풀어야겠고…… 이거면 되겠느냐?”
유홀이 스스로 포박을 자처하자 단성은 지체 없이 그의 손과 발을 묶었다. 상대는 장신의 건장한 남자, 그럼에도 단성은 여전히 팽팽히 긴장한 채였다.
“치한이오?”
“그럴 리가. 나도 멀쩡한 눈이 있거늘.”
몰아붙이는 쪽이 무안할 정도로 빠르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단성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이상하게도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어차피 관아에 넘길 참이니 뭐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럼 그 빼어난 안목, 다음번에는 그른 일에 쓰지 마시오.”
정말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계집이 아닌가. 유홀은 지극히 고결하고도 품격 있는 표정으로 단성을 싸늘히 쳐다보았다. 냉소를 머금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 따위 목적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우습지만 여자가 아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단성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아니, 아주 미미하게 성가심과 피곤함이 스치고 갔지만 유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혹 실성해 사는 곳을 잊었소?”
“너…….”
유홀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고 섰다가 얼결에 제 앞에 디밀어진 잔을 받아들었다. 잔에는 따뜻하고 향긋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셔보시오. 실성한 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몸은 덥혀 줄 거요.”
“하아!”
요상한 계집, 아까는 죽을 듯이 칼을 겨누더니 지금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잔다. 결국 유홀은 허탈한 표정으로 묶인 손을 움직여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젠장, 향도 맛도 정말이지 좋다. 뭣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차는 이런 식으로 기막히게 내린다 이거지.
“이름은?”
“차나 한 잔 하라 했지 통성명 하자고 한 적은 없소.”
단성의 답은 여유롭고도 매몰찼다. 희고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유홀은 남은 차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허면 내 쪽부터 하지. 유홀, 천신이다. 계약자를 만나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대신에 난 빌어먹을 공덕을 세워 천계로 돌아가야 하지.”
“아.”
“그 말을 단번에 믿는다?”
“어차피 관심 밖이라서.”
단성의 담백한 말에 유홀은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만 들어 단성을 보았다. 선명한 붉은 입술에 맺힌 웃음기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허면 관아에서는 믿을까?”
“실성했다고 할 테지요.”
“그래, 네게 분명 그리 말하겠지.”
무슨 소리냐고 묻는 단성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유홀은 천천히 신력을 순회시켰다. 계약이 이루어지기 전이니 접촉조차 없이 본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기실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애써 그러모은 힘이 흩어지자 장신의 사내 대신 열 살가량의 눈매 사나운 남자 아이 하나가 남겨졌다.
“계약자가 없는 상태로 신력이 동이 나고 은둔할 신물마저 없는 상태가 되면 이 모습조차 유지하기 어렵지. 그러니까 네가 날 관아에 넘길 때쯤에는 혼자 걷지 못할 지경이 될 거다. 그런 존재가 아녀자가 사는 집에 무단으로 들이닥쳐 위협을 가했다 함은, 내가 천신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유홀은 헐거워진 포박을 빙빙 돌리며 단성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놀리듯 본모습과 아이의 모습으로 번갈아 변했다. 단성은 그것을 꼼짝 않고 지켜보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여전히 한 손에는 단도를 쥔 채였다. 복잡한 눈빛과 달리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정말로 천신이라…… 허면 그런 분께서 어찌 이곳에 나타나셨는지요? 제게는 천신의 힘으로 이루고픈 소원 같은 건 없는데 말입니다.”
고요하나 어딘가 모르게 슬픈 물음. 녹담에 퍼붓는 빗줄기가 그러할까. 작은 파문은 심장 바닥까지 번졌다.
부르지 않았어, 나를? 아니 이 힘을? 그런데 왜 네가 날……. 유홀은 스며들 듯 말갛고 까만 단성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 인연
가을도 이제 끝자락이다. 단성은 오들오들 떨리는 팔을 꼭 끌어안고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을 끌어안은 아침이 파랗게 열리고 있었다. 고적한 하늘을 돌아내린 바람은 시리게 찼다. 낡은 옷가지 속으로 야멸차게 들이닥치는 한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밤새 갈무리 한 일감이 든 보퉁이를 끌어안으면 한결 따뜻할 터였다. 허나 단성은 미련스럽게 보퉁이를 손에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행여 정성들여 마무리한 옷에 구김이라도 갈까 염려하는 때문이었다.
일감은 대개 옷에 꽃수를 드리는 것이었다. 수놓는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은 많이도 들었다. 색이며 문양을 아주 곱게 뽑는다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일감이 많지는 않았다. 밭을 일구고 약초를 캐는 사람이 대부분인 작은 마을에서 꽃수까지 드린 옷을 지어 입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니 이번에 부탁받은 다섯 벌은 꽤나 많은 축이었다.
일을 준 것은 이웃 마을 도화 상단의 단주로, 규모는 크지 않아도 역사가 오래되고 내실이 탄탄하다는 평을 받는 곳이었다. 그곳의 수장이 앓아누운 귀한 고명딸을 위해 급하게 주문하는 것이라는 모양이었다. 도성 혹은 이국에서 지은 옷만 입던 아씨의 취향을 꼭 맞추기는 쉽지 않겠으나, 한 땀 한 땀에 정성을 다한 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을 지나 개울 하나를 건너면 도화 상단이었다. 단성은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편치 않아 부러 더 걸음에 신중했다. 갑자기 나타난 유홀이라는 이름의 사내. 끔찍할 만큼 아름답지만 삐딱한 그는 정녕 천계에서 온 것일까?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닐 테지. 단성은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뭐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말 이상한 남자……. 한참이나 제 눈을 응시하던 그가 내뱉은 말이 또 생각나버렸다.
‘그래 좋아. 뭐 어찌되었든 넌 이 몸과 계약을 하게 될 거다.’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감탄스러웠지만 그때의 자신은 분명 소리 나게 한숨을 내뱉었었다. 그런데도 당장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어야 하는데, 그럴 작정이었는데 왜……. 옷깃을 조금 더 여민 단성은 동 터오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